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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남편과의 이혼을 거부합니다 (32)화 (32/107)

제32화

“입이 있으면 말을 해 보지.”

모락모락 더운 김이 올라오는 찻잔, 그리고 그 옆에 놓인 얇은 종이 한 장.

휘황찬란한 마차와 정체불명의 문양들이 새겨진 종잇장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정체가 무엇임을 알 수 있었다.

탈출 마법서, 몇몇 실력 있는 마법사들만이 만들어 내고 또 사용할 수 있다던 소문 속 물건.

일순 에드먼드의 미간이 빠르게 구겨졌다. 테이블 아래, 가지런히 놓여 있던 두 주먹이 저도 모르게 움켜 들어갔다.

그토록 따스하게 굴더니, 뒤로는 또다시 탈출을 감행하고 있을 줄이야. 멀쩡한 뒤통수가 얼얼했다.

의심은 비로소 확신이 됐고 예상했던 일이었음에도 타격이 컸다. 그가 구겨진 얼굴을 애써 바로 잡으며 말문을 열었다.

“그렇게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지 말고 변명이라도 해. 뭐라도 이야기해야 속아 주는 시늉이라도 하지. 안 그런가?”

“…….”

서늘한 시선이 다시금 클로엔을 향했다. 제 말을 듣기는 한 것인지, 가늘게 떨고 있는 보라색 눈동자가 죽일 듯 테이블을 노려보고 있었다.

‘코앞까지 왔던 거사가 물거품이 되어 버려 분하겠지, 화가 날 수밖에.’

전이었다면, 당장에 이게 뭐냐며 윽박지르고 추궁해댔겠지만 답지 않게 망설여졌다.

굳이 이유를 꼽자면 간단했다. 적어도 이번만큼은, 먼저 해명할 기회라는 걸 주고 싶었으니까.

에드먼드가 앞에 놓인 찻잔을 홀짝이며 말없이 대답을 기다렸다.

“…….”

무거운 침묵이 한동안 계속되고,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클로엔은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에드먼드의 시선이 넓게 퍼진 드레스 자락을 따라 조용히 위쪽을 향했다. 그림 같은 모습과 달리 잔뜩 구겨진 클로엔의 얼굴.

뭘 그리도 망설이는 걸까? 알 수 없는 갈증과 함께 슬슬 짜증이 솟구쳤다. 물음을 던진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클로엔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꾸깃꾸깃한 종잇조각을 죽일 듯 노려볼 뿐. 일말의 변명도, 핑계도, 하다못해 비아냥조차도 없었다.

“설명할 이유조차 없다는 건가?”

기다리다 못한, 에드먼드가 다시 한번 말문을 열던 그때였다.

“아무리 봐도 모르겠는걸요? 글을 알아야 뭘 알지, 까막눈인 내가 알 턱이 있나.”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당겨 앉아 있던 그녀의 몸이 소파 위로 늘어졌다. 날카로운 그의 시선이 피부 위로 박혔지만, 애써 외면했다.

“모르는 척을 하겠다?”

흥미로운 듯, 미소 짓는 에드먼드의 입꼬리. 웃는 낯짝이 더 살벌하다는 말은 이걸 보고하는 걸 거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어깨를 으쓱이며 놓여 있던 마법서를 집어 들었다. 그러곤 얄궂은 목소리로 답했다.

“모르는 척이 아니라 정말 모르는 거예요. 어휴, 멜리사 얘는 뭘 주고 간 거람.”

지저분한 걸 만지기라도 하듯 불쾌한 손짓이었다. 잔뜩 찌푸린 클로엔의 눈동자가 집어 든 손가락을 향하는가 싶더니, 경로를 바꿨다.

‘아나, 제대로 똥을 주고 갔네.’

가늘게 떨리는 보랏빛 눈동자가 은밀히 그리고 빠르게 에드먼드의 얼굴을 힐끗거리고는 자리로 돌아왔다.

갑자기 들이닥친 손님도 모자라, 원치 않음에도 손에 쥔 처치 곤란의 물건까지 파국의 향연이었다.

타들어 가는 제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법서 중앙에 그려진 화려한 마차와 말들의 기개는 실로 엄청났다. 그리고 그 위로 보란 듯이 새겨진 꼬부랑 글씨.

‘이게 왜 읽히고 난리야, 사람 난감하게 진짜.’

구김 너머로도 정확히 알 수 있는 ‘탈출’이라는 단어를 보며 나는 헛웃음을 흘러나왔다.

불과 몇 시간, 아니 몇 분 전만 해도 이곳의 언어를 잘 모른다고 생각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상용되는 글자를 몰랐다고 여겼다.

샤샤가 가져다준 책은 물론이거니와 멜리사가 보냈다던 편지 역시 몇 가지 단어들만 겨우 읽을 수 있었으니, 모르는 게 맞았다.

‘그런데 왜, 얘만 예외인 건데? 몰라야 하는데, 모르는 게 당연한데 이건 왜 잘 보이는 거냐고!’

나는 미간을 구기며 들고 있던 마법서를 이리저리 살폈다. 초침이 흐름에 따라 내 얼굴 또한 시시각각 변모했다.

‘설마, 내가 마법사라는 황당한 설정은 아니지? 그치?’

암담한 현실을 알아차리는 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후원에 있던 나무만 해도 이곳이 보통 세계관이 아님을 예상케 하는 장치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빌어먹을, 시든 나무를 빨리 잘라 버렸어야 했다. 피하고 싶던 원작의 설정에 기어코 감길 줄이야.

‘애초에 여주가 마법사라는 건 나오지도 않았었잖아!’

꿈이 있다면 그저 눈앞의 존잘남과 오래도록 평화로이 대대손손 씨를 뿌리며 사는 것뿐이었거늘. 왜 이런 시련을 주는 것인지, 하늘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원래도 모르지만 무조건 아무것도 모른다고 잡아떼야 돼. 괜히 엮였다간 나 혼자 독박 쓰겠어.’

사라지지 않는 종잇장을 태울 듯 노려보며 한참을 고민했다. 하지만,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는 것 외에는 답이 없었다.

대문짝만하게 적힌 ‘탈출’이라는 저 불순한 단어가 가져올 파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기껏 잠재워 둔 에드먼드의 의심과 날조가 어김없이 저를 향할 터.

조금 더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고 가자면, 머지않은 미래에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남편의 손에 의해, 비참히도.

애초에 두 사람의 불화는 작은 오해들로부터 시작됐고, 비극의 끝은 서로의 심장을 앗아가는 파멸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어찌 보면, 다른 결말을 만들겠다는 다짐 자체가 우스울지도 몰랐다.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쳇바퀴처럼 다르게나마 원작의 굴레를 맴돌고 있었으니.

그런데도 포기할 수 없었다. 아니, 포기하고 쉽지 않았다. 해피엔딩은 결국 노력하는 자의 것이고, 지금 이 삶을 사는 것은 그녀 자신이지 않은가?

‘운명의 쳇바퀴 따위 쌈이나 싸 먹으라지.’

나는 결연한 표정과 함께 에드먼드를 응시했다. 세차게 이글거리는 보랏빛 눈동자. 에드먼드가 미간을 구기며 어깨를 흠칫거렸다.

“그런 표정을 할 때면, 꼭 알 수 없는 짓을 하고는 했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새초롬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손에 든 건 뭐지?”

“모, 모른다니까요.”

“모르는데, 왜 숨기려고 한 걸까? 마치 해서는 안 될 일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에드먼드가 나른한 숨소리와 함께 길게 뻗은 두 다리를 교차했다. 지독히도 치명적인 그의 모습에 ‘이건 탈출 마법서입니다.’ 사실을 터놓을 뻔했다.

‘정신 차려, 앞으로의 80년이 걸린 중요한 시점이야!’

잠시 생각한 난 세차게 도리질하며 흐트러지는 정신을 부여잡았다.

“그, 그건! 멜리사, 그 애가 숨기라고 하니까. 나도 모르게 숨긴 것뿐이에요. 별 뜻은 없다고요.”

순간 서늘한 시선이 피부 위로 닿았다. 마차 사고가 있던 그 날을 제외하고는 처음 보는 얼굴이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계속됐다. 길게 뻗은 에드먼드의 손끝이 들고 있던 종잇장을 가리키고, 닫혀 있던 그의 잇새가 천천히 벌어졌다.

“탈출 마법서. 공간과 공간을 이어 눈 깜짝할 새에 사라져 버리지. 당신 친구, 멜리사가 한 것처럼.”

예리한 지적에 입술이 움찔거렸다. 허를 찌르는 그의 말에 마른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나, 나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다고요. 정말 모르는 일이라니까요? 이것도 오늘 처음 봤다고요.”

“실패 끝에 찾은 방법이 결국, 이건가?”

“아니, 말이 왜 그렇게 가는데요! 나는 정말 부탁한 적도 없고, 이걸 어떻게 쓰는지도 몰라요. 나도 피해자라고요.”

“큭, 아끼던 요정 나무를 자르자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결백을 주장하는 내 말 따위 들리지 않는 모양인지, 에드먼드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쩌지? 당신 계획이 모두 무너져 버려서.”

에드먼드의 적안이 오롯이 나를 향했다. 피식, 낮게 조소한 그가 가문 입술을 느릿하게 적시며 다음 말을 이었다.

“연기처럼 홀연히 사라지고 싶었을 테지. 흔적 없이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을 거야. 조금만 기다리라는 내 말이 그렇게도 못 미더웠나? 대체 왜!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난 결백하다니까요! 괜한 추측으로 애먼 사람 잡지 말라고요!”

“결백? 증거가 이렇게도 확실한데 지금 결백을 논하는 건가? 내게 어디까지 놀아나 줘야 하지? 어설픈 연기에 속아 넘어가는 날 보며, 당신 꿰임에 넘어가는 날 보며! 매일같이 비웃으며 같잖아했었으려나?”

변하는 날씨처럼 그녀의 내면에도 분노가 들끓었다. 아니라는데, 왜! 사람 말을 믿지를 못하는 것인지. 물론 쉽게 믿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부부잖아?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를 믿어 줘야지, 안 그래?

나는 씩씩거리며 들고 있던 종잇장을 세게 쥐었다. 가늘게 떨리는 보라색 눈동자가 에드먼드를 향했다.

“끝까지 믿지 못하겠다면, 행동으로 보여 줄게요. 두 눈 똑바로 뜨고 잘 봐요.”

결연한 목소리가 내부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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