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남편과의 이혼을 거부합니다 (33)화 (33/107)

제33화

“악-.”

순식간이었다. 엉망으로 구겨진 종잇조각이 클로엔의 입 안으로 들어가는 데까지는 단, 3초도 걸리지 않았다.

대책 없는 여자의 대책 없는 짓. 에드먼드의 입매가 놀라움을 이기지 못한 채, 제멋대로 벌어졌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질문을 건넨 목소리가 답지 않게 떨려왔다. 이 얼마나 놀랍고도 창의적인 대응 방식이란 말인가.

오직 클로엔만이 기억을 잃었다 주장하는 눈앞의 여자만이 행할 수 있는 고차원적인 방법이었다. 정상인의 상식선에서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그런 방법 말이다.

“당신이라는 여자는 대체……!”

언성을 높이던 에드먼드의 잇새에서 자연스레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던 그때였다.

클로엔이 양 볼을 부풀린 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내뱉었다.

“우으음, 움음음!(당신이 날 못 믿으니까!)”

정면을 향해 있던 공작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정상적인 대응 방식으로는 엉망진창인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없을 터.

“장난치지 말고 뱉어, 어서!”

에드먼드가 곱게 편 손바닥을 내밀어 보이며 말했다. 구겨진 이마가 클로엔이 머금고 있는 마법서를 닮았다는 걸, 그는 알까?

“으음으음.(싫어, 싫어.)”

나는 도리질하며 웅얼거렸다.

“뱉으라고! 당신이 염소야? 그걸 왜 먹고 난리야!”

“우음, 으으음! 음음, 우으움!(이렇게라도 내 결백을 증명하는 거라고요!)”

“일단 그것부터 뱉어, 뱉고 말해.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으니까 빨리 뱉어!”

“우으음!!(싫어!!)”

“뭐라는 거야 대체!”

보다 못한 에드먼드가 인상을 구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게 뻗은 두 다리가 허공을 가로지르곤 내 앞에 섰다.

“뱉어, 빨리!”

커다란 손바닥이 연신 흔들거리며 뱉기를 종용했다. 굳은살이 잔뜩 박여 툭 불거진 살결이 어찌나 치명적인지.

‘정신 차려! 지금은 대치 상태라고. 겉모습에 홀리지 마!’

흩어지는 집중력을 애써 바로잡으며 나는 입매를 꾹 다물었다. 그러곤 비장한 표정과 함께 고개를 두어 번 내저었다.

명백한 거절. 답답한 듯, 에드먼드가 정돈된 머리칼을 흩트리며 신음을 흘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미간을 구기며 뻗었던 손을 좀 더 가까이 내밀었다.

“마지막이야, 뱉어. 이 이상은 나도 어떻게 할지 몰라.”

꾹 다물린 입술 아래 닿을 듯 말 듯, 거리를 좁힌 커다란 손바닥이 파들거리며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주춤거리는가 싶더니 다시 한번 도리,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화르르 불타오르는 기분이었다. 에드먼드의 붉은 눈동자가 클로엔을 향한 채 이글거렸다.

“우으음, 움음음.(정, 뱉게 하고 싶으면 뽀뽀라도 해 주든가.)”

나는 커다란 눈망울을 깜박거리며 조그마한 입술을 쭉 내밀었다. 의도를 알아차린 듯 에드먼드 역시 고개를 좌우로 내저으며 대답을 대신에 했다.

‘아, 이렇게 세 번째 키스 각도 물 건너간 건가?’

씁쓸한 미소와 함께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러곤 의미심장한 표정과 함께 말없이 에드먼드를 응시했다.

“장난은 이쯤 하지. 놀아 주는 것도 여기까지니까.”

마지막 말을 내뱉던 그때까지도 그는 알지 못했다. 저를 향해 지어 보이는 썩은 미소의 의미를, 눈앞의 제 부인이 상상 그 이상의 도라이임을.

“우음.(기꺼이.)”

작게 대꾸한 난 닫힌 입술을 오물거리며 틈을 벌렸다. 에드먼드의 입매에 승리에 찬 미소가 걸리던 그때였다.

피식, 작게 코웃음 친 나는 보란 듯이 입을 놀렸다. 음식을 씹듯 입에 든 것을 꼼꼼히 씹었다. 곧이어 에드먼드의 낯빛이 사색으로 물들었다.

“그, 그만!! 이런 식으로 증거 인멸을 할 생각이라면 당장 포기해!”

“우움!! 음!음!음!(당신 마음대로 생각해!)”

이어진 원성에 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웅얼거렸다.

“그만! 멈춰! 그만 씹으라고!”

에드먼드의 다급한 손길이 내 입술에 닿았다. 꾹 닫힌 입을 벌려보려 애를 썼지만, 자라의 입이라도 된 양 꿈쩍을 하지 않았다.

“우으!! 으! 음으으움!”(빌어먹을 종잇장 다 씹어 먹어 버릴 거야!!)

뺏으려는 자와, 뺏기지 않으려는 자. 맞닿은 두 사람이 아등바등하며 힘겨루기를 계속했다.

“종이 먹으면 배탈 난다고!”

에드먼드의 손이 입에 든 것을 빼내려 가까이 올수록 저항 역시 거세져 갔다. 외면받은 여인의 마지막 자존심이자 쓸모없는 오기였다.

‘이번만큼은 순순히 들어주지 않으리라……!’

뒷걸음을 칠지언정, 입에 문 것은 뱉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얽히고설켜 있던 두 개의 몸이 응접실 구석에 놓인 소파 근처로 향했다.

이윽고, 꽈당! 맞닿았던 두 사람의 몸이 균형을 잃으며 소파 위로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추락에 놀라기도 잠시.

“……!”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낯선 숨결에 커다란 두 눈이 튀어나올 듯 동그랗게 변했다.

‘이렇게 브레이크 없이 들이댄다고? 뜬금없이 거사를 치른다고?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동시에 꿀꺽, 잘근대던 종잇조각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치자, 온몸이 경직되며 긴장되기 시작했다.

“여보……!”

가늘게 떨리는 보랏빛 눈동자가 연신 반짝이며 위쪽을 향했다. 기대에 찬 나와 달리 에드먼드의 얼굴 가득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느릿느릿, 에드먼드의 입술을 가로막았다. 그러곤 끈적한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쉿,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아니, 지금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데…….”

“어허, 말하지 말라니까!”

나는 혀끝을 내밀어 입술을 느릿하게 적셨다. 이내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그를 향해 추파를 던졌다.

“도망은, 여기까지.”

늘어진 넥타이가 클로엔의 손에 단단히 붙들렸다. 붉게 물든 그녀의 입술이 다시 한번 벌어졌다.

“당신이야말로 나에 대한 능욕은 여기까지 하는 게 좋을 거예요.”

“……!”

“이 정도 했으면 믿어 주는 시늉이라도 해 주는 게 예의 아니에요? 에드먼드, 랜돌프 공작?”

순간, 에드먼드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렸다. 옛말에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조금만 더 흔든다면 후세 양성 크게 이바지를 할 수 있을 터.

‘이대로 키스해! 부딪혀, 빨리!’

나는 쿵덕거리는 마음을 애써 짓누르며 여유롭게 웃었다.

“내가 또 당신 말에 속아 넘어갈 거로 생각하나?”

“이왕 속아 준 거, 끝까지 속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죠.”

“뻔뻔하기 그지없군.”

“내가 정말 당신을 떠날 생각이었다면, 아까 그 마법서인지 뭔지를 입 안에 넣고 삼키는 바보 같은 일 따위 벌이지 않았을 거예요.”

“…….”

“그 빌어먹을 종잇장을 필사적으로 숨기고, 지키려 들었겠죠. 안 그래요?”

말과 함께 가느다란 손끝이 잡고 있던 넥타이를 좀 더 세게 움켜쥐었다. 눈동자의 떨림이 강해진 걸 보아, 에드먼드는 분명 흔들리고 있다.

‘이런 숙맥 같으니, 이렇게 마음을 못 숨겨서야 낄낄.’

검은 속내를 숨긴 채, 두 눈을 깜박이며 다음 말을 이었다.

“후음, 이 정도면 해명은 다 한 것 같은데 우리 여보는 계속 그렇게 망설이고 있을 건가요?”

“뭘 말이지?”

“이럴 땐 화해의 키스라는 걸 하는 거랍니다. 아주 찐하게.”

색이 다른 두 개의 눈동자가 서로를 가득 담은 채 흔들렸다.

쿵 쿵 쿵, 누구 것인지 모를 두근거리는 떨림이 귓가를 울렸다. 고요한 저택, 어둑한 하늘, 일렁이는 촛불마저 완벽한 순간.

방 안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달아오른 얼굴 위로 짙은 음영이 새겨졌다. 에드먼드의 몸이 조금씩 기울기 시작하자 약속이라도 한 듯, 기다란 속눈썹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드, 드디어…… 드디어!’

기쁨에 젖은 입꼬리가 절로 씰룩였다. 첫 키스를 이빨에 할 수는 없다. 올라간 입매를 힘껏 부여잡으며, 다가오는 숨결에 집중하던 그 순간.

파사삭!

‘이런 X발, 깜짝이야.’

화들짝 놀란 난 놀란 거북이처럼 몸을 움츠렸다. 그런 나와 달리, 에드먼드는 매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덩달아 시선을 쫓았으나 그림자는 침입자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보이지 않았다.

너무 긴장되어 환청이라도 들은 것일까? 아니면 사용인 중 누군가가 위층에 있는 걸까?

애가 탔다. 나는 동그란 눈알을 굴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흠흠, 위층에서 집무실을 치우는 모양이군.”

민망한 듯, 에드먼드가 괜한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붙였다.

“그, 그러게요. 거, 조심 좀 하지.”

재빨리 장단을 맞췄지만, 대화는 그리 길지 못했다. 의미 없는 주고받음을 끝으로 드넓은 저택은 다시 한번 정적으로 물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갈증 어린 진득한 시선이 서로를 향한 채 일렁였다. 아무리 허울뿐인 부부라 해도 두 사람 모두 아직 건장한 20대가 아니던가.

결심한 듯, 에드먼드의 입술이 재차 거리를 좁혀 왔다. 닿을 듯 말 듯, 부부의 첫 입맞춤이 한 뼘도 채 남지 않은 그 순간.

또다시, 파사삭!

닫힌 커튼 너머로 무언가 맞부딪히며 듣기 싫은 소음이 울렸다. 떨리는 눈동자가 조용히 소리가 난 쪽을 향했다.

“……!”

앙다문 입술이 소리 없이 벌어졌다. 놀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흔들리는 커튼 뒤로 정체불명의 실루엣이 선명히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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