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미쳤나 봐. 진짜 제정신이 아닌가 봐. 아 놔, 분노조절장애인가? 이거 어떡하냐, 진짜.”
곧장 계단을 내려온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곤 자책이라도 하듯 기둥에 머리를 콩콩 박아댔다.
“아니지? 저쪽에서 먼저 말을 안 예쁘게 하잖아. 단순히 아내라서라니. 그러기엔 본인 눈빛이 불순했는데, 어?! 썸도 이렇게 타면 유죄라고 유죄.”
“부……인?”
홀로 중얼거리는 사이, 언제 온 지 모를 샤샤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샤샤!”
괜한 억울함에 나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그리고 조금 전 일들을 고자질하듯 줄줄이 읊었다.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샤샤의 낯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저…… 이건 부인께서 백번 천번 잘못 하신 것 같은데요.”
“물론 이혼을 먼저 말한 건 내 잘못이 맞긴 하는데, 그래도 말을 꼭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단순히 남편의 의무라니. 누가 봐도 서운하지.”
“하지만 남편의 의무가 맞기는 하잖아요.”
“그래, 가재는 게 편이다 이거지? 내가 이혼하면 너도 무조건 데리고 나갈 거야.”
“에이, 무슨 그런 심한 말씀을. 장난이라도 그런 얘기하지 마세요. 원래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잖아요. 다시 화해하시면 되죠.”
“정말 그럴까……? 이참에 잘됐다고 내다 버리면 어떻게 하지? 나 진짜 갈 데도 없어.”
나는 두 발을 동동 구르며 울상을 지었다. 욱한 감정에 휩쓸려 저지르기는 했으나, 막상 돌아서니 후회막심이었다.
그런 저를 위로하듯, 샤샤가 주변을 힐끗거리며 가까이 왔다. 이내 쥐꼬리만 한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사실 두 분이 어제 새벽쯤에야 들어오셨거든요. 괜히 들어갔다가 부인께서 깨실 것 같다고 집무실에서 주무신 거예요.”
“에이, 말도 안 돼. 진짜?”
“네. 진짜! 저도 듣고 놀라기는 했는데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분께서 에라, 잘됐다. 한 번에 도장 찍으실 리가 없죠.”
샤샤의 말에 입술을 삐죽이며 위층을 힐끔, 바라봤다. 조금 전 대형 폭탄을 던지고 온 것과 달리 주변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고요했다.
“그렇다기엔 너무 조용하지 않니? 나 진짜 망한 것 같아.”
가느다란 손끝으로 위층을 가리키며 툴툴거렸다. 답지 않은 엄살에 샤샤가 샐쭉 미소 지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공작께서도 생각하실 시간이 필요하시겠죠. 서로 오해가 쌓이니까 돌아와서 잘 이야기해 보세요. 부인의 주특기잖아요.”
“주특기?”
“네! 앞뒤 안 보고 무작정 들이대시는 거. 그거 제일 잘하시잖아요.”
저놈의 주둥이를 그냥.
타는 속과 달리 샤샤가 두 눈을 반짝이며 해맑게 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작님께서 오늘 동산에 갈 때 가져가라고 손수 석궁도 챙겨 주셨는걸요? 아무리 남편이라지만, 아무 감정도 없는데 어떻게 그래요.”
“그런가……?”
“그럼요. 제가 볼 땐 요즘 두 분이 끈적한 무언가가 있었다고요. 확실히 옛날과는 달랐어요. 그러니까 자책은 여기까지만 하시고 이제 그만 가요. 부인께서 해야 할 일을 하셔야죠!”
샤샤가 두 눈을 예쁘게 접어 가며 샐쭉 미소 지었다. 그러곤 재빨리 팔짱을 끼우며 저택 입구로 잡아끌었다.
* * *
‘이게 다 뭐냐?’
마차 한편에 실린 거대 석궁을 보며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고작 손톱만 한 달팽이를 잡기엔 그 크기와 위세가 과해도 한참 과했다.
“오늘 점심으로 레틴 님이 도시락을 싸 주셨는데, 냄새가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고민하는 사이, 준비를 마친 샤샤가 마차 문을 열었다.
“부인?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계세요?”
마차에 올라탄 샤샤가 손에 쥔 케이지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곧장 거대 석궁을 가리키며 궁금증을 토로했다.
“근데 저거…… 진짜 나 쓰라고 가져온 거야?”
“어떤 거요?”
“저거, 내 키만 한 활.”
“아~ 저거요? 물론이죠! 원래부터 부인께서 쓰시던 거잖아요.”
“내가? 저걸? 아니 내 몸뚱이만 한 걸 어떻게 들어.”
“아…… 기억을 잃으셨죠.”
그걸 왜 지금 깨닫는 건데.
샤샤가 뒷말을 흐리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별일 아니라는 듯 해맑게 웃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그래도 몸은 기억하지 않을까요? 사고 전만 해도 활 실력이 정말 좋으셨거든요.”
이 쥐방울만 한 손으로 저걸 쐈다고? 얘 대체 정체가 뭐야?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지런히 놓인 석궁과 퀴버를 살폈다. 그리고 황당한 얼굴로 같은 말을 되물었다.
“내가 진짜 이 비루한 팔목이 저걸 들었다고? 잡으면 부러지겠는데?”
“에이, 엄살 부리시기는! 제가 이런 거로 거짓을 말하겠어요? 그러니 공작께서도 사냥을 나가신다니, 곧장 ‘아테나’를 챙겨 주셨겠죠.”
“아, 그 와중에 이름도 있어?”
“부인께서 직접 지으신 건데, 이것도 역시나 기억이 안 나시겠죠? 아끼시던 물건 중 하나였는데…….”
아련해진 샤샤와 달리 나는 온몸에 털이 곤두서는 듯한 기분이었다. 다른 것도 아닌 ‘전쟁의 여신’이라니.
‘얘 생각보다 중이병이 심했네. 고질병이 있었어.’
흑염룡을 200마리는 때려 넣은 듯한 작명 실력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여담이지만, 부인께서 아테나를 들고 사냥감을 조준하실 때는 진짜 작은 거인을 보는 것 같았다고요! 가까이하시던 거니 분명 몸이 기억할 거예요.”
확신에 찬 샤샤의 말에 호응하듯, 아래에선 “쀼쀼!” 기분 좋은 울음소리가 울렸다.
긴가민가한 마음으로 앞에 놓인 것들을 좀 더 자세히 살폈다. 예리한 화살촉이 박혀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끝이 뭉툭한 무언가가 화살대에 달려 있었다.
“잠깐, 이거 화살이 아니라 도장 아니야? 여기에 잉크 묻히고 콕 찍으면 딱 맞겠다.”
“아~ 그거. 공작님께서 아침 일찍 바꿔 놓으셨어요. 사고 이후 첫 사냥이신데 그냥 쓰시면 위험할 수도 있다고.”
흡사 곤봉을 보는 듯한 비주얼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민해 보았지만, 저 거대한 석궁을 달팽이 채집용만으로 쓰기엔 과해도 너무 과했다.
“저거로 뭐, 토끼라도 잡아야 하나……? 뭔가 찝찝한데.”
어딘지 미심쩍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사이, 정차 중이던 마차는 조금씩 속도를 붙였고 빠르게 저택을 빠져나갔다.
* * *
“부인, 여기부터는 걸어서 움직여야 해요. 길이 좁아서 마차가 들어갈 수가 없거든요.”
말을 끝으로 고난은 시작됐다. 금방이라던 페트라 언덕은 30분이 지나도록 보이질 않았고. 높은 지대만큼이나 부실한 두 다리는 조금씩 후들거렸다.
“대체 언제 도착하는 건데……. 금방이라며! 가깝다며!”
나는 지친 몸을 끌어당기며 볼멘소리를 터뜨렸다. 뒤따르던 샤샤 역시 상황은 비슷했으나 그렇다고 내 고통이 덜어지는 건 아니었다.
어깨에 ‘걸쳤다’기보단 ‘짓눌렀다’에 가까운 석궁과 퀴버, 그리고 손에 들린 쀼의 케이지까지.
그나마 편한 차림이었기에 다행이었다. 와중에 치렁치렁한 드레스까지 입었다면 언덕은커녕 그대로 되돌아갔을 거다.
“후……! 이제 정말 다 왔어요. 이 고개만 넘으면 페트라 언덕이에요.”
어느새 옆으로 온 샤샤가 헉헉거리며 벅찬 숨을 내쉬었다. 전과 달리 손끝으로 능선을 가리키는 걸 보아 진짜 고지가 멀지 않은 모양이었다.
“마지막으로 믿는다.”
낮게 일갈하며 흐물거리는 두 다리를 내디뎠다. 태생적으로 약한 몸뚱이는 체력을 빠르게 소모했다.
“와…… 이거 좀 걸었다고 어지러운 거 봐. 진짜 어떻게 살아야 몸이 이렇게까지 쓰레기지.”
나는 혀를 끌끌 차며 마지막 젖 먹던 힘까지 짜냈다. 그리고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랐을 땐. 기괴한 광경에 닫힌 입술이 절로 벌어졌다.
“저게 달팽이라고……?”
커다란 두 눈을 느리게 굴러 샤샤를 바라봤다. 흐릿하게 풀린 초점은 복잡한 내 머릿속을 대변해 줬다.
“네! 라비스텔의 오랜 고충이죠. 자이언트 달팽이.”
그런 나와 달리 샤샤는 퍽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는 뭐든 중간이 없구나?
나는 망연한 표정으로 허허, 너털웃음을 지었다. 푸른 초원 위로 적어도 100센티는 될 법한 거대 달팽이들이 줄지어 다녔다.
달팽이 주제에 그 속도는 어찌나 빠른지 눈 깜짝할 새에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그 아래 흥건하게 젖은 점액질은 흡사 대형 콧물 같았다.
“이런다고?”
믿지 못할 상황에 두 눈을 비비적거리기도 했으나 고증 쓰레기인 원작은 오늘도 역시나 만만치 않았다.
‘그런 이유라면 내가 잡아다 주지. 두 마리 정도면 되나?’
‘그래. 당신 말대로 달팽이 백 마리, 꼭 잡아 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