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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남편과의 이혼을 거부합니다 (58)화 (58/107)

제58화

도망쳐……!

자이언트 달팽이와 눈을 마주쳤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본능이 말했다. 저 거대 괴물은 네 상대가 아니라고.

“뭐, 뭐야! 가까이 오지 마. 훠이, 훠이 저리 가!”

조금씩, 아니 무척 빠르게 가까워지는 대형 점액질을 보며 나는 뒷걸음질 쳤다.

“부, 부인! 그러지 마시고, 뭐라도 해 보세요. 점점 가까워지잖아요!”

“으, 싫어! 내 계획에 저런 대형 콧물은 없었다고. 체급에서부터 일단 저쪽이 완승인데 내가 뭘 어떻게 해!”

“침착하세요, 부인. 무기는 저희가 더 많잖아요!”

“무기? 설마 이 아테넨지 뭔지 하는 쇳덩이 말하는 거야?”

“네! 가지고 계신 석궁으로 달팽이 집을 맞추시면 되죠! 화살 끝이 뭉툭하니까 분명히 균형을 잃을 거예요. 그때 호록하고 잡으면 어떨까요?”

“그렇게 잘 알면 샤샤, 네가 하는 건 어때? 양도해 줄게.”

“어휴, 저는 잡는 법도 모르는걸요. 그 비싼 거로 후려치면 쳤지 맞히지는 못해요.”

샤샤가 빠르게 손사래 치며 발을 뺐다. 그사이 집채만 한 대형 콧물은 “미유우웅”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미치겠네, 정말.”

기괴한 광경에 나는 본능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아래에서는 똥 싸는 선인장이 “쀼쀼!”거리며 울어댔고, 옆에서는 희게 질린 샤샤가 “빨리요, 빨리”를 외치며 재촉했다.

가장의 무게란, 이런 걸까?

뒷걸음질 치는 나를 향해 샤샤는 두 눈을 반짝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불필요한 책임감이 샘솟고 말았다.

“그, 그래. 원래 영웅은 난세에 나는 거라고 했어.”

나는 달달 떨리는 손으로 어깨에 있던 쇳덩이를 더듬거렸다. 엉망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자연스레 자세가 잡혔다.

더럽게 무겁네.

묵직한 무게감에 팔목이 후들거렸으나, 손에 쥔 석궁을 단단히 붙들었다. 명중에 실패하면 그대로 후려쳐 버리자 생각하며.

“후…… 할 수 있다.”

낮은 한숨 소리와 함께 스스로 최면했다. 이 시각 나는, 태조 이성계와 버금가는 명사수라고.

본체에 가져온 활을 고정하고 천천히 시위를 당기자.

‘오우 쉣, 내 날갯죽지……!’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미유우웅.”

그리고 마침내 대형 콧물이 반경 500미터 안까지 들어왔을 때, 승패는 판가름이 났다.

* * *

이런다고?

불과 몇 분 전, 제 손으로 한 일임에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나는 허망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했다.

“역시! 절대 못 한다고 하시더니 다 엄살이셨던 거죠? 제가 뭐랬어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몸은 기억하고 있다니까요.”

곤봉이나 다름없는 화살촉은 정확히 자이언트 달팽이의 보금자리를 명중시켰고,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던 대형 콧물은 그 자리에서 꼬꾸라졌다.

“부인, 얘 완전히 기절했는데요? 잡아가도 모르겠어요.”

어느새 곁으로 간 샤샤가 녹다운된 거대 달팽이를 쿡쿡 찔렀다. 이내 천천히 주변을 살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네요. 자이언트 달팽이는 무리 생활을 한다고 들었는데. 왜 얘밖에 없죠?”

“하하, 선택형 아싸인가 보지.”

나는 여전히 넋이 나간 얼굴로 말했다.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인지 샤샤는 이해하기를 포기하고 제 할 말을 이었다.

“최근에 사냥꾼들이 다녀간 건가? 그래도 한 마리뿐이어서 다행이지, 여러 마리였으면 정말 곤란했겠어요. 그건 그렇고 얘는 어떻게 할까요? 이대로 묶을까요?”

“아니! 아니, 절대. 괜찮아!”

얼토당토않은 말에 나는 두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저 거대 생물체가 후원을 제집처럼 돌아다닐 생각을 하자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샤샤, 공병 챙겨 온 거 있지? 그것 좀 가져와 봐.”

“공병은 따로 없고, 이따 오후에 마시려고 음료를 담아오기는 했거든요?”

당연히 저 산만 한 놈을 끌고 갈 거로 생각했는지, 샤샤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럼 그 안에 든 거 버리고 가져와 봐. 기절했을 때 빨리 담아 가게.”

“네? 뭘요? 뭘 가져가는데요?”

“저기 밑에 있는 콧물 같은 게 달팽이 점액이라는 건데 피부에 그냥, 죽거든.”

“에엑!? 죽는다고요? 아무리 다른 영애들이 미워도 그건 아니죠, 부인!”

얘 또 뭐라니.

샤샤가 내게 적응했듯, 나 역시 저 말 많은 시녀에게 적응한 모양이다. 이젠 저 헛소리조차 귀여운 애교로 들리는 걸 보면.

“됐고, 병부터 빨리 가져와. 그사이에 얘 깨기라도 하면 그때야말로 정말 곤란해져.”

“진짜 위험한 거 아니죠?!”

“아, 쫌!”

“아니, 저는 정말 걱정되니까 그렇죠. 부인께서 이래 놓고 뒤통수치신 게 한두 번이냐고요. 제가 공작님 뵐 면목이 없다니까요? 오늘 이혼하자고 폭탄선언까지 하신 마당에 또 사고 치시면 이제 정말 쫓겨나요.”

연신 툴툴거리는 와중에도 샤샤는 가져온 짐꾸러미를 부지런히 풀었다.

“아니래도 그러네. 나를 좀 믿어.”

나는 몸져누운 자이언트 달팽이를 살피며 샤샤의 행적을 뒤쫓았다. 투명한 유리병 안에는 정체 모를 노란 액체가 담겨 있었다.

‘피난 온 것도 아니고, 뭘 저렇게 바리바리 가져온 거야.’

시선을 느낀 샤샤가 힐끔, 눈치를 살피곤 병에 든 액체를 남김없이 쏟아 냈다. 잔여물이 남은 모양인지, 근처에 있던 작은 연못까지 다녀온 후에야 공병을 건네받을 수 있었다.

“이따가 당 떨어지셔도 저는 몰라요. 레틴 님이 귀한 거라고 아껴 먹으라고 하셨는데…….”

“장갑.”

나직한 부름에 샤샤는 하던 말을 멈추고 입을 삐죽였다. 그러곤 미리 준비해 온 장갑을 양손에 꼼꼼히 끼웠다.

“흘리지 말고 잘 받아야 해. 두 번은 못 하니까.”

해롱거리는 거대 달팽이의 살점을 살살 긁어내자 끈적하고 미끄덩한 점액이 한가득 쏟아졌다. 야생인만큼 고약한 냄새는 덤이었다.

“으, 부인! 이거 너무 징그러워요. 이 괴상한 걸 대체 어디에 쓴다는 거세요?”

“이게 다 돈이라고 생각해. 저쪽 세계에서는 구하고 싶어도 못 구하는 거야.”

“이 고약한걸요? 저 같은 사람은 줘도 안 가지겠는데요.”

“그게 다 무지에서 오는 편견이야. 뭐든, 아는 만큼 먹는 거라고. 장담컨대 이거 없어서 못 판다. 비법 전수해 줄 테니까 나중에 어디 가서 써먹던지.”

나는 심드렁히 말하며 마지막 한 방울까지 심혈을 기울였다.

* * *

“아무리 봐도 용도를 모르겠단 말이죠. 먹는 건가?”

샤샤가 품에 들린 유리병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댔다. 그와 달리 클로엔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이대로라면 떼부자 되는 건, 시간 문제겠는데?’

고작 한 마리를 포획한 것뿐인데 커다란 공병을 가득 채우고도 넘쳐흘렀다. 거기다 더해 이곳 사람들은 저 귀한 재료의 효능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고로 내가 말하지 않는 한, 달팽이 사업은 랜돌프 공작 가의 독점이라는 말이었다.

“돌아가서 달팽이 농장을 만들자고 해야겠어.”

“갑자기 농장을요? 아까 데리고 가자니까 펄썩 뛰셨잖아요.”

“후원을 공유하는 건 곤란하지만, 농장을 만든다면 또 이야기가 다르지. 이거 잘만 굴리면 아주 쏠쏠하겠어.”

“저는 도통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샤샤, 넌 모르겠지만 이게 랜돌프의 미래야. 화장품계의 혁명이 될 거라고.”

“네, 그렇다고 해요. 부인께서 그렇다고 하시면 그게 맞는 거죠.”

“너 유독 영혼이 없다?”

나는 짧게 말하며 화끈거리는 손바닥을 긁었다.

“부인, 얼마 전부터 유독 손을 긁으시네요?”

“글쎄, 요즘 무리해서 그런가?”

“돌아가면 달팽이 농장이 아니라 마틴 님부터 불러야겠어요. 얼굴도 유독 붉으신 게 조금 이상해요.”

“에이, 좀 쉬면 괜찮아. 어서 정리하고 이제 생강이나 캐러 가자. 저거 하나 잡는다고 시간을 너무 보냈어. 서둘러야 해.”

“네, 금방이면 돼요.”

짧은 대답 뒤로 샤샤가 들고 있던 유리병을 짐꾸러미에 담으려던 찰나였다.

꼬르륵. 호기로운 포부가 무색하게 지극히 본능적인 생리 현상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일단 점심부터 드시고 가야겠네요.”

“흠흠, 들었어?”

“못 들었을 리가요. 천둥인 줄 알았는걸요.”

시큰둥한 목소리와 달리 샤샤의 손은 연신 바삐 움직였다. 곧이어 펄럭 소리와 함께 휘황찬란한 천 조각이 초원 위에 깔렸다.

돗자리를 시작으로 공백은 빠르게 채워졌다. 저택에서 먹던 식사에 버금가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부족함은 없었다.

“방금까지 활을 쏘셨으니, 체력 소모가 클 수밖에 없죠. 든든히 먹고 힘내셔야 해요.”

마지막 고기 반찬까지 내려놓은 후에야 샤샤는 행동을 멈췄다. 어서 먹으라는 듯, 말 많은 시녀는 챙겨 온 나이프와 포크를 손수 쥐여 줬다.

“샤샤…… 나는 맨날 너 말 많다고 구박만 했는데.”

잔잔한 감동에 코끝이 찡해지기도 잠시.

“그냥 차라리 구박을 해 주세요. 이러다 돌변하시는 게 더 무서워요.”

샤샤가 학을 떼며 말했다. 딱히 반박할 말이 없던 건 함정이었다. 민망해진 난 자연스레 먹던 음식으로 화제를 돌렸다.

“으음, 너무 맛있어. 연어가 입에서 진짜 살살 녹아.”

“그러다 체하지 마시고 천천히 드세요. 물도 좀 드시고요.”

고생 뒤 먹는 음식인지라 그런지, 유독 꿀맛이었다. 나는 부러 가져온 음식을 반으로 나눠 샤샤에게 건넸다.

“너야말로 좀 먹어. 괜히 참고 있다가 먹다 남긴 거 먹지 말고.”

“부인…….”

“오글거리니까 감성 멘트는 사양할게.”

울먹이는 샤샤를 향해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름의 소소한 복수였다.

* * *

“휴, 잘 먹었다. 이대로 낮잠 한숨 때리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을 텐데.”

식사를 마친 난 부른 배를 통통거리며 자리에 누웠다. “쀼쀼”거리는 소리와 함께 선선한 가을바람이 피부를 스쳤다.

“날씨 진짜 좋다.”

높아진 하늘만큼이나 유독 날이 따뜻했다. 그렇게 평화로운 여정이 계속됐다면 좋았으련만.

크르릉.

이곳이 산 중턱임을 망각한 것과 등 뒤에서 쏟아진 살벌한 시선을 느끼지 못한 건 크나큰 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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