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강아지 폭죽 만들기]
폭죽이 터질 때, 귀여운 강아지 울음소리가 들린답니다. 뜨거운 밤을 원한다면.
“진짜 개소리네.”
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다음 내용을 훑었다.
[준비물 : 갓 수확한 폭탄 열매 2개, 멈뭄꼬리풀 5잎, 송진 가루 3줌…….]
다소 생소한 별빛 폭죽 제조법과 달리, 강아지 폭죽은 비교적 구하기 쉬운 재료로 구성돼 있었다.
“근데 강아지 울음소리가 좀 걸린다. 좋은 날인데 개소리는 좀 그렇지.”
홀로 중얼거린 나는 재빨리 다음 장을 넘겼다.
[축제용 폭죽 만들기]
불꽃 쇼의 끝. 화려한 축제를 만들고 싶다면.
이름을 확인한 나는 곧장 제조법을 옮겨 적었다. 닫힌 창문 너머로 어스름한 새벽 해가 뉘엿뉘엿 피어올랐다.
* * *
다음 날, 아침.
텅 빈 침대 옆자리를 보며 에드먼드는 고민했다. 이대로 각방 생활을 유지하는 게 옳은 건지, 의구심이 들었다.
“어제는 제풀에 지쳐 들이닥칠 줄 알았는데…….”
삐죽, 입술을 내민 그가 답지 않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다부진 손끝은 부지런히 옷차림을 정돈했다.
처음엔 옆에서 꼼지락거리는 클로엔의 존재가 귀찮고 불편했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편하기만 했던 독방 생활이 이제는 좀 짜증스러웠다.
이른 새벽, 눈앞을 아른거리던 백금색 머리칼도, 새근거리는 숨소리도, 닿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온기도 조금 그리웠다.
“그리워? 미쳤군, 진짜.”
스치듯 떠오른 감정에 에드먼드는 질색했다. 계절이 바뀌니,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었다. 그런 왈가닥을 두고 그립다는 말을 하다니.
마지막 정돈을 마친 그는 검은 재킷을 걸치며 방에서 나왔다. 경합까지 일주일이 채 남지 않은 시점인 만큼, 안팎으로 신경 쓸 일이 많았다.
에드먼드는 재빨리 계단을 내리며 하루를 시작했다. 커다란 구둣발이 2층 복도를 지나칠 때쯤, 수상한 그림자가 보였다.
“집사?”
모두가 잠든 이른 새벽, 문 앞에 선 노 집사는 퍽 수상쩍었다. 에드먼드는 곧장, 걸음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내 아내의 침소 앞에서 뭘 하고 서 있지? 일과를 시작하려면 아직 멀었을 텐데.”
“공작님, 일찍 일어나셨군요.”
능구렁이 같은 노인은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인사를 건넸다.
퍽,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으나 빠르게 움직이던 데릭의 손을 에드먼드는 놓치지 않았다.
에드먼드가 말했다.
“난 여기서 뭘 하고 있었는지 물었다.”
“……아가씨께서 잘 주무시는지 확인하려던 차였습니다. 큰소리가 나는 것 같아서요.”
“등 뒤로 숨긴 건?”
줄곧 여유롭던 데릭의 시선이 조금씩 흔들렸다. 그에 따라 에드먼드의 미간이 보기 싫게 구겨졌다.
커다란 손바닥이 허공에 펼쳐졌다. 이대로 순순히 내놓는다면 해치지 않겠다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줘.”
낮은 울림에도 집사는 요지부동이었다. 노인을 핍박하는 건 취향이 아니었으나, 중간에 클로엔이 끼어 있다면 이야기는 달랐다.
“주인으로서 명하지. 이 저택에 발붙이고 살고 싶다면 순순히 내놓아라, 데릭. 엘리테른 백작에게 내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것도 참아 주었다. 더는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
잠시 고민하던 데릭이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주름진 손에는 입구를 봉한 편지 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
“누가 보낸 거지?”
“……요제프 경께서 보낸 서신입니다.”
말과 동시에 에드먼드는 이를 아득 물었다. 저도 모르게 말아쥔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불룩, 솟은 핏줄이 터질 듯 팽팽했다.
“미친 새끼.”
대답을 들은 에드먼드가 낮게 짓씹었다. 커다란 손이 잡아채듯 서신을 가져왔다.
“가봐. 입조심하고.”
에드먼드의 붉은 동공이 손에 든 봉투를 이리저리 살피며 경고했다.
* * *
“오늘 오전 훈련은 여기까지 한다. 각자, 정비를 마치고 한 시까지 모이도록.”
꿀 같은 휴식 시간에 단원들의 입에선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신이 난 단원들은 무용담을 떠들어대며 연무장을 벗어났다.
그와 달리 보좌관 멜빈의 얼굴엔 먹구름이 가득했다.
휘익, 탁!
벌써 몇 시간째인지, 시위를 당기는 상관의 뒷모습은 살기 그 자체였다.
“저…… 공작님?”
멜빈의 부름에 에드먼드의 동공이 느리게 굴렀다. 마치 활 쏘는 기계라도 된 양, 눈알만 움직이는 공작의 모습이 기괴스러웠다.
“혹시…… 무슨 일 있으십니까? 오늘따라 유달리 더 열심이시네요.”
“신경 쓰지 말고 식사하지.”
“직속 상관께서 혼자 이러고 계시는데, 제가 어떻게 밥을 먹으러 가나요?”
그 순간, 빠직!
괴력을 이기지 못한 통나무가 속절없이 갈라졌다. 붙여둔 종이 과녁은 이미 너덜너덜해진 지 오래였다.
[그날, 그곳에서 기다릴게.]
불현듯 떠오른 편지 내용은 에드먼드를 분노하게 했다. 후, 크게 심호흡하며 천천히 시위를 당겼다. 순간 저 나무 파편이 요제프의 머리통이길 바랐다.
공작이 말했다.
“멜빈, 누군가 내 먹잇감에 손을 대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야……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토끼 같은 자식들과 여우 같은 아내라면 충분히 양보할 것 같습니다.”
“남자라면?”
“조져야죠. 그걸 그냥 두나요? 감히 누구 밥그릇에 손을 얹습니까, 건방지게!”
“그래, 밥그릇 주인이 누군지 똑똑히 알려 줘야지.”
“물론이죠. 그런 건 처음부터 싹을 뽑아야 합니다. 근데 누가 겁도 없이 공작님 밥에 손을 댑니까? 목숨이 두 개도 아……!”
에드먼드는 대답을 채 듣지도 않고 멀어졌다. 씩씩거리는 뒷모습을 보며 멜빈은 멀뚱히 자리를 지켰다.
고래 싸움엔 피신이 답이니까.
* * *
그 시각, 클로엔.
정오가 가까운 시간에도 볼록한 이불은 걷힐 기미가 없었다. 일찍이 샤샤가 가져다 둔 빵과 우유는 온기를 잃은 지 오래.
“아…… 등 배겼어.”
단잠을 마친 나는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안 하던 공부를 한답시고, 날을 샌 게 문제였다. 나는 부은 눈을 비비적대며 주변을 살폈다.
저게 뭐야?
나는 테이블에 놓인 작은 쪽지를 발견했다.
[●]
종이 위엔 뜻 모를 검은 동그라미가 전부였다.
“매직아인가……?”
나는 손에 든 쪽지를 요리조리 살폈다. 모은 눈이 피로해질 때쯤, 샤샤가 차고 다니던 머리 두건이 보였다.
“아 놔, 검은 구슬. 샤샤답네.”
의미를 알아차린 나는 조용히 주변을 살폈다. 샤샤의 부재를 알려 주듯, 방 한편엔 미리 준비해 둔 드레스와 장신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보자, 별빛 열매랑 꽃 기름, 무지개 나무 조각이랑 또…….”
나는 미리 적어 둔 구매 목록을 살피며 우물거렸다. 비교적 사용 빈도가 잦은 재료들이니, 잘만 둘러댄다면 별다른 의심 없이 들여올 수 있을 거다.
“슬슬 준비하고 나가 볼까나.”
정리를 마친 난 입고 있던 슬립 끈을 천천히 내렸다.
동시에 쾅!
굉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제법 거칠었으나, 뒤돌아선 인영은 상대를 확인할 생각조차 없었다.
“티모? 그래서 문이 부서지겠어? 화가 나면 차라리 들에 가서 뛰고 와. 그럼 좀 풀리더라.”
말과 동시에 주르륵, 아슬하게 걸려 있던 어깨끈이 궤도를 벗어났다. 붉은 망막 위로 결점 하나 없는 흰 피부가 걸렸다.
……!
속옷 차림의 인영은 무척이나 자극적이었다. 손에 쥐면 바스러질 듯, 작은 몸을 하고선 안으론 능구렁이를 품고 있었다.
젠장.
생경한 장면에 에드먼드는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사리문 입술은 퍽 금욕적이기까지 했으나 그 속은 썩어 문드러졌다.
동시에 악!
에드먼드를 발견한 두 눈이 한계까지 커졌다. 벌어진 입술에선 외마디 비명이 흘러나오고, 놀란 두 팔은 허공에 버둥댔다.
“아니, 이게 그러니까…… 내가 일부러 벗은 게 아니라.”
한참을 허둥거리던 클로엔은 그 자리에 앉아 몸을 둥글게 말았다. 당황한 손이 잠옷을 집으려 바르작댔으나 애석하게도 잡히질 않았다.
“아니, 이게 내가 일부러 안 집는 게 아니라…… 이게 진짜 미끄럽거든요.”
온몸이 발갛게 달아오른 클로엔은 지질한 변명 따위를 더하며 뚝딱댔다.
끈 풀린 망아지라도 된 양 겁 없이 달려들 때는 언제고 저럴 땐, 영락없는 샌님이었다.
‘귀엽군.’
그는 부러 올라간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표정을 바로잡았다. 그러곤 흠흠, 마른 목을 긁으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뱉었다.
“아무리 부부라지만 이건 좀 노골적이지 않나?”
“대뜸 말도 없이 들어온 게 누군데요! 나는 당연히 시녀 중 하나일 줄 알았다고요!”
서둘러 빈 몸을 가린 그녀가 허공에 꽥꽥댔다. 분명 짜증을 내고 있거늘, 이상하리만치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연무장에 있어야 할 사람이 왜 또 여기 있는 건데요!?”
엉망으로 구겨진 미간도, 불만스럽게 잔뜩 부풀린 양 볼도 귀엽게만 느껴졌다.
‘그냥 저 표정이 귀여워 보이는 것뿐이야. 단순히 내 소유에 대한 애정을 느끼는 것뿐이지. 예를 들면 말, 칼, 활처럼.’
스스로 이상함을 느낀 에드먼드는 필사적으로 최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