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화
‘눈새처럼 괜히 초 치지 말고, 적당히 분위기 맞춰라.’
나는 다채로운 얼굴 근육을 써 가며 소리 없이 말했다. 다행히 말귀를 알아들은 모양인지, 에드먼드는 잠잠했다.
“랜돌프 공작께서 저희 상권에 이토록 관심이 많으신지는 몰랐습니다. 말이 나와서인데, 무서운 분이라고만 생각했거든요.”
“오호호~ 겉보기에는 그럴 수 있죠. 우리 공작께서 워낙에 냉미남 재질이라. 범접할 수 없는 뭔가가 있기는 하죠.”
그렇죠, 여보?
나는 뒷말을 덧붙이며 에드먼드의 팔뚝을 가볍게 문질렀다. 동시에 고요하던 붉은색 동공이 피부 위로 쏟아졌다.
마주친 시선 위로 전에 없던 열감이 느껴진 건, 아마도 착각일 거다. 동시에 에드먼드의 손이 내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덕분에 클로엔 랜돌프, 당신만이 내 진가를 알아봤으니 차라리 다행일지도.”
저 새끼, 또 끼 부리네.
나는 쿵쿵대는 심장을 붙들며 환희의 미소를 지었다. 저런 잘생긴 얼굴로 이따위 느끼한 대사를 읊는 건 늘, 환영이다.
“아이~ 여보도 참. 사람들 보는데 얼굴은 만지고 구래용.”
남편의 가슴팍에 살포시 안착한 나는 마음껏 머리를 비비적댔다. 흡사 변태 같아 보일 수 있으나, 가지지 못한 것을 갈망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다.
‘아…… 청정한 야수의 스멜.’
때아닌 애정 행각에 닉은 곤란한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시선을 느낀 에드먼드가 “흠흠.” 마른 목을 긁었으나, 나는 찰거머리라도 된 양 자세를 유지했다.
* * *
거리는 어느새 주홍빛 노을이 넘실넘실 저물었다. 한바탕 쇼핑을 마친 나는 사은품으로 받은 상자를 만지작댔다.
“동네 인심이 확실히 좋네요. 서비스도 이렇게나 많이 챙겨 주고 자주 와야겠어요.”
“그야 값을 두 배로 치렀으니까. 생각이라는 게 있으면 뭐라도 챙겨 줘야지.”
“그래도 이건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라던데. 저기 먼 이웃 나라에서 몰래 들여온 거라잖아요.”
“그래 봤자 씨앗 정도겠지. 뭐 얼마나 대단한 걸 줬을까.”
“하여간 감성이 메말랐다니까. 씨앗이라도 준 게 어디예요. 누가 뭐 주면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고 넙죽 받아야지. 그래야 주는 사람도 신나고 받는 사람은 더 신나죠.”
잇단 잔소리에 에드먼드의 눈초리가 날카로웠다. 이따금 으르렁대는 입술에선 전에 없던 짜증마저 느껴지던 그 순간.
-더 신나죠! 더 신나죠!
열린 상자 사이로 빼꼼, 모습을 비춘 지렁이 인형이 놀리듯 내 말을 따라 했다.
“거봐요, 얘도 그렇다잖아. 내가 틀린 게 아니라니까? 근데 이거 진짜 귀엽다, 그렇죠?”
“…….”
“치, 아니면 말고.”
구겨진 남편의 눈살을 보며 나는 곧장 꼬리를 내렸다. 제멋대로 울어대는 인형을 처박듯, 상자에 넣은 건 덤이었다.
“필요한 건 얼추 다 샀고…… 이제 집으로 갈까요? 하하.”
힐끔, 노을을 살핀 나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시간이 시간인 만큼 어서 집으로 돌아가 폭죽 제조에 힘을 쏟아야 했다.
“여보? 집에 가자니까요?”
이어진 채근에도 에드먼드는 답이 없었다. 그저 성난 거북이처럼 입을 꾹 다문 채 눈을 치켜떴다.
말을 하라고, 말을.
“여보, 왜 그러고 있어요? 방금 내가 한 말 때문에 그래요? 그냥 말이 그렇다는……!”
마지막 남은 인내심을 쥐어짜 내며 다정하게 묻던 그때였다. 삽시간에 거리를 좁혀 온 그가 내 허리를 순식간에 붙들었다.
“그래서.”
달라진 상황에 나는 눈만 멀뚱멀뚱 굴렸다. 손에 쥔 상자는 아슬하게 걸렸고, 살짝 벌어진 입술은 놀란 가슴을 대변했다.
“그렇게 실실 웃어 줬나?”
“그게 무슨……?”
엉뚱한 에드먼드의 말에 나는 바보처럼 되물었다. 그에 따라 마디 굵은 남편의 손끝이 간질이듯 뺨과 턱을 훑었다.
“내가 분명 아무한테나 웃어 주지 말라고 했을 텐데.”
잔잔하던 붉은 동공이 깊어질수록 숨이 턱턱 막혀 왔다. 부푼 뺨 위로 간질거리듯, 손길이 닿을 때면 마수에 걸려드는 순진한 어린 양이 된 것 같았다.
갑자기 이렇게 집착한다고? 설레게? 잠 못 자게? 생각나게?
그런 나를 비웃듯, 에드먼드는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순식간에 거리를 벌렸다.
“간단하게 목 좀 축이지.”
에드먼드는 짧게 말하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앞장서 걸었다. 반쯤 혼이 나간 나는 멀뚱히 자리를 지켰다.
역시, 500년 묶은 폭스 녀석인 게 분명하다.
* * *
“같이 가자니까 꼭 그렇게 혼자 가죠? 당신은 다리가 길어서 어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짤막한 다리로 쫓아가는 게 얼마나 버거운데요.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고요.”
잇단 툴툴거림에도 에드먼드는 남다른 기럭지를 자랑하며 자리에 앉았다. 곧장 종업원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입술을 달싹이며 다가왔다.
“주, 주문하시겠어요?”
얼굴이 파랗게 질린 걸 보아, 말로만 듣던 랜돌프 공작의 출연에 잔뜩 겁을 먹은 모양이다.
“의외겠지만 공작 부부도 가끔은 이런 곳에 온답니다.”
얼어붙은 점원을 향해 나는 부러 시답잖은 농담 따위를 건네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아…… 네.”
“그러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아요. 보기보다 우리 공작님께서 순한 편이거든요. 아무나 해치지 않는답니다. 어디 보자…… 여기에는 뭐 맛있는 게 있나.”
나는 시선을 돌려 건네받은 메뉴판을 찬찬히 훑었다. 얼추 글을 익혀서인지 어렵지 않게 주문할 수 있었다.
“얼음 동동 띄운 체리 주스랑 또…… 여보는 뭐 마실 거예요?”
“난 물.”
아나, 이 새끼가.
나는 구겨지는 미간을 애써 펴가며 어색하게 웃었다. 불안한 내 동공이 점원과 에드먼드를 번갈아 살폈다.
“이이가 농담을 참 잘해요. 하하하…… 당신도 참. 여기 맛있는 포도 주스도 있고 에이드도 있고, 더 나아가 위스키도 있는데 물을 먹겠다고요?”
에드먼드는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냥 같은 거로 줄래요? 한쪽에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얼음 좀 많이 부탁할게요.”
“물도 두 병.”
에드먼드의 덧붙임에 나는 입술을 아득 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한 체리 주스 두 잔과 생수가 나왔다. 살기를 느낀 점원은 가져온 것들을 내려놓고 부리나케 달아났다.
“진짜 안 마셔요? 지금 말 안 하면, 이거 내가 다 마셔요?”
내 물음에 에드먼드는 대답 대신 생수가 든 유리병을 집었다. 유리병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생수 한 병을 다 털어먹은 그가 상쾌한 신음을 내질렀다.
“주스는 당도가 높아 몸에도 좋지 않을뿐더러 갈증을 더 극대화하지. 건강을 위해서라도 주스나 에이드보단 물이 좋아.”
대단한 건강 전도사 납셨네.
벽에 똥칠하실 듯?
나는 그런 에드먼드를 못마땅히 바라보며 체리 주스에 집중했다. 빛깔 좋은 체리 주스는 예쁜 색만큼이나 맛도 좋았다.
역시 주스는 생과일이지.
한참을 쭙쭙대던 나는 문득 조용해진 주변에 고개를 들었다.
‘아까부터 뭘 저렇게 두리번거리지? 뭐 찾나?’
나는 입에 문 빨대를 잘근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매섭게 번뜩이는 붉게 동공이 마치 주변을 경계하는 포식자 같았다.
“근데 말이에요. 내가 궁금한 게 있거든요? 진짜 중요한 이야기예요.”
거듭된 강조에 듣고 있다는 듯, 에드먼드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말해.”
“혹시 멜빈이랑 이런 데 와서도 물 시켜요?”
동시에 풉, 목을 축이던 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그건 왜 묻지?”
“아니, 이제라도 그러지 말라고요. 직속상관이 물 마시는데 아랫사람이 주스 마시기는 쉽지가 않잖아요.”
“이젠 하다 하다 별걱정을 다하는군. 애초에 당신 말고는 이런 데에 올 일이 없어.”
“뭐야~ 그 말 조금 설레는데? 어디 가서 멘트 배워 오는 거 아니죠? 사람을 들었다가 놨다가 혼을 빼놓는다니까.”
“글쎄. 타고난 재능이랄까.”
이마저 익숙해진 그가 능숙하게 받아쳤다. 그러곤 텅 빈 내 음료 잔을 보며 앞에 있던 체리 주스를 슬쩍 밀어 줬다.
“너무 많이 마시진 마. 배탈이라도 나면 곤란하니까.”
“내가 무슨 어린애인 줄 알아요? 그 정도는 나도 충~분히 조절할 줄 알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만취했었나?”
“어허, 지나간 일로 구차하게 굴지 맙시다. 사람 민망하게 그러는 거 아니에요. 누구에게나 흑역사가 있기 마련인데.”
“지나간 일이라기엔 일주일이 채 안 됐다지, 아마.”
에드먼드의 이죽거림에 나는 조용히 눈을 흘겼다. 무언의 힘겨루기를 하던 나는 에드먼드의 기세에 완전히 눌렸다.
“치, 앞으론 조심할게요.”
작게 툴툴거린 나는 자연스레 힘을 풀고 의자에 기대앉았다. 그러곤 두 뺨을 불만스럽게 부풀리며 잔을 들었다.
“기대하지.”
옆에서 작게 코웃음 치는 에드먼드의 숨소리가 들렸으나 무시했다. 남은 음료를 모두 비울 즈음.
“……랜돌프 부인?”
멀어진 시야 너머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아나……샤?
순간 사람을 잘못 봤나 싶었다. 놀란 눈을 비비고 다시 시선을 맞춰 보았으나 영락없는 아나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