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화
“황, 황실이요?!”
“응, 황실! 이왕 목표를 잡으려면 크게 잡아야지. 고작 귀족 나부랭이로 되겠어?”
“그건 그렇지만…….”
샤샤가 뒷말을 흐리며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손끝을 까딱이며 멀찍이 선 샤샤를 가까이 불렀다. 그러곤 소리를 낮추고 작게 속삭였다.
“원래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가야 하는 거야. 혹시 알아? 그러다 호랑이가 잡아 둔 토끼라도 들고 올지?”
“그게 무슨 이상한 소리세요.”
“그만큼 목표를 크게 잡아야 한다는 말이지. 뜻밖의 수확이 날 수도 있잖아.”
“듣고 보니 또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내 최종 목표는 황실인데 뭐가 있어야 영업을 하지. 뭘 만들어야 잘 만들었다고 소문이 날까…….”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고민을 이어 갔다. 그사이 주변을 정리하던 샤샤가 새로운 화젯거리를 던졌다.
“그러고 보니 요즘 쀼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 알고 계세요?”
“쀼?”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샤샤를 바라봤다. 머릿속엔 돌아선 궁둥이가 둥둥 떠올랐다.
샤샤가 말했다.
“며칠 전부터 갑자기 밥도 먹지를 않고, 좋아하던 쳇바퀴도 안 굴리더라고요. 가시를 삐죽 세우고는 우리에서 꼼짝을 안 하는 데 정말 걱정이에요.”
“쀼도 계절 타나 봐.”
“갑자기 계절이요?”
“바람도 차고 날도 춥고 사랑이 그리워질 시기 아니겠어?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게 괜히 있는 게 아니야. 종족 번식이 돼야 이름도 남기지. 어쩌면 모든 생물체의 뿌리 깊은 본능이랄까?”
“오늘 유독 호랑이 얘기가 잦으시네요.”
“호랑이에 꽂혔나 봐. 이참에 쀼한테도 짝을 구해 줘야……!”
샤샤와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축이던 그때, 머릿속에 번개가 쳤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나는 순금을 찾아낸 아르키메데스처럼 벌떡! 일어나 음흉하게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을 샤샤의 낯빛은 희게 질렸다. 부인께서 저런 표정을 지을 때면, 언제고 일이 난다는 사실을 이제는 모두가 안다.
“왜, 왜 또 그러세요? 무섭게.”
“페로몬! 페로몬 향수가 있었는데, 와 내가 그걸 깜박했네.”
“페, 페로몬이요?”
“그래, 페로몬! 씨족 사회에서 제일 중요한 게 그건데 괜히 멀리서 찾았잖아.”
그게 무슨 말이냐며 샤샤의 표정이 곧 울상으로 변했다. 무슨 일을 꾸리는 건 좋지만 제발 마음의 준비라도 할 수 있게 해 주면 좋겠다, 샤샤는 소망했다.
“봐 봐, 모리 부인께서 예뻐 보이려는 이유가 결국 뭐야?”
“음…… 자기만족?”
“아니지. 좀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잖아. 내면을 봐, 내면을.”
“재, 재혼?”
“그럼 그 많은 귀부인이 고슴도치 하나 보겠다고 나를 찾아오는 이유는 또 뭐야?”
“아무래도 아이를 가지고 싶어서죠? 영물인 쀼가 자식 운을 가져다준다고 했으니까요.”
“그래! 결국, 그 둘의 공통점은 이성을 유혹하는 거라고. 이성을 유혹해야 재혼도 하고, 이성인 남편을 유혹해야 아이도 가질 거 아니야.”
“엄…… 아무래도 그렇죠?”
“그럼 이성을 홀린다는 페로몬 향수는 얼마나 인기가 좋을까?”
깨달음을 얻은 샤샤의 입술이 맥없이 벌어졌다. 나는 그런 샤샤를 향해 코끝을 찡그렸다.
“이제 좀 감이 와?”
“부인께서는 정말 천재세요. 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시는 건지, 매일매일 놀라워요.”
매번 듣는 소리에 나는 말 대신 손을 휘적거렸다. 그러곤 펜과 종이를 가져와 필요한 것을 적어 나갔다.
“우선 베이스로 할 라즈베리랑 장미. 프래그런스 오일은 당연히 없을 테니까 향유로 만들 허브를 종류별로 사 오고……. 용연향이 있으면 좋겠는데 그것도 당연히 없겠지?”
“혹시…… 저한테 물으시는 건가요? 저는 부인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모르겠어요.”
“음, 그럴 리가. 혼잣말이야, 혼잣말. 나도 양심이라는 게 있는데 바랄 걸 바라지.”
나는 옅게 미소 지으며 메모를 이어갔다. 이 정도면 완벽한 페로몬 향수를 구현하기는 어렵겠으나, 얼추 흉내는 낼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나가기에는 시간이 늦었고, 내일 동트면 아침 일찍 다녀와야겠다.”
홀로 중얼거린 나는 창문 밖을 바라봤다. 푸르렀던 하늘은 어느새 붉은 노을이 너울너울 저물었다.
* * *
그날 밤, 침실.
“내일 외출을 하겠다고?”
갑작스러운 통보에 에드먼드는 메고 있던 타이를 느슨히 풀었다.
“응! 필요한 게 좀 있거든요.”
복잡한 제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클로엔은 두 눈을 깜박거리며 천진하게 답했다.
“글쎄. 나는 되도록 사용인들을 시키면 좋겠는데.”
잠시 고민한 그가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최근 랜돌프에 대한 황실의 경계가 삼엄해졌을뿐더러, 주변을 맴돌던 아메트린 마법단 역시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다. 와중에 외출을 감행하겠다니 걱정이 앞섰다.
“사용인들을 시켜도 되지만, 아무래도 내가 직접 보고 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마. 필요한 걸 적어 두면 닉에게 서신을 보내도록 하지.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알아서 질 좋은 물건을 선별해 보낼 거야.”
이어진 답변에 클로엔은 도리,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더니 미간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조금씩 거리를 좁혀 왔다.
“내가 직접 가고 싶어요.”
“난 원하지 않는다면?”
이에 질세라 에드먼드 역시 한 발짝 거리를 좁혀 왔다. 불과 몇 시간 전, 애정 넘치던 부부의 눈에 스파크가 일었다.
“랜돌프 경, 투자자라고 제 사업을 왈가왈부하지 말아 주시겠어요? 남의 눈 말고,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싱싱하고 좋은 물건을 고르고 싶거든요. 이건 아내 말고 동업자로서 이야기드리는 겁니다만.”
“나 역시 남편이 아니라, 투자자로서 동업자의 안위를 신경 쓰는 거라면?”
“아니, 어느 미친놈이 대 랜돌프 가문의 공작 부인을 건드려요. 정신이 나가지 않은 이상. 이건 명백한 과잉보호라고요.”
“몇 달 전 마차 사고로 죽을 뻔한 거, 벌써 잊었나?”
질문을 던진 에드먼드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한음 한음 곱씹는 저음의 목소리에 전에 없던 분노가 깔렸다.
왜 저렇게 진지해.
힐끔, 눈치를 살피던 나는 손사래 치며 대답을 이어 갔다.
“그거야 단순한 사고일 뿐이잖아요. 마차가 고장이 나서……!”
“사고가 아니라면?”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남편의 시선을 마주한 순간, 나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사고의 원인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단순히 마차 결함일 거라 그렇게 치부했다.
얘 설마…… 공공의 적이야?
나는 불안한 동공을 이리저리 굴리며 미간을 구겼다. 이제 좀 인생이 펴려는 데 허망하게 갈 수는 없다.
그렇다면 결론은, 든든한 조력자를 앞에 세울 수밖에.
“혹시…… 누군가 날 노리고 있다는 말이에요?”
힐끔, 주변을 살핀 나는 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그에 따라 단조로운 에드먼드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확실하지는 않아. 하지만 사고 현장에서 당신 외의 다른 누군가의 흔적이 나온 건 맞아.”
“히익?”
나는 놀란 승모근을 잡아당기며 질색했다. 그러곤 무서운 광경을 보기라도 한 듯, 남편의 등 뒤에 바짝 붙었다.
“뭐, 뭐 하는 거지?”
“아무래도 난 조그마니까 당신 뒤에 숨으면 안 보이지 않을까요? 어디선가 날 노리고 있으면 어떻게 해요.”
“랜돌프의 경비가 그리 허술하지는 않아.”
“사람 일 모르는 거잖아요. 우리가 더 붙어 있어야 하는 합당한 이유가 생긴 거라고요.”
나는 부러 얼굴을 빼꼼 내밀며 에드먼드와 시선을 맞췄다. 허무맹랑한 내 말에 심각하던 분위기가 조금은 풀렸다.
“곧 죽어도 나가지 않겠다는 말은 안 하지?”
에드먼드가 부푼 뺨을 살짝 잡았다 떼며 핀잔을 놨다.
“나한테는 든든한 보호막이 있는데요, 뭘.”
“아, 나를 미끼로 쓰겠다?”
“딱히 그렇다기보다는 건장한 여보랑 있으면 한결 안전하다, 이 말이죠. 그리고 죽이려고 했으면 진작 죽였겠죠. 헤슈턴과의 경합 때라든가, 지난 파티에 혼자 있을 때라든가. 기회가 얼마나 많았었는데.”
말과 달리 옷깃을 잡은 손이 달달 떨려 왔다. 무슨 업보를 지고 다녔는지 모르니, 공격의 대상도 불특정 다수인 셈이다.
“하, 하나도 안 무서워요. 나는 짱 센 클로엔 랜돌프니까.”
나는 불안한 입술을 달싹이며 시선을 돌렸다. 허세를 부리는 혀와 달리 굳은 몸은 불필요하게 정직했다.
휴, 순간 머리 위로 낮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커다란 손바닥이 부드러운 머리칼을 느리게 쓸어내렸다. 닿은 온기에 불안한 감정이 조금은 진정됐다.
“내일 외출은 함께해.”
들려온 말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잔뜩 구긴 표정과 달리 에드먼드의 시선 속엔 짙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