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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남편과의 이혼을 거부합니다 (103)화 (103/107)

제103화

이른 아침, 저택에서 나온 우리는 곧장 마차로 향했다. 앞에는 미리 대기 중이던 사용인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멜빈이 말했다.

“어제 말씀하신 림보르기니 2호입니다. 대장장이 말로는 코끼리가 와서 때려 박아도 끄떡없을 거랍니다.”

익숙한 호칭에 나는 넋을 놓고 바라봤다. 화려한 외관은 물론 코끼리도 울고 갈 튼튼한 뼈대는 멀리서도 빛이 났다.

“필요한 게 뭐라고 했지?”

이어진 물음에 나는 서둘러 표정을 지웠다. 그리고 미리 적어 둔 메모지를 남편에게 건넸다.

“라즈베리랑 장미, 백합 그리고 허브도 엄청 많이 필요해요. 증류수를 뽑아내야 하거든요.”

잠시 고민하던 그가 멜빈을 향해 무어라 지시했다. 그러곤 자연스레 옆자리에 착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타고 있던 마차 바퀴가 느리게 굴렀다.

“그래 봐야 요 앞 베델른 광장에 가는 건데, 뭘 이렇게까지 준비했어요. 다들 힘들게.”

나는 부러 툴툴대며 에드먼드를 나무랐다. 말과 달리 벌어진 입꼬리를 감추기 어려웠으나 아무튼 그랬다.

에드먼드가 말했다.

“도착하는 데까지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응? 시간이 좀 걸리다니요? 광장까지는 10분 거리잖아요.”

“싱싱하고 질 좋은 물건을 사고 싶다며. 그럼 산지로 직접 가야지. 겸사겸사…… 데이트도 좀 하고.”

내심 부끄러운지 에드먼드가 뒷말을 흐리며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툭툭, 널찍한 어깨를 두어 번 치며 흘리듯 말했다.

“피곤할 텐데 눈 좀 붙이든지.”

남편의 적극성에 나는 소리 없이 웃음을 삼켰다. 무심히 툭툭 던지는 말들이 얼마나 심장을 아프게 하는지 그는 모를 거다.

“안 그래도 피곤했는데 조금 신세 질게요.”

나는 팽창하는 코 평수를 부여잡으며 살포시 몸을 기댔다. 불끈불끈한 이두박근을 마주하자니 절로 두 눈이 감겼다.

* * *

“하암~ 림보르기니라더니 승차감 진짜 끝내주네.”

잠에서 깬 나는 졸린 눈을 비비적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이곳은 대체 어디인지, 창밖은 온통 풀밭이었다.

“흠…… 얼마나 온 거지.”

힐끔 살핀 에드먼드 역시 단잠에 빠진 모양이다. 지그시 감긴 두 눈은 미동이 없었다. 조심스레 몸을 움직인 나는 창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으음, 프레시한 자연의 냄새.”

사뭇 달라진 공기에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선선한 가을바람을 느끼려 몸을 일으켜 손을 뻗던 그때였다.

덜컹!

장애물에 걸린 마차 바퀴가 크게 휘청였다. 덕분에 종잇장 같은 내 몸은 속절없이 흔들렸고.

“지금 뭐, 뭐 하자는 거지?”

최종 도착지는 에드먼드의 무릎 위였다. 하얗던 피부가 순식간에 달아올랐고, 마주한 시선 역시 속절없이 떨려 왔다.

“아니, 그러니까 그게 내가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전혀 아니고 그냥 좀 균형을 잃어서.”

나는 두 팔을 버둥거리며 일어나려 애썼다. 하지만 덜컹거리는 마차 덕분에 그마저 쉽지 않았다. 애를 쓰면 쓸수록 어째 균형이 더 쏠렸다.

그 순간, 와락. 에드먼드의 두 팔이 내 허리를 단단히 감쌌다. 졸지에 몸이 묶인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편을 바라봤다.

“에드……먼드?”

“흠흠, 차라리 지금은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것 같군.”

에드먼드가 마른 목을 가다듬으며 시선을 회피했다. 숨은 뜻을 알아차린 나는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그러곤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엄……. 여기 진짜 좋은 거 같아요. 원래도 공기가 맑지만, 훨씬 더 청정한 느낌이랄까?”

“도심에서 한참 벗어난 곳이니까. 곧 도착할 거야.”

“아~ 그렇구나.”

설렁하게 대답한 나는 능구렁이처럼 몸을 기울였다. 널찍한 품에 머리를 가져다 대자 쿵쾅대는 심장 소리가 고스란히 들렸다.

이게 사람 사는 거지.

조용히 눈을 감은 나는 더없는 늪에 빠졌다. 허리를 두른 팔에 힘이 들어갔다.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그가 손을 들어 천천히 토닥였다.

그렇게 얼마나 더 갔을까, 도착을 알리는 마부의 알림에 나는 감은 눈을 떴다.

동시에 “와……!” 벌어진 입술에서 환호성이 나왔다. 드넓은 평지 위로 각양각색의 꽃과 나무가 자리했다.

에드먼드가 말했다.

“파라마라 꽃시장이야. 쌍둥이 형제가 운영 중이지. 형인 파라가 꽃을 팔고, 동생인 마라가 분재를 팔아.”

그렇게 진지하게 말한다고?

나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삼키며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러면서 휘적휘적 걸음을 내디뎌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갔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랜돌프 공작님 아니신가요.”

멀리서 허름한 차림의 중년 남자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러곤 허리를 기역 자로 꺾으며 연신 고개 숙였다.

에드먼드가 말했다.

“오랜만이군, 파라. 손님들이 전보다 는 것 같군.”

“다 공작님께서 주변을 정리해 주신 덕분이죠! 심심하면 오던 도적 떼 놈들이 요즘에는 얼씬을 안 합니다.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클로엔 랜돌프예요. 랜돌프 가문의 안주인이자, 공작님의 아내랍니다.”

이어진 물음에 나는 해사하게 웃으며 답했다. 겁을 줄 마음은 없었으나, 공손했던 파라의 허리가 새우처럼 굽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작 부인. 저는 파라마라 꽃시장의 주인인 파라블러섬이라고 합니다. 편히 ‘파라’라고 불러 주십시오.”

“나도 반갑……!”

“전에 이야기했던 물건들은?”

순간 손을 내밀던 나를 제치고 에드먼드가 말했다. 나는 민망해진 오른손을 살포시 내리며 대화에 집중했다.

“보관이 쉽지 않다 보니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도 최대한 하는 데까지 해 봤으니 살펴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곧장 안내할까요?”

파라의 물음에 에드먼드가 손을 가로저으며 말했다.

“일단 다른 거 먼저 보지.”

“혹,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오늘은 나 말고 내 아내가 필요한 게 있어서 말이야.”

“오! 그러십니까? 부인께서도 꽃에 관심이 많으신 모양입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부인께서 어떤 걸 필요로 하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는 파라마라 꽃시장입니다.”

집중된 이목에 나는 활짝 미소 지으며 가져온 쪽지를 건넸다. 내용을 살핀 파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즈베리랑 장미…… 그리고 허브? 조금 생소한 조합이네요. 하지만 저희 파라마라에는 없는 게 없죠. 필요하신 양을 말씀해 주시면 곧장 준비하겠습니다.”

“각각 100개씩. 갓 따온 신선한 친구들로 부탁해요. 허브는 여기 있는 종류별로 모조리 주고요.”

“모, 모조리요? 하지만 당장 납품하기로 한 물건들이…….”

화통한 주문에 파라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곤란한 반응에 나는 남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러곤 절박한 얼굴로 눈을 반짝였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세 배.”

“……세, 세 배요?”

“정확히 세 배 더 줄 테니까, 모조리 팔아. 물건 질이 괜찮으면 앞으로도 쭉 거래하고.”

그 말에 이견이 없다는 듯, 에드먼드는 파라를 향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 잠시 계시면 곧장 준비하겠습니다! 싱싱한 아이들로 준비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상황을 인지한 파라가 왔던 것처럼 뛰어갔다. 멀어지는 그림자를 보며 나는 조용히 손을 가로저었다. 그 모습을 보던 에드먼드가 팔짱을 끼며 물어왔다.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듣고 있어요. 허브를 세 배씩이나 주고 사시는 화통한 공작님.”

“그러라고 그런 눈으로 본 거 아니었나?”

“그래도 세 배는 너무했죠.”

시큰둥한 내 반응에 에드먼드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더니 괜한 목을 가다듬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번에는 또 뭘 하려는 거지? 그 많은 걸 어디에 쓰려고.”

“음…… 인류 증진을 위한 하나의 획기적인 발명품? 욕망덩어리 그 자체랄까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에드먼드의 표정이 보기 싫게 구겨졌다.

“완성되면 가장 먼저 여보한테 선보일게요. 그러니까 쪼끔만 기다려용.”

나는 그런 남편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윙크를 날렸다. 뒤이어 빈 허공에 “쪽!”하고 소리를 내자, 거뭇한 피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 * *

“어라, 혼자 오셨어요? 공작님은 어쩌시고요.”

출입과 동시에 낭랑한 샤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지친 몸을 늘어뜨리며 자연스레 겉옷을 건넸다.

“응, 볼 일 있다고 나 먼저 들어가래. 저녁 전에는 올 거야.”

“아아~ 그러셨구나. 피곤하시죠. 목욕물 준비해 둘까요?”

“아니, 아니. 난 신경 쓰지 말고 볼일 봐. 필요하면 부를게.”

손을 휘휘 저은 나는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안에는 레틴을 비롯한 사용인들이 저녁 준비에 한창이었다.

“부인께서 여기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저녁까진 시간이 좀 남았는데, 간단한 요깃거리라도 챙겨 드릴까요?”

“아니에요, 레틴. 나 신경 쓰지 말고 할 일들 해요. 그냥 좀 큰 냄비가 필요해서.”

“큰 냄비라면 얼마나 큰 걸 말씀입니까?”

어느새 앞으로 나온 레틴이 두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나는 엄지와 검지를 벌려 레틴 위로 이리저리 움직였다.

“얼추…… 사람 하나 들어갈 정도?”

이어진 답변에 레틴의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퍼렇게 질린 입술이 딱딱 소리를 내며 긴장을 호소했다. 레틴이 말했다.

“그, 그건 어디에 쓰시려고?”

“뭘 좀 찌려고요.”

엄습한 불안감에 꿀꺽, 레틴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곤 체념한 얼굴로 커다란 솥단지를 들고 왔다.

“부, 부인 제가 혹시 무슨 잘못……!”

“오! 딱 좋네.”

안절부절못하는 레틴을 뒤로 한 채, 나는 가져온 솥단지를 깡깡 두드렸다.

“이거 좀 내가 빌릴게요! 고마워요, 레틴.”

나는 레틴을 향해 유유히 손을 흔들며 밖으로 나왔다. 돌아선 등 뒤로 안도에 찬 숨소리가 여기저기 터져 나왔으나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았다.

“아, 옮겨 달라고 할 걸 괜히 내가 한다고 해서. 더럽게 무겁다, 진짜.”

그렇게 한참을 낑낑거리며 냄비와의 사투를 이어 가던 찰나였다. 툭! 드러난 정수리 위로 딱딱한 무언가가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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