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클레어는 정부와 협상을 했다. 정부도 그 협상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트리니티를 먼저 죽여야 합니다. 그들이 우리의 목숨을 끊기 전에.”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결국 부술 수 없는 절대 권력. 그걸 노리는 상대는 절대 용납할 수 없지만, 권력의 기반을 없애려는 자들은 더더욱 용인할 수 없다.
정부와 혁명군은 트리니티에 대항하기 위해서 손잡기로 했다.
▣ 010. 능력 부족은 죽음과 직결된다
두 번째 방송을 통해 은우는 아임휴먼의 결말만을 남겨 두었다. 절묘한 방종에 사람들의 애간장이 끓는 건 당연지사였다.
덕분에 세 번째 방송은 시작부터 5만을 찍고 시작했다. 어떤 게임이든 결말부를 방송할 때는 해당 게임 구매자만이 시청 가능한 점을 떠올리면 엄청난 수였다.
물론 은우는 그게 어떤 의민지 잘 몰랐다. 그의 유어튜브 구독자 수가 십만을 돌파했다는 것의 의의조차 모르는데 이것을 알 리 없다.
“비하, 유하. 안녕하세요. 다이아박스 소속 스트리머, 켄입니다. 원래 보셨던 분들, 새로 오신 분들 전부 반갑습니다.”
기철이 당부한 대로 소속을 강조한 그는 바로 게임을……!
켜지 않았다.
딱히 시청자들을 모을 시간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다만 너무 빨리 시작해서 시작 장면을 놓쳤다는 사람들을 배려하기 위함이었다.
“10분 후에 게임 시작하겠습니다. 그동안 대기실 좀 꾸밀게요.”
대기실 꾸미는 것마저 콘텐츠라던가. 은우는 과연 사람들이 좋아할까 반신반의하면서 말했다.
그러자 채팅 창에 반응이 실시간으로 올라왔다. 게임 빨리하라고 아우성치는 사람 반, 안 그래도 대기실 바꿔 주고 싶었다는 사람 반이다.
과연 경험자는 다르구나. 그는 기철의 지략에 감탄하며 대기실 변경 모드를 켰다.
어쩔 수 없이 기다리게 된 사람들이 이번엔 각자의 의견을 피력했다. 이렇게 꾸며라, 저렇게 꾸며라. 그냥 흰색만 피하려던 은우의 입장이 난처해졌다. 심지어 후원을 통해 지시하는 이들도 있었다.
“여기가 낫습니까?”
─ㅇㅇㅇ
─ㄴㄴㄴㄴ
─그거 말고 다른 가구 놓죠?
─뭐래ㅋㅋㅋTV가 국룰이지
─여기서 볼 일도 없는데 뭔 TV임
사람들의 의견이 판이하게 갈리자 은우는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약간의 고민 끝에 그가 결정한 건 초기화다.
후원한 이들한테는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이러다간 끝이 안 날 것 같다. 시간도 아슬아슬하고.
“그냥 제 맘대로 하겠습니다.”
─ㅋㅋㅋㅋ결국ㅋㅋㅋㅋ
─이렇게 9분이 날아가고ㅋㅋㅋ
─솔직히 훈수두는 놈이 너무 많음ㅋㅋㅋ
─지금 시청자수 6만입니다. 고민할 만합니다 lol
─완전 머기업이자너ㅋㅋㅋ
은우는 기본으로 제공되는 맵 중에서 멸망한 세계를 골랐다. 사람들이 사라지고 방치된 마천루의 숲이 진짜 초목들로 뒤덮인 맵이었다.
거기에 콘크리트 기둥을 대충 의자나 탁자처럼 배치했다. 제법 만족스러운 형상이었다.
“이제 게임 시작하겠습니다.”
─너무 대충이잖앜ㅋㅋㅋㅋ
─켄의 취향 잘 알았습니다. 메모합니다wwww
─저런 거 좋아하는 거냐구ㅋㅋㅋㅋ
─과연 학살좌ㅋㅋㅋ살풍경한 맵을 골랐음ㅋㅋㅋ
“학살좌 아닙니다.”
불만을 담아 웅얼거리니 사람들이 학살좌란 단어를 쫘르륵 꺼내 들었다. 아무리 봐도 놀리는 태도였다.
은우는 그냥 게임이나 하기로 했다. 부정하기엔 안타깝게도 근거가 없었다.
그렇게 시야가 뒤바뀌고, 조금 익숙해진 아임휴먼의 배경이 쫙 깔렸다. 이제는 많이 변화한 트리니티의 기지다.
은우가 얻어 온 비리를 전역에 알린 까닭에 현 정부는 민심을 잃었다. 혁명군 역시 명분을 상당수 빼앗겨 세력이 많이 줄었다.
그로 인해 두 세력은 힘을 합친 상태고, 트리니티와 시민군은 대항해서 교전을 벌이고 있다.
은우가 이제 해야 할 일은 알렉스 부대와 함께 대통령의 관저로 숨어드는 것이니. 클레어를 죽이고 대통령을 생포하면 끝이다.
“켄, 당신밖에 없어요. 알렉스를 부탁할게요.”
“…이제 고지가 코앞이다. 너를 믿겠다.”
어제 플레이하며 조금 친해진 캐서린과 알렉스가 묵직한 말을 내뱉었다. 파트너도 평소와 달리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그게 꼭 전생의 어느 순간을 상기시켜, 은우는 기분이 묘해졌다.
전생에서도 출전할 적이면 시민들이 저런 얼굴이었지. 그를 응원하고 신뢰하면서도 살아 돌아오기만을 기원하는 얼굴.
반면 알렉스는 사지로 같이 걸어가던 동료와 비슷한 얼굴이다. 처지가 비슷해서 그런 걸까. 그게 불쌍하다가도 소름 끼친다.
게임이지만 표정 하난 참 잘 만들었다.
“걱정 말라고 해 주고 싶네요.”
─ㅇㅈㅋㅋㅋㅋㅋ
─켄을 왜 걱정해ㅋㅋㅋ
─사신이 간다...!
─켄은 걱정받지 않아도 되는 남자입니다
─뭐어?! 켄을 걱정한다고?! 혁명군이랑 정부가 아니라?!
그렇다고 저런 반응이 좋은 건 아니다.
은우는 채팅 창을 살짝 흘긴 후, 출정 준비를 했다. 본래는 정비사에게 가서 몸체를 강화해야 하나, 그는 미션에 매인 몸이라 불가능하다.
아무렴, 끝까지 강화 안 하고 깨면 얻을 수 있는 돈이 총합 6백만 원이었다. 미션 걸리기 전에 강화한 것까진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 안 하면 저 돈이 고스란히 지갑에 들어오는 거다.
“마지막 미션, 시작합니다.”
무엇보다 진행하면서 새로운 무기들이 추가되었다. 그것만 있다면 그는 어떤 미션도 돌파할 자신이 있었다.
* * *
시작은 지하 수로를 통과하는 것이다.
은우는 수로에 입장하자마자 칼질을 했다. 감시 카메라와 레이저를 겸하는 경보 장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저러면 안 걸려요?
─어제 방송에서 해킹템 득했음 ㄱㅊ
─그거 들고 다니면 발각되도 침입경보는 안 울림ㅋㅋ 레이저는 발사되지만ㅋㅋ
─안드로이드가 친구들 소환하는 것도 못 막음ㅋㅋ
채팅의 설명대로 감시 카메라는 막아 주지만, 레이저나 안드로이드는 못 막는다.
그래도 큰 문제는 아닌 게, 레이저는 잘라서 떨구면 되고 정찰 안드로이드는 동료 소환 전에 죽이면 된다.
뒤에서 알렉스 부대가 따라왔다.
서걱!
은우의 검이 코너를 막 돌던 안드로이드의 몸을 양단 내었다. 인간형 안드로이드가 아닌 사냥개 형태의 안드로이드다.
잽싸긴 하지만, 딱 그것뿐. 몸이 가늘어서 베기가 쉽다.
은우는 추가로 몰려오는 개들을 총으로 쏴 죽이고 검으로 베어 넘겼다. 개들은 처음부터 떼거리로 나오는 대신에 친구를 부르지 않아 좋다.
─ㅋㅋㅋ알렉스 울어욧!!
─버리고 가버리는 켄좌ㅋㅋㅋ
─방해만 된다 이건가...!
─알렉스 부대 ㅈㄴ 편하게 오네ㅋㅋㅋㅋ
그 사이, 은우가 알렉스 부대를 두고 혼자 이동하는 걸 보며 시청자들이 뭐라 떠들었다.
“잘 따라오고 있습니다. 느려서 그렇지.”
파삭.
와이어가 연결된 단검이 카메라를 부수자마자 도로 회수됐다. 그가 얻고 나서 제일 편해졌다 여기는 무기다.
10분을 더 돌아다닌 끝에 지하 수로와 연결된 비밀 연구동에 도착했다. 대통령 관저 아래에 마련된 연구동이다.
즉, 이곳을 통과하면 대통령과 클레어를 만날 수 있다.
클레어는 죽이고 대통령은 생포였던가. 그는 목적을 다시 한번 상기하며 안드로이드의 목을 쳤다. 달음박질하는 다리는 기이할 정도로 발소리가 작다.
“지금, 연구동에─!”
알림은 안 되지. 은우는 감시 카메라에 나이프를 던짐과 동시에 경비의 팔을 베었다.
15세 게임인지라 안드로이드와 달리 인간의 몸은 잘리지 않는다. 단, 무전기를 놓치게 만드는 건 가능했다.
서걱!
부드럽게 검로를 꺾어 목을 벤다. 그리고 아까 던졌던 나이프를 회수한다.
손으로 되돌아오기 무섭게 단검이 허공을 또 한 번 갈랐다. 막 달려오던 안드로이드의 미간에 작은 검날이 박혔다.
은우는 한시도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건너편에서 개 떼가 몰려올 때는 몇 알 챙겨오지 않은 수류탄을 바닥에 굴리며 한쪽 벽으로 몸을 틀었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벽을 밟고 달린 몸이 개 떼를 지나친 후 다시 바닥에 내려섰다.
퍼엉!
폭발과 함께 개들이 몰살당했다.
─아아ㅠㅠㅠ 인간이 미안해ㅠㅠㅠ
─켄이 미안해ㅠㅠㅠ
─잠깐 치킨 차리는 사이에 지하수로 돌파했엌
─알렉스는 어디갔나요?
─치킨 맛있겠다ㅠ
─켄 인성 인간 아님
시청자들의 누명에 그는 조금 억울해졌다. 안 해치우면 성가셔지는데 어쩌라는 건지. 공부를 위해 다른 스트리머 영상 볼 때부터 알았지만, 사람들 참 빌미잡는 거 좋아한다.
“적을 죽였을 뿐인데…….”
─응, 아니야
─응, 개는 죽이면 안 돼
─과몰입충 ㄴㄴ
─켄 억울해하는거 왤케 귀엽누ㅋㅋㅋ
항변해 보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은우는 사실 적시를 포기했다.
그는 대신 계속해서 나아갔다. 연구동에서 관저로 넘어가는 긴 통로가 나왔다. 알렉스 무리는 어디까지 왔는지 알 수가 없다.
그때, 통로에 있던 한 무리가 그를 발견하고 황급히 턴했다. 아마 비밀통로로 빠져나가려던 대통령과 클레어일 것이다.
잡았다. 은우가 맹렬하게 달리고, 무리가 다시 통로를 빠져나갔다. 남은 건 미니건을 든 안드로이드였다.
투투투투투투!
총알이 통로를 벌집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속도는 느렸다. 미니건을 설치할 시간이 없어 손에 든 채로 발사하는 탓이다.
저렇게 되면 안드로이드들이라도 획획 돌리지 못한다. 앞선 임무들로 알아낸 지식이었다.
그는 그 점을 십분 활용했다. 복도를 지그재그로 이동하는 식으로 총알을 피한 것이다.
벽면에 다다르면 벽을 밟고 떠오른 후 저편으로 넘어가 다시 총을 피해 달린다. 이러면 그가 있는 쪽으로 총구를 돌리려 할 테고, 그는 그쪽 벽을 차 반대쪽으로 재차 이동하면 된다.
“어림도 없지.”
─킹림도 없지!
─강화 단계도 낮은데 이게 가능함??
─최고속도를 내면서도 저 좁은 통로에 부딪히지 않고 달리다니, 당신은 대단합니다.
─그냥 인간 아님
─진짜 적들 개무섭겠다ㅋㅋㅋㅋ
중도에 수류탄을 던지거나 칼을 던지는 수도 있지만, 은우는 구태여 끝까지 달렸다.
그리고 미니건 앞에 도달했을 때, 그는 그 위로 점프하며 안드로이드의 가슴을 찔렀다.
“기술이 발전하면 뭐 해. 다루는 게 인간인데.”
─정보) 안드로이드다
─정보) 켄 앞에선 안드로이드도 인간이다
─평-등
─편-안
은우의 중얼거림에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사이, 그는 다시 발을 박찼다. 어느새 꺼내든 와이어 단검이 그의 손에서 붕붕 돌아갔다.
콰앙!
문을 발로 쳐 낸 후 입장하자마자 손에 스냅을 주었다. 연결된 와이어에 따라 회전하던 칼날이 기습하려던 적의 목울대를 정확히 베었다.
그 상태에 은우는 뱅글뱅글 돌리다가 다시 한번 스냅을 주어 좌로 그었다. 순식간에 덤비던 적들이 죽음을 맞이했다.
후우우우웅.
단검을 매단 와이어가 사납게 돌아가고, 은우는 경호 안드로이드들을 처치하며 나아갔다.
그가 지하 수로를 통해 들어온 곳이 유일한 탈출 통로이므로 이제 클레어와 대통령은 독 안에 든 쥐다. 정문으로 나가고 싶어도 그곳엔 시민군이 버티고 있으니 불가능할 거다.
“발포.”
대통령 집무실을 앞두었을 때, 마지막 반격이 시작되었다.
두두두두!
네임드 적인 ‘가스터’와 두 부하의 사격이 가해졌다. 아무리 은우라도 좁고 긴 공간에서 간격 없이 직선으로 쏘아지는 총탄을 피할 순 없다. 그는 다시 복도로 나왔다.
가스터. 대통령의 경호실장으로서 단일 개체로선 가장 강하다 평가받는 안드로이드다.
유탄에 맞지 않는 이상 뚫리지 않는 에너지 막을 둘렀다는 게 게임 속 정보. 혁명군 루트를 따라가도 대적할 수 있어서 악명이 높다는 게 채팅 창 속 정보다.
은우는 총알이 벽을 뚫지 못하는 것에 감사하며 채팅 창을 슬쩍 확인했다.
─미친 저걸 어케 잡어;;
─수류탄 같은 거 던져넣으면 될 것 같긴 한데....
─수류탄 써도 한두 개론 안 될듯. 쟤네 전부 막 두르고 있음
─난이도 미츳나ㅋㅋㅋ 진짜 더럽게 나오네ㅋㅋㅋ
─아니면 알렉스 부대 기다려야하는 거 아니냐?
─오 그럴 수도
다들 수류탄을 써야 한다 또는 알렉스 부대를 기다려야 한다 쪽으로 의견이 쏠려 있다. 수류탄이야 넉넉히 남아 있지만, 쓰자니 어딘가 꺼림칙하다. 알렉스 부대는 더더욱 그렇다.
「‘MABY’ 님이 ‘10,000원’ 투척!
수류탄 없이 가스터 잡으면 10만 원.」
그때, 미션이 걸렸다. 은우는 검 자루를 쓰다듬었다.
「‘우나우나쟌’ 님이 ‘10,000원’ 투척!
묻고 알렉스 부대 오기 전에 처리하면 20만 원.」
이건 가야지. 은우는 헬멧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연막탄도 안 되겠죠?”
─ㅋㅋㅋㅋㅋ글고보니 연막탄은 얘기 안햇네ㅋㅋㅋ
─ㅋㅋㅋㅋ야 어서 나와봐라ㅋㅋㅋ
「‘강남건물주’ 님이 ‘50,000원’ 투척!
연막탄도 안 쓰고 하면 저기에 30만 원 추가.」
수류탄 금지 미션을 걸었던 이가 나오기도 전에 다른 사람이 나섰다. 이번 전투에만 합산 60만 원이다.
은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역시 쉬운 전투는 재미없지. 그의 손이 들고 있던 수류탄과 연막탄을 전부 내려 두었다. 사람들이 기대 어린 말들을 내뱉었다.
“시작합니다. 숨 조심하세요.”
그 수면 위에 돌멩이를 던진 그는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입구로 던졌다. 문에 위치하되 그의 상체 위치 정도로 높여 던지자 금세 총알 난사가 시작됐다.
그와 동시에 은우는 바닥을 슬라이딩해 들어갔다.
그가 입구를 통과함과 동시에 날려진 단검이 U자형으로 굽어 날아가며 안드로이드들의 총을 정확히 맞췄다. 에너지 막이 혹시라도 단검마저 튕겨 낼까 싶어 맞춘 차선책이었다.
은우는 연이어 와이어로 단검을 회수했다. 총신을 수직으로 꿰뚫은 단검이 연결된 와이어로 인해 강제로 끌어당겨졌다. 단단히 박혀 버린지라 총까지 함께다.
안드로이드들이 저항했지만, 갑작스럽게 가해진 인력은 대처하기 힘든 것이었다. 총이 은우의 뒤편으로 부웅 날아갔다.
다만 가스터에게서는 총을 빼앗지 못했다. 가스터가 단도를 회피해 낸 탓이다.
상관없다. 애당초 악명을 감안해 가스터에겐 일부러 일반 단도를 썼다. 진짜 목표는 떨거지들에게서 총을 빼앗는 것. 목표는 성공했다.
두두두!
가스터가 총을 발사하고, 은우는 바닥을 구르며 와이어를 잘랐다. 움직이다가 총이 끌려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그리곤 제대로 일어나 달려 벽을 박찼다. 어느새 그의 손은 긴 검을 뽑아낸 채였다.
총을 빼앗긴 안드로이드들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지만, 오히려 반가운 일이다.
옆면 유리창 사이로 흘러든 햇빛에 헬멧이 희게 반짝이고, 은우의 사고가 더없이 빨라졌다.
최고의, 최적의 효율을. 군더더기도 없고 쓸모없는 힘 낭비도 없는 최상의 검로를. 기운이 맺히지 않아도 상대를 죽여 버릴, 그런.
헬멧 속 에메랄드 빛깔의 눈동자가 모든 것을 삼켰다. 확장된 감각은 찰나를 또 한 번 쪼개어 만든 시간 속에서 적들을 낱낱이 분해한다.
왼발, 아니 오른발. 첫 휘두름은 조금 느리게, 대신 강하게. 적들의 팔에 칼날이 튀어나왔으니 먼저 쳐 내는 거야. 일섬에 두 개의 팔을 전부.
그다음 춤을 추듯 원을 그려서 허리춤을 베어 내면.
서걱!
두 안드로이드의 몸이 두 동강 났다. 하체와 분리된 상체가 옆으로 스르륵 떨어지는 사이, 은우의 다리는 옆으로 물러났다. 많은 총알이 가까스로 그를 비껴 나갔다.
콰직!
다만 하나의 총탄이 그의 헬멧에 적중했다. 피하던 와중이라 부상으로 이어지진 않았으나, 헬멧 왼쪽 눈 부근이 깨져 나갔다.
그게 은우가 맞은 유일한 공격이었다.
두두두!
옆으로 피하자 옆으로 넘어지는 적의 상체가 방패가 되어 주었다. 사용자가 죽어도 몇 초간 더 지속되는 에너지 막에 총알 튕겨 나가는 소리가 느지막이 들려왔다.
그사이 은우는 검을 역수로 바꿔 쥐며 오른팔을 최대한 뒤로 젖혔다. 마치 창을 던지는 사람처럼.
그리고 방패였던 적의 상체가 떨어지며 가스터가 보였을 때, 그는 그대로 검을 던졌다. 은빛 검신과 티타늄 총알이 교차하며 날아갔다.
타다다당!
가스터의 총알이 은우의 상체를 두들겼다.
퍼억!
은우의 검은 가스터의 머리를 꿰뚫었다.
“후우.”
호흡이 돌아왔다.
은우가 상체는 너덜너덜해졌지만, 방탄복 덕에 죽을 상처는 피했고, 가스터는 가장 중요한 머리가 관통당했다. 체력 바로 표기한다면 은우는 실피, 가스터는 제로인 셈이다.
『도전 과제를 달성함! -가스터 사살』
『숨겨진 도전 과제를 달성함! -도움이 필요 없는』
도전 과제마저 확언해 주었다. 승패는 확실하다.
“미션 성공입니까?”
쓸모를 다한 방탄복을 벗으며 은우는 물었다. 대답 대신 터진 건 후원 알림음이었다.
「‘MABY’ 님이 ‘100,000원’ 투척!
이걸 이렇게 하네??」
「‘우나우나쟌’ 님이 ‘200,000원’ 투척!
알렉스 부대가 필요하긴 한 건가 이 미션?」
「‘강남건물주’ 님이 ‘300,000원’ 투척!
완벽해요ㅠㅠㅠㅠ」
약속된 것은 저 세 사람뿐이나, 후원 알림은 계속 터져 나왔다. 귀가 조금 간지럽다.
은우는 일단 검부터 회수했다. 그가 잘라 버린 와이어 끝 나이프도 챙겼다. 와이어는 더 이상 못 써도 나이프는 쓸 수 있다.
“여러분, 후원 감사합니다. 근데 이거 좀 거슬리네요.”
은우는 총알이 헬멧을 스쳐 지나가며 난 균열을 매만졌다. 흠집은 왼쪽 관자놀이 부분에 길게 이어졌는데, 문제는 앞판 유리에도 금이 쩍 가 버렸다. 오른쪽 시야는 괜찮은데 왼쪽은 영 좋지 않다.
이래선 안 쓴 것만 못하다. 그러나 벗고 싶지도 않다.
은우는 그의 얼굴로 인해 치렀던 곤혹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헬멧을 빌미로 야방까지 생각해 둔 이상─별로 하고 싶진 않지만, 세상일은 모른다─, 절대 사수해야 한다. 선례를 보여야 바깥에서 죽어도 안 벗는 걸 이해해 줄 테니까.
그는 눈을 감은 채 단도로 헬멧 앞 유리판을 쳤다. 힘 조절을 했기에 눈이 찔리진 않았으나, 유리판은 왼쪽 눈가가 깨져 버렸다.
에메랄드 눈동자를 품은 눈매가 아질아질 드러났다.
─그냥 벗지ㅋㅋㅋ왜 굳이ㅋㅋㅋ
─헬멧 빌런이라서 그럼ㅋㅋㅋㅋㅋ
─근데 비주얼이 어디서 본 듯한....?
머리를 털어 유리 파편을 바깥으로 떨궈 낸 그는 이제 마지막 장소로 진입할 준비를 했다.
그의 발이 문을 막아선 채 쓰러진 가스터를 치워 냈다.
쾅!
은우는 문을 발로 깐 뒤 옆으로 굴렀다. 탐지 센서가 미리 잡아 놨던 대로 클레어가 총알을 쏟아 냈다.
“가, 가스터가 뚫린 건가!”
“젠장! 빌어먹을 늙은이! 총이나 쏘라고!”
클레어랑 대통령이 마지막 발악을 하는 모양이다. 은우는 그들의 총질이 멈추길 잠시 기다렸다.
“시발…….”
멈췄다. 은우의 몸이 득달같이 방 안에 입장했다. 안드로이드만 못한 인간의 반응속도는 그에게 총구를 겨누지도 못했다.
은우의 단검이 클레어의 총과 대통령의 손등을 찔렀다.
“커억……!”
타닥.
대통령이 든 총은 바닥으로 형편없이 추락했다. 클레어의 총은 당연하지만 폭발 엔딩이다.
은우는 그런 그들을 보며 집무실 중심에 섰다. 하필이면 그가 선 자리는 구름으로 인해 햇빛이 가려져 어두웠고, 클레어나 대통령이 있는 자리는 빛이 들어왔다.
구도만 보면 악당은 꼭 은우 같았다.
─자, 이제 누가 보스지?
─켄 너무 나쁘게 보입니다.
─누가 악당이야ㅋㅋㅋㅋ
시청자들이 시원하게 웃었다. 은우는 머쓱하게 뒷목을 쓸다가 엉금엉금 기는 클레어에게로 다가갔다.
“어딜.”
클레어가 잡으려던 권총이 은우의 발에 맞아 날아갔다. 은우는 클레어의 뒷덜미를 잡고 그녀를 집무실 중심으로 내던졌다.
“대체, 대체 왜! 대체 왜 내 길을 막는 거야!”
프로그래밍된 대사를 내뱉는 NPC를 보며 은우는 총을 들었다. 문득 떠오르는 말은 그가 새내기 헌터에게 입버릇처럼 건네곤 하던 충고였다. 단 한 번도 어긋난 적 없는 진리기도 했다.
“능력 부족은 죽음과 직결됩니다.”
탕!
클레어의 몸이 그대로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