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내구도도 있습니까?”
─레전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게 엔간하면 잘 안 부서지는데,,,,
─있긴 있음
「‘카를로스’ 님이 ‘10,000원’ 투척!
이렇게 흑우되나 했더니 판 자체가 엎어짐ㅋㅋㅋㅋ」
─보통 보스전 돌입 전에 장비 바꿔서 이런 건 처음 봄;;
─방송감 개쩌신닼ㅋㅋㅋㅋㅋ
「‘이게이렇게’ 님이 ‘1,000원’ 투척!
회복약없이 검없이 채찍으로만 1트 미션의 결과 = 노히트 검없이 싸우다 채찍이 사망」
은우는 본능적으로 유리기사의 공격을 피하며 다시 한번 물었다. 습관된 평정 덕에 여전히 차분하고 침착했으나, 기는 막혔다.
“후원 감사합니다. 근데, 진짜 내구도 다 돼서 부서진 겁니까……?”
─아마도,,,,,?
─이 와중에 회피 신들렸노ㅋㅋㅋㅋ
─검기사에서 템 갑자기 부서지는 버그는 없어요;;
─유리기사도 템 부수는 기술 안 가지고 있음
「‘ㄴㅇㄱ’ 님이 ‘5,000원’ 투척!
진짜 상상도 못한 전개」
─와, 진짜 어이없닼ㅋㅋㅋㅋ템이 부서졐ㅋㅋㅋ
─근데 무기 부서지면 뭘로 깨냐? 주먹?
괴수가 득실거리는 정글에서 혼자 고립되었을 때, 가지고 있던 무기가 박살 났었어도 이렇게 허망하진 않았다. 은우는 마른세수를 하며 바닥을 다시 굴렀다. 유리기사의 방패가 그 자리에 내려꽂혔다.
“진짜로……?”
바닥으로 착 가라앉다 못해 꽉 잠겨 버린 목소리가 속삭였다.
─ㅗㅜㅑ.....목소리....;;
─ㅋㅋㅋㅋ켄 목소리봐...ㅋㅋㅋ
「‘형...이미끝났어’ 님이 ‘1,000원’ 투척!
진짜야 형.....현실도피해도 채찍은 돌아오지 않아...」
─꿀성대인 와중에 너무 슬프잔어;;ㅋㅋ
「‘푸푸링’ 님이 ‘1,000원’ 투척!
켄의 가장 큰 적은 유리기사가 아니라 채찍내구도였어....」
─외부의 적보다 무서운게 내부의 적이라더니ㅋㅋㅋㅋㅋ
─아니ㅠㅠㅠ이 와중에 칼같이 회피하고 있다는 게 더 웃프다고ㅠㅠ
「‘켄우냐?’ 님이 ‘1,000원’ 투척!
우냐? 울어?」
은우는 사람들의 채팅을 보며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럼 제 미션은……?”
─쫑난거죠 뭐....
─ㅋㅋㅋㅋ판이 없어져버렸누ㅋㅋㅋ
그는 휘둘러진 방패를 발판 삼아 뛰어올랐다. 그리고 그의 다리가 유리기사의 투구를 후려쳤다. 명백한 화풀이였다.
▣ 014. 구울왕의 탄생
「‘강남건물주’ 님이 ‘50,000원’ 투척!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걸 아니까 회복약 없이 1트 클리어 조건만 이행해주시면 성공으로 칠게요. 검은 쓰셔도 돼요.」
「‘заявление об отставке’ 님이 ‘322,600원’ 투척!
나는 지금까지 보여준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불운한 사고는 참작받아야 한다. 스트리머의 재능은 진짜다. 약속된 대가를 받을 자격이 있다.」
「‘заявление об отставке’ 님이 ‘48,390원’ 투척!
하지만 유리기사를 잡는다면 찬사의 의미로 같은 값을 더 지불하고 싶다. 이 스트리머는 가치가 있다.」
─개멋있엌ㅋㅋㅋㅋ
─와, 진짜 통크다...
─근데 번역기 반말은 지원 안 하지 않나?
─난 번역기 쓰지 않는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유리기사를 실컷 때리던 은우는 쏟아지는 위안에 기분을 풀었다. 사실 그렇게 화난 상태도 아니었다. 조금 억울하긴 했지만, 이런 걸로 분해할 정도의 무분별함과는 거리가 있다.
단지 방금 화풀이는 그런 거였다. 미션을 위해서 발차기나 주먹질도 안 하고 채찍만 썼던 것이 무효로 돌아가자 생긴 아쉬움의 산물.
“강남건물주 님, 음…….”
─러시아어 못 읽는닼ㅋㅋㅋ
─ㅋㅋㅋㅋㅋ이름은 번역을 안 하지롱!!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편하게 사직서라 부르면 된다.
─ㅋㅋㅋㅋㅋㅋ미친 사직섴ㅋㅋㅋ
“사직서 님? 그리고 보사노바 님… 후원 감사합니다.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네요. 다음부턴 내구도도 충분히 신경 써 가며 해야겠습니다.”
그는 차분히 후원에 감사를 표하며 유리기사의 피통을 확인했다. 후원 목록이 꽤 길었던지라 주먹과 발로 찼음에도 피통이 제법 까였다.
“설마 몸에도 내구도가 있진 않겠죠.”
담담하지만 어딘가 해탈한 어조에 사람들이 실컷 웃었다.
쿵.
은우의 발이 바닥을 밟았다. 튀어 오른 건 검이었다. 회랑 이모저모를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검을 버렸던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너어는 진짜… 투구라도 내놔라.”
─헬멧 빌런ㅋㅋㅋㅋㅋ
─진짜 끔찍한 집착이다......
은우는 검을 휙휙 돌리곤 다시 유리기사에게 덤벼들었다. 유리기사가 코웃음 치듯 방패를 휘둘렀지만, 검을 든 그는 채찍을 든 그와 또 달랐다.
곧 유리기사의 목에 칼날이 처박혔다.
유리기사의 몸이 발부터 천천히 가루로 변했다.
그 자리에 남은 건 그가 탐냈던 투구와 방패였다.
* * *
은우는 꾸역꾸역 해당 지역의 최종 보스, 가한까지 잡고 방송을 종료했다. 유리기사만 잡고 끝내자니 시간이 애매해서 결정한 사항이었는데, 덕분에 방송 시간은 7시간으로 늘어났다. 새벽 2시까지 했단 소리다.
그럼에도 그의 방송은 엄청난 여파를 가져왔으니. 커뮤니티가 또다시 그의 이름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다른 인기 스트리머와 시간이 맞물렸음에도 일궈 낸 업적이었다.
<아임휴먼 여운 너무 오지더라...>
클썅년이 뒤지는 꼴을 볼 수 있다니...이제 여한이 없다
마지막에 발악하는 거랑 인정사정 없이 총으로 쏴죽이는 거 넘 시원했음....
─ㅇㅈ.....드디어 편안히 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쓰앵님....
─클썅년이 뒤지다니??? 그게 가능함???
└켄이라는 스트리머가 새로운 엔딩 밝혀냄
└ㅎㅓㄹ? 어디가서 볼 수 있음??
└비위치 킹시보기나 유어튜브에 켄 치면 됨ㅇㅇ
└ㄳㄳ
은우가 차지한 지분 중 반의반 정도는 아임휴먼 이야기였다. 은우 자체를 언급하지 않는 게시글도 있었지만, 유일하게 밝혀낸 이가 그뿐이었으므로 은우의 이야기라 봐도 무방했다.
<아임휴먼 히든루트 가는 방법 정리>
<아임휴먼 히든루트 어케 가냐>
<아임휴먼 제작진들 신작낸다는 소문 있던데>
<켄 따라하는 거 가능하긴 함?>
<(스포)아임휴먼 히든엔딩 요약>
<아임휴먼 제작사가 켄 대놓고 말하던데>
<아임휴먼 숙련자모드 3번째 암살미션 맵 정리>
<켄 소식 못들었던 외국인들 화들짝ㅋㅋ>
<밝혀진 도전과제들 정리 (계속추가중)>
그들은 밝혀진 히든 루트에 대해 온갖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임휴먼 제작사에서 은우의 예명을 제대로 언급해 준 덕에, 모닥불에 장작을 넣은 듯 이야기는 끊이질 않았다.
<검은기사가 이런 겜이었냐?>
[발로 걷어차이는 유리기사 사진]
무기 부서져서 발로 후드려패더라ㅋㅋㅋ
─리얼 레전드;;
─채찍 부서졌을 때 목소리 진짜 압권이었는뎈ㅋㅋ
화제는 아임휴먼에서 그치지 않았다. 2부 삼아 한 게임, 검은기사는 더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검은기사) 적은 내부에 있다>
[클립영상]
채찍?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목소리 ㅈㄴ 허망하네ㅋㅋ
─이 와중에 다 피하는 거 실화냐? 피지컬 무언?
└켄이라서 그럼ㅋ
─타이밍ㅋㅋㅋ그래서 저 뒤로 죽었냐?
└더 쩌는 건 손발로 처때리다가 나중에 가선 검으로 썰어버림ㅋㅋㅋ
유리기사를 잡던 도중 채찍이 부서졌던 장면은 벌써 여러 곳으로 퍼져 나간 상태였다. 진중한 저음과 대조되는 허망한 목소리가 사람들의 드립 본능을 자극했다.
<학살좌는 죽지 않는다>
[클립영상]
전부 죽일 뿐
─켄: 가한만 잡으면 끝이니까 여긴 빨리 넘어가겠습니다
└켄 언어: 넘어가겠습니다=다 죽이겠습니다
─?? 저길 저렇게 깬다고?? 저게 가능해??
└고거슨 선생님, 켄이라서 가능한 일입니다만
─ㅋ...ㅋㅋ....ㅋㅋㅋㅋㅋ 저기 거기잖아. 그그그그 가한 만나기 전 회랑ㅋㅋㅋ
└넵, 플레이어들 홧병나 돌아가시게 만들던 17:1구간 맞습니다
─정석공략법은 하나씩 유인하는 걸 텐데....와......피지컬이 오지면 유인 따위 필요 없구나...ㅋㅋㅋ
물론 드립들만 쏟아져 나오지는 않았다. 은우가 선보인 무력은 아무리 낮잡아 보려 해도 손상시킬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켄이 대체 뭔데 세최피니 지랄들이냐>
진짜 개어이없네
켄은 우최피임ㅡㅡ
우주최강피지컬
─ㅋㅋㅋㅋㅋ미친놈ㅋㅋㅋ
─안티인줄 알았더니 츤데레였누ㅋㅋㅋ
└처음엔 켄 이 새낀 뭐야, 였는데 오늘자 방송보고 팬됨ㅋ
─아 근데 진짜 맞말....너무 규격외임
└가상현실 버전은 스피드런도 안 나온 걸로 아는데ㅋㅋㅋ...켄은 1트에 스피드런 하고 있자너..ㅋㅋㅋ
└가한의 성채 가장 빠른 기록이 그 썅놈die새끼 14시간 아니냐.
└어림도 없지! 7시간으로 줄여버리기!
└심지어 40분은 아임휴먼이었자너ㅋㅋ
└?그 새끼 스피드런도 함?
└성채만 함ㅇㅇ
─막 검도 배운다는 뭐한다 하는 애들보다 더 검술이 자연스럽지 않냐
└사실 그런 거 아닐까? 1인전승 유파의 후계자?
└ㅋㅋㅋㅋㅋㅋ개소리ㅋㅋㅋㅋ
처음엔 운이니 뭐니 하던 사람들도, 그래 봤자 설레발이겠거니, 과대평가니 하던 이들도 슬슬 은우의 진가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아무렴 현직 무술가니 특수부대니 운동선수니 자랑하던 이들도 까딱하면 죽곤 하는 게임이 검은기사였다. 1트에 노 데스로 가한까지 잡은 은우를 폄하할 근거는 더 이상 없었다.
<뭔가 닮지 않았냐?>
(왼쪽 눈가가 부서진 헬멧을 쓰고 있는 켄 사진)
(도X구울의 주인공 사진)
??: 능력부족은 죽음과 직결됩니다
??: 모든 불이익은 본인의 능력부족.
심지어 이름마저 같음ㅋ
─그래서 이게 뭔데 씹덕아
└2011년 만화ㅋ
└돌은 새끼아냨ㅋㅋㅋ 몇십 년 전 유물임 대쳌ㅋㅋㅋ
└몇 년 전에 가상현실 겜도 나왔다 무시하지마라
─얼굴 들키면 잡혀가서 필사적으로 가렸던 것임
└킹득력 있다ㅋㅋㅋㅋ
─켄 인간이 아닌가 했더니 구울왕이었누ㅋㅋㅋ
└ㅋㅋㅋ그럼 우리들은 구울임??
└ㅅㅂ구울단ㅋㅋㅋㅋㅋ
그런 와중에 켄 자체를 가지고 농담을 치는 게시글도 생겨났다.
그 게시글은 정말 뜬금없이 이슈가 되어 은우에게 새로운 별명을 주고 말았으니.
‘학살좌’에 이은 ‘구울왕’의 탄생이었다.
* * *
은우는 기철을 처음 만났던 카페로 갔다. 그때 마셨던 초코라테가 맛있어서만은 아니었다.
“아아, 이번에도 먼저 오셨군요.”
그는 기철에게 꾸벅 인사했다. 기철이 흠칫거렸다가 바로 너스레를 부렸다.
“여전히 잘생기셨네요, 은우 씨는!”
잘도 입에 침 안 바른 채 말한다 싶다.
“말씀드릴 것도 있고 전해 드릴 것도 있어서 오늘 약속 잡은 건데, 혹시 불편하신 건 아니죠?”
“그럴 리가요.”
외출을 꺼리진 않는다.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겁먹는 게 싫어서 헬스장 외의 출타를 삼갈 뿐. 그런 점에서 이런 약속 때문에 나오게 되는 건 내심 나쁘지 않았다.
은우는 휘핑크림이 잔뜩 얹어진 초코라테를 호록 삼켰다.
“일단 자, 이것부터 받으세요.”
기철이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손바닥만 한 은색 패였다. 영상 재생할 때 누르곤 하는 화살표 모양의 마크가 새겨져 있다.
뭐지, 이건. 은우는 패를 받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비치는 질감이나 무게를 보아 진짜 은 같지는 않다.
“유어튜브에서 구독자 수가 10만이 넘어가면 수여하는 겁니다. 이건 동봉된 편지고요.”
“그렇군요.”
은우는 뒷목을 쓸었다. 유어튜브에서 이런 것도 하는 모양이다. 관심이 없어서 몰랐다.
“여기, 이것도 더 있습니다.”
기철은 택배 상자도 건네주었다. 아임휴먼 로고가 박혀 있는 상자였다. 설명을 듣자 하니 히든 루트 최초 개척자에게 제작사에서 보내 주는 선물이라 한다. 그의 방송 이후 떨어져 가던 판매율이 다시 오른 기념이기도 하고.
받아서 나쁠 건 없으므로 은우는 흔쾌히 받았다.
“그리고 이건 지난 활동으로 추측한…….”
그 외에도 기철이 이것저것 이야기해 주었다. 하나 은우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삶을 두 번 살았다고 하나, 그래 봤자 전쟁터에서 구르거나 학업에 열중한 것이 다다. 이런 법적 문제나 돈 문제에 쌓인 경험은 전무하다시피 한 거다.
이 대화가 알아듣지 못해도 문제없는 보고뿐이라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진즉에 변호사님을 데려왔을 거다.
“자, 그럼 이 문제는 여기까지 하고. 이제부턴 은우 씨의 방송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요?”
“그러죠.”
“먼저 합방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은우의 눈매가 깊어졌다. 합방. 대충 스트리머들끼리 같이 방송하는 거란 건 안다. 해 본 적도, 해 볼 생각도 별로 없지만.
“계약할 때도 말씀드렸지만, 아직 생각해 보진 않았습니다.”
“역시 별로 내키지 않으시군요?”
은근한 기철의 물음에 어깨를 으쓱였다.
“방송 3일 차니까요.”
혼자 방송하는 것에도 아직 안 익숙한 판에 합방이라니, 가당치도 않다. 기철은 그 말뜻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뭐, 은우 씨 정도면 합방은 필요가 없죠. 다른 시청자층을 끌고 올 수 없다는 건 아쉽지만, 시간은 많으니까요.”
기철은 거기까지 말한 후 잠시 침묵했다.
뭔가 있구나. 은우는 라테를 홀짝이며 생각했다. 애초에 합방에 대한 건 미리 협의한 터. 그런데도 왜 묻나 했다.
“말씀하시죠.”
“하, 제가 어지간하면 스트리머에게 강요 안 합니다만, 이번은 정말 좋은 기회라서요. 이건 비밀인데 곧 비위치 내부에서 여는 대회가 있을 예정입니다.”
“네.”
“‘Nebula War’라고, 곧 출시될 게임을 대상으로 하는 홍보용 대회인데… 이게 팀전입니다.”
팀전. 은우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가 다시 풀어졌다.
“별로 참가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저도 압니다. 합방을 꺼리시는데 팀전 대회를 좋아하시진 않겠죠. 근데… 혹시 ‘우유에탄산’ 님 아십니까?”
“요즘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유어튜브 구독자 수가 200만 명이었던가. 종합 게임 스트리머 중에서는 거의 최고로 꼽히는 사람이다. 같은 다이아박스 소속이기도 하고.
말솜씨가 유려하고 방송을 재밌게 진행할 줄 알아, 그도 참고 삼아 보고 있다. 그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인 만큼 완전히 참고하긴 힘들겠지만 말이다.
“그분이 원래 제의를 받으면 받았지 먼저 요청하진 않는 분이십니다. 하셔도 ‘탄산 사단’이라고 불리는 지인들하고만 하죠. 같은 소속사라고 해도요.”
“그렇습니다. 근데 제게 이 말씀을 하신다는 건…….”
“네. 은우 씨에게 왔습니다, ‘우유에탄산’ 님의 제의가.”
기철이 눈을 빛냈다.
“이건 기회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우유에탄산’ 님 팀이라면 은우 씨가 몇 주에 걸쳐 쌓을 인기를 단번에 당겨 올 수 있을 겁니다. 정말 황금 같은 기회란 겁니다.”
비단 기철의 말이 아니어도 객관적으로 봤을 때 굉장히 매력적인 상황이었다. 유어튜브 구독자는 200만, 노가리 까는 방송으로만도 7천이 넘는 시청자를 불러오는 거대 기업이 ‘우유에탄산’이니까.
뭘 믿고 그를 선택했는지는 몰라도 말이다.
“정중히 거절해 주세요.”
그렇지만 은우는 단호히 쳐 냈다. 이유는 기철의 말에 있었다.
“몇 주에 걸쳐 쌓을 인기란 건 저 혼자라도 가능하단 이야기잖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당장의 이익 때문에 먼 미래를 좌시해서야 쓰나.
상대가 누구든 한 번 허락하면 계속해서 상대해야 한다. 공평성이니 뭐니 문제가 걸려 올 것이므로.
물론 합방은 하자는 의지가 교합되어야 가능한 일이므로 그가 거절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랬다간 이미지가 안 좋아질 것이다. 누군 되고 누군 안 되냐며 뒷말이 나올 테지.
사람이란 게 원래 그렇다. 자기도 차별하는 주제에 스스로가 차별의 대상이 되면 거품 물고 달려든다.
“대회는 불참, 합방 또한 없습니다. 적어도 몇 달간은.”
아무렴, 전생에서 신입 하나 데리고 사냥 갔다가 뭔 일을 당했나. 다른 신입도 키워 달라고 청탁이 더럽게 많이 들어왔었다. 귀찮아서 거절했다가 한동안 욕먹기도 했고.
사소해 보여도 평판이란 건 은근 중요한 문제라서, 그 당시에 한동안 고생했다. 한데 그런 꼴을 여기서도 볼 순 없다.
“은우 씨는 참 일관적이시네요. 선택한 방향에서 가장 현명한 판단을 내리기도 하고.”
기철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습니까?”
“보통은 당장의 이익에 눈이 벌게지는데, 은우 씨는 그렇지 않잖습니까.”
“그렇다는 건 팀장님도 장기적으로 봤을 때 손해라고 생각하셨단 거군요.”
“그 정도까진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계약 기간이 1년이었지. 은우를 마지막 남은 음료를 입에 털어 넣었다. 능구렁이 같긴. 역시 사람 좋은 거랑 비즈니스는 별개다.
“뭐, 그러시다면야.”
은우는 잔을 내려놓았다. 이번엔 반대로 기철이 잔을 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은우 씨.”
“네.”
“오디오 비는 것에 고민하고 계시는 것 같던데, 맞나요?”
“네, 조금요.”
정말로 능글맞다. 은우는 능숙한 화제 전환을 받아 주었다.
“그렇다면 생각으로만 하고 그치는 말을 실제로 해 보는 건 어떨까요? 물론 문제 되는 발언들은 안 됩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감이 잘 안 잡힙니다.”
“왜, 몬스터들을 잡으며 그런 생각 하시지 않습니까? 너무 약하다, 이건 이렇게 해야겠다 같은 것들. 아니면 상대가 보일 반응이나.”
하긴 하지. 하지만 그건 너무 잘난 척처럼 보이지 않나? 은우의 눈이 가늘어질 즈음, 기철이 손을 휘저어 시선을 모았다.
“그런 말을 해 놓고 죽어도 좋고, 당연하게 이겨도 좋습니다. 어느 쪽이든 시청자들은 재밌어할 거예요. 어제 검은기사를 하다가 아임휴먼이 더 어렵겠다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렇습니까.”
“말도 편하게 해 보십쇼. 아니면 간간이 반말을 섞는 것도 유니크한 맛이 있어 좋을 겁니다.”
은우는 빈 잔을 매만졌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네.”
슬슬 자리를 파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