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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자도 방송할 수 있습니다-18화 (18/233)

18화

“……!”

들리지 않는 경악이 들리고, 보이지 않는 당황이 보였다. 은우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다른 손을 뻗었다.

흔히들 돈을 표현하는 것처럼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았다가 그대로 검지를 튕겼다. 적의 이마에 딱밤이 깡, 소리를 수놓았다.

“가능했네요.”

그는 두 걸음 물러났다. 채팅 창은 글자가 잔상을 남길 정도로 빠르게 갱신되고 있었다.

─시ㅋㅋㅋ밬ㅋㅋㅋㅋㄱ진짜 해냈엌ㅋㅋㄱㅋㄱ

─어케했누 미친;;

─진짜 된다고?!!!????

─??????????????

─그는 미친 것입니까???

“……?”

시청자들만큼 당황했는지 적이 어정쩡하게 멈췄다. 그리곤 이내 메이스를 움켜쥐었다. 다시금 공격이 짓쳐들어왔지만, 아까보다도 공격로가 더 선명하다.

은우는 개울이 굽이치듯 손으로 유선을 그렸다. 교묘하게 움직인 손이 쇳덩이를 위로 밀어냈다. 자동적으로 적의 팔이 크게 원을 그리며 뒤로 넘어갔다. 가슴팍이 무방비하게 열렸다.

그는 다리를 들어 명치 어림을 밀듯 차 냈다. 상대가 허둥대며 뒷걸음질을 쳤다. 우스꽝스러웠다.

“이렇게구나.”

은우는 손목을 까닥였다. 원리와 타이밍을 이제 알겠다.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는 앞으로 알아봐야 할 문제지만.

“@##@%@!!”

상대는 붉으락푸르락한 표정으로 재차 덤벼들었다. 가공할 위력의 내려 찍기다.

다만 그런 공격일수록 알아보긴 쉬우니. 은우의 왼손이 기기묘묘하게 휘며 메이스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밀어냈다. 역시나 패링 성공 판정이 일며 불똥이 화려하게 튀었다.

“@#!!!$#%##$.”

작게 흔들거리던 몸이 머리를 붙잡았다. 지금 치면 재미없겠지. 은우는 그리 생각하며 봐주었다가 곧장 후회했다.

상대의 몸이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미쳐 버린 망령, 《DieeeHHH》를 퇴치했습니다.』

“……?”

은우는 뜬금없는 상황에 당황했다. 그는 아직 상대를 죽이지 않았거늘, 어째서?

─저거 튀었네

─튀었다

맨손 패링 머시기라고 가득했던 채팅창이 ‘튀었네.’라는 파도로 새 물결을 일으켰다. 참 놀랍고 허탈한 일이었다.

제멋대로 침입할 땐 언제고 불리해지니까 도망간다고? 이성은 납득했으나 감정은 불쾌했다. 이제 막 이것저것 시도해 보려던 순간에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의 불쾌함이다.

“이러면 어떻게 합니까?”

죽이지도 못했거니와 이걸로 사람들이 만족할지도 모르겠다. 은우가 언짢은 고민에 잠기려던 찰나, 후원과 구독이 물밀듯 들어왔다.

「‘켄아제발해내자’ 님이 12개월 구독했습니다!

지렸다」

「‘켄님복수부탁드립니다’ 님이 ‘200,000원’ 투척!

속이 너무 시원합니다.....」

「‘강남건물주’ 님이 ‘1,000,000원’ 투척!

완벽해.」

「‘정의구현시급’ 님이 ‘100,000원’ 투척!

농락 못하신다더니,,최상위셨네;;」

「‘赤竹’ 님이 ‘1,034,940원’ 투척!

매우 만족합니다.」

.

.

완전한 성공도 아닌데 기백이 넘게 들어왔다. 은우는 괜히 찝찝해져서 감사 인사만 거듭했다. 이렇게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다.

“일단 예정한 대로 저주 굴 보스까지 잡고 방종하겠습니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온 이들까지 후원을 쏘았을 때, 그는 그냥 체념했다. 쏘지 말라고 해서 안 쏠 이들도 아닐뿐더러 누군갈 퇴치했다고 환영받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 또한 향수를 자극함과 동시에 새삼스러운 기쁨을 느끼게 했다. 나쁘지 않다.

다만 아쉽게도 맨손 패링은 더 이상 쓸 일이 없었다. 저주받은 굴의 보스가 거대한 곤충 형태의 괴물이었던 탓이다.

비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패링 시스템은 파악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밖에 널린 잡몹을 상대로 하면 될 걸 보스 상대로 했다가 노 데스를 부수는 것도 별로였다.

은우는 결국 패링 없이 보스를 참살했다. 평소와 다를 게 없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은우를 폄하하는 일은 없었으니. 맨손 패링의 압도적임에 눌려 있던 사람들은 벌레 사냥마저 좋게 봐 주었다.

아무렴, 지금까지 했던 플레이는 다른 이들이 부분적으로 소비한 콘텐츠였던 반면, 맨손 패링은 나온 적 없는 전무후무한 소재다. 같은 ‘최초’라도 부분적으로 달성된 적 있는 최초와 완벽하게 처음인 최초는 충격의 무게가 다를 수밖에 없다.

맨손 패링을 비롯한 ‘DieeeHHH’와의 대결은 클립으로 따여 타인에게 영상 후원으로 전해지고 커뮤니티에 올라갔다.

조금 시들해지나 싶던 은우의 주목도가 다시 치솟기 시작했다.

▣ 018. 몰라서 못 데려가지 알면 데려가는

“오랜만에 네 방 들어와 본다야.”

방송을 끄자마자 은우는 형, 서건우의 방문을 받았다.

“헐, 컴퓨터 샀어? 캡슐도 있네? 언제 산 거야?”

그는 애꿎은 목덜미만 쓸었다. 같은 집에 사는 가족인 만큼 형이 동생 방에 들어오지 못할 이유는 없다. 다만 방문이 연 단위 만에 이뤄졌기에 이 겸연쩍음을 감출 길이 없다.

“…얼마 전에 받았어.”

“이거 비쌀 텐데, 누가?”

“당첨 상품 같은 거.”

은우는 대답을 하되 형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졌다. 그보다 작고, 객관적으로 봤을 때조차 가느다란 형은 어딘가 다가가기 힘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병원 신세 지는 걸 하도 많이 본 탓일지도 모른다.

“그래? 대단하다, 두 개 다 걸리고.”

형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앉으라는 표시로 옆을 두드렸으나, 은우는 그것을 따르는 대신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그… 요즘 공부는 잘돼 가?”

건우의 물음에 그는 잠시 고민했다. 공부 대신 방송을 하고 있다 말을 할까, 하지 말까.

“평소랑 비슷해.”

어렸을 때부터 건강했던 그와 달리 형은 곧잘 아프곤 했다. 그 때문인지 그가 하는 것을 과하게 부러워하거나 자랑스러워했고, 그건 과도한 반응으로 이어졌다.

이를테면 방송한다고 고백할 경우, 온 동네방네 말하고 다닐 수 있다는 거다. 그건 은우가 바라는 게 아니었다.

“아, 그래? 뭐 도와줄까?”

“괜찮아.”

실제로 공부하는 것도 아니거니와 직장 생활로 바쁜 형이다. 더 고생시킬 생각은 없다. 부모님이 탐탁잖아 하기도 할 테고.

“없으면 다행이고, 뭐…….”

건우가 깍지를 꼈다. 명백히 무언가를 바라는 이의 모습이었으나, 은우는 애써 무시했다.

원하는 게 정확히 무언지 짐작도 가지 않을뿐더러, 짐작 갔다 해도 난처할 따름이다. 은우로서 이십 년을 살아왔지만, 그는 여전히 가족 대하는 법을 몰랐으므로.

“가끔은 게임도 해 봐. 공부만 하면 뭔 재미야. 마침 컴퓨터도 좋은 거 생겼구만.”

건우는 결국 일어섰다.

“잘해라.”

“응.”

형이 방을 나가고, 곧 거실에서 형과 부모님 간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은우 녀석, 부럽게 컴퓨터랑 캡슐 좋은 거 쓰네. 아, 나도 이벤트 당첨 같은 거 안 되나?”

방문이 다 안 닫힌 모양이다.

“웬 컴퓨터? 캡슐은 또 뭐야?”

“두 개 다 당첨됐대. 엄만 몰랐어?”

“뭐… 많이 좋은 거야?”

“응. 컴퓨터는 잘 모르겠는데, 캡슐은 확실히 최신품이더라.”

은우는 문을 닫기 위해 문고리를 잡았다가 이어지는 말소리에 그대로 굳었다.

“은우한테 달라고 할까?”

“엥? 무슨 소리야. 쟤가 받은 건데 왜 달라고 해.”

“은우는 공부하니까 필요 없을 거 아니야.”

“그렇게 치면 나는 일해서 더 필요 없거든? 됐어. 동생 거 뺏는 형이 되고 싶진 않아. 할 시간도 없고.”

그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그대로 문을 닫았다.

“그래도─.”

어머니의 목소리가 뚝 잘렸다. 희고 서늘한 호흡이 공기 위를 걷는다.

“…….”

뭐, 이럴 줄 알았지. 은우는 뒷목을 슬슬 쓸다가 미리 구비해 둔 물잔을 들었다. 미지근하게 식은 물은 그럼에도 조금 차갑다.

방송을 끄고 캡슐에 나올 때까지만 해도 출출하던 배는 영 반응이 없다.

은우는 그래서 그냥 일찍 자기로 결정했다.

* * *

그 시각, 커뮤니티는 뜨거운 불판이 되어 타올랐다.

<킹갓제너럴켄 소리 하지도 마라>

[빛 이미지]

이제부터 저를 켄이라 불러주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젠 빛이 돼버렸누

─아앗,,,!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어!

<켄쉑 스무살 뻥카 오지네>

[클립영상]

난 무조건 형이라 부를 거임

─ㅋㅋㅋㅋ이건 킹정이지ㅋㅋㅋ

─와 진짜 개오진다....

─ㄹㅇ 인간이 아닌듯;;

<지금 검기사 하는 애들 죄다 맨손패링 도전중인데?>

어림도 없지! 다 죽어버리기!

늬들은 켄이 아니라 이거야~~!!

─보는데 진짜 개답답해서 뒤지는 줄ㅋㅋㅋ

─아 켄 마렵다

die 참교육시키는 것 보고 묵변이 내려갔습니다 쓰앵님

─???: 역시 사두면 다 쓸모가 있네요.

─진짜 20분동안 싸우는데 하나도 질리지 않았음ㅠ

─영상 3번 돌려보고 꿀잠 잘 예정임니다^^7 충성충성

<맨손패링 미친 거 아니냐??>

??: 맨손도 무기 취급을 받는다면, 이론적으로 패링이 불가능하진 않을 텐데.

이런 말 지껄이면서 대미지 입기 전에 손으로 무기를 튕겨내는 거 대체 무냐고ㅋㅋㅋㅋ

─고거슨 슨생님, 켄이라서 가능한 일입니다만

─ㅋㅋㅋㅋㅋㅋ진짜 미친 피지컬

─무쳤음무쳤어

생방을 본 사람들은 신나서 글을 올렸고, 그것은 다시 보기로 새 유입자를 부르며 새로운 글을 만들었다. 사흘 연속으로 커뮤니티가 한 사람에 대해 떠드는 기이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대망의 게시 글은 검은기사의 제작자, 카롬 소프트웨어가 올린 짧은 글이었다.

『우리는 게임이 하드코어해지길 바라기에 현실적인 전투를 바라고 또 요구합니다.

패링시스템은 유일한 예외였죠. 압도적인 체급차이에 굴하지 않고 공격을 튕겨내는 것. 우리가 검은기사에 넣은 비현실입니다.

다만 비현실적인 이 시스템은 우습게도 굉장히 현실적입니다. 대미지가 들어오기 전에, 즉 피격판정이 나기 전에 상대의 무기를 튕겨내야만 하기 때문이죠.

닿지 않은 상태도 안 됩니다. 닿았으나 피격판정이 나서도 안 됩니다. 100% 완벽한 타이밍이 아니면 패링은 당신에게 찾아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이 죽음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이 타이밍을 깨우치길 바랐습니다. HP가 깎이지 않고, 적에게 경직까지 줄 수 있는 기술이라면 그 정도 대가는 치뤄야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오만이었습니다. 우리는 플레이어들이 종종 상상 못 할 결과물을 만들곤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최초의 플레이에서 죽지 않고, 맞지 않고, 단 한 번의 시도에 패링을 성공했으며, 심지어 그것이 맨손이었던. 이 아름다운 조건에 우리는 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의 오만함을 깨우쳐준 한국의 게이머에게 찬사를. 예부터 한국은 게임제작사들의 원성을 사는 나라였는데, 이번에도 한국이 한 건 해냈군요.

우리는 맨손패링이 이론뿐 아니라 현실적으로 가능했음을 인제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것을 해낼 수 있는 게이머가 있다는 것도요.

덕분에 많은 영감과 확신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새롭게 들고 올 게임은 이전보다 더한 죽음을 가져올 것입니다.』

3년 동안 잠잠하던 곳에서 들려온 신작 소식은 카롬의 팬층을 뒤흔들었다. 자연히 같은 글에 언급된 ‘한국의 게이머’ 역시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영상 조회 수가 걷잡을 수 없게 늘어나고, 유료 구독 숫자 또한 우뚝 치솟았다.

켄이란 이름이 한층 성장하는 순간이었다. 정작 본인은 자고 있었다고 해도.

* * *

은우는 버릇처럼 새벽에 눈을 떴다. 원체 잠이 적은 체질이기도 했고, 고등학교 이후로 깊게 잠든 적이 드물었다.

죽을 위험이 적다는 걸 머리로 인지했건만, 육체에 각인된 습관은 도통 빠지질 않는다.

만약 군인이 됐다면 이런 점에서 고생하는 일은 적었겠지. 갑갑한 분위기나 손맛 떨어지는 신식 무기로 인해 절대 못 버텼겠지만.

은우는 적당히 식사를 챙긴 후 헬스장으로 갔다. 영 좋지 않은 기분을 땀방울과 함께 떼어 낼 생각이었으나, 아쉽게도 그건 불가능했다.

공부 삼아 보는 타인의 방송도 마찬가지였다. 계속해서 잡념이 들었다.

하다못해 사람들이 그의 별명으로 삼은 구울왕 관련해서 원작 만화를 찾아보기도 했지만… 주변이 고요해서 집중이 되지 않았다.

은우는 결국 그 기분을 버티지 못하고 일찍 방송을 켰다. 유일한 친구 녀석은 데이트하러 갔으니, 그는 그의 일방적인 인맥과 놀아야 하지 않겠나. 사람들의 떠들썩함 속이면 차라리 편할 것 같았다.

“그러니까… 유하, 구하. 구하 맞나요?”

─오늘 방송 일찍 키셨네요

─ㅋㅋㅋㅋㅋㅋ시작부터 귀엽누

─구하~(구울단 ㅎㅇ라는 뜻^^7)

─켄하~

─안녕하세요, 카롬의 남자!

─아직 방송 시간 아닌데 ㄱㅇㄷ

─켄하!

“안녕하세요, 여러분. 내일이 토요일이고 해서 오늘은 일찍 켰습니다. 켠왕까진 무리겠지만, 가능한 한 오래 해 볼 예정입니다.”

─헐 ㅁㅊ

─갸아아아ㅏㄱ!!!

─착석 준비

─켄님 카롬이 올린 글 봄??

─켄하~

“아뇨, 못 봤습니다. 무슨 글 올라왔습니까?”

─ㅋㅋㅋㅋㅋ카롬이 켄님 언급했자너~

─시청자 수 봐라ㅋㅋㅋ

─맨손패링!!

─카롬맨들 다 몰려옴ㅋㅋㅋ

─오늘은 맨손패링 나오나요?

평소보다 더한 텐션으로 채팅이 올라갔다. 줄어든 시청자 수만큼 태극기로 물들었던 채팅 창이 다시금 다양한 국기로 채워졌다. 맨손 패링 보여 달라는 말도 심심찮게 나왔다.

은우는 뒷목을 긁적이다가 게임을 실행했다. 대기실이 부서지고 검은기사의 배경이 시야를 까무룩 삼켰다.

“오늘 안에 그 배신자라는 보스를 보고 싶네요. 맨손 패링은 여건이 되면 도전해 보겠습니다.”

슬슬 익숙해진 방송 멘트를 날리며 그는 몸을 일으켰다. 보스를 잡고 활성화했던 맥의 지팡이가 눈앞에 있다.

“보스는 잡았고… 길이 더 있네요.”

그는 어제 미처 다 둘러보지 못한 보스 방에서 길 하나를 발견했다. 일종의 승강기로 보이는 그것은 매우 낡고 오래되었지만, 그럭저럭 잘 작동되었다.

─벌써 신전이드아

─신전에 잇는 선택보스도 잡으실 건가요??

“글쎄요. 가는 길에 마주친다면 잡겠지만, 구태여 찾진 않을 예정입니다.”

은우는 승강기에 탑승하며 말을 이었다.

“그것들까지 찾아 헤매기엔 아무도 못 잡았다는 배신자의 상판이 너무 궁금한지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킹직히 켄이면 선택보스 넘겨도 ㅇㅈ임

─안봐도 보이는 결과ㅋㅋㅋㅋ

사람들이 깔깔 웃는 사이, 승강기가 지상에 다다랐다. 잠긴 석문을 여니 관리받지 않은 정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카르테 신전》

글자가 떠올랐다가 금세 사라졌다. 은우는 주변을 천천히 뜯어보았는데, 지역 저편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이거, 가한의 성채 지역이랑 붙어 있네요.”

─ㅇㅇ 숏컷 뚫으면 둘이 연결됨

─검은기사 맵이 원래 그래요 길이 어려운데 하다보면 뭔가 다 연결되어있음

그런가. 은우는 고개를 갸웃거린 후 새로운 무기를 들었다. 대중적으로 쓰이는 직검이다.

“오늘은 정석 조합으로 가겠습니다.”

─ㅋㅋㅋㅋ방패는 어디갔나요ㅋㅋ

─방패가 없는데 정석조합이라니 루삥뽕삥빵

─성기사는 글타쳐도 사제들은 신성마법 쓸 텐데ㅋㅋ

“방패는 이거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들까요?”

은우가 손목을 까닥이자 사람들이 초성을 치며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아무렴 달변가나 오디오가 꽉 차는 방송을 두고 은우의 방송을 택한 이유는 다 이런 것 때문이 아니던가.

팅!

그런 시청자들의 바람을 은우는 절대 배신하지 않았다.

반복할수록 더욱 숙련되는 맨손 패링이 가는 길마다 은빛 불똥을 튀겼다. 상대가 사제복을 입었건, 갑옷을 입었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마주치는 족족 혈시들은 가루행이었다.

“오, 오… 이런. 제가 헛것을 보고 있는 걸까요?”

그러다 잠깐, 은우는 걸음을 멈췄다. 정원 구석에 처박혀 있는 기도용 정자에서 누군가가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부드럽게 다독이는 듯한 미성이 제법이다. 느껴지는 기세도 강자에 속하는 것이었다.

“저는 아카르테의 종, 오스로입니다. 귀공께서는… 오, 고귀한 존재셨군요. 멸몰의 시대에서 당신을 뵙게 되다니, 이것 또한 신의 안배일까요?”

자신을 오스로라 소개한 그는 사제보단 성기사 쪽의 인물이었다. 빛바랬으나 여전히 성스러운 기품의 갑옷과 허리춤의 검 한 자루, 등의 방패가 의견을 뒷받침해 주었다.

─석화남ㅎㅇㅎㅇ

─쟤 템 쓸만 한데 죽이실?

─죽여도 스텟 안 올려서 못 끼잖어ㅋㅋㅋㅋ

─더 말 걸어보세염ㅎㅎ

왜 석화남이라 부르는진 모르겠으나, 딱히 불호성 캐릭터는 아닌 듯싶다. 은우는 실제로도 선해 보이는 오로스를 보며 뒷목을 쓸었다.

한판 붙어 보고 싶은데 가능하려나.

“대련 기능은 없겠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죽일 생각부터 하는 거냐고ㅋㅋㅋㅋ

“대련은 죽이는 거랑 다릅니다.”

─그래서 싸우고 싶긴 하단 거네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이 남자 은근 호전성도 있어ㅋㅋ

─죽여도 되긴 한데, 그럼 엔딩 하나 날아가요

엔딩이 날아가는 건 안 된다. 은우는 좀 더 갈림길이 어떤지 조목조목 살핀 후 선택하고 싶었다.

그는 결국 오로스와 한판 붙는 걸 포기했다.

“신의 안배?”

대신 키워드 중 대충 거슬리던 단어를 집었다. 오스로가 바로 반응했다.

“신에 대해 부정적이신가 보군요. 이해합니다. 세상이 이 지경이 된 걸 보고 있자면 저 또한 허탈해지곤 하니까요. 그러나 이런 저임에도 신께선 여전히 당신의 힘을 내려 주십니다. 그건 대체 어째서일까요?”

“신의 힘도 존재하나 보네요.”

은우는 키워드로 힘을 택했다. 그런 다음 채팅 창을 보니 오로스가 막 말하려는 것들을 미리 토설하는 시청자들이 있었다.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신성 마법은 신앙이 있다면 누구든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고귀한 존재께서도 쉽게 쓰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저거 개뻥임ㅡㅡ

─신앙마법 좀 쓸만한 거 배우려면 신앙 스텟 진짜 많이 찍어야해요ㅋㅋㅋ

─스텟 좀 찍어야 뎀지 나옴

오로스의 말에 사람들이 아우성을 쳤다. 배운다고 해서 엄청 좋아지는 건 역시 아닌 모양이다. 하긴, 그렇게 친절한 게임이었다면 난이도로 욕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으리라.

“신성 마법 중 하나를 알려 드릴까요?”

『‘신앙’ 스탯이 부족하여 배울 수 없습니다.』

“오, 오… 이런. 고귀한 존재께선 신의 힘이 별로 탐탁지 않으신가 보군요. 어쩔 수 없지요. 마음이 바뀌시거든 언제든 제게 말해 주시기를.”

“…배울 생각은 없었는데 이거 좀 기분 별로네요.”

─입구컷ㅋㅋㅋㅋㅋㅋㅋ

─1레벨의 설움ㅋㅋㅋㅋㅋㅋㅋ

선택도 하기 전에 거부당했다. 은우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가 키워드로 예상되는 단어들을 연거푸 내뱉었다. 대부분은 불통이었고, 몇 개는 대답이 나왔다.

“이곳에 있는 이유를 물으셨습니까?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이 정자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던 저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거든요. 이상하게도 그 전의 기억은 잘 나지 않습니다.”

“이 정자는 혈시들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덕분에 요긴하게 쓰고 있지요. 아카르테께서 내려 주신 축복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떠나지 않은 이유는 아직 제게 사명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신전 깊숙한 곳에 있는 중요한 것을 되찾아야 합니다.”

“아카르테께서는 태양의 신이십니다. 이 신전도 본래는 그분을 모시던 터였죠. 지금은 혈시들이 차지해 그들의 신을 모시고 있는 모양입니다만.”

“혈시들의 신에 대해 궁금하십니까? 안타깝게도 저 또한 많은 걸 알진 못합니다. 다만 저들은 인간들이 아카르테를 모셨던 것처럼 그네들의 신을 모시더군요.”

“이곳에 있다 보면 매일 정해진 시각에 정해진 시간만큼 기도를 올리는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멸망 전 인간들의 성직 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더군요. 저로선 참 묘한 기분입니다.”

대부분은 세계관 유추에 쓸 만한 정보였다. 오로스와의 만남은 아무래도 신성 마법을 배울 수 있다는 게 제일 큰 수확인 듯싶다.

“그만 갈까요.”

그의 제안에 시청자들이 호응했다. 은우의 걸음이 오로스에게서 세 발자국 멀어졌다. 그러자 오로스가 배웅 인사를 건넸다.

“오, 제가 고귀한 존재의 걸음을 너무 오랫동안 잡아 두었나 보군요. 당신의 걸음에 태양의 축복이 깃들기를. 언젠가 다시 뵐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곤 본래 있던 기도실로 들어가 버렸다. 풀에 뒤덮여 잘 눈에 띄지 않는 정자 안에는 아카르테로 추정되는 신상이 있다. 오로스가 그 앞에 앉아 기도 자세를 취했다.

은우는 그걸 보다가 시청자에게 질문했다.

“혹시 저걸 따라 하면 뭐가 있나요?”

─ㅋㅋㅋㅋ이걸 바로 찾네ㅋㅋ

─오로스가 기뻐하면서 동료로 합류해요ㅋㅋ

─신전 보스전에만 써먹을 수 있음

“아, 그럼 별로 쓸모가 없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가차없어ㅋㅋㅋㅋ

─오로스 울겠어욧! 오로스 애껴욧!

─몰라서 못 데려가지 알면 반드시 데려가는 녀석인데...

─ㅋㅋㅋㅋㅋ여윽시 학살좌ㅋㅋㅋ혼자로도 충분하다!

이제껏 주어지는 동료를 내던지고 혼자 싸운 게 한두 번인가. 은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본래 가던 길로 발을 옮겼다. 이제 신전을 정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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