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게임이 참 절묘해요.”
은우는 대검의 검 자루를 움켜쥐었다. 신전 공략이 절반을 넘겼을 때 신청받은 무기다.
“분명 현실의 물리법칙을 벗어났는데, 그게 또 마냥 나쁘지도, 마냥 좋지도 않거든요.”
그는 두 손으로 대검을 움직였다. 기본 무기라서 스탯 제한에 구애받진 않으나, 그래도 한 손으로만 들면 무겁기 때문이다. 그가 들기 어려운 것도 아니건만, 전체적으로 동작이 굼떠진다.
은우는 그게 게임사가 준비한 나름의 밸런스 패치가 아닐까 싶었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ㅋㅋㅋ
─괴상한 물리엔진 얘기하는 듯ㅋㅋ
─그게 절묘한 수준입니까?
“가령 제가 지금처럼 무기를 들고 풍차처럼 붕붕 돌면 가속이 붙습니다.”
현실에서는 무기의 무게로 인해 원심력이 과도하게 붙어, 나중에 가면 멈추고 싶어도 못 멈춘다. 무기를 던져 버리지 않는 이상.
“그런데 이 게임은 멈추고 싶으면 멈출 수 있죠.”
은우의 대검이 혈시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채팅 창이 아닌 것 같다며 깔깔대었다.
“반동도 없이, 의도적인 게 아니라면 손에서 무기가 빠져나가지도 않습니다.”
물론 완전히 없는 건 아니다. 땅에 내려찍고 나면 1초간은 무기를 들어 올리기 어렵다. 무기를 손에서 놓고 구르는 건 가능하겠지만.
“대신 원심력이 정도 이상 붙지 않습니다. 붙어 봤자 대미지가 더 오르는 건 아니라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연속적으로 대검이 혈시들의 머리만을 깨부쉈다. 절묘하게 경로를 조절하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전체적인 그림에서 오는 호쾌함에 사람들이 매우 흡족해했다.
“덕분에 이런 재밌는 그림도 만들어지니까 저로선 좀 더 좋은 쪽에 가깝네요.”
쾅!
은우의 대검이 바닥에 박혔다. 몇 분 단위로 이어진 ‘검, 풍차처럼 돌리기’ 기술이 드디어 끝난 것이다.
그가 걸어온 길들을 돌아보면 혈시들이 말끔히 사라져 텅 빈 신전 복도를 볼 수 있다. 가루가 되어 형체도 남기지 못했기에 만들어진 처참한 광경이다.
─여윽시 학살좌....
시청자 한 사람이 이 상황을 짧고 굵게 요약했다.
▣ 019. 활 하면 로빈 후드
신전 청소가 어찌나 깔끔했는지 교황혈시는 은우를 격렬하게 반겨 주었다. 패링도 안 먹는 신성 마법이 교황혈시의 뒤편에 도열해 있었다.
그에 은우 역시 지지 않고 열렬히 환영해 줬다. 그의 손에는 실전용보단 의식용 검에 가까운 ‘플랑베르주Flamberge’ 한 자루가 들려 있다.
「‘заявление об отставке’ 님이 ‘82,050원’ 투척!
굉장히 만족스럽다.」
서로 훈훈히 반기는 광경에 러시아의 시청자는 아주 만족스러운 기색을 했다. 그가 전에 신청했던 것이 이제야 받아들여졌다는 건 신경도 안 쓰이는 모양이다.
“오, 오, 이런. 대단하시군요. 여기까지 오시다니.”
그렇게 보스 토벌을 마치고 가한의 성채로 돌아가기 전, 은우는 조금 더 탐색하길 택했다. 그 결과가 오로스와 다시 조우하는 것이었다.
그는 숏컷Shortcut(지름길)이 아닐까 싶은 창살 앞에 앉아 있었다. 지하와 연결된 문은 지켜보는 것만으로 수상했다. 아무리 봐도 은밀한 곳과 통할 것 같은 형태였다. 최소 숨겨진 방, 최대 숏컷이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네요.”
─ㅋㅋㅋㅋㅋ님이 혈시 다 처리해서 온 거 아니겠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ㅇㅈ
─말 걸면 비밀통로를 통해 왔다고 말해주긴 하는데....
─킹직히 얘는 켄 따라서 왔을 듯
은우는 오로스의 앞에 섰다. 그러자 오로스가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빛바랜 갑옷은 먼지가 한층 쌓인 것 같다.
“신전의 숨겨진 길을 아실 리는 없으시니, 이단자들의 왕을 처치하고 이곳에 당도하신 것이겠지요. 굉장하십니다. 저는 그것을 혼자 처치할 엄두가 나지 않아 숨겨진 길이나 찾고 다녔는데요.”
그는 말을 하면서 제 뒤편을 힐끗 보았다. 대지를 대각선으로 뚫고 나온 대리석 통로와 창살문, 그것을 뒤덮은 넝쿨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이 문이 궁금하십니까? 이 문은 아카르테의 신물을 숨겨 두는 비밀 방 입구입니다. 본래는 이렇게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만, 멸망 이후로 이런 형태가 돼 버렸습니다.”
오로스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참 수다쟁이였다.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면, 다음을 듣고 싶게 하는 말솜씨가 아니었다면 진즉에 무시했을 것이다.
“혈시들이 들어갈 수 없도록 막아 둔 듯합니다만, 덕분에 저도 못 들어가게 됐군요. 서글픈 일입니다. 제 사명은 저 안에 있는 신물을 챙기는 것인데. 이것을 열려면 증표를 찾아야 하니, 아무래도 다시 길을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신물?”
은우는 직감적으로 저 안의 물건이 오로스에게만 귀중한 물건이 아님을 깨달았다. 시청자들이 진행하려면 꼭 필요한 템이라고 알려 주지 않았어도 그랬을 거다.
“오, 오… 본래라면 지켜야 하는 비밀이지만, 고귀한 존재라면 괜찮겠지요. 저 안에 있는 것은 교구의 성배입니다. 마탑에 가져가면 수도로 직행하는 마법진을 발휘할 수 있지요.”
수도. 감이 딱 잡혔다. 저게 최종 보스에게로 향하는 길을 터 주는 물건이다.
“저게 아니면 최종 보스를 못 만나겠네요.”
─ㅇㅇ맞음
─저거 얻자고 뺑뺑이 돌아야함ㅋ
─다음은 마을인가....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증표.”
“고귀한 존재께서도 수도에 가고 싶으신 모양이군요……. 뭐, 한 번 마법진을 발동하면 언제든 쓸 수 있는 만큼 알려 드려도 괜찮겠지요. 고귀한 존재께서 저보다 먼저 찾으실지도 모르는 노릇이니.”
오로스는 ‘큼큼’ 헛기침을 하곤 마저 설명했다.
“증표는 태양의 문양이 새겨진 주패입니다. 몇 개 없는 귀한 물건인데, 안타깝게도 저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도 성력을 품고 있는 귀물인지라 어느 곳에 있는지는 알아낼 수 있습니다.”
그는 중도에 기도를 한 번 올렸다. 빛이 그의 몸을 휘감는 모양새가 주패의 위치를 찾는 것 같다.
“이런……. 주패는 항구에 있는 것 같습니다. 성벽을 거쳐 산을 두 번 넘으면 나오는 항구지요. 다만 그곳으로 가는 지상 길은 완전히 막혀 있습니다. 낭패로군요.”
오로스의 말은 앞으로 가야 할 곳과 가야 할 방법을 알려 주는 단서였다.
“또 지하로 내려가야겠네요.”
은우는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전부를 얻은 것 같다 판단했다.
“가십니까? 오… 당신께선 항구로 가시겠지요. 저 또한 그런 것처럼……. 고귀한 분께서 수도에 가시는 이유는 확신할 수 없으나, 부디 그것이 그른 결말을 가져오지 않기를 빕니다. 당신의 걸음에 태양의 축복이 깃들기를.”
마침 오로스도 작별을 고했다.
은우는 맥의 지팡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 공간 이동을 했다. 활성화만 되어 있다면 맥의 지팡이가 세워진 어느 공간이든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기능이다.
은우의 몸이 한순간에 가한의 성채로 되돌아왔다. 이제는 항구로 갈 길을 찾을 시간이다.
* * *
“이런 하수도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약간의 시청자 도움을 받아 알아낸 항구 루트는 가한의 성채, 잊혀진 마을, 하수도를 통하는 것이었다.
이 놀라운 하수도는 잊혀진 마을과 성채뿐 아니라 산을 관통해 항구까지 이어졌다. 다른 말로는, 더럽게 넓었다.
잊혀진 마을도 넓었건만, 참 첩첩산중이었다. 괜히 길 어렵기로 악명 높은 게 아니다.
“나는 로렌스, 화염 거미 로렌스다. 그댄 왜 이곳을 떠돌고 있지? 나처럼 어둡고 축축한 굴을 탐방하며 진리를 찾고 있나?”
와중에 갑자기 튀어나온 새 NPC는 좌로 세 번 보고 우로 다섯 번 봐도 여행자였다. 펑퍼짐한 로브와 천 옷, 지팡이가 그 근거였다.
허리춤의 레이피어는 아마 호신용일 테다. 손에 책을 들고 있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수도를 떠돌다니, 특이한 여행자네요.”
─누나아아아아아!! 나 죽어!!!
─아니 마법산데요ㅋㅋㅋ
─로하~
─딱봐도 마법사잖아요ㅋㅋㅋ
“저게 마법사라고요?”
은우가 순간 당황했다. 그가 아는 마법사들과 너무 달랐던 탓이다.
전생의 마법사들은 움직일 때 불편한 로브를 쓰는 법이 없었다. 마력으로 체온 조절을 할 수 있어서다.
천 옷도 입지 않았다. 마법이 마법사를 축으로 발동되는 만큼 최전선에 서야 하는 그들이다. 천 옷보단 갑옷을 입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몸도 좋았다.
─저게 마법사가 아니면 뭔데요ㅋㅋㅋㅋ
─대체 뭘 마법사라고 생각하는 거임?
─누나아아아아아아아아!!
─레이피어 들고 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
“…그러게요.”
그렇지만 그는 금방 수긍했다. 구울에 대한 개념이 달랐던 것처럼 마법사의 개념 또한 다른 게 당연하다. 단지 너무 뜻밖이어서 놀랐을 뿐이다.
성직자야 믿는 신에 따라 별의별 유형이 다 있었기에 이곳도 그렇겠거니 넘겼지만, 마법사는 구축한 이미지가 전생의 것 하나뿐이었으니까.
“진리?”
“나는 괴물이 탄생한 원인을 찾아 헤매고 있다. 배신자가 어째서 인류를 배신했는지 알고 싶거든. 그것이 내가 탐구하는 진리다.”
“…배신자.”
“인류의 배신자에 대해 알고 있나? 그녀는 한때 촉망받는 인재였다지. 마탑의 선구자였고 왕의 신임을 받는 신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혈시의 등장 이래 인류를 배반하고 혈시들의 편을 들었다. 같은 마탑의 일원으로서 나는 그 이유를 찾아야만 한다. 오명을 벗기 위해서라도.”
“마탑.”
“고요한 산림에서 남쪽으로 쭉 내려가면 불타는 협곡이 있다. 그곳을 통과하면 마탑이지.”
“그쪽에도 길이 아직 있었군요. 항구 다음엔 그곳으로 가야겠습니다.”
은우가 새로 얻은 정보를 정리하는 사이, 로렌스가 지팡이를 찍었다. 그녀의 적발에 달린 구슬 장식이 딸랑였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네게 마법을 하나 알려 주지. 얼마 남지 않은 동족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긍지 높은 마탑의 마법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까.”
허공에서 종이가 하나 내려왔다. 로렌스가 들고 있던 책의 페이지 하나를 찢어 준 것이다.
“그것은 ‘탐지’ 주문이다. 페이지를 쥔 채 마력을 싣고 스펠을 외워라. 그러면 마법이 발동될 것이다.”
─아아, 빛렌스....
「‘누나아아아아’ 님이 ‘5,000원’ 투척!
누나아아아!! 나주거!!!」
─죽어 새꺄 죽어
─근데 저거 생각보다 쓸모는 없음;; MP잡아먹는 양이 넘심이라
─스펠 발언도 넘 어렵지
은우는 떨어지는 종이를 잡아 단면을 확인했다. 마법진과 스펠로 보이는 글자가 적혀 있다. 안타깝게도 발음은 알파벳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후원 감사합니다. 딱히 스탯 제한은 없나 보네요.”
─마법은 스텟제한 없음
─지능이 높을 수록 댐지 높긴 한데 제한은 없어요 주문서를 모아야하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요
─근데 님 1렙이라서...ㅋ
1렙이라서 별 효용이 없을 거란 건 잘 알겠다. 은우는 페이지를 인벤토리에 적당히 욱여넣었다. 어떤 주문인지 설명 창조차 보지 않았지만, 안 봐도 감이 잡히거니와 필요도 없었다.
“그럼 난 이만 가 보지.”
오로스와 달리 로렌스는 먼저 휙 떠나 버렸다. 따라가면 어찌 될까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은우는 따라가지 않았다. 로렌스가 곧 빛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곳의 마법사는 공간 이동도 하는구나. 은우는 초능력자의 전유물이었던 공간 이동이 마법사의 손에서 펼쳐지는 걸 보며 감탄했다.
게임이고 법칙이 다르니까 가능한 일이지만, 그냥 마법사가 공간 이동을 한다는 명제 자체가 놀랍다.
“오로스보단 조금 약해 보이네요.”
별개로 강함은 오로스보다 그저 그랬다. 변칙적인 전투가 가능한 점에서 난이도는 비슷하거나 이쪽이 더 높겠지만, 순수 무력은 로렌스가 떨어진다.
─전투력 판정기냐ㅋㅋ
─싸움 생각밖에 없는 듯
─로렌스도 엔딩 분기 NPC예요ㅋㅋㅋ조심하세요
이쪽도 엔딩 분기였나. 은우는 시청자들의 경고를 받아들이며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퀴퀴한 하수도를 빠져나갈 때가 됐다.
한참 움직이니 저 멀리 하수도의 보스로 예상되는 것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슬슬 보스 방이 나오나 봅니다.”
하수도에 사는 혈시를 죽이며 은우는 생각했다.
신전 돌파에 잊혀진 마을, 곧 끝날 하수도까지. 세 개의 지역을 돌파하는 동안 방송 시간은 12시간을 넘겼다. 이 정도면 시청자들도 피곤에 찌들 타이밍이다.
“1인칭 시점 분들은 냄새도 맡아지십니까?”
─예.....
─뭐하러 이 냄새를 같이 맡고 있는지 모르겠음
─킹치만 켄이 느끼는 감각 나도 느끼고 싶은걸!
─네다씹
“그럼 일찍 끝내야겠네요.”
정작 그는 크게 피곤하진 않으나 시간이 너무 늦었다. 은우는 체감 피로도와 실제 피로도가 다르단 걸 잘 알기에, 슬슬 방종 각을 재었다.
사람들이 기가 막히게 눈치채며 떠들었다.
─방종 에반데
─배신자 보고 간담서요
─배신자까진 가야지
「‘오빠달려’ 님이 ‘10,000원’ 투척!
내일 토요일이야 형 달려도 돼」
은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주말에 딱히 쉬지 않으므로 여기까지 하는 게 옳다. 어차피 내일─자정이 지났으니 오늘이지만─도 켤 것이다.
“오늘은 여기 보스까지만 잡고 종료하겠습니다. 한숨 자고 오후에 다시 봬야죠. 후원은 감사합니다.”
은우는 확고히 매듭지었다. 시청자들이 매달렸지만, 그는 완강했다. 결국 시청자들이 먼저 포기했다. 오래 한 것도 사실이었기에 잡을 명분이 없기도 했다.
「‘로빈후드’ 님이 ‘10,000원’ 투척!
대신 활로 보스킬 어떰? 10만 원」
─헐ㅋㅋㅋ
─이건 또 신박한 미션이네ㅋㅋㅋ
─켄이 괴물이라서 그런지 갈수록 미션이 인간의 영역이 아니게 된다ㅋㅋㅋㅋ
─마! 구울왕이라면 이래야지!
은우는 떨어진 미션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의 손은 어느새 쥐고 있던 무기 대신 활대를 새로 움켜쥐는 중이다.
“활 하면 로빈 후드보다 제 이름이 먼저 떠오르게 될 겁니다.”
간드러지는 저음이 녹진녹진한 오만함을 담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