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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자도 방송할 수 있습니다-37화 (37/233)

37화

다섯 명으로 구성된 팀 두 개가 하나의 거점을 두고 쟁탈전을 벌이는 것이 점령 모드의 핵심이다.

다른 모드와 달리 죽어도 부활이 되지 않기 때문에 실력자가 한 명만 껴 있어도 쉽게 승패가 갈린다고 한다.

“다른 모드는 부활이 됩니까?”

─넹!!

─정보) 사도들의 육신은 성좌가 만들어주는 것이라서 부활이 가능하다

─설정 하난 기똥차게 탄탄함ㅋㅋㅋ

─요즘 설정 그지 같은 겜이 어딨냐?

─뱀주인이 껴있으면 부활 가능

─뱀주인 개복치자너ㅋㅋㅋㅋ

“부활이 계속된다니…….”

은우는 적은 수일지언정 계속해서 몰려오는 적들을 떠올리고 고개를 휘휘 저었다. 전생에 영웅이라 불렸던 그지만, 그랬던 그마저도 인해전술만큼은 질색팔색을 했다.

기라는 한정된 자원에서 해방된 지금도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부활하는 적군이라니. 그들이 부활할 수 있다는 건 그도 부활할 수 있다는 거겠지만, 그가 죽는 일이 얼마나 있겠나. 그냥 피곤한 게임이구나 싶을 뿐이다.

“싸움이 길어지겠네요.”

─실력 비슷비슷하면 그렇져??

─거점 지배하러 가즈아아ㅏ

“무슨 얘길 그렇게 하세요?”

“아, 시청자분들이 배경 설정에 대해 알려 주셔서요.”

은우는 그렇게 말하며 단검을 내질렀다. 전장이 된 별의 원주민들이 픽픽 쓰러졌다. 거점 가는 길을 방해하는 역할들이다.

“아니, 얘네가 이렇게 쉽게 죽는 애들이 아닌데…….”

“그보다 자기들 싸움에 휘말린 사람들을 죽인다니, 사도들도 착한 놈들은 아니네요.”

─특) 자기가 죽였다

─양심 어디.....?

“그건 그렇죠.”

“그보다 슬슬 거점입니다!”

“제가 먼저 나가겠습니다!”

유일한 돌격형 성좌-헤라클레스를 고른 레드바가 앞으로 튀어 나갔다.

몽둥이와 방패를 든 모습은 레드바의 호리호리한 몸체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으나, 게임 캐릭터 특성상 돌진하는 힘이 만만치 않았다.

“레드바 님.”

“네, 형님!”

은우는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까마귀깃 망토를 여몄다. 그의 몸이 그늘과 동화될 것처럼 칠흑색으로 물들었다.

전생의 동료, 그림자술사가 떠오르는 모양새였지만, 그는 신경을 껐다. 언제까지고 이런 것에 매여 있을 순 없다. 게임을 통해 그는 그것을 깨달았다.

“샛길이 있던데, 뒤에서 끊어 볼까요?”

“어, 그것도 나쁘진 않은데…….”

튜토리얼 당시 시청자들이 떠드는 바에 따르면 까마귀 성좌는 암살자에 가깝다. 그림자에 반쯤 녹아들어 이동하기도 하고 독 바른 단검을 통해 엄청난 딜을 넣으니까.

그렇다면 그에 맞게 행동해야 하지 않겠나. 은우는 협력에 자신 없어서 빼는 제 행위를 그럴싸한 말로 포장했다.

─앗 여기 구간이 좀 삥삥 돌 텐데

─시간 오래 걸려요

─거기에 잡몹이 엄청 많아서;;

─근데 까마귀 성좌면 괜찮을 것 같기도?

─스킬 잘 쓰면 나쁘진 않은데,,,,,

“…도는 게 좋은 선택이 아니면 같이 돌격하겠습니다.”

“아뇨! 켄 님, 지금 까마귀 성좌이시죠? 그러면 이것도 나쁜 선택은 아닐 것 같네요. 그리고 져도 뭐, 어차피 연습 경기인데요! 다른 분들은 어떠세요?”

“우리 구울왕 님, 하고 싶은 거 다 하세요!”

“켄 님이면 뭔들 못 해!”

그렇다고 이렇게 믿어 줄 줄은 몰랐지만.

은우는 양심이 쿡쿡 찔리는 걸 느끼며 경로를 확인한 후 움직였다. 이곳을 몇 번이고 플레이했을 사람들만은 못할 테지만, 훑어본 것만으로 대략적인 파악은 끝냈다.

까마귀가 그림자 속에서 날아올랐다.

▣ 037. 까마귀가 울었다

“동생아!”

팀원끼리는 거리가 멀어도 보이스 채팅이 제공된다. 반면 적군과의 대화는 접근했을 때만 가능하다. 그것도 양쪽 다 음성 채팅을 OK 했을 때만이며, 한쪽이라도 반대하면 말을 전하는 건 불가능했다.

“왜!”

그렇지만 이 판은 친선경기나 다름없으니. 레리와 레드바는 음성 채팅을 켜 놓은 상태였다. 때문에 그들은 서로를 향해 웃으며 소리쳤다.

“누나가 돼서 동생 고생하는 걸 두고 볼 순 없지 않니. 안식을 선물해 주마!”

“안식은 무슨! 모가지 뽑는 게 뭔 안식!”

레드바와 레리가 최초로 격돌했다. 둘 다 돌격형 성좌라서 벌어진 일이었다.

“페르세우스 따위가!”

“미쳐서 가족을 죽인 놈은 빠져!”

레리의 검이 레드바의 방패를 후려치고, 레드바는 몽둥이를 휘둘렀다. 레리가 그 공격을 가뿐히 피하며 방패를 휘둘렀다.

숫제 고대 검투사들의 싸움이었다. 둘 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영웅이란 점이 약간 다르겠지만, 박력은 비슷하다.

“남매끼리 사이가 좋아.”

우유에탄산이 뒤에서 들고 있던 거대한 시계의 시침을 잡고 그대로 당겼다. 시침과 똑같은 형태의, 기운으로 이뤄진 시침이 그 손에 잡혀 올라왔다.

“사이 안 좋은데요!”

“뭐가!”

“탄산 님이 사이좋다고 하셨어!”

“구웨에에에엑.”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레드바의 반응을 알 것 같다.

우유에탄산은 껄껄 웃으며 시침을 그대로 내던졌다.

“레리 님, 서포트할게요.”

우유에탄산이 하는 말에 레리는 레드바의 시야를 의도적으로 가렸다.

“시침 날아옵니다, 레드바 님!”

“노우!”

시침에 맞는 즉시 주변에 역장이 펼쳐지며 그 안의 생물체는 둔화 디버프에 걸린다. 레드바는 시청자의 경고에 따라 몸을 빼려 했다. 레리가 그것을 막아서지만 않았어도 그랬을 것이다.

필사적인 노력 끝에 시침은 피했지만, 대신 승기가 기울었다. 레리는 탄산이 벌어 준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실로 레드바의 목을 딸 준비만을 하는 것 같다. 가죽 샌들을 휘감은 다리가 레드바의 발을 걷어차고, 투구를 쓴 머리로 박치기를 했다. 남매 혈전이었다.

“어휴, 브론즈 냄새! 네뷸라는 어서 랭크 도입 안 하고 뭐 하냐! 브론즈 냄시가 이렇게 진동하는데!”

“님도 브론즈 냄새 나는데.”

“넌 적 팀이냐 아군이냐?!”

“적어도 네 동룐 아님, 수고.”

레리와 같은 팀인 슬리퍼와 산호의 경우 투닥거리면서도 찰떡같은 호흡을 선보였다.

레드바가 발악하는 만큼 시청자들도 딜러들의 공격을 끊기 위해 교전을 이어 나갔는데, 저 둘에 의해 다 막혀 버리는 것이다.

“거점 열렸다! 점거해!”

“제가 갑니다.”

구체를 이용해 다양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산호가 뒤로 물러났다. 그렇지만 이제야 인원수가 맞춰졌을 뿐이다.

“우유야, 켄 님이 안 보이는데?”

묘하게 사투리가 묻어나는 목소리가 외쳤다. 싸움에 참가하되 힐러로서 몸을 사리던 개불은어깨위에였다.

“뒤로 이동한 것 같은데… 도는 구간이 좀 크니까 올 때까지 20초는 더 걸리겠네. 그래도 긴장 늦추지 마.”

“목동 컷!”

“천칭 컷!”

“이번엔 처음이라서 도는 걸 택하셨─.”

“다들 물러서세─!”

레드바와 개불의 목소리가 겹친 채로 울려 퍼졌다.

“켄 님 등장… 악!”

산호가 다급히 외친 말이 그들의 대화 소리를 잘랐다.

“산호 님?!”

“아.”

거점에서 누군가가 뛰쳐나왔다. 산호가 목소리를 내뱉은 지 3초 어림이 지나고 나서 벌어진 일이었다.

“죄송합니다. 조금 늦었네요. 한 명 컷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적 팀 한 명을 죽였노라 고하는 목소리는 미묘한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순간에도 적을 공격했단 점이라.

개불의 체력 바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탄산이 빠르게 대처하지 않았다면 어이없이 탈락했을 것이다.

“아따, 놀랐잖어!”

“산호가 잘렸다!”

개불이 베인 목을 붙잡은 채 황급히 물러났다. 우유에탄산은 상황을 파악하며 스킬을 발동했다.

발밑에 생겨난 역장을 확인한 순간, 은우는 독 대신 어둠을 덧바른 깃털 단검을 던졌다. 그것 또한 스킬 발동을 위한 것으로, 사용할 기술은 ‘그림자의 샛길’이었다.

교묘하게 던져진 단검은 직선으로 나아가며 멀리 있던 슬리퍼를 요격했다. 단검이 나아간 자리에 새까만 그림자가 새겨졌다. 그림자에 녹아들면 더 빨리 이동할 수 있는 까마귀 성좌의 특성상 회피기나 다름없다.

“와! 켄 님이다!”

“벌써 오셨어?”

“오우, 쉣. 산호가 죽었다고? 진짜?”

“피해!”

은우의 몸이 그림자로 스며들며 역장 반경을 벗어났다. 슬리퍼가 다급히 석궁을 발사했으나, 그조차도 전부 피했다.

그림자와 함께 나풀나풀 움직이는 은우의 몸이 난전 속으로 스며들었다.

“레드바 님, 레리 님만 꽉 잡아 주세요.”

“매 사냥 간다!”

“무조건 죽여!”

“아, 우리 형님 건드리면 안 되지!”

레드바가 다급히 궁극기 자세를 취하고, 레리가 그것을 제지했다. 힐러가 붙은 탱커, 레드바를 이길 순 없으나 시간을 끌기엔 충분하다.

반면 슬리퍼와 탄산은 은우를 막기 위해 움직였다. 은우의 스킬 지속 시간은 고작 5초뿐이지만, 그마저도 내주지 않으려 드는 것이다.

“아고, 초보자를 배려하지 못해서 미안할 지경입니다, 켄 님.”

매 사냥으로 인해 억지로 그림자의 샛길이 풀리고, 은우가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슬리퍼가 이제 됐다고 생각할 무렵, 은우의 눈이 보석처럼 다채로운 빛을 흘렸다.

“괜찮습니다, 슬리퍼 님.”

망토가 펄럭이며 까마귀들처럼 보이는 것들이 사방으로 쏟아졌다.

까아아악!

까마귀의 울음소리와 함께 발동되는 그것은 까마귀 성좌의 궁극기, ‘까마귀의 합주’다.

“경쾌한 연주를 들어 보게.”

전용 대사가 희미한 웃음기와 함께 내리깔렸다.

스킬 이름에 걸맞게 까마귀의 합주는 엄청난 수의 까마귀를 사방으로 뿌렸다. 검정색 새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그림자가 생겨나고, 까마귀 자체가 사람들의 시야를 방해했다.

“궁?!”

“와, 저걸 생각 못 했네. 역시 젊은 사람은 생각하는 게 달라?”

까마귀 사이에 숨겨진 암검이 슬리퍼와 탄산의 발목에 박혔다. 암검은 마구잡이로 난사되지, 이렇게 세밀한 조종이 가능한 궁극기가 아니었는데, 놀라운 일이었다.

“와악! 어케 맞추셨대!”

“한 번에 부상 판정 나왔어.”

Nebula War는 특정 부위를 노리면 ‘부상’을 입힐 수 있다. 발목의 경우는 걷는 데 불편해지는 쪽이다. 다르게 말하면 회피에 어려움이 생긴다는 것과 같다.

그리고 움직임에 어려움이 생긴 이들을 잡는 건 결코 어렵지 않다. 사거리가 짧은 대신 대미지가 높은 까마귀 성좌의 단검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숙련자분들을 배려해 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네요.”

“켄 님, 그렇게 안 봤는데 멕일 줄도 알았네요?”

우유에탄산은 지금이라도 한 사람을 거점에 보낼까 고민했다. 그러나 점령 게이지가 차기도 전에 도륙당할 게 뻔했다.

수가 많은 지금조차 밀리는데, 수가 줄어들면 더욱 쉽게 각개격파 당할 테지. 그녀는 결국 그 방법을 포기했다.

“노익장의 여유!”

우유에탄산은 강력히 저항했다. 궁극기와 회피기를 적절히 섞은 슬리퍼와 연계는 참으로 대회 나가는 이다운 모습이었다. 개불 또한 숨을 돌리자마자 힐을 넣기 시작했다.

단지 그런 팀워크 속에서도 은우는 살아남았다. 그뿐 아니라 적 팀의 피를 개불의 힐보다 더 빨리 깎아 냈다.

튜토리얼 내내 온갖 성좌를 다뤄 본 결과물이었다. 은우는 그들의 공격을 전부 꿰고 있었다.

“컷.”

그렇게 탄산을 보내 버린 은우는 다음 타깃을 찾았다. 그가 노리는 이는 뒤로 물러나 궁극기를 쓸 준비를 하는 개불이다. 슬리퍼의 공격은 그의 신경을 건드리지도 못했다.

레드바와 시청자는 레리를 제대로 잡아 주는 것만으로도 할 일을 다했다.

“와, 나 아까 입 괜히 털었네. 박제했지, 늬들?”

“역시 우리 행님! 죽여 버려요!”

“아아, 이게 뭐람!”

“와아악! 젊은이! 불쌍한 힐러 목숨 좀 살려 주시게!”

“노인 공경! 켄 님, 노인 공경!”

“레리야! 아무리 그래도 나한테 노인이라니!”

개불은 켄이 자신에게 도달하기 전에 궁극기를 쓰려고 발악했다. 사용만 하면 아군의 HP를 다 회복시킬 수 있으니 이것밖에 매달릴 게 없었다.

그러나 목, 즉 성대 부분이 잘려 나간 탓에 그의 궁극기 시전 시간은 늘어나 버렸다. 대충 켄이 탄산을 죽이고 슬리퍼의 공격 사이를 누비며 그에게 도달할 만큼.

‘잠깐, 그래서 처음부터 목을……?!’

개불이 깨달음을 얻었을 때, 은우의 단검이 그의 목을 베었다. 끝까지 목을 고집하는 게 보통 성깔이 아니었다. 개불은 떠오르는 사망 표시에 이마를 붙잡았다.

“한 명 컷.”

성좌를 외우지 못했는지 다만 단위를 속삭이는 목소리가 보이스 채팅으로 울려 퍼졌다.

“인간이세요?”

졸지에 역전당한 슬리퍼가 허망하게 물었다. 아무렴 켄 혼자 산호와 우유에탄산, 개불을 잘랐다. 솔직한 심정으론 굳이 이렇게 뒤를 돌아오는 식의 희망 고문을 해야 했을까 싶을 정도다.

“음.”

슬리퍼의 물음에 은우는 뒷덜미를 쓸었다.

“인간이 아니면 뭐겠습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냐, 형 이제 인정해 형 인간 아니야

─구울왕이시여!!!

슬리퍼의 헛웃음 소리가 보이스 채팅으로 여실히 전해졌다.

“저, 어차피 죽을 거 좀 멋있게 죽으면 안 되나요?”

“멋있게라면, 어떤?”

“…일대일?”

“지금도 일대일입니다만.”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아, 그럼 저도……! 껴 주세요!”

아직도 레드바와 접전을 벌이고 있던 레리가 다급히 외쳤다. 힐이 끊긴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반피 넘게 남아 있는 상태다.

레리의 외침에 레드바가 슬금슬금 공격을 멈추었다. 졸지에 휴전 상태가 됐다.

“그래도 됩니까?”

“…어, 안 될 건 없죠?”

─이게 게임이냐ㅋㅋㅋㅋㅋ

─아니 협력게임 어디갔어ㅋㅋㅋㅋ

─팀전이 아니라 사실 개인 대 팀전이었던 거임ㅋ

─지금 우탄 땅치고 있는데ㅋㅋㅋㅋ

─대전 모드냐고ㅋㅋㅋㅋㅋ

팀전 게임에서 벌어지기 힘든 기묘한 상황에 모두가 떨떠름해졌다. 그 애매한 정적을 깬 것은 유일하게 살아 있는 시청자 팀원이었다.

“와! 그럼 저, 성하랑 슬리퍼 님을 동시에 상대하는 켄 님을 코앞에서 볼 수 있는 거예요? 맨눈으로!?”

“어… 그러네?! 형님, 가자! 형님, 무조건 가자!”

시청자의 의견에 레드바가 눈을 빛냈다.

“…두 분은 괜찮으십니까?”

“저야 상관없죠.”

“켄 님이야말로 오히려 괜찮으신지.”

내적으론 어떨지 몰라도 외적으론 일단 불공평한 싸움이다. 은우는 괜찮다는 사인을 보냈다.

“전 괜찮습니다.”

“와와와! 그럼 어서 자리 잡죠!”

“근데 동생아, 그거 아니?”

“응?”

“우리가 켄 님 이기면 다음은 너희라는 거.”

“…켄 형님! 파이팅입니다!”

그렇게 2 vs 1 매치가 성사되었다. 원래 이런 게임인가? 은우는 고민해 보았지만, 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저 상대의 앞에 섰을 뿐.

“잘 부탁드립니다.”

페르시우스 성좌의 레리가 전면에, 궁수 성좌의 슬리퍼가 후위에 섰다. 은우는 그들을 지그시 응시하다가 손에 쥔 단도를 역수로 쥐었다.

“자, 그럼 고!”

게임의 본래 의미를 잊은 듯 너무 신난 레드바의 함성과 함께 은우는 ‘그림자의 샛길’을 사용했다. 단도가 날아간 자리로 그림자가 새겨졌다.

레리의 다리에 빛이 어리며 스킬 ‘탈라리아의 날개’가 발동했다. 이동속도가 순간적으로 상승하는 해당 스킬은 기실 쓰임새가 따로 있지만, 이렇게 써먹어도 나쁠 것은 없다.

단도가 레리를 지나 뒤로 허무하게 날아갔다.

그렇지만 은우는 애당초 레리를 맞추기 위해 던진 게 아니었다. 은우의 몸이 그림자에 녹아들며 빠른 속도로 전진했다.

“매!”

하나 매가 날아옴에 따라 그림자가 끊어졌다. 궁수 성좌의 ‘매 사냥’. 딜링이나 이동기가 아닌 대신 정찰이 가능하고 남이 선포한 영역을 멋대로 끊어 버리는 스킬이다.

은우가 예상했다는 듯 그림자 밖으로 튀어나오며 단검을 내던졌다. 동시에 레리의 검에 빛이 서렸다. ‘탈라리아의 날개’에 붙어 있는 부가 효과, 피해량 상승이었다.

은우의 손이 새 스킬을 발동시킬 준비를 했다.

* * *

‘그림자 베일인가!’

레리는 짧은 시간 동안 방어막을 생성해 내어 무적 판정을 받는 까마귀 성좌의 스킬을 떠올렸다. 해당 스킬의 사전 동작이 지금 켄이 하는 것과 같았다.

그녀의 검로가 살짝 틀어지며 바닥을 긁었다. 언젠가 켄의 방송을 보며 배운 기술이었다.

“레리 님, 제법이시네요.”

끈적하게 녹아내린 석청처럼 밀도 높은 목소리가 귓가에 달라붙었다.

“어?”

레리에 보이는 켄의 손이 형태를 바꾸었다. 저건 ‘그림자 베일’의 사전 동작이 아니다. 사용 시 해당 소리를 들은 자들에게 죽음의 낙인을 찍고 2초간 피해를 주는 ‘우는 까마귀’다.

그것을 깨달은 레리의 검로가 다시 바뀌었다. 억지로 방향을 튼 것이기 때문에 반동이 왔지만 버텨야 했다.

검술 쌤이 이러면 손목 나간다 했는데, 게임이니까 괜찮겠지.

까아아악!

체력 바가 뚝뚝 떨어지고, 그녀의 얼굴 반쪽에 낙인이 떠올랐다.

그녀가 인지하는 세계 속 상대는 허공에 떠 있다. 아니, 떠 있나?

“레리 님아, 화살 비 간다!”

동료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들리지 않았다.

레리는 본능적으로 그녀가 들고 있는 방패, 아이기스의 스킬을 발동시켰다. 일정 시간 동안 받는 피해를 줄이는 ‘제우스의 축복’이었다.

그와 동시에 체력 바가 조금 나동그라졌다. 감각을 따라가면 그녀의 목과 겨드랑이, 허벅지에 단검이 박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갑옷에 가려진 부위와 아닌 부위에 방어력 차이점이 있는 것도 아니건만, 참 결벽적인 타격이었다.

“스킬이 참, 귀찮네요.”

켄의 발이 그녀의 방패를 걷어참으로써 공중 텀블링을 했다. 스킬 ‘화살 비’가 켄이 있던 자리에 쏟아졌다. 켄의 어깨와 모자에 화살이 꽂혔지만, 부상은 입지 않은 듯하다.

착지와 동시에 날아오는 독 단검을 레리는 방패로 쳐냈다. 켄의 다리가 두다다다 슬리퍼가 있는 자리로 달리기 시작했다. 탱커로서 딜러가 당하는 걸 두고 볼 순 없다. 레리가 다급히 그를 뒤따랐다.

푹푹푹푹!

속사 모드인지 슬리퍼의 화살이 켄을 향해 연달아 쏘아졌다. 놀랍게도 켄은 역수로 쥔 단검으로 화살들을 전부 흘려보내고 쳐 내었다.

“후, 과연 구울이십니다.”

─성하 어서 처단하시지요

─이단을 처형하자!!

─저 분 진짜 뭐하는 사람이에요??

─인간인 척하는 이종족의 목을 뽑아버리자!!

탈라이아의 날개 쿨타임이 돌았다. 레리의 다리에 빛이 어렸다. 켄의 몸이 순간 확 틀어지며 레리에게 달려들었다.

단검이 그녀를 향해 쏘아지고, 방패로 막아선다. 그사이에 접근한 사내의 손이 또 다른 단검으로 방패를 긁었다.

레리는 그 순간 ‘하르페의 처단’을 발동했다. 그녀의 검에 거대한 빛이 어리며 온몸에 힘이 실렸다.

캉! 캉! 캉!

레리의 검이 켄을 몰아쳤다. 다만 조악하기 그지없는 단검은 빛 어린 검 앞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타격이 안 들어가……!”

그녀가 검을 내려 꽂을 때마다 단검이 그 검날 아래를 미끄러지며 방향을 틀었다. 스킬의 효과 덕에 억지로 회전을 이어 나가지만, 켄의 몸에 직격하는 건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켄은 한 손으로만 그녀의 공격을 흘려 내고 있었다!

이게 사람이야? 레리가 이를 악물 무렵, 켄의 녹색 눈동자가 한쪽으로 쏠렸다. 지금껏 놀고 있다고 생각한 그의 손이 새로운 단검을 생성했다. 일반 단검이 아니라 스킬용 단검이다.

그림자의 샛길. 그가 단검을 던지고 바로 그림자에 녹아들었다. 까마귀보다는 수면을 떠도는 돌고래처럼 우아하게 나부끼는 깃이 마치 고래의 꼬리와 같으니.

“오래 살아 좋을 게 뭐 있겠나!”

피잉!

슬리퍼 님이 궁극기를 썼는지, 특유의 대사가 흘러나왔다.

거대한 파공음과 함께 켄이 있던 자리를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일반 화살을 몇 배나 부풀려 놓은 그것은 궁수 성좌의 궁극기, ‘불사자의 안식’이다.

이걸로 궁 하나가 사라졌다. 그림자에 녹아들어 후퇴했던 켄이 도로 되돌아왔다. 단검이 그녀에게 짓쳐 들었다. 제우스의 축복을 엉겁결에 사용했지만, 그런다고 HP가 아예 안 깎이는 것은 아니다. 이제 그녀의 피는 거의 바닥이었다.

“와, 진짜 못 당하겠네요!”

레리는 어차피 죽을 거 궁극기나 쓰고 죽자는 마음으로 스킬을 발동했다. 그녀의 허리춤에 달랑거리던 주머니가 멋대로 열리며 한 줄기의 빛이 그녀의 방패에 매달렸다.

“신이시여! 제게 승리를!”

‘키비시스의 메두사’. 정면으로 맞으면 석화된다. 대상에 남은 체력에 반비례해서 석화 시간이 증가하는 이 기술은 조건이 사악할 뿐 무시무시한 스킬이었다.

“그거, 체력 반비례잖습니까.”

다만 그래. 그녀가 간과한 것은 켄이 지금껏 깎인 체력이 정말 적다는 것. 그 정도 체력으로 석화에 당해 봤자 0.1초도 되지 않는다.

켄의 단검이 그녀의 목을 베었다.

“이제 하나 남았네요.”

빛이 되어 사라지는 페르세우스의 사도를 두고 까마귀가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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