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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자도 방송할 수 있습니다-64화 (64/233)

64화

은우는 광고를 찍기 위해 세트장에 방문했다. 한 번도 가 볼 일 없던 곳이라 새삼 신기했다.

그는 헬멧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직원을 따라 움직였다. 직원은 안내와 함께 그가 해야 할 일을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은우의 뒤편에선 다이아박스에서 보내 준 사람이 조용히 따라왔다.

“가장 먼저 균열 사냥꾼 트레일러 영상에 들어갈 장면을 찍을 겁니다.”

“네.”

“외국에 내보낼 홍보 영상 겸 곧 업데이트될 스토리 홍보 영상이라서요.”

직원은 새로운 보스가 나올 거라며 재잘거렸다. 은우에겐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였다.

새로운 보스 홍보 영상인데 설마 옛것을 우려먹겠나. 당연한 이야기를 제치고 보면 남는 건 업데이트될 스토리인데, 이쪽은 더더욱 관심 없다.

킨슨 쪽에선 업데이트를 기념해서 다시 방송해 주길 바랄 터. 그러나 추가된 스토리라고 해 봐야 분량이 얼마나 나오겠나.

게임이 크게 달라진 게 아닌 이상 별로 메리트가 없다. 차라리 스토리가 많이 쌓이길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하는 게 은우 입장에선 나았다.

“여기 안에 캡슐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미리 일러 주신 대로 동화율도 조절했고요.”

“감사합니다.”

그가 얼굴 내보이기 싫어하는 걸 알아 캡슐 주변에는 가림막이 쳐져 있었다. 은우는 만족스럽게 그 안으로 들어갔다.

캡슐에 접속하자 익숙하지만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광화문 광장이었다.

슬쩍 자기 자신을 살피면 균열 사냥꾼 속 그의 캐릭터를 발견할 수 있다. 검정색 코트에 검에, 바지, 부츠.

“헬멧이…….”

심지어 부서진 후 다시 구매한 적 없던 헬멧까지 복구되어 있다. 기분이 썩 좋아졌다.

[게임 캐릭터는 켄 님이 본래 쓰시던 캐릭터에서 레벨만 올렸습니다. 보스는 혼자 잡을 수 있도록 약화해 두었고요.]

직원의 친절함에 감탄이 새삼 나왔다. 이 회사가 미쳤나?

“약화 안 한 보스를 잡는 건 안 됩니까?”

[네?]

레벨이 올라간 거야 큰 문제는 아니다. 확인해 보니 여분의 포인트만 새롭게 생겼을 뿐 크게 강해지진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보스를 왜 약화시킨단 말인가.

“본래 성능도 한번 경험해 보고 싶은데…….”

머리 하나는 작은 직원이 난처한 표정을 했다. 이 부탁이 곤란하다기보단 생각도 못 한 내용에 놀란 쪽이다. 거기서 은우는 가능성을 엿봤다. 잘하면 본래 성능과도 붙을 수 있겠다.

“안 되겠다 싶으면 바로 포기하겠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상부에 보고를 해야 해서…….]

“네.”

은우는 배가 부를랑 말랑 한 맹수의 심정이 되어 차분히 기다렸다. 여기서 허기가 질지 아닐지는 다음 상황으로 결정될 것이다.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다만… 아시죠? 약화된 버전으로 다시 찍으셔야 할 수도 있습니다.]

“유의하겠습니다.”

그는 광화문 광장에 서서 쌍검을 고쳐 쥐었다. 확인해 본 바, 다른 기본 무기들도 있으니 얼마든지 스위칭하면서 싸울 수 있으리라.

[이제 곧 시작합니다. 아까 들으셨던 콘티를 기억해 주세요. 대답은 괜찮습니다.]

킨슨사는 자연스러운 영상을 바랐기에 개입을 최소한으로 한다 했다. 그러니 앞으로 지시가 들려오는 일은 거의 없을 거다. 다시 찍으면 찍었지.

곧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텅 비었던 광장에 생기가 불어넣어졌다.

은우는 목덜미를 쓱 쓸었다. 평화로운 사람들 사이에 그 혼자만 헌터로서 껴 있으니 느낌이 묘하다. 현실에서 유리된 것 같은 이질감이라고 해야 하나. 킨슨이 의도한 분위기일 것이다.

“너, 근데 그거 믿어?”

“뭐?”

“예지자가 나타났다는 거.”

“요즘 이상한 종교가 그렇게 극성이라더라.”

“으웩. 진짜? 할 것도 없다.”

“또 전염병 퍼트리는 거 아냐?”

“에이, 설마.”

“광휘 길드가 요즘 시끌시끌하던데…….”

“구호 기금 괜히 기부했어.”

“야, 그래도 할 일은 하잖아.”

“마창은 요즘 뭐 하냐?”

“마창 계속 외국 돌고 있던데.”

“우리나라나 지키지 왜…….”

“불법 스틸러 심정을 어떻게 알겠어.”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유난히 깨끗하게 들렸다. 은우는 그런 그들의 말을 듣다가 이순신 동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균열이 열릴 거라는 말을 미리 듣긴 했지만, 위치는 따로 듣지 못했는데 왠지 그곳일 것만 같았다.

아무렴 예전에 봤던 게임 시작 영상에선 이순신 동상 앞 허공에 균열이 나타났지 않나. 추측일 따름이지만 은우는 그게 진짜일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나아갔다. 발은 소음 없이 전진하고 손은 쌍검을 굳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이순신 동상 앞 허공이 쭉 찢어졌다. 균열 사냥꾼의 가장 큰 특징인 균열이다.

헬멧 속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끼아아아악!”

“도망쳐!”

“균열이야!”

균열 근처에 있던 이들이 경악하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균열을 못 봐 어리둥절하던 사람들도 균열 주변인들이 도망치자 얼떨결에 도주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뒤돌아봤을 때 균열을 목격해 내면 타의가 자의로 변한다.

“미쳤어!”

“엄마아!”

사람들이 사방으로 퍼지는 와중에 은우는 그 인파를 역으로 거슬러 갔으니.

균열에서 무언가가 발을 쿵, 내밀었다. 오크다. 은우가 균열 바로 앞에 선 것도 그즈음이었다.

크어?

균열 밖으로 얼굴을 내민 오크가 은우와 눈을 마주한 순간 그 목이 날아갔다. 머리가 달아난 몸뚱이는 바닥으로 철퍼덕 엎어진다.

그그그극-

오크의 시체를 밟고 고블린이 튀어나오는 사이 은우의 검이 균열 주위에 원을 그었다.

크륵?

고블린이 깡총깡총 원 바깥으로 나가려는 순간 검이 검은 궤적을 새겼다. 고블린이 쪼개졌다.

“웨이브 형은 질색인데.”

쪼갠 검은 허공에서 결벽적으로 털어진다.

“얼마나 베어 넘겨야 우두머리가 나올까.”

오토바이 헬멧에 햇빛이 미끄러져 내렸다.

“열? 스물?”

검날이 번쩍일 때마다 잡몹의 목이 달아났다. 오랜만에 하는 균열 사냥꾼이지만, 마나 다루는 법은 감각에 새겨져 사라지지 않았다.

“날이 좋아 출전을 결심했건만…….”

적지 않은 잡몹을 잡고 나서야 우두머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완벽한 인간형 몬스터다.

그렇지만 은우는 그 몬스터에서 다른 게임의 잔재를 찾았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카카라족과 상당히 흡사하다. 그러니까, 귀 대신 뿔을 달고 있다는 점이나 피부가 회청색이란 점이.

대충 용인족이란 설정이 아닐까 싶다. 용의 손 같은 건틀릿─혹은 건틀릿 같은 용의 손─이 확신을 더했다.

“날파리가 끼어들었구나.”

눈동자가 없이 흰자위만 가득한 안구로 그것은 은우를 내려다보았다. 키가 3m쯤 되어 보이는 탓도 있고, 공중에 떠 있어서 그런 것도 있다.

“뭐, 됐다. 들어라, 천한 생명들아. 나는 아스타로트 님을 모시는 제1군단장, 에르키텔이다.”

은우는 본인을 에르키텔이라 소개한 놈을 천천히 살폈다.

눈에 띄는 무장은 검과 건틀릿. 건틀릿은 손톱 부분이 날카로워 무기로 취급할 만하다.

검은 형태만 보면 일단 바스타드 소드 같다. 검 폭이 넓지 않고 손잡이가 크다. 그렇지만 길이가 너무 길었다. 사용자의 키를 감안해도 길다.

그 외에는… 치렁치렁한 옷차림이 거슬린다. 발목까지 오는 코트 자락이 유독 눈에 밟히는 건, 저런 종류의 코트를 시청자들이 그에게 입히려 한 적이 있어서다.

“이 일대를 피로 물들여 아스타로트 님의 이름을 널리 알리리라!”

트레일러용이라서 그런 건지 원래 설정인진 몰라도 긴 대화는 없었다. 은우는 쌍검을 든 채 녀석에게로 달려갔다.

참고로 방금 전까지 대화를 들어 준 건 콘티에서 그걸 요청해서다.

은우와 아스타로트의 검이 맞부딪치기 시작했다.

▣ 064. 이젠 알 것 같은 우울함

“뭐라는 건지.”

인간은 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다.

“난 인간이다.”

“넌, 신이다.”

그는 괴수신의 말에 픽 웃었다.

신은 개뿔. 그는 인간이다. 특별한 능력이 없고, 그나마 가질 수 있던 특별함마저 타고나지 못한 인간이란 말이다.

“네놈, 먹는다. 먹을 거다.”

신의 손에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그것은 아주 거대한 검의 손잡이다. 오직 손잡이뿐이다.

“어린 신, 먹어 치운다.”

살점이 다시 뭉그러지고, 머리통에 크게 붙어 있던 눈동자가 감겼다가 형태를 달리한다. 뱃가죽에 붙어 있던 입과 이빨이 위치를 옮기더니 일반적인 인간의 입 자리로 이동했다.

그것이 잡은 손잡이에서 희푸른 기운이 뿜어지며 존재하지 않던 검날을 만들었다.

“그러면 지금보다 더 대단한 존재, 될 수 있다. 저 밖에서 날 보는 것들, 먹을 수 있다.”

강자들의 멍청한 특징은 자랑하다가 정보를 누설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 누설을 감사히 받아들이며 정체를 추론했다. 상대를 먹어서 나아지는 것. 보는 것만으로 외형을 베끼는 것. 형태를 온전히 갖추기 전 뭉개진 살점 덩어리에 불과한 것. 모습을 바꿀 때의 과정.

찰나를 쪼개어 만든 새로운 찰나에 추측이 그의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구울인가…….”

산도 갈라 낼 수 있는 거검이 휘둘러졌다. 저것 한 번이면 이 전장에 있던 괴수들은 물론 동료마저 휘말릴 가능성이 있으나, 그는 경고할 여유조차 갖지 못했다. 동료들이라면 알아서 살아남을 거란 믿음도 있었다.

다만 사고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신이란 이름값답게 먹지 않고도 상대의 외형을 베끼는 것일까? 일부 구울은 먹은 개체의 능력을 사용하는 것도 있다. 저 신은 어디까지 가능하지?

그러고 보니 아까 그 뭉개진 살점들은 온갖 괴수의 형태가 섞여 있었다. 설마 지금까지 먹어 왔던 모든 것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나?

거대한 검날과 그의 검이 맞부딪쳤다. 일반적인 검과 달리 기운으로만 이뤄진 검은 검 면에 닿아도 타격을 입으니.

그는 검 면에 닿지 않도록 검으로 막아 가며 돌진했다. 엄청난 과부하가 신체에 쏟아졌지만, 억지로 버텨 냈다. 턱없이 부족한 기가 그의 몸을 휘감으며 파열만은 간신히 막아 냈다.

이런 거엔 지지 않는다. 그는 이를 악물고 거검의 반경에서 튕겨 나갔다. 텀이란 게 없다는 듯 신은 다시 거검을 휘둘렀다.

상대가 구울임을 안 이상 상처를 입어 체액을 흘려선 안 된다. 보지만 해도 복제하는 저것이 그의 신체 일부까지 먹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인간은 그런 빌어먹을 제한까지 떠올리며 검을 피했다. 휘둘러진 것의 여파로 인 바람이 그의 몸을 강렬하게 때렸다. 몽둥이로 얻어맞은 기분이다.

“어린 신, 맛있는 것.”

그 와중에도 신은 그를 어린 신이라 불렀다. 인간은 무기를 치켜세웠다.

자신이 인간임을 고집하는 그는 신의 말을 새겨듣되 흘려보냈다. 그는 실로 인간일뿐더러 만일 그가 신이더라도 상황이 바뀌는 일은 없다.

“너의 본질, 무엇? 신성 어디?”

그러니 모은다. 쌍검의 끝에, 기를, 다가올 거대한 벽을 가르고 부숴 낼 파괴적인 기운을.

푸른 눈동자가 순간 흰자위만 보이며 참격이 일어났다. 기운으로 이뤄진 거검의 날이 인간이 내지른 검에 부서졌다.

그러나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인간은 숨을 되잡으며 신을 살폈다. 거검 따윈 그저 맛보기에 불과했다는 듯 신의 손에 다른 무기가 들렸다.

그래. 이래야지. 이래야 신이지.

그가 전력을 다해서 겨우 평타를 파훼할 수준은 되어야 신이지. 도저히 죽음밖에 미래가 그려지지 않아야 신을 상대한다는 게 실감나지.

이래야 이기는 맛이 나지.

살고 싶지 않아서 전장에 몸을 던지는 주제에 절박한 승리에 미친 인간이 쌍검을 조작하며 달렸다. 쌍검은 한쪽에 두 개의 날이 달린 창이 되어 신을 노렸다.

“이상해.”

잠깐 방심이라도 했나. 인간은 신의 몸체에 타격을 주었다. 녀석의 어깨가 두 갈래로 패인 것이다.

하지만 그 상처는 고속으로 메워졌다. 재생력이다.

운 좋게 넣은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 상황이나, 그는 굴하지 않았다. 저런 녀석들은 재생력에 한계가 있거나, 절대 회복되지 않는 약점이 있다. 그는 그걸 찾으면 된다. 그럴 수 있다.

그럴 수 있을까?

죽음이 그의 목을 죄었다.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직감에 따라 그는 다급히 바닥을 굴렀다. 촉수들이 대지에 여럿 박혔다. 그를 붙잡기 위해 쏟아지는 것들도 있었다.

그 와중에도 검은 기류가 인간의 발목을 잡고, 사방에서 생겨난 불덩어리들이 그를 따라다니며 요격하려들며, 대지가 부지불식간에 갈라지며 그의 균형을 무너트린다.

“신성, 있나?”

완전한 회피란 것은 불가능해서 피와 살점을 일부 내주었다. 그것을 먹은 신은 온전한 인간의 형으로 변화했다. 인간이 평생 쌓아 온 모든 것을 베껴 낸 것은 물론이었다.

특수 능력에 대인전에선 이겨 낼 자가 없노라 평가받는 무력까지. 놀랍게도 신은 자신의 뼈와 근육 섬유로 무기까지 재현해 냈다.

“먹으면, 보이겠지.”

안 그래도 밀리던 전세가 더욱 밀린다. 인간은 금세 피 칠갑을 했다.

그렇지만 신에게 무수한 능력이 있다면 인간에겐 무수한 무기와 그 이상의 날카로운 재능 하나가 있었다.

그가 이곳까지 오게 만든 유일한 특별함이고, 그가 가진 유일한 유능이니. 그건 성장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능력이다. 모두가 가지고 있지만, 모두가 이뤄 낼 순 없는 것.

까앙!

일방적이던 공격이 언제부턴가 쌍방으로 교환되기 시작했다.

회피밖에 하지 않던 몸이 언제부턴가 맞서기 시작한다.

기회를 잡지 못해 밀리던 인간이 조금씩, 조금씩 나아갔다. 신이 능력을 달리하면 다시금 밀렸다가도 또 한 번 변화하여 이겨 냈다.

줄어들던 기가 어느 순간부터 순환을 거듭하며 그 부피를 유지했다.

“왜, 신성 없어? 이건, 말도.”

두 번째 밤이 다가왔을 때, 인간은 제가 제 입으로 인간이라 말했음에도 믿지 않는 신을 보며 비웃었다.

“멍청한 신에게 고하지.”

신이 되기 위한 조건은 딱 세 가지. 추앙받음으로써 신성을 가지고, 종을 초월한 능력을 가짐으로써 종의 한계를 탈피하고, 타인에게 믿음에 대한 대가를 줄 수 있어야 한다.

“난 인간이다.”

그렇지만 그는 신성이 없었고 타인에게 믿음에 대한 대가를 줄 수 없었다. 그러니 인간이었다.

“그럴 수 없어!”

“있어.”

그리고 동이 트기 전 가장 어두운 순간에.

인간은 자신의 오른팔과 신의 머리를 교환했다.

* * *

직원이 중지를 요청하지도 않았으므로 은우는 꾸역꾸역 아스타로트의 끝을 보았다.

그렇지만 그에게 남은 건 허탈함이었다. 본래라면 그래도 재미를 느꼈을 것 같은데, 지금은 그저 망연하기만 했다. 며칠 전 꾼 꿈이, 그 시절의 잔상이 아직 남아 모든 것을 퇴색되게 만드는 것이다.

일상이 망가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너무 강렬한 기억이 비슷한 종류의 순간을 덮어 버리는 것에 가깝다.

“잘 만드셨네요.”

은우는 의무적으로 인사치레를 남기며 검을 칼집에 집어넣었다. 검정색 연무로 변해 흩어지는 에르키텔의 모습이 허무하다.

물론 인간형과 용 형태를 오가며 적절히 공격하는 에르키텔은 지금까지 잡았던 균열 사냥꾼 보스 중 제일 나았다. 괜히 홍보 영상용으로 뽑힌 게 아니었다.

아마 꿈을 꾸기 전이었다면 그럭저럭 만족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재미를 느끼기에는 그의 과거가 너무 무거웠다. 아무렴 목숨을 내건 싸움 중에서도 가장 치열했던 순간이다. 데이터 쪼가리가 그것을 압도할 수 있을 리 없다.

은우는 목덜미를 쓸었다. 차라리 배신의 순간을 꾸었다면 나았을 것이다. 트라우마이긴 하지만 거의 이겨 낸 상태고 익숙하니까.

그렇지만 왜 하필 잊고 살던 괴수신과의 싸움을 꿨는지.

덕분에 이유를 모르겠는, 그렇지만 이젠 알 것 같은 우울함마저 살아났다.

그건 더 이상 목숨 건 싸움을 할 수 없는, 그보다 더 강한 자를 만날 수 없다는 현실에서 오는 애석함이다.

“들리십니까?”

[아, 아! 네. 이제 로그아웃해 주시면 됩니다.]

“네.”

답이 조금 늦긴 했지만, 은우는 신경 쓰지 않고 로그아웃했다. 킨슨 쪽에서는 그의 방송을 기대하겠지만, 이때가 기억에서 잠잠해질 때까지 건드릴 일은 없을 것 같다.

“저걸 진짜 잡네…….”

“저거 거의 잡지 말란 심정으로 만들었다 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최종 템 다 챙기고 패턴 다 외워야지만 잡을 수 있을 거랬는데…….”

은우는 직원들의 뒷말을 무시한 채 가림막을 나갔다. 쑥덕거리던 직원들이 서둘러 다음 작업을 진행했다.

레이싱 게임 광고는 또 다른 쪽에서 찍는지 장소를 옮겨야 했다. 언급될 필요가 없어서 그런지 콘티에선 딱히 못 들었던 부분이다.

아무래도 개발 부서가 달라서 그런 듯하다.

“레이싱 게임은 처음이신 거 맞으시죠?”

“네. 처음 맞습니다.”

광고 찍기 전 연습이라도 해 볼까 했지만, 킨슨 쪽에서 절대 연습하지 말라고 해서 영상도 안 보고 왔다. 덕분에 레이싱 게임 경험은 이게 최초였다.

“그럼 저희 ‘크루 러시Crew rush’, 잘 부탁드립니다.”

“예.”

은우는 기대감을 접은 채로 다음 광고를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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