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단계가 점차 올라간다.
다섯에서 열.
약하다.
두 사람의 데이터를 뒤섞은 하나.
이럴 거면 왜 섞었지?
데이터를 뒤섞은 하나에서 데이터를 뒤섞은 셋. 다섯.
조율이 안 돼서 그런가, 합공이 형편없다.
데이터를 많이 뒤섞은 하나.
좀 나은가.
데이터를 많이 많이 뒤섞은 다섯.
재롱을 보는 것 같다.
·
·
·
그들이 수집한 모든 무술가의 데이터를 집합한 넷.
아, 정말이지.
▣ 072. 뜬금없기는 매한가지
심장이 쿵쿵 뛴다. 은우는 자신의 심장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머리로, 팔로, 다리로 그리고 다시 심장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호흡은 철저한 계산하에 억제되어 온몸에 산소를 전달하고 이물질을 뱉어 냈다.
그의 앞에는 네 명의 인형이 있으니. 여성 둘, 남성 둘. 우연스럽게도 과거 그를 배신 때린 놈들과 숫자와 성비가 일치한다. 심지어 무기도 비슷했다.
괴수신까진 바라지 않는다 기원했더니 그다음 순간을 실현해 내는가. 그렇지만 따라한 것은 외형에 불과하다. 내용물은 전혀 달랐다.
그러니 기대하지 말자. 기대하지 말자…….
은우는 연이은 전투로 인해 턱까지 차오른 숨을 삼켰다. 직원들이 원 상태로 돌려 주겠다는 걸 매번 거절한 끝에 벼랑까지 내몰린 체력이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 기분이 나지 않았다. 불안했던 대로 가짜는 가짜에 불과했다.
[이걸 마지막으로 하겠습니다.]
“예.”
은우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아무렴 지금까지 겪은 것들로 비추어 본 바, 난이도를 더 높인다 한들 달라질 게 없어 보였다. 신체도 마침 한계고.
[5초 후에 시작하겠습니다.]
그는 호흡을 다스리기 위해 다른 걸 생각했다.
신체가 과도한 산소를 필요로 하는 건 체내에 있는 모든 것을 불태우기 위함이니. 태워지는 것은 대체 뭘까.
[5.]
그가 먹고 소화한 무언가? 그의 살가죽 아래 쌓인 지방? 아니면 그의 재능이라거나 그가 쌓아 올린 업이라거나, 그도 아니면 기억, 경험.
모든 것.
[4.]
통각을 살린 덕에 아릿한 통증이 온몸을 때렸다. 얕게 그의 피부를 가른 생채기들 때문만은 아니다.
싸우는 동안 그의 신체가 본래 낼 수 있는 능력보다 더 많은 힘을 내었기에, 실제였다면 근육이 송두리째 녹아 버릴 지경으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3.]
하지만 이건 전부 가짜잖아? 어차피 사라질 것들이라면 이렇게 불사르는 것도 나쁘진 않잖아.
[2.]
상념이 끝났다. 은우는 사리문 채 웃고는 검을 쥐었다.
[1!]
구현된 네 명의 가짜들이 덤벼들었다.
* * *
“왜……?”
영웅은, 인간은, 그는.
기침과 함께 피를 뱉었다. 그의 배에는 생사고락을 같이하던 전우의 레이피어가 꽂혀 있었다. 화검사의 레이피어다.
“우린 널 버리기로 결정했어. 그동안 수고했어, ─.”
어째서. 묻기도 전에 레이피어가 뽑혀 나갔다. 금빛으로 물든 핏줄기가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미안해. 그렇지만 그렇잖아? 제국과 싸우지 말라고 한 건 너였어.”
자기 합리화를 위한 그림자술사의 말이 떨어져 내렸다. 그게 저를 배신하란 말이 아니란 걸 알 텐데도 이유로 삼는 게 우스웠다.
몸이 그림자에 묶이며 자유를 잃었다. 등진 괴수신의 시신이 벽을 대신했다.
“제국이 네 목에 건 현상금이 수억이고 준비해 준 자리가 자리더군. 그 돈과 권력이면 ──쯤 얼마든지 가질 수 있겠지! 안 그러냐?”
방패가 떨어져 내렸다. 무릎 조금 위부터 발끝까지 양다리가 짓뭉개졌다.
그렇지만 고통에 절은 비명 대신 컥컥 대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 사람은 전장에서 사는 사람을 싫어하는 것 이상으로 배신자를 싫어한다. 저 사랑이 이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빌어 처먹을 네 사랑은 이제 결코 이뤄지지 않아.
“미안하네. 그렇지만 이건 왕자님께서도 명한 일일세. 알다시피 그분은 왕의 친애를 받는 자넬 싫어하지 않나?”
싫어한다 뿐일까. 제국 친화적인 인간이란 것도 안다. 그런 왕자에게 저 네 사람이 넘어갈 줄은 몰랐지만. 아니, 제국에게 넘어간 건가?
생각을 잇는 사이 다가온 시체교주가 몸 위에 독을 떨어트렸다. 그녀가 자랑하는 극독이다. 백 년 묵은 미라를 곱게 빻아 독충에게 먹인 후, 갓 죽은 어린아이의 뱃속에 독충들을 집어넣고 단 한 마리만 남았을 때 만들어지는 극독.
“이렇게 해야만 안심이 되다니, 자네도 참 독해.”
“목은 챙겨야 한다.”
“난 접근하기 싫어. 꽁꽁 묶어 줄 테니까 너희가 잘라.”
“내 방패로 했다간 머리가 짓뭉개질 텐데?”
그의 목을 두고 떠드는 대화에 그저 웃음만 나왔다. 그건 배신감이었나, 절어 버린 슬픔이었나. 아니면 마지막까지 외면해 온 자신에게 조소를 보내는 이성이었나.
“괴수신이랑 싸우다 죽어 버릴 것이지.”
“차라리 독에 중독돼서 죽을 때까지 기다리는 건 어떤가.”
“난 찬성.”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나는 이곳에 죽으러 온 게 아니었나? 괴수신에게 죽나 배신당해 죽나 그게 그거 아닌가.
“크흐흐, 이제 돌아가면 돈과 명예가 날 따르겠지!”
그렇지만 한 대 맞고 가만히 있고 싶지도 않다.
“너희를 이해해.”
그러니까.
“그러니 너희도 이해해.”
그는 검을 들었다.
오른팔이 잘리고 양다리가 짓뭉개졌다는 건 문제되지 않았다. 형태와 물리력을 갖춘 기운이 팔다리를 대신했다. 그것을 구성하는 기운의 본질은 그의 생명이자 수명이며 천수다. 그림자들의 속박이 끊겨 나갔다.
“나, 예전부터 너희랑 한판 떠 보고 싶었거든.”
어차피 죽는 미래라면 이런 식으로 죽어도 괜찮잖아.
* * *
그는 가장 먼저 단검을 내던졌다. 레이피어를 쥔 자가 그것을 튕겨 내고, 은우의 걸음이 가장 왼쪽의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여럿을 상대할 땐 포위되는 걸 피해야 한다. 그것을 알기에 그는 덩치가 가장 큰 녀석에게로 향해 지체 없이 공격을 밀어붙였다.
성주가 쓰는 방패가, 그러나 그것보다 작은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검이 상대를 가르기보단 내려찍으려는 듯 내려쳐진다. 꽈왕. 덩치 큰 녀석, 그러니까 1번은 그것을 소형 방패로 막았다.
방패가 움푹 파였지만 팔이 잘리지 않은 것으로 그 방패의 역할은 다했다. 1번이 공격을 시도했다.
어설퍼. 방패에 박힌 철심을 이용해 검을 미끄러트리고 물 흐르듯 반격을 했으면 됐을 텐데.
은우는 비뚜름하게 웃으며 망설이지 않고 검을 버렸다. 꼴깍 넘어갈 것 같던 호흡은 전투에 임하자마자 완벽한 통제권에 들어온 채다.
검을 손 놓은 몸이 옆으로 확 굴렀다. 동시에 일어설 때 다가온 2번(체격이 두 번째로 큰 여자)에게 돌려 차기를 했다. 가드를 올린 2번은 그것을 정확히 막았다.
그렇지만 은우는 2번에게 타격을 주고자 그 짓거리를 한 게 아니었다.
돌려 차기를 하던 그 순간, 그의 손은 팔꿈치를 기점으로 겨드랑이까지의 살 부분에 부착해 두었던 단검을 빼 들었으니.
그 단검은 1번에게로 날아가 그 눈썹 어림을 베었다. 만약 현실이었다면 피가 철철 흘러 시야가 무너졌을 것이다.
은우의 몸이 앞으로 튕겨지듯 나오며 바닥을 손으로 짚고, 텀블링을 했다. 동시에 일어날 때 두 손은 그의 허리춤에 메여 있는 쌍도를 잡았다.
교차하듯 왼손으론 오른쪽 허리의 검을, 오른손으론 왼쪽 허리의 검을 잡았는지라 자세를 잡기 위해선 손과 손이 서로를 스쳐 지나가야만 했다.
쌍도의 폼멜 부분에 달린 고리에 무언가가 걸린 것도 그때였다.
은우의 손목 부분에는 끝에 고리가 달린 밴드가 둘둘 감겨져 있으니.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재질의 그것은 길이 자체가 길진 않다. 때문에 고리가 걸린 걸 확인한 은우가 두 검을 놓았을 때 그의 손목으로부터 30cm 어림 아래까지 추락하는 게 다였다.
은우의 손이 그 고무 밴드 같은 것을 휘어잡았다. 그러곤 그대로 휘둘렀다. 2번과 3번(키가 작은 남자)의 공격이 쌍검에 튕겨 나갔다.
그는 연이어 짓쳐들어오는 4번(팔이 유독 긴 여자)의 레이피어를 막기 위해 몸을 최대한 비틀었다. 공격을 쳐 낼 때의 반동으로 튀어 오른 쌍도의 손잡이가 그의 손에 들어오고, 4번이 그의 품 안쪽까지 거의 들어왔다.
챙강!
은우의 심장을 노리는 검날은 우수 검의 검 면에 막혔다. 힘의 세기가 다르다 보니 밀려났지만, 그래 봤자 검 면이 어깨에 닿은 정도다.
레이피어의 리치를 이 정도로밖에 사용하지 못하다니, 형편없군. 역시 데이터 쪼가리는 어찌할 수 없나?
그의 좌수 검이 4번의 목을 베고 검의 손잡이를 놓은 후 그대로 4번의 멱을 잡았다. 그 상태로 옆으로 끌어당기면 옆쪽에서 치고 들어오던 1번의 공격을 막을 수 있다. 고기 방패였다.
다른 쪽은 위로 쭉 뻗은 다리가 2번의 공격을 쳐 내다 못해 교묘하게 그 턱주가리를 올려 찼다. 3번의 팔이 그의 등을 노리고 다가온다.
손목 안쪽에는 암기가 걸려 있고, 팔 그 자체로도 무기다. 그래서?
심장을 노리던 4번의 검을 막았던 오른손이 뒤로 돌아갔다. 그러곤 주먹을 잡음과 동시에 허리를 뒤틀어 가며 상대의 주먹을 비틀었다.
적이 팔을 포기해 가며 다른 팔로 공격하는 것은 맞아 주었다. 하필 맞은 부분이 과거 레이피어에 꿰뚫렸던 복부라.
내장이 일순 흔들리는 듯했지만, 이건 아픔 축에도 끼지 않는다. 은우는 이를 악물며 덧씌워지려는 과거를 벗겨 냈다.
은우의 머리가 3번의 대가리를 후려쳤다. 각오하고 머리를 들이박은 은우와 달리 3번은 순간 별을 보았는지 주춤 물러났다. 빈틈이었다.
고기 방패를 휘두르느라 복귀가 늦었던 왼손이 3번을 붙잡고 그대로 메쳤다. 메치는 방향은 당연히 1번이 있는 쪽이다.
졸지에 1번은 제 아군이 적군에게 펼쳐 준 실드에 공격 기회를 두 번이나 잃었다.
섞을 거면 제대로 섞었어야지. 데이터가 늘어나 봤자 전부 따로따로 노는데 소용이 있나.
차라리 패턴이 더 적었던 배신자가 더 나을 판이다. 그쪽이야 오랜 시간 조율을 통해 완성된 AI고 이것들은 급하게 구현한 기계에 불과하다지만.
이래선 전에 상대한 것과 다를 게 없잖아. 그 녀석들의 발끝만도 따라갈 수 없잖아.
은우는 그의 옛 기억에 새겨진 이들을 저것들과 요구하는 것 자체가 불합리하다는 걸 알면서도 무의식적으로 비교했다.
네 명의 구성원이나 쓰는 무기가 닮았다는 게 이유만은 아니었다. 그것들과 싸울 당시, 그의 몸 상태가 지금처럼 벼랑 끝에 몰린 처지였던 게 겹쳐서만도 아니다.
단지 이렇게 기대하며 왔는데, 좀 더 나아지겠거니 하면서 달려왔는데 기대를 조금도 충족시키지 못하는 0과 1의 집합체들이 짜증나서다.
그의 기대는 불가능한 거였나? 마지막 기회라 잡았던 것은 처음부터 없었나?
은우는 2번을 노렸다. 마침 메이스를 휘두르던 2번과 은우의 시선이 마주쳤다.
은우는 쌍도 중 하나를 살짝 비트는 것으로 밴드와 연결된 고리에서 빼내고, 그대로 쌍도를 단검처럼 던졌다. 2번이 후다닥 막았지만, 그 찰나로 은우는 걸음을 내디딘 상태다. 장갑에 설치된 손가락 갑옷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가 2번의 머리를 잡고 그 목을 벤 것은 아주 빛살같이 벌어진 일이었다.
이렇게 2번과 4번은 죽었다. 은우는 뒤로 확 도는 순간에도 2번의 직검을 빼앗아 1번의 공격을 흘려 내었다. 방패와 검이 서로를 부드럽게 보내 주고, 은우의 몸이 바로 뒤로 돌며 무릎을 굽혔다.
적의 주먹이 그의 상체가 있던 자리를 스쳐 지나며 은우의 검이 적의 허벅지를 길게 베었다.
은우의 몸이 바닥을 굴렀다. 뒤늦게 그 자리에 무기들이 박혔다. 3번의 공격이다.
은우는 일어나며 쏟아지는 1번의 맹공을 막아 냈다. 동시에 하나 남는 팔─아까 도를 던진─로 다른 무기를 집어 들었다. 세 개의 봉이 그의 손가락 사이에 잡혔다가 절묘한 손놀림에 저절로 결합했다. 완성된 건 단창이었다.
은우는 남은 도를 던져 버리고 단창을 두 손으로 잡았다. 이후 짓쳐들어오는 3번을 위협해 물러나게 만들고 1번에게 덤벼들었다.
허벅지에 부상을 입은 1번은 쉽게 움직이질 못하니. 은우는 공격을 피해 가며 한쪽 방향으로 그를 몸을 지나친 후 그대로 단창을 제 등으로 넘겼다. 등에서 옆으로 뻗어진 창이 1번의 목을 꿰뚫었다.
이제 남은 건 하나. 은우는 창을 돌려 잡으며 나머지를 응시했다. 그것의 심장에 창이 박히는 건 10초도 지나지 않아 벌어질 미래였다.
아, 정말이지.
“조금 실망이네요.”
안 될 건 알았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그 녀석들을 죽이는 느낌을 다시 받고 싶었는데.
은우는 이곳에서도 그가 원하는 것은 잡을 수 없었음을 깨달았다. 애초에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실망이 그의 가슴을 뻥 뚫었다.
* * *
캡슐에서 나오자마자 땀이 송골송골 흘러내렸다.
은우는 상체를 곧추세우며 잠시 눈을 감았다. 남들이 보면 잠시 감각을 진정시키려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꼭 틀린 이야긴 아니었다.
“괘, 괜찮으십니까?”
은우는 새삼 깨달은 사실을 정리했다.
그는 이제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곳은 평화롭고 싸움의 수준이 낮다. 무기 자체의 살상력은 발전했을지 몰라도 개개인의 실력은 바닥에 처박혔다.
그게 그가 살고 있고, 앞으로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었다.
“네.”
우울했지만, 이걸로 됐다. 은우는 쓸데없는 희망을 접기로 했다. 그러자 결여된 빈자리가 덩그러니 남았다.
결코 채울 수 없는 갈급, 갈증, 갈구.
그러나 생각보다 덜 허한 것은 그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할 뿐이지 비슷한 느낌을 낼 수 있는 대체제가 존재하는 덕인지 모른다.
심지어 그래. 전투 액션이 없던 게임도 즐거웠지 않았나. 레이싱 게임이나 다른 장르도 슬슬 해 봐도 좋을 것이다. 색다른 재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또 그는 이제 방송하면서 시청자랑 소통하는 것 자체를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게임이 재미없어도 시청자랑 이야기하다 보면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러니까 괜찮다. 지금과 그때는 다르니까. 싸움밖에 몰랐던 그때와 그것 외의 것들이 있는 지금은 다르니까.
달라서 우울해지고, 달라서 이겨 낼 수 있다. 은우는 제 뺨을 짝짝 때리곤 캡슐에서 일어섰다.
텅 빈 감각은 어딘가 후련함과도 닮아 있다. 마음먹기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는 허무였다.
“정말 괜찮으신 것 맞습니까?”
상념이 제법 길었는지 사람들이 걱정하는 눈을 했다.
“정말 괜찮은 것 맞습니다.”
정신적으론 정말 말짱하다. 육체적으론… 감각 동기화를 너무 올린 덕에 실제 다치지 않은 육신이 욱신거리긴 하다. 그렇지만 근육이 망가지거나 하는 영구적 장애는 입지 않았을 터. 그거면 괜찮은 거 아닐까?
실제로 고통만 제하면 움직임에는 불편함이 없었다. 은우는 멀쩡하게 움직여서 사람들 앞에 섰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이제 그를 어찌 볼까. 미친놈? 괴물? 가짜라고 해도 실제와 같은 감각에서 사람을 쳐 죽이는 잠재적 살인마?
그도 아니면.
“켄 님을 모신 건 최고의 한 수였네요.”
“아니었다면 정말…….”
“오, 게임 보스를 깰 때 마지막 대사가 나왔다고 생각하면 정말 끔찍해.”
도달해야 할 곳을 발견한 탐험가들의 얼굴이라도 할까.
“하.”
은우는 생각했다. 예술가나 개발자들은 어딘가 맛이 가 있다. 전생이나 현생이나 아무튼 그렇다.
동시에 그가 싸움에 미친 놈같이 굴어도 배척하는 이가 없다.
은우는 욕구를 우선시하느라 짓눌러 둔 불안감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마치 백사장의 모래를 한 움큼 쥐었다가 밑으로 버려 내는 것 같다. 손바닥에 묻는 것은 존재해도, 그것은 소량에 불과하다.
생각한 쪽으로는 만족하지 못했으나 그래도 이곳에 와 보길 잘했다.
“일단 검사부터…….”
“네.”
이후 일은 계약대로 돌아갔다.
카롬은 서비스를 철저히 했고, 은우는 오현과 함께 병원 가서 검사도 받고 심리 치료도 순서대로 받았다. 귀찮긴 했으나 필요한 과정이라서 피할 수도 없었다.
다행히 내일은 휴식이었다. 데이터를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나. 하루 걸러 다시 시범을 보이기로 했다.
보통은 한 번만 시연을 보이고 원할 경우에 추가로 움직이는 것이지만, 그들은 은우에게 제발 한 번 더 기회를 달라 부탁했다.
그때도 지금처럼 실망할 것 같으나, 은우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싸우는 이로서의 기대가 남은 건 아니었다. 단지 앞으로 나올 게임이 더 재밌어지길 바라는 게이머의 심정이었다.
다만 이렇게 말해도 그들이 나올 때 보였던 반응을 생각하면 하루가 아니라 일주일은 필요할 것 같다. 그들은 꼭 따분하단 소리가 나오지 않게 만들겠다며 결연한 얼굴을 했었다.
자, 그렇다면 사이좋게 검사와 치료와 퇴원을 같이한 오현은 어떤가.
그는 오늘 겪은 싸움에 대해 복기라도 하는 듯 끝없이 중얼거렸다. 그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기에 은우는 방해하지 않았다.
그러자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졌다.
은우는 눈을 껌뻑이며 호텔 방에 누웠다. 침대는 아직 끔찍하리 만치 푹신했기에 어제처럼 소파가 낙점되었다.
그렇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너무 고급스러워서일까? 하긴 그는 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 제 방의 싸구려 침대조차 불편하게 여겼다. 그것마저 편해서였다.
기억을 자각하기 전부터 그랬던 걸 보면 태생이 과한 편안을 거북해하는 것 같다. 전생의 여파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 확률이 제일 크긴 클 거다.
은우는 결국 몸을 일으켜 방 안을 돌아다녔다.
캡슐은 병원에서 사용을 금했으니 못 하고, 방송? 나쁘진 않지만 아직은 그다지 하고 싶지 않다. 피곤하진 않으나 피로는 있었으므로.
그렇다면 뭐를 해야 할까. 그는 호텔 한쪽의 통유리에 다가섰다. 시내가 다 들어왔다. 한국과 비슷하면서도 영어로 가득 차 있는 점이나, 보이는 사람들의 옷차림에 외국 냄새가 물씬 났다.
은우는 그것을 보며 눈을 껌뻑였다. 외국은 외국이구나. 전생에서 만일 그가 제국을 가 보았다면 이런 느낌을 받았을까?
모르겠다. 그가 제국에 갈 일이 있었다면 아마 목이 베여 효수당하러 갔거나, 제국의 요인을 암살하러 간 것일 테니. 뭐든 간에 관광과는 거리가 있다.
그다음으로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산이 없는 지평선이었다.
노을이 지는 하늘은 동이 트는 것과 색이 크게 다르지 않다. 세상을 금빛으로 덧칠하고 가넷이나 루피로 장식한다.
그는 그것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손으로 유리창을 더듬었다. 손끝이 매만지는 창에는 어슴푸레하게 그 자신이 비치고 있다.
그리고 단정하게 잘린 손톱이 목 부근에 다다랐을 때, 그는 힘을 주어 그었다. 목이 잘렸다. 잘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잘려서 굴러 떨어졌다.
아마 검날에. 레이피어보다 두껍고, 조금 짧은 검날에.
띵똥.
오랜만에 과거의 베일을 들추려던 그 순간, 전자 노트가 진동했다. 은우의 눈이 껌뻑였다. 경찰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과도 없고 전적 자체도 없는 무고한 시민이나, 여러 가지 이유로 양심 찔린 그는 땀을 뻘뻘 흘렸다.
“네… 서은우입니다. 아, 네. 네?”
다행인 것은 경찰은 그를 잡아가기 위해 전화를 건 것이 아니란 점이었다.
“…실종 신고요?”
실종 신고 대상자가 돼 버린 시점에서 뜬금없기는 매한가지였다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