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공적인 일이 끝나면 사적인 일이 남는다. 특히 그만두면 그만인 전자와 달리 후자의 경우 어떻게 끝이란 게 없다는 점에서 더 악질이다.
은우는 현재 그 상황을 절절히 느꼈다.
『✉ 메시지 │서건우 오후 10:12
많이 힘들었구나. 미안해. 어쩌면 이 문자도 네게…….』
그가 일부러 보지 않는다는 걸 모를 리는 없다. 그렇지만 형은 끝없이 문자를 보내 왔다.
비록 형도 직장을 다녀야 하니 주로 저녁에 많이 왔지만… 어쨌거나 꾸준히 알림이 갱신되었다. 내용은 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문자가 오는 듯하던데.”
돌아가는 길, 비행기 옆자리의 오현이 물었다.
쏟아지는 무술가들의 질문에서 그를 구해 줬던지라 은우는 오현의 질문을 흘려듣지 않았다. 개인 정보에 관련한 질문은 보통 무시하는 편이지만 받은 게 있으니까.
“가족입니다.”
“답장은 안 하나?”
은우는 손가락으로 노트를 쓸었다.
“해야 합니까?”
“꼭 그럴 필요는 없지.”
오현도 깊게 들어올 생각은 없는 듯 적당한 대꾸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현도 희수와 비슷한 의견을 낼까?
은우는 노트를 더듬었다. 집에 가면 가족과 마주칠 거다. 이사하기 전에 호텔에서 지낸다고 해도 최소한 한 번은 보겠지. 챙겨 나올 짐이 있으니까. 한데 그때도 외면해야 하나?
그는 누르지 못한 문자와 메아리치는 희수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판단이 안 선다. 조금의 조언이 더 필요하다.
은우는 오현에게 그가 이 정보를 말해도 되는지 계산해 보았다.
사적인 정보지만 그가 제한할 수 있다. 그를 파고들려는 의사와 달리 오현은 그가 내주는 정보들로 만족할 것이다.
무엇보다 의사가 받아 가는 것은 돈이라는, 누구든 대신해 제공할 수 있는 가치지만, 오현은 다르다.
그가 바라는 것은 극사실적인 무의 추구. 그것은 은우가 제공할 수 있는 것임과 동시에 은우 외 사람들이 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대가로 내걸면 오현은 어디 가서 떠들고 다니지 않을 것이다.
결정했다.
은우의 입이 열렸다.
“지금까지 제게 관심 없던 사람이 갑자기 문자를 보내 오면 오현 님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오현이 턱을 쓰다듬었다.
“무시해야지.”
희수보다 더 빠른 대답이었다.
“…그것만 말하면 누구나 그렇게 대답할 걸세.”
본인도 너무 즉답인 걸 알았는지 헛기침과 함께 말을 덧붙였다.
“중요한 사람인가?”
“아마도.”
“왜 갑자기 관심을 가지는진 알고 있나?”
“그걸 모르겠습니다.”
오현이 팔걸이를 톡톡 치더니 한 번 더 질문했다.
“자넨 어떻게 하고 싶은가?”
“…네?”
“무시할 수 있었다면 내게 묻기 전에 무시했을 테지. 그런데도 물어보는 건 무시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닌가.”
그건 생각지도 못한 관점이었다.
은우는 입술을 떼었다가 다시 붙였다. 되새겨 보면 그는 희수가 판결을 내려 준 후에도 계속해서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갑자기 왜 이러나, 왜 문자를 멈추지 않나, 대체 무엇 때문에.
어째서.
“대화는 해 봤나?”
“…아니요.”
“대화하는 게 기분 나쁜 일이 아니라면 한번 해 보게. 의문은 풀고 가야지 자네도 마음이 편할 테니까.”
맞는 말이었다. 다만 은우는 선뜻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건 지난 며칠간 문자를 차마 확인하지 못하고 외면해 온 심정과 비슷하다.
그것을 본 오현이 툭 물었다.
“겁이 나나?”
은우는 눈을 느리게 껌뻑였다. 겁? 겁이 난다고? 그가? 다른 누구도 아닌 그가?
“저는…….”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그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모르겠습니다.”
모름지기 싸움은 두려움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되느니.
그는 자신이 겁내고 있음을 인정했다. 무엇에 대한 공포인지는 그도 모른다. 다만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번 사태에 대해, 아니 형이 계속 보내고 있는 관심에.
왜 두려운 걸까. 은우는 그 점을 생각해 보았다. 모르겠다. 그래서 더욱 대화하고 싶지 않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전투에 임할 땐 무지한 상태로도 잘만 덤볐는데, 이상하게 가족, 형과 관련된 문제는 그게 안 된다니.
불안 하나 때문에 가능성을 버리지 말자, 극복하자 했던 게 옛말이라도 된 기분이다. 한심하다.
은우의 속눈썹이 눈을 가릴 듯 아래로 처졌다.
“사람이긴 했군.”
그사이 오현이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더니 그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은우는 뒤늦게 그가 쓰다듬이란 걸 깨달았다.
“세상 그 누구를 이길 수 있는 강함이 있대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은 이겨 낼 수 없네. 애초에 전장이 아닌데 이기고 지고가 어딨겠나.”
오현은 어딘가 아릿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목숨을 건 싸움에서 이기면 상대는 죽거나, 더는 무기를 들 수 없는 몸이 되어 떠나지. 그렇지만 사람 간의 일은 아니야. 이긴다고 해서 상대가 사라지는 일은 없네. 서로에게 상처만 남긴 채로 존재하는 걸세.”
은우는 그것을 손쉽게 알아보았다. 그 눈은 과거를 더듬는 눈이다.
“싸움과 사람을 동일선에 두지 말게. 이기려 들지도 말게. 그저 대화를 해. 이야기를 듣고 말을 하면 되네. 그러면 길이 보일 거야.”
이야기를 듣고 말을 하는 건가. 그러면 되나.
그는 오현의 말을 곱씹었다. 결국 부딪쳐서 깨지란 말이었다. 그렇지만 이대로 집에 가면 반드시 겪을 일이기도 하다.
오현의 조언은 쓸모 있다. 그에게 필요한 건 대화할 용기였다. 혹은 대화해도 된다는 확신이거나.
“그리고 이건 내 개인적인 조언이네만.”
“경청하겠습니다.”
“상대가 물질적인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반성하는 거라면 단 한 번만, 딱 한 번만 기회를 더 줘 보게.”
오현이 쓰게 웃었다.
“자네가 무시하지 못할 정도면 제법 소중한 것 같아서 하는 말이네. 보통 그런 대상은 가족이나… 친구나 연인이니까.”
그건 그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일까, 후회가 자아낸 충고일까.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지만… 기계와 달리 변할 수 있는 것도 사람이야.”
마지막에 가서는 거의 혼잣말에 가까워진 상태였다.
“그렇다고 무리해서 기회를 주진 말게. 그냥, 자네가 여유가 된다면, 미련이 남는다면 딱 한 번 줘 보란 거였으니까.”
“네.”
그것으로 대화가 잠시 끊겼다. 은우의 손이 목을 매만졌다.
“돌아가면, 검을 봐드릴까요.”
“…굳이 그래 주지 않아도 입 다물 거네만, 거절할 이유 또한 못 느끼겠군.”
다행히 오현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 075. 환장하겠네
비행기는 밤에 도착했다. 다이아박스 쪽에서 보내 준 셔틀을 타고 집에 도착했을 때엔 새벽 1시였다.
은우는 박 팀장이 보낸 문자를 보며 집에 들어섰다.
귀국하느라 피곤할 걸 알아서인가. 박 팀장은 수고했다는 말 몇 마디를 담은 문자만 보낸 상태다.
아직까지 잠을 안 자는 이유가 과연 야근 때문일지 뭣 때문일지 궁금하다.
달칵.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새어 나갔다. 현관 전등이 얕게 켜지며 시야를 밝혔다.
스윽-
중문을 열고 거실에 입성할 때, 문 소리가 하나 더 겹쳤다. 은우는 중문을 닫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서건우가 있었다.
“…왔네.”
“…어.”
어색한 답들이 오갔다. 먼저 시선을 피한 건 은우였다. 그는 목덜미를 쓸었다.
희수와의 대화로 비정상적인 가족임을 깨닫고 오현과의 대화로 마지막 대화를 결심해 보았건만, 직접 마주치니 목소리가 안 나온다. 차라리 괴수신과 한 번 더 싸우고 싶다. 이번엔 팔 하나 안 잘리고 이길 자신 있는데.
“은우야.”
침묵을 깬 건 형이었다.
은우는 눈동자를 데굴 굴렸다. 조금 열려 있던 중문이 닫힘과 동시에 현관의 전등이 꺼졌다. 거실이 빛을 잃었다. 그들도 어둠에 잠겼다.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밤이 말을 걸어왔다.
* * *
은우는 처음 들어와 보는 형의 방에 생경함을 느꼈다. 종종 그에게 말을 걸려고 했던 건우와 달리 그는 형에게 먼저 접근한 적이 없어서 그런가. 방도 처음이었다.
회색 톤에 철제 프레임이 가득한 그의 방과 달리 이 방은 하얗고 원목 가구가 많다. 탁자에는 비타민과 보약, 일반 약들이 너저분하다.
텅 비어 있는 방 한쪽은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들였던 병원 기기의 자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형이 퇴원하기 며칠 전, 커다란 기계가 형 방으로 들어가는 걸 본 적 있었으니까. 언제 사라졌는진 모르겠지만.
“술, 뭐 마셔?”
“…아무거나.”
은우는 아마 기계가 있었을 그 자리에 앉았다. 그의 방보다 널널해서 방바닥에 앉아도 문제는 없었다.
주변을 은근히 더 둘러보면 다양한 사진이 액자에 걸려 전시되어 있다. 대체로 풍경 사진이었지만, 친구들이랑 찍은 것도 많다. 혹은 부모님이라거나.
“밥은?”
“안 고파.”
“그래.”
건우는 그를 방에 데려다 둔 후, 주방에 잠시 들렀다 왔다. 그의 손에는 간단한 안주거리와 소주가 들려 있다.
이슬X톡까진 바라지 않았지만, 맥주가 없네. 은우는 그가 저것을 먹을 수 있을까 잠시 고민했다.
“…….”
대화하자고 불러 놓고 형은 술만 들이켰다. 은우는 덩달아 술잔을 들었다. 안 그래도 조그만 술잔은 그의 손에 들리자 더 작아졌다.
쓰고 맛없다. 혹시 몰라 입에 술을 입에 대 본 그의 눈살이 헝클어졌다. 전생에서도 술은 몸 망가질 것 같아서 손도 안 댔는데, 이번 생에서도 술꾼은 글렀다.
“…음료수 가져다줄까?”
“…아니야.”
그래도 꾹 참고 삼켰다. 맨정신으로 형과 대화할 용기가 없기도 하고, 이대로 물러나고 싶지도 않았다.
은우는 겨우겨우 한 잔을 비웠다. 형은 이미 석 잔을 비운 상태였다. 형이 처음으로 대단해 보였다.
은우는 두 번째 잔을 들었다. 고작 한 잔 마셨을 뿐인데 벌써부터 머리가 핑 돌았다. 입에 남은 알코올의 잔향은 썼다.
몸이 벌써부터 화끈거린다. 그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형이 얕게 웃었다.
“왜 웃어.”
술 못 먹는 게 웃기냐는 마음으로 핀잔을 주니 바로 사과했다.
“술 잘 먹게 생겼는데 온몸으로 쓰다고 외치는 게 안 어울려서… 미안하다야.”
“…웃지 마.”
그라고 술 못 먹고 싶어서 못 먹는 게 아니다. 맛없는 걸 어쩌란 말인가.
희수 놈은 먹으면 먹을수록 달댔는데 그는 왜 쓰기만 한지. 은우는 괜히 술잔만 노려봤다. 그래도 술맛이 좋아지거나 하진 않았다.
어쨌거나 세 잔째. 형은 벌써 한 병을 해치우고 새 소주를 까고 있다. 인간이 아니다. 어떻게 저렇게 먹지? 맛있나?
은우는 믿지 못하고 술잔에 혀를 담갔다가 바로 후회했다. 맛없어. 이걸 왜 먹는 거야? 다들 미쳤어. 혀가 없는 게 분명해.
“…미안해.”
“…뭐가?”
형이 내게 미안할 게 있었나. 있었나?
“지금까지 신경 써 주지 못한 거.”
신경, 신경 써 주지 않았나?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근데 말은 좀 걸어 줬는데. 맞다, 희수가 그건 관심이 아니랬지. 맞네. 신경 안 써 줬네.
“나는, 그러니까… 뭔 말을 해도 변명처럼 들릴 걸 알아. 잘못인 것도 맞아. 그렇지만 정말로 신경 안 썼던 건 아니었어. 내가…….”
세상이 빙글빙글 돈다. 형이 두 사람, 세 사람… 잠깐, 말하고 있잖아. 이거 더 마셔도 되는 건가? 어, 어…….
“지금까지 신경 써 주지 못해서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난, 난 정말로 몰랐어. 변명인 건 알지만 네가 그렇게까지…….”
잘못? 잘못했지. 잘못했나? 변명은 잘못했을 때 하는 게 맞는데. 아닌가. 신경 안 써 줬으니까 잘못한 게 맞겠지?
들고 있던 잔의 술을 홀짝홀짝 삼켰다. 지금이라면 식도도 그릴 수 있다. 원래도 그릴 수 있지만.
그보다 아직도 써. 술은 언제 달아지는 거야. 한 잔 더 먹으면 달아지나.
어느새 잔이 비었다. 마셔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치만 계속 마시면 달아진댔는데.
은우는 긴가민가하며 술을 더 따랐다.
“내가 따라 줄게.”
형이 뺏어서 잔을 채워 줬다. 이번엔 달까. 다시 먹어 보았는데 여전히 맛없었다.
“…저기, 듣고 있어?”
“어.”
듣고 있다. 응, 듣고 있다. 은우는 뜨거운 뺨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손등이 차갑고 얼굴이 뜨거웠다. 왜 뜨거운지 모르겠다. 근데 손 시원해.
“그, 취한 것 같은데…….”
“안 취했어.”
아직 말할 수 있으니까 취한 건 아니다. 아닌가? 맞나? 몰라.
은우는 잔을 홀짝였다.
“맛없어.”
알코올향 구려.
“너 알쓰… 아니, 음료수 줄게.”
고개를 붕붕 돌렸다.
“싫어.”
실랑이가 잠깐 이어졌다.
“이거 말고 맛있는 거 줄게, 응?”
그의 술잔을 형이 잡았다. 아닌데, 이거 내 건데. 달아질 때까지 먹어 볼 건데.
뺏기기 싫어 힘을 주었다. 잠깐의 힘 싸움 끝에 콰직, 하는 소리가 났다. 술 때문에 손이 흠뻑 젖었다.
“어.”
“피!”
왜 부서졌지. 그보다 왜 피가 나지. 이상하네.
은우는 유리 조각이 박힌 손을 쿡 찔렀다. 따끔따끔한 와중에 피가 더 났다. 내 손이 이렇게 말랑했나? 그런 의문도 들었다.
“뭐 해!”
시끄럽다.
“너, 안 아파?!”
근데 술 어디 갔지.
“술 없어졌어, 형.”
내 술. 맛없는 술 어디 갔어.
“환장하겠네.”
귀가 윙윙거린다.
“위험하니까 가만히 있어.”
“어디가 위험해?”
“아냐… 그냥 그대로 있어.”
위험? 괴수가 나타났어? 아니면 제국군? 아니면, 어, 또 뭐가 있지. 근데 여기도 괴수랑 제국군이 있나? 그럼 안 되는데. 위험한데. 무기, 무기가 있나. 맞아, 무기 도안 넘겨야 하는데. 어디에 넘겨야 했지?
“…뭐 해.”
“유리 조각 치우고 있어. 아니, 너! 그 손으로 바닥 짚지 마!”
바닥을 짚은 손이 따끔거렸다. 슬쩍 들어 보니 피가 난다. 물에 손 담근 적도 없건만 투명한 액체에 젖어 있기도 하다.
“나, 피 나.”
왜 나지. 나, 뭐에 당했나. 뭐에 당했지. 나 방금까지 술 먹고 있었는데.
“맞다, 술. 술이 없어졌어, 형.”
“…병원 가자, 어서.”
“왜?”
그냥 꿰매면 되잖아. 나 혹시 독 먹었어? 독 먹었으면 독 빼야 하는데.
“건드리지 말고!”
손이 붙잡혔다.
“놔줘.”
안 놓으면 독을 못 빼.
“다음부터 술 절대 먹지 마라, 넌.”
“왜……?”
술 안 먹어. 술 맛없어. 근데 나, 술.
“내가 진짜… 미치겠다…….”
강제로 일으켜져서 강제로 걸었다. 세상은 핑핑 도는데 걸음은 곧았다.
“어디 가.”
손을 잡힌 채 뚜벅뚜벅 걸어 현관까지 갔다. 형이 신발을 꺼내느라 잠시 그를 놓아주었다.
어, 어, 세상이 돈다. 손─상처 난─을 휘적이다가 중문을 잡으려 하니 형이 콱 붙들어 맸다.
“병원!”
밤인데 소리 질러도 되는 거야?
“…아프지도 않아?”
“아파?”
이게? 별로? 은우는 피가 나는 손을 보았다.
“내 목 내가 잘라도 봤는데 무슨…….”
근데 목 잘라도 별로 안 아프긴 해. 끔찍한 이물감이 들었을 땐 좀 아픈데, 직후 혈류가 차단되면 시야가 순간 검어지고 그리고 생각이 끊기니까.
“뭐? 목을 졸라?”
“별로 안 아파.”
진짜 안 아프다니까. 느낌이 좀 더럽긴 한데 사지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걸 느끼며 죽느니 갈끔하게 자결하는 게 낫잖아. 응, 그게 훨씬 나아. 그래서 내가 모가지만 댕겅댕겅 해 주잖아. 그게 덜 아파서.
“내가,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형, 뭐 했어?”
형이 누구 목 잘랐어? 아닌데. 형은 약해서 그런 거 못할 텐데. 목 자르는 거, 쉬운 일 아니야. 보통 뼈가 검날에 걸려서 탁 막힌다니까. 그것도 요령 있어야 해.
“내가, 미안해…….”
“왜……?”
“지금까지 몰라 줘서 미안해…….”
“울어?”
왜, 왜 울지. 어, 울면 안 되는데. 이땐 뭘 해 줘야 해?
“누가 형 괴롭혀?”
“아, 아니야. 택시 왔다, 택시 타.”
“죽여 줄까?”
벌컥 택시 문이 열렸다.
“뭐래. 어서 타.”
형이 그를 택시 안으로 꾹꾹 밀어 넣었다.
“너, 진짜 징글징글하게 크다…….”
뒷말에는 조금 짜증이 담겨 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방금 한 말은 진심인데. 귀족이라도 죽일 수 있는데. 왕자가 그걸 빌미로 뭐라 하겠지만, 기껏해야 최전선에서 몇 년 노역하는 게 다일 거고.
아, 여긴 왕국이 아니지. 법이 다른가? 여긴 살인죄 처벌이 뭐더라.
“살인죄 처벌이 뭐였지, 형.”
“진짜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술 취해도 사람 죽인다는 말 하는 거 아니야!”
“술 안 취했어.”
사람 죽이는 게 뭐 어때서. 그리고 나 진짜 술 안 취했는데. 근데 술 어디 갔지. 술 마시고 있었는데. 분명 마시려 했는데… 형이…….
“다 뺏어 가네.”
“응?”
“술 정돈 줘도 되잖아.”
“아니, 손 다쳤잖─”
“관심도 다 형이 가져갔는데.”
“…은우야.”
“됐어, 안 먹어. 맛없어.”
술 맛없어, 안 먹어. 단 거 먹을 거야.
“콜라 먹고 싶다.”
달고 톡 쏘는 거.
“콜라 먹을 거야.”
먹으면 기분 좋아지는 거. 지금 기분 안 좋아.
“…내가 다 가져갔다고 생각했어?”
“응?”
“그래서 내가 싫었구나… 그래서…….”
싫어? 아닌데, 안 싫어하는데.
“안 싫어.”
“…싫어서 말 안 하는 거 아녔어?”
“아닌데.”
그렇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형한테 말하면 모르는 사람들이 나한테 말 걸어와.”
나는 모르는데 그 사람은 날 알고 있는 게 얼마나 기분 더러운데. 왜 말하고 다니는 거야.
“내가… 밉지 않아?”
“미울 이유가 없는데…….”
밉나? 잘 모르겠다.
“불편해.”
“불, 불편… 그래…….”
“여기서 미워해야 해?”
“아니, 그럴 필욘 없는데… 그, 그렇지만 그렇잖아……. 네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동안 난…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힘들었나? 힘들었던 것 같기도. 사실은 조금 힘들었나.
“밥, 먹고 싶다.”
“…배고파? 뭐 사다 줄까?”
“어머니, 식당 여셨어?”
어머니는 언제 식당 여셨지. 뭐야, 한번 가 볼걸. 나, 어머니가 해 주는 밥 먹고 싶었는데. 기억이 잘 안 나서. 어땠는지 떠올리려고 해도 떠오르지가 않아서.
“…엄마, 밥이 먹고 싶었어?”
“응.”
아버지가 하신 것도 좀 궁금하고. 그렇지만 안 주시겠지. 찬 남는 거 안 좋아하시니까. 그거 좋은 습관이야. 전장에 나가면 식량 문제는 덜 겪으실걸. 조금 아쉽지만 응, 버리는 것보단 낫지.
“…미, 미안해.”
“왜?”
아까부터가 뭐가 미안한 거야. 형, 뭐 했어?
“아, 시트에 피 묻었다.”
이것 때문에 미안한 거구나.
“아니, 그 손으로 짚지 말라니까! 상처가 더 커졌잖아!”
손에 미지근한 게 닿았다. 물방울? 맞다, 형 울었지. 왜 울더라.
“…통증도 못 느끼냐, 너는.”
“…걱정해?”
“당연하지!”
“왜?”
이상해. 왜 형이 날 걱정해? 왜? 예전부터 이상했어. 왜? 왜 갑자기?
“나 신경 안 썼잖아.”
“…은우야.”
“왜 걱정해?”
내가 죽든 말든 형이랑 어머니랑 아버지랑 잘 살 거잖아. 내가 없어도 잘 살 수 있잖아. 그랬던 거 아니었어?
“미안, 해. 내가, 미안해…….”
“갑자기 왜 미안해?”
사과는 왜 하는 거야. 나한테 잘못했어? 형이 나한테 뭐한 게 있던가? 어, 어… 관심 아니랬지. 응, 근데 이건 뭐야. 이것도 관심 아닌가? 희수한테 물어볼까. 지금 몇 시지.
“맞다.”
“지금까지… 내가…….”
“집 나가야 하는데.”
“……?”
집 나가는 것밖에 답이 없다 했지. 응, 집 나가야 돼. 근데 지금 택신데. 지금도 나가고 있는 거로 쳐주나. 형이 옆에 있는 건 괜찮은 건가? 집 나가면 땡인가.
“…집, 나갈… 거냐?”
“으응.”
나가랬어.
“희수가, 비정상 집 나오래.”
그리고 또 뭐랬지…….
“자기도 눈치챈 걸 못 채는 족 같은 비정상이랬어.”
기억이 점차 가물어진다. 손바닥이 따끔거려서 정신은 또렷한데, 뭔가 이상해.
“관장님이 대화는 해 보랬는데…….”
대화 지금 하고 있으니까 그건 된 거지? 아닌가? 지금 대화하고 있는 거 맞나?
“어지러워.”
몰라, 토할 것 같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이, 일단 내리자.”
뭐야, 어디 가. 나 어지러워. 독 먹었나 봐. 독 빼야 하는데.
“손에 유리 조각이 박혀서…….”
풍경이 휙휙 바뀐다. 은우는 옅은 소독약 냄새와 환자들의 말소리를 들었다.
치료하러 온 의사가 암살자인 줄 알고 엎어칠 뻔한 게 그의 마지막 기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