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죄송합니다.”
다행히 동트기 전에 깼다. 은우는 그가 어젯밤 엎어 메칠 뻔한 의사에게 90도로 사과했다. 자칫하면 폭력사태로 이어질 수 있었던 일이다 보니 사과는 더욱 진심이 담긴 채다.
“괜찮습니다. 형님분이 말려 주신 덕에 다치지도 않았고, 접근하지만 않으면 얌전하셨으니까요.”
의사는 다행히 관대했다.
다만 은우는 그게 그의 외형에 겁먹어서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 없었다. 술 먹고 꽐라 됐던─우습게도 3잔에 녹다운됐지만─그보다 얼굴이 더 파리했던 탓이다.
그래도 사과는 진정성 있어야 하는 법이니. 은우는 그분께 거듭 사과하며 근처 편의점에서 비 맞아 가며 사 온 먹거리와 음료들을 건넸다. 그 양은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의사와 간호사들 전원이 먹고도 그 세 배는 남을 정도다.
참고로 다이아박스에겐 미리 연락해 두었다. 술 먹고 사고 쳤다는 창피함보다 위약금이 더 무서웠다. 그쪽에서 이번 일을 잘 처리해 주기도 할 테고.
“대신 앞으로 가능하면 술 드시지 마세요.”
“다신 술 안 먹겠습니다.”
“절대 안 먹이겠습니다…….”
“네에.”
그들은 마지막까지 굽실거리며 응급실을 빠져나왔다. 계산은 건우가 했던 것을 무르고 은우가 다시 했다. 본인 실수였으니 당연하다.
“…입에서 아직도 술 냄새 나.”
응급실을 빠져나오는 복도에 화장실에 있길래 다급히 들렀다. 은우는 입에 찌든 술 냄새를 헹구기 위해 가글을 꺼내 들었다. 아까 먹거리를 사 올 때 같이 구매한 가글이다.
뒤편에서 서 있던 형의 얼굴은 복잡하다.
“너, 주량 알고 있었어?”
“좀 적은 편이란 건.”
솔직히 본인도 의문이었다. 주량이 한 병 못 되는 편이긴 하지만, 희수랑 먹을 땐 이렇게까지 빨리 골로 가진 않았다.
손이 가글의 포장을 따고 뚜껑에 액체를 적당량 따랐다. 전체적으로 유리 조각에 난자됐던 왼손이 따끔따끔했다.
“안주도 안 먹고 연달아 세 잔 들이켜서 그런가.”
어쩌면 텍사스 시내를 뱅글뱅글 돌아다니다가 시간 맞춰 비행기로 귀국한 후 잠도 안 자고 생 소주를 마셔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는 피로함을 못 느꼈다지만, 신체에 쌓인 피곤이 아예 없지는 않았을 테니.
“무슨 일 있었는진 기억나?”
“…….”
그르르르르, 퉤. 은우는 정확히 30초 뒤 새하얀 가글 물을 뱉었다. 민트 향이 화악 입안을 메웠다.
“응.”
안타깝게도 그는 술 취한 후 행하는 모든 일을 기억하는 부류였다.
은우는 쉴 새 없이 이어지던 미안해의 향연을 떠올렸다.
“나한테 미안해?”
사과를 들었지만 외려 그는 떨떠름했다. 저들이 무관심했던 게 그가 사과를 들을 일인가 싶기도 하고, 이에 와서 사과하려는 저의도 잘 모르겠어서다.
그런데도 한구석으론 묘하게 기쁜 게, 제 감정이지만 대체 어떻게 돼먹은 녀석인지 모르겠다. 감정이란 건 정말 이성으로 어찌할 수 없는 존재인가 보다. 계산이 불가능하다.
“…그래.”
“왜?”
은우는 거기까지 말한 후, 이 질문패턴은 어제 이미 했음을 기억했다.
“형 잘못은 아니잖아.”
말을 덧붙이자 형의 안색이 거무죽죽해졌다.
“나도 잘못한 게 맞아.”
토해 내지는 말은 그 얼굴색만큼이나 어두웠다.
“3년간 네가 그렇게 아파하는지 몰랐으니까. 같이 있었는데도, 알려 하지 않았으니까.”
은우는 쏟아지는 수돗물로 손을─왼손은 얇은 방수 재질의 장갑을 꼈다─닦고 입을 문지르며 거울을 확인했다. 거울에 비치는 형은 주먹이 새하얗게 질리도록 힘을 주고 있다.
“궁금해서 묻는 건데.”
“…응.”
“이제 와서 관심 갖는 이유가 뭐야.”
하얀 얼굴이 더 핏기가 빠졌다. 사람이 정말 백지장처럼 될 수 있구나. 은우는 쓸데없는 감상을 얻었다.
“그건…….”
“원망하는 건 아니야. 단지 태도가 변한 이유가 궁금해서.”
형이 변한 건 작년 말, 혹은 금년 초의 일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부쩍 말을 걸려고 했고 이것저것 신경을 써 줬다.
그게 직장에서 승진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이었을까. 은우는 아직도 확신이 안 섰다.
“…병원, 다니고 있지, 너.”
뜬금없는 존재의 등장에 잠깐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렇지만 그 단어 하나로 모든 윤곽이 잡혔다.
“그때 봤구나.”
“응.”
아이를 잡아 줄 때 봉투 사이로 삐져나온 약을 본 거였다, 형은. 그래서 그의 상태를 알게 된 거고, 그래서…….
“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다는 건 알아. 널 볼 면목이 없다는 것도. 하지만 알고 나니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나는, 그러니까…….”
은우는 젖은 손을 건조기에 대고 말렸다. 우우웅, 소리와 함께 손이 금세 말랐다. 그 상태로 목을 쓱 쓸면 제법 뽀송뽀송하다.
“솔직히 말하면.”
말할 생각 없던 것들이 목에 가시처럼 박혀 들었다. 이걸 말해도 되나? 말해야 하나?
그렇지만 이미 술 먹고 토한 단어들이다. 또한 상대는 형이었다. 그러니까, 가족이다. 가족이 대체 무슨 의미인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랬다. 내밀한 속내를 토해내도 되는, 될, 되는? 그런 존재. 남들 말로는 그렇단다.
아니, 그냥 다 집어치우고 대화를 위해서는 말해야 했다. 대화는 듣고 말해야 하는 거니까. 싸움과 동일하게 보고 있진 않지만, 비유만 들면 말이 무기이고 방패인 셈이니까.
“난 모르겠어.”
“…뭘?”
“너무 익숙해서 별생각 없거든. 오히려 형이 이제 와서 신경 써 주는 거야말로 낯설어서 불편하고. 아… 그렇다고 지금까지 괜찮았던 건 아니지만…….”
희수의 대화로 괜찮았던 건 아니란 걸 깨달았으니 이렇게 말해도 되겠지. 되겠지?
그는 눈동자를 내리깔았다. 내밀한 속내를, 유일하게 선 안으로 들여 둔 친구 놈이 아닌 타인에게 말한다는 게 어색했다. 도망치고 싶다.
그렇지만 그래선 안 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겁쟁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 몸을 돌렸다. 거울로만 마주쳤던 시선이 온전하게 맞닿았다.
“형이 싫거나 미운 건 아니야.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 나도 정확힌 모르겠지만… 그냥 불편하고 거북한 쪽에 가까운 거지, 싫은 건 아니야. 아마도.”
그가 진심을 고백하는 걸 어려워하는 사람이어선지, 정말 본인도 몰라서인 건지 표현이 궁색해졌다.
알 것 같은데 말로 속삭이자니 그게 잘 안 된다. 은우의 입이 벌어졌다가 닫히길 두어 번 반복했다.
“그냥, 모르겠어.”
그는 뒷목을 매만졌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티가 난다 했던가. 그렇지만 그는 난 자리가 너무 오래된 사람이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은우는 기억나지 않는 유년기를 더듬었다. 그때의 그는 과연 사랑받았었을까.
“괜찮진 않아도 지금까지 적응해서 잘 살았으니까.”
결여를 본능적으로 알 수는 있다. 그렇지만 무지하므로 그 결핍에 애달파할 뿐, 난 자리에 고통받지는 않는다.
딱 그 짝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버려 온 기대라서 이제 와 충족되려 한들 어색하고 이상할 뿐이다. 그것의 단맛을 맛보기엔 너무 늦었다.
“앞으로는 더 잘 살 거고.”
은우는 손을 내리고 채팅 창에 들어갔다. 그가 미국에 가 있는 동안 박기철이 선별해서 보내 준 집 사진이 있다.
그는 그것을 화면에 띄운 후 잠시 머뭇거렸다. 이걸 형에게 보여 줘도 되나? 이런 것까지 얘기할 필요가 있을까?
“…어제 들었지, 집 나간다고 한 거.”
그렇지만 어차피 알게 될 일이다. 어느 정도 들었을 테고.
은우는 그 사진을 건우에게 보여 주었다.
“이사… 독립? 이주? 어쨌든 이런 집으로 갈 거야.”
형의 눈동자가 확장되었다. 흔들리는 홍채엔 그가 읽을 수 없는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가 침몰해서 사라졌다.
“…어, 언제.”
그중 건우가 꽉 잠긴 목소리로 골라낸 첫 마디는 그것이었다. 은우는 노트를 종료했다.
“아직 안 골랐어. 그렇지만 근 시일 내에 가겠지.”
손가락으로 손바닥을 긁다가 주먹을 쥐었다. 희수가 말한 대로 끊어 버리려고 했는데 무언가가 계속 남아서 그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엄밀히 따지면 가족이라고 해도 건우는 남처럼 살아온 사람인데. 지금까지 말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족 대우를 해 준 것 같은데.
문득 오현이 한 말이 떠올랐다.
「상대가 물질적인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반성하는 거라면 단 한 번만, 딱 한 번만 기회를 더 줘 보게.」
그 말이 어째서 지금 떠올랐을까.
“나, 정말 끝까지 도움이 될 수 없는 거네.”
형의 중얼거림에 그는 고개를 설핏 들었다. 안 그래도 작은 키, 건우가 고개까지 낮추니 무슨 눈을 하고 있는지 보이지가 않는다.
무슨 의도로 형은 그런 말을 한 걸까. 도움? 그가 독립하는 데 도움이라도 주고 싶었나?
“미안, 해. 네가, 그런 돈을 모을 때까지 몰라 줘서, 아니… 그런 돈을 모으게 만들어서…….”
“…난 형이 미안해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은우는 뺨을 쓸었다. 차가운지 미지근한지 혹은 뜨거운지. 차갑다면 손이 차가운 건지 뺨이 차가운 건지.
“기쁘지 않아?”
“뭐?”
“형은 부모님이랑 사이가 좋잖아. 난 그 사이에 낀 이물질 같은 거고. 내가 나가면 신경 쓰일 일도 없으니까…….”
“그걸 말이라고 해?”
건우가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은우의 눈이 커졌다. 방금 그가 한 말에 화낼 구석이 있었던가?
“내가 그렇게 개새끼인 줄 알아?! 네가 그렇게 될 때까지 모른 거에선 할 말 없다는 거 인정해. 그렇지만 난……!”
“어…….”
“난 그래도 네 형이야……!”
건우가 이를 악물었다. 먼저 잘못해 놓고 우는 놈이 되고 싶지 않아서 꽉 참아 온 눈물이 그의 눈꼬리에 살짝 맺혔다.
은우의 심장이 콩, 놀랐다.
“비록 형 노릇 해 준 적 한 번 없는 못난 새끼지만, 그래도 동생이 나 때문에 집 나간다는데 좋아할 리 없잖아……!”
“아니, 형 때문에 나가는 건…….”
“나 때문 맞지! 내가 불편해서, 부모님이 불편해서잖아!”
은우는 할 말을 잃었다. 부정하고 싶은데 팩트가 맞았다.
“…네가, 집 나가겠다고 하면 막을 생각 없어. 솔직히 그래도 싸다고 생각해. 네가 지금까지 받아 온 상처에 비하면 내가 집 마련해 줘도 모자를 망정이고…….”
그사이 건우는 코를 먹으며 손바닥으로 눈을 우악스럽게 닦았다.
“그렇지만 네가 집 나가는 게 기쁠 리 없잖아…….”
듣고 있던 은우의 눈이 떨리는 건 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그는 멍청한 동생에게 화를 냈다. 그들 때문에 아팠을 텐데도 화 한 번 내지 못하는 게 가슴이 아파서, 적반하장인 걸 알면서도 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물질이라고 말하지 마. 네가 왜 이물질이야. 나쁜 건 우리였는데, 왜 네가 너를 폄하해.”
“그치만 그게 사실─”
“비정상이라고 했지. 맞아, 비정상이야. 엄마랑 아빠는 정상적인 부모가 아니었어.”
그에겐 정말 좋은 부모님이었지만, 그의 동생에겐 그렇지 않았으므로 정상이 아니다. 건우는 마음속으로 외면해 왔던, 그러나 알고 있던 사실을 드디어 못 박았다.
“네가 이상한 게 아니라 우리가 이상한 거라고.”
그러고 나니 더 미안해졌다. 그는 감히 동생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부모님은 석고대죄해도 부족했다. 그들이 아직도 자신들의 잘못을 모른다는 점에서 죄질이 더 나쁘다.
“네가 그렇게 벼랑까지 밀려나게 만든 우리가 나쁜 거야…….”
조금이라도 더 빨리 눈치챘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상처는 덜했을까. 그만 잘못한 게 아닌데, 그 하나가 달라졌다고 많은 게 바뀌었을까.
건우는 만약을 그만두었다. 가정하는 것조차 동생을 향한 실례였다. 이런 생각을 한단들 그가 가해자란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어딘가의 비틀림을 무의식적으로 감지하고 있었던 주제에 건조하고 덤덤한 동생의 표정을 핑계로 덮어 두고 있던 죄가 사라지지 않는다.
“미안해…….”
사실 어렸을 때부터 조금 부러웠었다. 그는 병원에서 살아야 하는데 어린 동생은 잔병치레 없이 건강했다 했으니까.
동시에 밉기도 미웠다. 은우는 그에게 문병 한 번 오지 않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로부터 줄곧.
“진짜, 네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어서 미안해.”
그래도 나이 차이 나는 동생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넘어갔다. 부모님이 곁에 계셨으니까 빈자리를 크게 느끼지도 못했다.
그의 건강이 나아진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오랜 병원 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온 집에 있던 동생을 보고 어색함에 몸서리치기도 했다. 그가 기억하는 동생은 유년기에 멈춰 있는데, 집에서 본 너는 그만큼 커 버린 고등학생이라서.
“모르겠다고 말하게 만들어서, 내가, 미안해.”
담담하고 건조한 얼굴에 위축되었던가 어색해서 외면하게 됐던가. 그렇게 2년, 거의 3년이 지났다. 그가 눈을 감고 있던 사이 동생은 제 목을 조르다 못해 스스로 병원까지 갔다.
더욱 우스운 것은 그걸 집안의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단 것이다. 그는 물론이고 동생의 지출까지 알고 있었을 부모님마저.
그는 그걸 깨달았을 때 도저히 눈을 감고 있을 수 없었다. 늦었다는 건 아는데, 그래도 손 놓고 있을 수가 없었다…….
“…가.”
그렇지만 늦은 건 늦은 거였다.
건우는 아까 봤던 집들을 떠올렸다. 대체 어떻게 그런 집을 구할 수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은우는 그보다 더 잘난 아이였다. 어련히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만약 빚내서 구한 거라고 해도 괜찮다. 그는 그 빚이 제 이름으로 되었어도 군말 없이 갚을 수 있었다. 그걸로 조금이나마 동생이 행복해하는 데 일조할 수 있다면, 아니 그의 죄를 참회할 수 있다면. 그는 그럴 수 있었다.
“이사, 가.”
문득 어릴 적 동생의 건강을 질시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병원에서 살아야 하되 캡슐로 등교하며 친구를 사귀고, 부모님 두 분 중 반드시 한 분 이상의 간병을 받던 시절이다. 그때의 그는 그 상황이 불만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배부른 고민이었는지.
“피해자인 네가 피하게 만들어서 정말 미안해. 그렇지만 집에 머무른다고 해서 네가 행복해질 리 없으니까. 우리 같은 거 꼴도 보기 싫을 거고……. 그러니까, 내가 방금 한 말은 다 잊어. 그냥 잊고, 새 집에서 편안하게 살아.”
정작 너는 집에 혼자 남아 눈물을 삼켰을 텐데. 빈자리가 익숙해져서 더는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혼자 설 수 있을 때까지 그렇게 방치되었는데.
관심이 낯설다 말하는 사람이 돼 버렸는데.
“새로운 추억도 쌓고, 방에서만 틀어박혀 있지 말고 거실에도 나오고. 게임도 하고 실컷 놀아. 이 집구석은 전부 잊어버리고.”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손깍지를 꼈다. 손톱이 손등을 파고들며 알싸한 통증을 냈다. 우습게도 그게 아팠다. 동생은 그보다 더한 아픔을 맛보면서 자랐을 텐데도.
“…미안해. 끝까지 이런 형이라서…….”
정말 우스운 일이었다.
▣ 076. 감정의 잣대
비가 왔다. 그렇지만 우산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걸었다. 상처 난 손이야 방수 장갑이 있으니 괜찮을 거다. 그냥 그렇게 믿었다.
“엥, 언제 한국 돌아왔… 아, 시발! 미친놈아! 왜 쫄딱 젖어 있는데!”
“희수야 무슨 일… 힉.”
“…미안. 생각나는 사람이 없어서.”
비에 젖은 몸으로 들어갈 수는 없으니까, 현관과 연결된 복도에 우두커니 섰다.
“안 들어오고 뭐 해!”
희수가 외쳤지만 애인이랑 노는 녀석의 집에 들어갈 생각 없다. 비에 안 젖었어도 안 들어갔다.
“하나만 묻자.”
“대체 뭔 문제길래 멀쩡한 노트 두고 비 맞으면서 온 건데?”
“네 말대로 그만두려고 했는데.”
“어?”
“집, 나가고 그걸로 끝, 하려고 했는데.”
그는 심장 어림을 더듬었다. 배신을 당했던 순간 이렇게 아팠던가? 배신자들의 목을 베고 광소를 터트렸을 때 이렇게 욱신거렸나? 아니면 진정으로 전부를 잃었음을 깨닫고 자살을 결심했을 때 이랬나.
모르겠다. 잘 모르겠다. 가족에 대해서 만큼은 언제나 멍청이가 된다.
“야, 너…….”
“형이 미안하대.”
“우냐?”
“끝까지 도움 못 주는 이런 형이라서 미안하고, 나가서 잊고 살래.”
은우는 그가 가진 유일한 일상의 조언자에게 물었다. 온통 비정상인 그와 달리 정상적으로 자란 친구에게 질문했다.
오래전에 고장나고 세계가 바뀜에 따라 뒤틀리기까지 한 감정의 잣대를 대신해 타인의 기준이나마 비슷하게 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냐.”
“…하.”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냐.”
“시발, 뭘 물어.”
희수의 애인이 수건을 들고 다시 달려 나왔다. 희수는 그 수건을 받아 그의 얼굴에 패대기쳤다. 그는 그것을 잡아 얼굴을 묻었다.
“한 번 봐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으니까 여기까지 온 거잖아.”
수건 새로 눈만 빼꼼 내밀었다. 그녀는 정말 한 치도 봐줌이 없다.
“그런 생각 안 했는데.”
“어휴, 이 똘추.”
자기 마음 정돈 알고 살아야 하는 거 아니야? 투덜거린 희수가 신경질에 가까운 물음을 던졌다.
“물을 테니까 대답해 봐. 너, 이제 집 나가면 가족이랑 끝맺을 거지. 그렇게 되면 형이랑도 안 만날 거고.”
“…그렇겠지.”
“부모님 다시 안 본다고 생각하면 어떤 느낌이냐.”
희수의 말에 은우는 잠시 고민하고 대답했다.
“별로, 지금과 달라질 것 같지 않아.”
깊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같이 살고 있는 지금도 따로 사는 것에 가까웠다. 완전히 끊기는 것에 묘한 느낌이 들지언정 그의 일상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형은.”
“형은… 형은…….”
형도 같아. 그 한 마디가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희수의 까만 눈동자가 그를 쳐다보았다.
“하나도 안 아쉬울 자신 있냐?”
아쉬울까? 형이랑 더는 안 만다면, 가끔 안부를 물어봐 주는 그 목소리가 없다면. 불편해도 싫진 않던 그 말들조차 사라지면.
“아니지? 속 안 시원하고 목구멍에 가시 걸린 것처럼 느껴지지?”
미안하다는 말이 마지막이 되면.
“…응.”
편할 것 같지 않다. 지금도 편하진 않지만, 이대로 끝이라 매듭짓는다면 영원히 편하지 않을 것 같다. 그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그럼 답 나왔네.”
“…….”
“더럽다, 더러워. 그놈의 피가 뭐라고. 아냐, 형까진 그래도 안정권이지. 부모님까지 포기 안 했으면 내가 화병 나서 뒈졌을 듯.”
혀를 찬 희수는 신발장 안의 우산도 꺼내서 던졌다. 그녀의 집에서 가장 큰 우산이었다.
“이만 꺼져, 새끼야. 너 때문에 데이트 잘하다가 찝찝해졌잖아.”
“…봐주면 될까.”
“네 맘대로 하세요. 애초에 답 정해 놓고 왔으면서 뭐라는 거야?”
“봐줘도 되냐.”
희수가 으, 하는 한숨을 내뱉었다.
“내가 우리 지수한테만 용사님이라서 널 구해 주진 않을 거고. 대신 형 새끼가 이번에도 좆 같이 굴면 그땐 내가 네 형님한테 진짜 좆같이 구는 게 뭔지 보여 준다.”
짜증이 한가득 난 말인데도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