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형> 여기 글 좀 봐 봐. “모두가 첫 번째 엔딩을 찾을 때 오로지 실력만으로…….”』
은우는 형의 메시지에 질색하는 얼굴을 하며 소고기 팽이버섯 말이를 뒤집었다.
“그만해.”
『형> 아, 미안. 기분 나빴어?』
“…그건 아니야.”
『형> 그럼 다행이고…….』
은우는 목덜미와 뺨을 문질렀다. 솔직히 말하면 형이 저러는 게 싫지는 않다. 형이 저걸 보낼 수 있는 것도 결국 켄에 대해서 찾아봤다는 의미니까.
원래 인터넷 방송 같은 걸 안 보는 사람이 서건우임을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다만 그렇다고 관련 글을 복사해 오거나 링크를 주는 건 좀, 역시 그렇다. 그가 저 글의 주인공이라서 그런지 저럴 때마다 귀가 홧홧해진다고 해야 하나.
싫진 않지만, 역시 싫다.
“언제 도착해.”
『형> 거의 다 도착했어.』
그건 정말 ‘거의 다’여서, 1분도 안 돼 차 소리가 들렸다.
“차고랑 현관문 열어.”
하우스 AI가 알아서 문을 열어 주었다.
“형님 왔다.”
“어.”
은우는 굳이 차고 쪽까지 나가 짐을 받아 왔다. 형이 들 수 있다며 항변했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은우에게 있어 형은 여전히 톡 치면 부러지는 이쑤시개였다.
“많이 샀네.”
“어, 어.”
고기랑 새우 팩 아래로 안주와 술이 있다. 은우는 그것을 발견하고 잠시 걸음을 멈춰 세웠다.
“나는 안 마셔.”
“아, 너 마시라고 산 거 아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겹쳤다. 둘 다 같은 순간을 떠올린 게 분명하다. 은우는 묘한 패배감에 미간을 좁혔다.
“특별히 선호하는 조리법은.”
“딱히? 다 좋아하는데.”
“알레르기는.”
“견과류랑 복숭아.”
그는 그 정보를 머리에 담아 두며 간식용 견과류를 전부 치워 버렸다. 그같이 튼튼한 사람도 한 번에 훅 갈 수 있는 것이 알레르기인 이상 당연한 행동이었다.
“아침은.”
“안 먹었는데…….”
구이용 돌판을 꺼내다 말고 은우는 형을 지그시 응시했다. 건우의 눈동자가 데구르르 굴렀다가 고개를 숙였다.
“집어 먹고 있어.”
미리 준비해 두길 잘했다. 은우는 구워 뒀던 요리 몇 개를 형의 입에 쑤셔 박았다. 조금 식었지만 먹을 만할 거다.
“다 네가 만든 거야? 엄청 잘 만들─ 읍.”
갑자기 들어온 음식에 건우는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정직하게 씹었다. 곧 그 눈이 크게 뜨였다.
“뭐야, 맛있어.”
그의 요리 실력을 기대하지 않았단 건 알겠다. 은우는 식는 걸 방지하기 위해 덜 익혀 놨던 음식들을 인덕션이나 오븐에 넣었다.
저쪽 집에서 살 땐 눈치 보여서 자주 하지 못했던 짓이다.
“너, 요리 진짜 잘한다.”
한편 건우는 식탁에 옮겨져 있는 음식들을 하나둘 주워 먹으며 감탄했다.
중학생 때부터 혼자 해 먹은 정도로 만들어진 수준의 실력이 아니다. 이건 정말 요리에 관심 있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너, 맛있는 거 좋아해?”
“어.”
돌아온 단답에 건우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맛있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더 드물긴 하겠다.
“요리가 취미야?”
“…취미라, 아마도?”
건우는 소고기말이를 하나 더 입에 밀어 넣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오늘 동생의 취미를 하나 더 알게 되었다. 많이 늦었지만, 이렇게 하나하나 알아 가다 보면 언젠가 많이 알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사이 은우는 빈 웍에 기름을 두르고 잠시 기다렸다. 그리고 열기가 훅 올라왔을 때, 휘저은 계란물을 부었다.
홧홧한 열기에 투명했던 계란물이 곧바로 희노랗게 변했다. 익은 단면 위에 생계란이 찰랑거렸지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는 그 상태에서 무척이나 긴 젓가락을 들었다. 대체 뭐 하는 건가 싶어 건우가 고개를 쭉 뺐다.
쿡.
동그란 계란 한가운데에 젓가락이 찍혔다. 은우의 손목이 기교를 부리며 꺾였다. 마치 태엽을 감듯 손목이 돌아갈 때마다 계란프라이가 장미꽃처럼 화려하게 피어났다.
샛노랗고 보들보들한 계란 장미가 동그랗게 퍼 둔 볶음밥 위에 사뿐히 올라갔다.
“헐.”
고기볶음과 샐러드, 파스타를 번갈아 먹고 있던 건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 정도로 막 완성된 볶음밥의 비주얼은 훌륭했다.
“개쩔어.”
은우는 살짝 뿌듯해졌다. 아침에 유어튜브에서 신기하게 본 터라 한번 해 본 건데 정말 가능할 줄 몰랐다.
“나, 이거 사진 찍어서 올려도 돼?”
은우는 눈을 껌뻑였다.
“그걸 왜 찍어.”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형이 흠칫거렸다.
“…뭐라 하는 거 아니야.”
“어어, 알아.”
말투가 너무 건조해서 그렇지, 은우가 하는 대부분 말은 쏘아붙이려는 게 아니란 걸 건우도 슬슬 학습했다.
“그냥, 자랑하려고?”
“누구한테?”
“…내 계정을 보는 불특정 다수에게? 겸사겸사 친구나 직장 동료들한테도 자랑… 아, 미안. 이거 기분 나빠 했지. 자랑은 안 할게.”
은우는 목덜미를 쓸었다.
“뭐라 자랑하려 했는데.”
형은 곰곰이 고민하다가 가볍게 답했다.
“동생이 만들어 줬다, 정도만?”
그 정도라면 허락해 줄 만했다.
“그 정돈 괜찮아.”
“진짜?”
“어.”
“그럼 찍는다?”
“어.”
사진 전용 앱을 켠 형은 전문 사진사처럼 사진을 찍었다. 전문 사진사처럼 찍느다 해서 결과물까지 그렇게 나오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럴싸했다.
그러고 보니 켄 계정으로 슬쩍 들어가 본 형 계정도 이런 게 많았던 것 같다. 은우는 사진에 추가로 필터를 거는 형을 보며 목을 긁적였다.
“복잡하게 하네.”
“그런가?”
씩 웃은 형이 그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병원에서 살 때 외출 할 기회가 별로 없다 보니, 한 번 외출할 때마다 사진을 잔뜩 찍어 와서 보정하는 게 취미가 됐다던가.
“진짜랑 VR로 접속해서 보는 거랑은 또 다르잖아.”
잔에 물을 따르며 은우는 침묵했다. 아무리 현실 같이 만든다 해도 VR과 현실은 엄현히 다르니. 형의 말이 맞다. 현실과 가상은 절대 뛰어넘을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현실 사진들이 좋아.”
형은 그리 말하며 완성본을 내밀었다.
“그리고 말이야, 사진에서 색감이 얼마나 중요한데. 필터 하나 까는 걸로 엄청 달라지거든?”
분명 그가 한 밥을 찍은 사진인데 조금 낯설었다. 필터가 약간 들어갔을 뿐인데 마치 예술 작품처럼 보였다.
“예쁘네.”
“거봐.”
씨익 웃은 건우는 뒤늦게 아차 했다.
“아이고, 음식 식었겠다. 빨리 먹자.”
“딴짓한 게 누군데.”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므로 건우는 시선을 회피하며 볶음밥을 해체했다. 한 손으로는 이것저것 집어 먹으며 다른 손으론 사진을 건드리는 솜씨가 한두 번 해 본 사람의 것이 아니다.
“맞다. 너, 얼굴책 계정 만들지 않았어?”
“어.”
“아, 그럼 거기에 올려. 내가 올리는 것보단 그게 더 낫겠네.”
“왜?”
그 ‘왜’는 여러 의미를 담고 있는 왜였다. 업로드를 해야 하는 이유, 이 사진이어야만 하는 까닭, 이걸 올린다고 사람들이 좋아할까 하는 의문까지.
“분명 사람들은 좋아할걸?”
“왜?”
“네가 만든 거니까.”
“…그냥 그 이유만으로?”
얼굴책 계정을 만들고 그의 일상 일부를 공개할 각오까진 다졌다. 그러나 은우는 어떤 걸 공개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다 공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이 되어서다.
그러다 보니 올려야 할 사진도 고르지 못했다. 과거의 버릇이 아직 벽이 되어 사고를 가로막은 케이스였다. 이번 사건이 겹친 것도 있었고.
“그렇게 따지면 올릴 사진이 없지.”
형의 반문에 할 말이 없는 것도 사실이라. 은우는 떨떠름한 얼굴로 사진을 받아 업로드했다. 업로드에도 형의 도움이 필요했다.
“…….”
그는 그 시점에서 형의 눈치를 보았다. 켄의 계정은 현재 같은 스트리머나 공적으로 만난 관계만 친구 추가 하고 일반인은 절대 받지 않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받기 싫어서 안 받는 거 아니야.”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 은우는 애꿎은 목덜미만 쓸며 소고기말이 두 개를 한 입에 넣었다. 방금 들은 말이 무슨 뜻인지 가늠하던 건우가 푸하하핫 웃었다.
“알아.”
일반인을 안 받는 계정이 한 사람의 일반인을 친구로 받는다? 장담하건데 순식간에 털릴 것이다. 개인 정보 보호법이 발달한 요즘이라도 절대 못 막는다.
은우가 추가해 준다고 하면 그쪽에서 거절하는 게 옳은 일이란 소리다.
“신경 안 써도 돼. 은근 이런 데서 세심하네 너.”
건우는 키득키득 웃으며 볶음밥을 한껏 떠먹었다. 보들보들한 계란옷 아래엔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밥알과 다진 재료들이 있다. 고기를 얼마나 많이 넣었는지, 입에 넣고 씹으면 밥알 사이로 육질이 씹혔다.
끝내주게 맛있다.
“오, 벌써 반응 온다.”
그사이 벌써부터 ‘좋아요’가 우다다 찍혔다. 직접 요리했다고 적어 둔 글 아래엔 ‘뻥치지 말라’ 내지는 ‘실력 미쳤다’ 따위의 답글이 달렸다.
박 팀장이 답장은 안 해도 된다 했으므로 은우는 노트를 그냥 꺼 버렸다. 저 무쓸모한 것 때문에 밥 다 식었다.
▣ 096. 늦게나마 이해받게 된
“나는 네가 손이 큰 건가 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은우는 그릇을 싹싹 비우다 말고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형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서다.
“너, 잘 먹는다고.”
참고로 은우는 5인분 정도 되는 양의 음식을 만들었다. 건우는 보편적인 성인 남성의 1인분을 먹고 백기를 들었고.
그러나 지금 그릇 속 내용물은 전부 깔끔하게 해치워진 상태다.
“난 형이 더 신기한데.”
은우는 시선으로 건우의 손을 가리켰다. 형의 손 안에는 맥주 캔이 들려 있다. 식탁 위에도 이미 빈 캔 두 개가 굴러다니고 있다.
차를 끌고 왔다는 건 자동 운전이 있으니 괜찮다지만, 대낮에 술을, 그것도 저렇게 많이.
그는 술을 물처럼 마시는 형을 보며 질린 눈을 했다. 그의 주량까지 다 가져가 버렸는지, 형은 맥주 세 캔을 앉은 자리에서 홀라당 마셨음에도 얼굴색 하나 안 변했다.
몸이 약한데도 주량이 셀 수가 있구나. 그는 새삼스레 세상의 신비함을 되새겼다.
“다들 신기해하긴 하더라.”
건우가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껏 주량 대결로 져 본 적 없는 사람의 여유였다.
“오늘도 위얼휴먼?”
“어.”
건우는 미간을 좁혔다.
“그거 좀 잔인하더라.”
“액션 장르니까.”
“다른 장르는 별로 생각 없어?”
그는 거기까지 말한 후 황급히 덧붙였다.
“지금 네 스타일도 좋은데, 딴 게임 하는 것도 궁금해서.”
“…종종 했던 것 같은데.”
“아니, 그게 아니라… 추리 게임이라든가… 스포츠 게임이라든가, 그런 거는 못 본 것 같아서.”
그런 장르의 게임은 생각해 본 적 없다. 그렇지만 레이싱 게임도 재밌게 해 봤는데, 추리 게임이나 스포츠 게임을 새삼 거부할 이윤 없다. 지금까지 상상도 못 해 봐서 그렇지.
“근데 그건 왜.”
“…아니, 사람 죽고 죽이는 게 좀, 그렇잖아?”
한편 건우는 그 말과 함께 픽 웃었다. 술 취했을 당시 그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고 오해한 나머지 ‘죽여 줄까?’라고 묻던 동생이 떠오른 탓이다.
은우는 그런 형이 웃는 이유를 몰라 눈만 껌뻑였다.
“넌 하나도 안 그렇지? 그래도 진짜로 사람 죽이면 안 된다.”
“안 죽여. 왜 죽여.”
“왜가 아니라 어떤 이유가 있어도 사람은 죽이면 안 돼.”
“…그래.”
가치관의 차이 속에서 은우는 떨떠름히 대답했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납득할 순 있다.
그는 설거지 거리를 안 겹치게 들었다.
“고려해 볼게.”
게임의 장르야 굳이 그가 끙끙댈 필요 없이 박 팀장에게 상담해 보면 될 일이다. 은우는 가볍게 넘겼다.
곧 싱크대 위로 그릇이 차곡차곡 놓였다. 기름떼 낀 놈들이 겹치면 짜증이 엄청 났으므로 따로 떨어트려 놨다. 주방이 넓어서 문제없었다.
그보다 언제 말한담. 아니, 꼭 말해야 하나? 관장님은 말하는 쪽을 권했지만, 여전히 필요성을 확신하지 못하겠다.
이 말이 당신의 상처를 긁을 걸 아는데 나는 다시 헤집어야만 하나.
은우는 목을 긁적이다가 네 번째 맥주 캔을 따는 형을 보았다. 어느 순간 세상이 어렴풋해졌다.
그건 주방과 연결된 거실의 한쪽 벽면이 통유리여서일까? 그곳에서 흘러든 햇살이 세상을 희뿌옇게 물들였나?
떠다니는 먼지가 마치 유리 조각처럼 빛을 반사하고, 갈라진 스펙트럼들이 서로 뒤섞이며 베일을 만들어 냈다.
세계의 윤곽이 희미해졌다.
망설이던 게 무색할 정도로 문장 하나가 울컥 솟아올랐다.
당신의 아픔은 주변 사람들이 알아주겠지만, 나는 누가 알아줄까.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결핍은 무엇으로 덮어야 해?
“서러웠던 것 같아.”
“응?”
“그때 모르겠다고, 괜찮지 않다고 한 거.”
그의 말은 소리로서 온전히 전달되었을까. 아마 그랬을 것 같다. 그 증거로 형의 갈색 눈동자가 동공에 먹혔다.
의자 끌리는 소리와 함께 그 몸이 벌떡 일어섰다.
그 모습을 은우는 너절한 눈빛으로 주시하다가 그대로 눈썹을 내렸다. 흐. 숨소리가 반쯤 감겼던 눈을 다시 뜨이도록 만들었다.
“사과받으려고 말하는 거 아니야. 진짜야.”
그것은 거짓 한 점 없는 진실이었으므로, 평소처럼 담담히 고할 수 있었다. 당신은 믿지 않을 것이나 그는 진심이었다.
“그냥, 그때 많이 서러웠다고. 아는 분이 말해 보라 그래서.”
다만 흔들리는 형의 눈을 담았을 때, 은우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었다. 눈을 마주칠 자신이 없어졌다. 그래서 싱크대 쪽으로 몸을 살짝 돌렸다.
쏴아아아-
그는 수도꼭지를 돌렸다. 기름기 낀 그릇 위로 뜨거운 물이 쏟아졌다.
부옇게 올라오는 김이 손가락 사이를 습하게 만든다. 은우는 괜스레 양손을 매만졌다. 복부와 양다리, 왼팔이 그리고 목이 아렸다.
“…그냥 무시해.”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은우가 그리 후회할 무렵, 훌쩍이는 목소리가 귀에 박혔다.
“아, 아냐.”
아, 또 운다. 은우는 수도꼭지를 잠근 것 같은 목소리에서 울음기를 발견했다.
하면 마음이 무거워지되 묘하게 들뜨게 된다. 참 이상한 일이다. 상반된 감정이 동시에 든다는 것은.
언제 겪어도 이상해.
“말, 말해 줘서… 고마워.”
그는 다시 뒤를 돌았다. 식탁의 바로 옆자리에 형이 서 있었다.
“킁.”
형은 코를 먹으며 손등으로 인중 부분을 문질렀다. 별들을 어긋매여 배열한 끝에 떨어지는 빛 방울이 그 뺨을 적셨다.
“정말 고마워…….”
은우는 그게 꼭 성직자가 백일기도를 드려 만든 성수처럼 보였다. 누군가를 고통에서 구원하는 치유의 물이다.
“많이, 서러웠지.”
온화한 눈매는 끊임없이 눈물을 토해 냈다. 은우는 그게 가끔 신기했다.
그는 이제 우는 방법조차 기억나지 않는데, 과거에 머무른 인연들조차 눈물을 씹어 삼키는 자들뿐이었는데. 그에 반해 형은 너무 잘 울었다. 마치 누군가의 것마저 대신 흘려 주는 것처럼.
“많이 아팠지.”
그리고 그 속에서 그의 명령을 따라 ‘미안해’가 생략된 말들이 이어졌다. 울금색 햇빛이 휘광처럼 형과 겹쳐졌다. 그저 오우의 햇살일 뿐인데 동살처럼 눈부시고 봄볕처럼 따스하다.
“억울, 하진 않았어?”
은우는 오현 관장이 한 말을 떠올렸다.
「어떤 심정이었는지 알아주길 바라는 거겠지.」
오현 관장도 만나 본 적 없을 것임에도 형은 그것 그대로를 행하고 있었다.
“서운했을, 것 같은데.”
멋대로 짐작하는 태도가 꺼려지나? 혹은 기꺼운가.
가슴이 욱신거리고 손끝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정의하지 못했던 감정이 타인의 공감 속에서 하나둘 이름을 갖추기 시작했다.
“내가, 내가.”
울음소리로 뭉개진 단어가 귀에 박혔다. 은우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다시 사과하려나.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건 별로 듣고 싶지 않다. 그는 형이 미안하길 바라는 게 아니었다.
형이 미안해하는걸,
“많이 늦었지.”
‘미안해’라는 말만 바라지 않았다.
은우의 입새가 살짝 벌어졌다.
“내가 많이 늦었지. 많이 아팠는데, 그렇게 서러웠을 텐데. 내가 너무 늦어서…….”
전생의 그 사람이 말하길, 어떤 현명한 이는 하나의 의미를 전달할 때 수백 가지의 문장을 고를 수 있다고 했다. 그 자신은 이리도 어리석어 ‘미안해’라는 단어밖에 모르는데, 당신은 그 단어를 쓰지 않고서도 그 뜻을 전달할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은우를 구성하던 삭막한 모래사막 위로 바람이 불었다. 간간이 불어오던, 모래를 흐트러트리는 데 그치던 산들바람이 아니었다.
“은, 우야. 알, 려 줄 수, 있어?”
그건 폭풍이었다.
“형이, 많이 멍청해서… 정말 멍청해서…….”
사막의 모래들을 쓸어버리고 그 아래 묻힌 전야를 끄집어낼 폭풍이었다.
“아직, 다 모르겠어. 네가 얼마나 아팠는지, 얼마나 아픈지.”
은우는 그 전야를 더듬었다. 네 구의 교수된 시신을 지나쳐, 머리가 잘린 신의 육신을 지나쳐, 사막의 한가운데에 박힌 비석을 더듬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단 한 번도 이해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고, 애정을 얻지 못했던 가여운 아이의 무덤.
“그러니까 제발 알려 줘…….”
그런 주제에 전생이 가져온 사막에 먹혀, 한때 어떤 기억과 감정과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는지조차, 어쩌면 그 존재조차 잊혀졌던 것.
─에 먹힌 서은우에게 가려지고, 그 이름마저 빼앗긴 애처로운 것.
“내가 더 이상 그러지 않을 수 있도록 알려 줘…….”
늦게나마 이해받게 된 것.
“동생이 더 이상 서럽지 않을 수 있게.”
은우는 이를 악물며 싱크대에 몸을 기댔다. 우연찮게도 아주 작은 기억의 파편이 사진 조각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건 서은우가 아직 걷는 것에 서툴 때, 그럼에도 부모님의 손에 들려 병원에 방문했을 때의 일이었다.
“더는 아프지 않게.”
병실 속에서 방긋 웃던 소년.
“은우 왔다!”
두 팔로 안아 주던.
“내 동생!”
정말로 따스했던.
“더는 동생을 혼자 두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게 해 줘.”
그 작은 기억 하나가, 이제야 떠올린 온기의 조각 하나가 얄팍한 위안이 되어 주었다. 가장 고통받았던 아이의 추모가 되었다.
유년기의 서은우가 이제야 온전히 눈을 감았다. 그 자리에 솟구치는 것은 누군가가 대신 흘려 준 눈물이었다.
* * *
“약속, 정말로 지킬 수 있어?”
“반드시, 어떻게든.”
“그럼 됐어. 그거면 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