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저녁, 은우는 형을 배웅한 뒤 어질러졌던 거실을 정리했다. 아침부터 저녁 먹을 때까지 놀았던 걸 생각하면 퍽 지칠 법도 한데, 컨디션은 멀쩡하다. 오히려 개운하기까지 했다.
그는 목덜미를 쓸었다. 오현 관장의 충고는 옳았다.
이젠 정말 후련하다.
▣ 098. 선택은 돌이킬 수 없다
한 휴머노이드의 도움을 받아 인디고는 휴머노이드의 대장에게로 안내되었다.
안내자의 말에 따르면 대장의 이름은 ‘번트 엄버Burnt Umber’. 정체는 뻔하게도 가장 인간과 닮았던 여자였다.
“어째서 날 살렸지?”
엄버와의 만남은 벌써 세 번째다. 그러나 앞선 두 번과 달리 홈그라운드라서 그런지 그녀는 가벼운 차림이었다. 덕분에 사람들만 신났다.
─후,,,,엄버 진짜 예쁘다
─누나,,,,지금까지 왜 망토 뒤집어쓰고 있던 거예요
─몸매가,,,,ㅗㅜㅑ,,,,,
─스칼렛보다 예쁜 듯
─이단이다!! 잡아라!!
─배신자의 목을 쳐라!!
저 사람들 때문에 방송을 이어 가긴 하는데, 가끔은 참 저질이란 생각이 든다. 사람의 외형이나 몸매를 신경 써서 뭐가 좋다고.
인디고 속 은우가 사람들의 밑바닥을 확인하는 동안, 엄버는 대답 대신 찻잔 속 스푼을 휘저었다. 마치 커피라도 탄 것 같았다.
심지어 그녀는 실제로 그걸 마셨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이 고즈넉한 실내에서도 잘 보였다.
인디고는 그것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소화기관이 없는 기계장치나 아바타에겐 불필요한 행위─불가능하기도 하고─기 때문이다. 링크를 풀고 인간으로 되돌아간다면 모를까, 전쟁을 위해 만들어진 몸에는 섭취 및 배설 행위 자체를 시도할 수 없다.
“너흰 날 도울 이유가 없을 텐데.”
그는 가까스로 정신 차리며 재차 질문했다. 그제야 엄버가 그를 돌아보았다. 인조 홍채란 걸 인식하지 않으면 진짜 인간의 것처럼 보일 눈동자가 은은히 빛났다.
“아주 오래전, 인간이 아직 지구에 남아 있고 기계장치가 아직 인간들 속에 섞여 있을 적에 한 과학자가 살았다.”
그녀는 대답 대신 뜬금없는 이야길 시작했다. 물론 건조하지만 진중한 목소리에 인디고는 쓸데없이 반문하는 짓거릴 하진 않았다.
“그 과학자는 모종의 사건으로 아이를 잃었고, 잃어버린 제 아이를 본 따 아주 작은 기계를 만들었지. 배양이나 클론이란 방식도 있었지만, 그녀는 기계장치를 고집했다. 쉽게 부서지지 않고 망가져도 고칠 수 있으니까.”
그들이 있는 방 창가의 커튼이 휘날렸다.
“그렇지만 그녀는 모순적이게도 제 아이를 기계장치가 아닌 인간처럼 대하게 되었다. 정말 그녀의 아이처럼, 아니, 새롭게 얻은 아이처럼.”
커튼 새로 희미한 햇살이 흘러들며 회색빛 실내에 색을 더했다. 공중을 가볍게 떠도는 먼지가 은빛으로 빛났다. 마치 명화의 한 장면처럼.
그리고 세계가 희뿌예졌다. 다시 덧그려지는 장면은 이야기 속의 순간이다.
〚죽은 아이의 대체제로 만들어졌던 기계장치는 어느새 그녀의 두 번째 자식이 되었고, 그것은 제가 기계장치란 사실도 잊은 채 인간으로 키워졌지.〛
짤막짤막하게 지나가는 장면은 내레이션을 그대로 따라 했다. 한 여자가 여자아이를 끌어안는 모습이 보이는가 하면 여아가 좀 더 자라서 여자와 청소를 하기도 했다.
〚성장기에 맞춰 체형을 키우느라 몇 달에 한 번씩 몸의 파츠가 갈아 끼워지는 줄도 모르고. 외출을 자제하는 게 사실 주변인이 그것을 이상하게 여길까 싶어서인 것도 모르고.〛
야심한 밤에 잠든 아이의 다리 파츠를 갈아 치우는 과학자.
‘오랜만에 본다야. 그보다 키가 많이 컸네?’라고 말하는 주변인. 짓궂게 웃는 아이.
〚그렇게 기계장치는 자신이 인간이라고 생각한 채 성인이 되었다. 심지어는 제 어머니가 일하던 연구소에 입사하기까지 했지.〛
아이는 그새 성인이 되었다. 성인이 되어 연구소 문을 박차고 들어가는 여인의 얼굴은 엄버의 것과 똑 닮았다.
〚기계장치가 인간들에게 반란을 일으키지만 않았다면 그 행복은 좀 더 길었을까.〛
상황이 급박하게 뒤바뀌고, 거리가 화마에 휩싸였다. 인간과 기계장치가 싸우는 모습이 비춰졌다.
〚기계장치가 반란을 일으키는 건 순간이었지. 처음엔 밀리는가 했던 인간들도 기계장치에 맞서 전선을 구축했고. 다만, 그래.〛
거기서 은우는 한 가지 의문을 품었다.
〚자신을 인간으로 알던 기계장치는, 기계장치를 자식으로 삼은 과학자는 대체 어느 편에 섰어야 했던 걸까?〛
그 어떤 편에도 서지 않았을 번트 엄버는 어떻게 이제까지 살아온 걸까?
“과학자는 제 딸에게 숨겨온 진실을 알려 주며 도망칠 길을 열어 주었다. 인간도, 기계도 되지 못한 어중간한 자식은 그 길을 따라 도망칠 수밖에 없었지. 모든 게 혼란스러운 와중에 어머니의 유언만큼은 흔들림이 없었으니까.”
과거 회상이 끝나고 다시 인디고와 엄버의 대화의 한 장면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로 줄곧 지상을 떠돌았다. 인간을 피해서, 기계장치를 피해서. 안드로이드 사건 이후 제조가 금지된 전투용 부품을 사용하신 덕에 수백 년이 지나도록 망가지지도 않았지. 물론 연구소에서 배운 정비 기술 탓도 있겠지만.”
“설마…….”
“그래, 방금 이야기는 내 이야기가 맞다.”
엄버는 창가에 몸을 기대며 차를 홀짝였다.
“기계장치인 주제에 인간에게 분노한 적 없고, 인간처럼 자란 주제에 기계장치란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어중간하고 바보 같은 이야기지.”
그 시점에서 몸의 자유가 돌아왔다. 너무 대화가 길어지면 플레이어가 지루해할 거란 걸 잘 아는 제작사다.
“단순히 지나가는 NPC가 아니라 게임의 주제를 관통하는 캐릭터였네요.”
─ㅇㅇ....
─와 그럼 얼마나 산 거임? 할머니네?
─저런 갓캐를 두고 할머니 소리가 나오냐;;
─진짜 정체성 혼란 오졌겠다
─얼마나 단단하면 벗겨지는 게 다냐
이런 캐릭터는 게임에 한해 악당이란 설정이 잘 붙지 않는다. 물론 보편적인 상황이 그렇고, 이 게임은 어떨지 모르지만.
은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물음표를 띄운 엄버를 살폈다. 여기서 키워드를 내뱉으면 잡담이고, 말 걸기를 택하면 이벤트 진행이다.
“조금만 묻고 바로 스토리 진행 하겠습니다.”
그는 잠깐 고민하다가 ‘휴머노이드는?’이라고 물어보았다.
“휴머노이드는 나 같은 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을 미워하지도 못하고 인간의 편을 설 수도 없는 자들. 다만 대부분 육체를 교환한 상태다. 나처럼 비싼 몸을 가진 자들은 별로 없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기계장치를 분해해 파츠를 직접 만들어 쓰는 중이지. 물론 완전히 다른 케이스의 구성원도 있다.”
“완전히 다른 케이스.”
“인류와 기계장치의 전쟁이 발발한 후, 기계장치가 어느 시점부터 퇴보했다. 그들은 자아를 잃고 이지를 상실했지. 그렇지만 간혹 뒤늦게 발현된 개체도 있다. 인간들은 그걸 보통 특수 기계장치라 부르더군.”
엄버는 창가에 기댔던 몸을 슬쩍 한쪽으로 밀고, 창밖을 엄지로 가리켰다.
“특수 기계장치는 대부분 살육에 특화되는 쪽으로 자아를 발현하지만, 소수의 개체는 기계장치가 잊었던 감정을 자각해 내는 데 성공했다. 그게 저들이다.”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수백 년에 걸쳐 모든 결과 그 수가 전체 휴머노이드 중 절반에 이를 지경이라며 설명이 덧붙여졌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거짓말할 이유도 없지만─이들의 전력은 꽤 되는 셈이었다. 감정 자각 케이스의 경우, 슬쩍 봤을 때 엘리트 몹 수준의 신체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물어볼 건 다 물어본 것 같네요. 스토리 진행 하겠습니다.”
은우는 엄버 앞에 제대로 섰다. 말 걸기를 택하자 엄버가 수동적인 자세에서 벗어났다. 은우는 반대로 수동적이게 변했고.
“그걸 왜 내게 말해 주는 거지?”
“너희 인간과 협력하고 싶어서다.”
“기계장치가 몰락하게 된 지금에서야?”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엄버는 기댔던 몸을 도로 세웠다.
“내가 셋의 행방을 바로 알려 줄 수 있었던 이유가 뭐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그녀는 인디고의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잘 벼린 칼처럼 예리하게 목소리가 쳐들어왔다.
“그는 우리에게 함께하자 이야기했다. 나는 휴머노이드들을 대표해 거절했고.”
“어째서?”
“짐승은 자유를 논할 수 없다. 난 기계장치들의 반란을 이해하지만, 그 이후 자유라는 목적을 상실하고 살육이란 수단에 집중하게 된 그들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건 우리 휴머노이드 모두가 동의하는 부분이야.”
“모두가…….”
“그래, 모두가. 인간에게 죄가 있고 없고를 넘어서 기계장치는 반란의 의미를 잃었어. 이제 와 대의를 논한들 늦었다. 우리가 그들을 거부한 이유다.”
그들이 기계장치와 같은 뿌리에서 파생됐음을 감안하면 놀랍도록 냉정한 판단이었다.
역사에서 동떨어져 이어받은 원한으로 살아갈 뿐인 인간─인디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건 그가 감히 대답할 수 없는, 원한과 가장 밀접한 당사자의 발언이었다.
“그렇다고 차마 인간을 택할 수도 없었어……. 기계장치가 대의를 잃었다고 해서 인간의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너희가 우릴 저 살육 병기와 똑같은 취급할 거란 건 둘째 치고서라도.”
그녀는 뚜벅뚜벅 걸어 방 한쪽에 있던 더미에 다가갔다. 누런 천을 덮어 둔 그것은 겉의 윤곽만으론 정체를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젠 때가 왔어. 선택할 때가.”
그녀는 천을 거뒀다. 그러자 정지됐지만 형체를 그럭저럭 잘 유지한 기계장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확인 개체다.
“인간, 특수 기계장치의 출현 빈도가 늘어난 걸 설마 우연이라 생각하진 않겠지? 또한 너희가 발견한 공장이 다일 거라고도.”
“…공장이 더 있다고?”
“특수 기계장치가 늘어나는 원인은 따로 존재한다. 만약 이번 기회를 놓치면 인류는 또다시 지지부진하게 전쟁을 이어 가야 할지도 모르지.”
그녀의 말에 인디고는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거래하자는 거군.”
“그래. 우리가 그 원인과 위치를 제공할 테니, 인간들은 우리를 동맹 내지 아군으로 인정해 주길 바란다.”
“왜 이제 와서? 아까 차마 인간을 택할 수 없다고 한 건 너희였을 텐데.”
“…우리가 누군가의 편에 서지 않은 건 꼭 우리의 힘이 약해서만이 아니다. 우리는 아직도 선택하지 못했어.”
연두색 눈동자가 어렴풋해졌다. 그것은 기계라고 경시하기엔 너무도 사람다운 빛깔로 반짝이고 있다.
“인간이 되고 싶은지, 기계장치로 끝나고 싶은지.”
건조하지만 쓸쓸한 색으로 그녀는 속삭였다. 인디고의 몸이 떨렸다.
“우리 스스로도 선택하지 못했을진대 인간들이 과연 우리를 인정해 줄까? 오랫동안 그것에 대해 회의적으로 생각해 왔다. 물론 세력이 약하다는 이유로 개죽음당할 가능성을 방지하고자 한 것도 있고.”
그게 상대를 더 이상 기계로 볼 수 없게 돼서인지, 혹은 그 말을 이해했기 때문만인지는 알 수 없다.
엄버가 인디고와 정확히 시선을 마주했다.
“그렇지만, 인간인지 기계장치인지 불분명한 상태에서 구조를 택한 너희를 믿어 보기로 했다. 적어도 예전보단 나아졌을 거라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혼란을 뒤집어쓰고 있던 눈동자가 또렷한 희망을 그렸다.
“어차피 이대로 가 보았자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멸망뿐일 테니.”
예부터 이어져 온 인과에 우연이 엮여 만들어진 희망이다.
* * *
인류는 인디고의 보고를 받은 후, 숙고 끝에 그들을 인정하기로 했다. 물론 바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기계장치와의 전쟁이 워낙 오래 이어진 터라 기계장치에서 떨어져 나온 휴머노이드를 도통 신뢰할 수가 없던 탓이다.
때문에 그들은 같이 싸우길 청했다. 휴머노이드가 확실하게 기계장치를 버린다면 그땐 휴머노이드를 인정하겠다는 심보였다.
뿌리를 저버리라는 말인 만큼 휴머노이드 쪽에서도 반발이 나왔다. 그렇지만 휴머노이드의 수뇌부들은 그 반발에 대해 고개만 저었다.
그도 그럴 게, 승기를 잡은 만큼 언젠가 인류는 승리를 거둘 터. 그때 가선 이런 제의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선택권을 가지기 위해서라도 이번 싸움에서 나서야 한다. 다만 벌써 결정한 자가 있다면, 나는 그 결정을 존중하겠다.”
엄버를 비롯한 수뇌부들이 휴머노이드 앞에 서서 연설을 했다. 결과는 당연하게도 같이 싸우겠다는 것이었다.
“슬슬 끝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ㅜㅜㅜ벌써ㅠㅠㅠ
─하, 이번 작도 벌써 끝나냐;;
─선택권을 가지기 위해서라도 싸움에 나서야 한다...크 띵언
─더 웃긴건 혼자만 최고난이도임
─어제 발매한 겜도 잼있어보이든데
─휴머노이드들 잘 됐음 조켓다...
한편, 인류와 휴머노이드 사이의 가교가 된 은우(인디고)는 게임의 끝을 직감했다. 사람들도 비슷한 눈치였다.
“스토리 진행 전에 할 수 있는 소규모 미션이 많네요.”
합동 전투를 위한 준비 시간 동안 플레이어는 휴머노이드의 마을에서 소소한 미션을 받고 해결할 수 있다. 기지의 광장에서 임무를 수주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한 원리였다.
물론 미션을 깨기 싫거나 스토리만 보고 싶은 사람들은 엄버에게 가서 메인 미션 진행을 고르면 됐다. 말이 준비 시간이지, 진행을 택하지 않으면 영원히 시작되지 않을 전쟁이므로 가능한 일이다.
“두 개만 하고 메인 진행하죠.”
─쪼아용~~
─엄청 많네
─가장 어려운 미션 가싈?
─동행퀘도 있누;
미니 미션의 경우, 하지 않아도 메인 스토리를 깨는 데 지장 없다. 그러나 은우는 굳이 미션 두 개를 수주, 이행했다. 게임이 너무 일찍 끝나 방송 시간이 채워지지 않으면 곤란한 탓이다.
세계 최초 타이틀을 포기하니 외려 이런 것도 가능하다. 은우는 미션을 고르며 어제의 판단을 긍정적으로 여겼다.
“주변에 나타난 특수 기계장치 제거 임무랑 고립된 휴머노이드 구출, 이 두 개로 하겠습니다.”
참고로 두 미션의 공통점은 엄버가 동행한다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시청자들의 의견이 매우 크게 작용했다.
“고립된 휴머노이드 구출.”
“그 이야긴 어디서 들었지? 뭐, 좋아. 도와준다면 거절하진 않겠다. 한시가 급한 상황인지라.”
그녀는 그렇게 말한 직후, 휴머노이드가 고립된 위치를 알려 주었다.
“먼저 가 있겠다.”
그 말은 덤이었다.
물론 그녀는 거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시스템상 어쩔 수 없었다. 아마 그쪽 지역으로 이동하면 거기에도 엄버가 있을 것이다.
“특수 기계장치 제거.”
“아아, 너인가. 골칫거리를 제거하는 데 도움을 준다 들었다. 고맙다. 안 그래도 남겨질 비전투 인원들의 거취를 고민하고 있었거든. 설마 그 잠깐 사이에 쳐들어올 확률이 얼마나 될까마는, 확률에 맹신했다간 패가망신하기 좋지.”
왔다 갔다 해 봤자 시간 낭비이므로 은우는 그 자리에서 두 퀘스트를 모두 받아 냈다. 이제 남은 건 퀘스트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도와주는 네게 하긴 뭐한 말이지만, 아니 오히려 도와주기 위해 나섰기에 해야 하는 말인가. 어찌 됐건 만반의 준비를 해라.”
“출발할까요, 슬슬.”
그 말과 함께 자리를 뜨려던 은우를 기입되어 있는 엄버의 대사가 잡았다. 단순한 충고라 볼 수도 있지만, 묘한 직감이 그 말을 무시하지 말라고 하고 있었다.
“이번에 발견된 특수 기계장치는 본인의 무력보다 해킹을 통한 공격에 능하다. 덕분에 쉽게 생각하고 접근했던 휴머노이드 부대가 싹 날아갔지.”
엄버의 눈썹이 까닥, 접혔다.
“수가 많으면 해킹당하기도 쉬우니 소수로만 팀을 구성할 참이다. 우리 대신 해킹을 막아 줄 백업 부대로 따로 마련해 두었고. 다만, 그래.”
동료를 잃었던 게 가슴 아플 법도 한데, 그녀의 연둣빛 눈동자는 냉철하기 그지없다.
“지금까지 오염당했던 휴머노이드 중 정상으로 되돌아온 녀석은 하나도 없어. 인간은 어떨지 모르지만, 너희도 오염의 위험성은 잘 알겠지. 조심해라. 만에 하나란 건 그렇게 멀리 있는 확률이 아니야. 당하는 순간 일분의 일이 된다.”
단순히 미니 퀘스트의 한 대사라 여기고 지나치기엔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 * *
미니 퀘스트는 합쳐서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아 끝을 보였다. 둘 다 근원을 제거하는 것보다 이동에 시간이 더 걸릴 지경이었으니 말 다한 것이다.
“그럼 바로 스토리 진행 하죠.”
─오빠 저 왔어요ㅋ
─퇴근길 켄방송 못참지;;
─치킨도 못참음
─맥주 준비했다
현실 시간도 슬슬 퇴근 시간에 맞춰지며 시청자들이 더욱 증가하기 시작했다.
은우는 무르익은 방송을 보며 제공된 바이크에 탑승했다. 엄버가 말한 기계장치의 변화 원인으로 향할 이동 수단이다.
또한 옆에는 엄버의 바이크가, 뒤에는 휴머노이드들이 타고 있는 지프 여러 대가 달릴 준비를 하고 있다.
“출발하지.”
전투복을 단단히 갖춰 입은 엄버가 고갯짓과 함께 바이크를 출발시켰다. 엔진음과 함께 먼지바람이 일었다. 은우도 질세라 액셀을 밟았다.
─엄버 누나 망토 왜 걸쳤어요ㅠ
─그래도 태가 나니까 됐어
─변태놈들 검거해!
─팩트) 검거하는 놈도 힐끔대고 있음
─흠칫) 아아닌데?
“스칼렛보다 엄버를 더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엄버 보고 끊임없이 감탄하는 꼴이 웃겨서 그렇게 말해 보았다. 그러자 채팅 창이 바로 진흙탕 싸움으로 변했다. 엄버파와 스칼렛파로 나뉜 것이다.
“제가 말을 잘못했네요.”
나 참. 은우는 고개를 젓다가 문득 심술이 생겼다. 그의 손이 목덜미를 쓱 쓸다가 입술을 삐뚜름하게 내렸다.
“형, 누나들이 다른 사람 이야기만 하면 동생 기분이 나빠지는데…….”
그는 연달아 헬멧의 앞면부─얼굴이었다면 입술이 있었을─를 엄지로 쓸었다. 일부러 내리깐 목소리가 성대를 긁고 나왔다.
“그래도 계속 그럴 거야?”
아무리 아름다운 것도 익숙해지면 처음보다 충격이 덜한 법이다. 그렇지만 줄어든 충격마저 태연히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치 이상이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내 귀 어디갔냐
─진짜 어이가 없어서ㅡㅡ 이러면 맨날 우리가 넘어가는 줄 알지?? (폴짝)
─(대충 줄넘기 넘는 중)
─(대충 재주 넘는 중)
─이미 다 넘어갔누;;
채팅 창이 0.1초의 딜레이를 가졌다가 터지듯 상승했다. 분명 걸어 둔 제한을 아직 안 풀었을 텐데도 그랬다.
사람들이 울부짖는 걸 보니 만족스럽다. 은우는 방송을 하며 드러나는 그의 못된 성격에 입술만 더욱 삐뚤게 만들었다.
“잘 먹히네요. 앞으론 그러지 마세요.”
─잘 먹혀,,,?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왜 갈수록 목소리를 더 잘쓰냐;
─초심 잃었따ㅡㅡ 처음의 그 수줍청년 어디갔냐
─팩트) 켄은 첫날부터 저랬다
─언제 그랬음?
─검은 기사 넘어갈 때 했음ㅋ
─엌ㅋㅋㅋ진짜네ㅋㅋㅋㅋ
“저는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그는 뻔뻔하게 굴었다. 마침 그를 구원한 것은 V2053와 스칼렛이었다.
[여긴 시즐링. 아무 이상 없음!]
“멀쩡해졌나 보네요.”
[휴머노이드 합류 부대에 발탁돼서 말이야. 전처럼 잘 부탁한다고!]
V2053이 시즐링, 즉 스칼렛R의 홀로그램을 띄워 주었다. 홀로그램 속 스칼렛의 얼굴은 아주 멀쩡해 보인다.
애당초 코드네임 말고 이름 대는 장난을 칠 정돈데, 멀쩡하지 않다면 말이 안 된다.
─누나ㅏㅏㅏㅏ
─스칼렛 누나아ㅏㅏㅏ
─보고 싶었어ㅓ어
─스칼렛 나온 건 좋은데 또 헬멧이냐 진짜;;
─켄한테 너무 감명 받은 거 아님??
─아 몰랑 그래도 이뻐
─안면부라도 벗은게 어디임?
아까까진 엄버파가 좀 더 많아 보였거늘, 스칼렛의 등장에 사람들은 과한 반응을 보여 주었다. 그녀가 탔을 것으로 추정되는 비행 기체가 보일 때엔 더했다.
은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바이크의 속력을 더했다.
갑자기 쳐들어온 컷신이 그것을 막았다.
부아아앙!
엄버의 바이크가 인디고의 옆으로 바짝 붙었다. 전투용 몸체에 시야만 가리는 헬멧은 무쓸모라며 아무것도 쓰지 않은 탓에, 그 머리카락은 하염없이 휘날리고 있다.
“들었을 때 기분 나쁠 수 있는 정보가 있다. 들을 텐가?”
“중요한가?”
“네 입장에선 중요하면서도 듣기 싫을 수 있는 부류지. 네가 듣지 않는다 해도 난 존중할 거다.”
“작전에 관련된 거라면 듣겠다.”
인디고의 대답에 엄버는 잠시 침묵했다. 먼저 말 걸어 놓고 고요를 내던지다니, 좋은 화자의 태도는 아니었다.
“지금 가는 장소에서 이 모든 사태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존재를 본 적 있다.”
“알고 있다. 그 존재가 해당 장소에서 데이터를 빼돌려 각 공장에 이식하고 있다고 네가 말하지 않았나?”
“그 정체에 대해 말하지 않은 사항이 있다.”
“그것을 숨긴 저의와 이제 와서 말해 주는 이유가 심히 궁금하군.”
함정이라면 쏴 버릴 것 같은 어조였다. 인디고B의 본판이 되는 목소리, 즉 은우의 목소리가 저음이다 보니 더욱 흉악하다.
그러나 엄버는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비꼬는 듯한 감정을 실어 말하기도 했다.
“분석한 결과 그건 인간이었으니까. 우리 입장에선 많은 것을 고려해야 했다.”
그럴 만한 사항이었다. 바이크의 손잡이를 쥔 인디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인간이라고?”
“그래. 최근에는 다른 개체가 대신하는 듯했지만, 적어도 초반에는 인간이었다. 그건 분명해.”
인디고B는 쉽사리 말을 잇기 어려웠다. 그건 정말 상상도 못 한 가능성이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휴머노이드란 존재가 기계장치의 앞잡이라서 인간의 분열을 위해 저런 발언을 했을 가능성이 없진 않다. 그러나 대상은 인디고 하나였다. 인디고 하나만으론 대세를 바꿀 수 없다.
“확신할 수 있나?”
“확신한다면 믿을 텐가? 믿는 건 네 자유다. 이럴 줄 알고 내가 굳이 말하지 않으려 했던 거고.”
참고로 인간 측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은 건 인간 내에 기계장치의 끄나풀이 있을까 싶어서였노라 엄버가 덧붙였다.
“이래서 휴머노이드 부대와 인간 부대를 따로 입장시킨 거군…….”
“그래. 너는 믿을 만한 것 같아서 이야기한 거다.”
“…혹시 목격한 인간의 생김새를 알려 줄 수 있나?”
“사진을 보여 주지. 멀리서 찍은 거라 화질은 선명하지 않지만, 인간이란 건 확실히 알 수 있을 거다.”
인디고가 그리고 컷신으로 지켜보던 은우가 숨을 짙게 내뱉었다.
“완벽한 인조 피부를 가진 휴머노이드는 나밖에 없는데, 이 사진 속 존재는 나랑 머리색이 다르니까. 인간밖에 가능성이 없지.”
사진에 비치는 존재는 스칼렛 레드 색상의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 * *
엄버가 일러 주었던 장소는 가까웠다. 건물의 형태나 주변 시설을 보면 공장보단 연구소에 더 가까운 장소다. 과연 특수 기계장치 제작을 가능하게 하는 데이터가 있을 만하다.
그들은 그곳의 뒷문에 단체로 멈춰선 후, 약속한 대로 진입을 시도했다. 앞이 인류, 뒷문 및 비밀 통로가 휴머노이드의 몫이었다.
휴머노이드와 인간이 섞인 팀은 주인공 조가 유일했다.
은우가 한 발짝 내디디려는 걸 헬멧을 단단히 쓴 스칼렛이 저지했다.
“여긴 대체 어떻게 안 거래?”
엄버를 향한 비아냥 조의 물음은 덤이었다.
“그쪽이야말로 함정을 잘 피하는군.”
“…이런 장소 조사는 R의 임무니까.”
“그렇군. 난 여기서 일한 적이 있어 아는 거다.”
혹시나 제가 의심받을 것을 우려한 듯 엄버는 본부에게 미리 전달했을 부분도 다시 말해 주었다. 은우가 듣기엔 마냥 신뢰할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발언이다.
“발견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애초에 찾을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거든. 무너졌을 거라 생각한 지 오래라서. 생각보다 더 튼튼하게 지어진 모양이야.”
엄버는 가물가물한 눈치로 뒷문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오래된 기억인 만큼 혼선이 있을 수 있다. 틀려서 보안 장치가 가동돼도 뭐라 하진 않았으면 하는군.”
그건 플래그였다.
그녀는 정확히 두 번 틀리고 세 번 만에 비밀번호를 기억해 냈다.
“면목이 없군.”
─괜찮아요! 미녀가 한 실수는 용납 받을 수 있어!
─킹직히 몇백년이나 흘렀는걸ㅎㅎ
─남자가 틀렸다면?
─죽여야지
─그 남자가 미남이면?
─한번만 봐주자 미남은 귀해
─하여간 잘생긴 놈들이란!!
열리는 문을 보며 은우는 생각했다. 저러다 뒤통수 한번 맞아 봐야 정신 차리지.
“거기에… 이미 각오들 해 놨겠지만, 혹시 모르니 다시 말하지. 세월이 흐른 만큼 내부 장치가 고장났을 경우를 감안해 두도록 해라. 보안 장치가 완전히 꺼졌다면 좋겠지만…….”
엄버는 발로 문을 걷어찼다. 동시에 그녀의 손이 총을 들어 올려 날아오던 쇠붙이를 막았다. 소총같이 생긴 것에 손잡이가 없는 단검이 박혔다.
“내가 보기엔 피아 식별 없이 다 공격하는 쪽으로 바뀐 것 같으니까.”
그녀는 미련 없이 총을 버리고 앞장섰다. 그 뒤를 은우와 스칼렛이 천천히 따랐다.
“여긴 오른쪽이었던 것 같은데…….”
몇 백 년 만에 온 것치고 엄버는 길을 잘 기억했다. 덕분에 그들은 수가 적음에도 어떤 팀보다 빠르게 연구소를 돌파했다.
중도에 전투가 벌어지며 은우와 엄버의 위치가 바뀐 걸 제외하면 입장할 때와 달라진 게 없다.
“슬슬 일이 터질 때가 됐는데.”
─겜잘알겜잘알 슬슬 터져야지?
─아 제바류ㅠㅠ
─제발제발 아니어라;;;
─정말 스칼렛이면 개발사 폭탄맞을 준비해라ㅡㅡ
끊임없이 플레이어에게 재미를 선사할 필요가 있는 게임 특성상, 이런 수월함은 보통 폭풍 전 고요에 가깝다.
하물며 그들은 배신자에 대한 밑밥도 얻은 상태였다.
은우의 눈매가 불쾌함으로 떨어져 내렸다. 아무렴 여전히 배신은 그의 어는점이었다. 그 이하로 내려가면 지행류 사냥꾼이 되어 감히 성질을 건드린 자를 물어뜯을 것이다.
“그런데 궁금한 게 하나 있어.”
타이밍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지금껏 묘한 태도를 보여 오던 스칼렛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에서 불길함이 짙게 배어 나온다. 증오나 혐오라고 말하기엔 그 성질이 다른 것이다.
“네 말에 따르면 기계장치들의 지능을 갑자기 뛰어나게 만든 녀석이 여기 있다는 건데, 그 녀석은 어떻게 이 연구소를 알고 온 거지?”
그녀는 언제나처럼 총을 든 채 가장 후열에 서 있다. 번트 엄버가 보여 준 사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은우의 손이 스리슬쩍 무기로 향했다.
“글쎄. 당사자도 아닌 내가 어떻게 답을 하거니와, 넌 정말 궁금해서 물은 게 아닌 것 같은데.”
“맞아.”
엄버가 고개를 돌린 순간, 스칼렛의 총구가 엄버를 향해 겨눠졌다.
하필 엄버가 중간에 끼어 있어 막기가 어렵다. 그러나 두 번째에 있었다고 해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리가 고정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게임 시스템의 개입이었다.
“이런.”
은우가 난처하지 않은 목소리로 곤란함을 표할 때, 스칼렛이 희미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난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그 원인 같거든.”
“헛소리. 그게 가능했다면 이제 와서 특수 개체를 발생시킬 게 아니라 애초에 발생시켰을 거다.”
“이 연구소를 발견한 지 얼마 안 됐다며? 데이터가 없어서 그랬던 거였을지 누가 알아.”
“그랬다면 지금처럼 순차적으로 했을까? 난 이곳의 상위 키를 가진 사람 중 하나고, 원한다면 최고급 정보까지 단번에 접근이 가능하다. 용사가 레벨 업 하도록 단계에 맞춰 졸병을 주는 마왕은 내 취향이 아니야.”
요컨대, 그녀가 원하기만 했다면 특수 기계장치가 지금처럼 적당히 강한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최고 수준까지 끌어올려질 수도 있단 소리다.
“말은 잘하네.”
명분에서 진 스칼렛이 어깨를 으쓱이며 은우 쪽을 바라보았다. 헬멧 너머로 시선이 마주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누가 배신자일까요.”
은우의 목소리가 건조하게 퍼져 나갔다. 아니, 그걸 단순히 건조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좀 더 황폐하고 삭막한 목소리였다.
마치 단두대의 칼날이 잠깐 목소리로 화한 것 같다.
─이분 배신때리는 놈 나오면 목소리가 무서워져;;
─데인 적 있나보지
─스칼렛 누나 제발류ㅠㅠㅠ
─제발해피엔딩제발해피엔딩
시청자들이 도란도란 떠드는 사이 스칼렛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난 역시 신뢰할 수 없어. 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네 동료를 넘어설 믿음이 내게 있진 않겠지만, 아니다. 날 믿어다오.”
상반된 의견이 팽팽히 대립했다. 띠링, 하는 묘한 알림음과 함께 희뿌연 창이 떠오른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선택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1. 스칼렛R의 손을 들어 준다.
2. 엄버의 손을 들어 준다.』
미처 다른 방송을 보지 못하고 은우의 것만 시청하던 사람들이 기어코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