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아니 이걸 어떻게 골라ㅠㅠㅠ
─이건 제작자의 농간이다! 함정이라고!
─짬뽕이냐 짜짱이냐.....
─난 볶음밥
─너,,,,천재냐?
─근데 볶음밥이 없잖아ㅠㅠㅠ
─양자택일 미쳤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는 동안 은우는 손으로 목덜미를 쓸었다.
지금껏 함께해 온 동료를 믿느냐, 동맹을 맺기로 한 집단의 리더를 믿느냐. 가깝게 보면 두 믿음 정도고 멀리 보면 한 종족의 명운을 좌지우지하는 선택이다.
물론 은우는 그런 거창한 것보다 누가 배신자인지가 더 중요했다. 배신자는 용납할 수 없다.
─무조건 스칼렛
─엄버쪽을 골라야합니다wwww
「‘아무래도’ 님이 ‘1,000원’ 투척!
엄버가 진엔딩일 것 같은디」
─(금지된 채팅입니다)
「‘뭘고민해’ 님이 ‘1,000원’ 투척!
무조건 스칼렛 누나다아ㅏㅏㅏㅏ!!」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아무렴 스칼렛을 버리기엔 정이 들었을 테고, 번트 엄버를 버리기엔 그녀가 짊어진 것들이 걸릴 것이다. 두 사람의 말이 죄다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것도 그렇고.
그렇지만 선택은 해야 한다. 단서가 너무 적다 보니 거의 마음 가는 사람을 고르는 쪽에 가깝긴 하지만… 솔직히 스칼렛이 좀 더 배신자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긴 한다. 근거도 빈약하고 행동거지에 인과가 뚜렷하지 않다. 이게 방송만 아니었다면 단칼에 그녀를 베었을 것이다.
“역시 스칼렛 쪽을 버리는 게…….”
문득 은우는 시간이 멈추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실내고 두 사람이 미동도 하지 않아 티가 안 나지만, 분명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앞선 모든 선택지에서 세계가 멈췄던 것과 대비되는 일이다.
제작사가 깜빡하고 이렇게 만들었을 리는 없고, 분명 의도한 것일 거다. 세계가 정지하지 않은 건 분명 이때 무언가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나을 것 같긴 한데, 조금 더 고민해 보죠.”
그렇다면 세계가 NPC나 기타 사물이 정지되지 않아서 얻을 수 있는 혜택은 뭘까. 사건 자체는 진행되지 않을지언정 저들이 약간의 자유를 가질 때 할 수 있는 건?
답은 뻔하다. 상호작용밖에 없다.
“혹시 선택 안 하는 방법은 없습니까?”
─없어요
─말 걸어봐도 소용 없음요ㅋ
─누가 시도해봤는데 되던데요?
─몰라요
─됨
─아가리훈수충 ㄲㅈ
─해본 놈들만 조언해라
─여기서 해본 놈들이 있겠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시청자들이 모르는 걸 보면 일단 공개적인 자리에서 성공한 사람이 없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런 이유만으로 포기하기엔 역시 궁금했다. 제작사가 굳이 시간을 멈추지 않은 까닭이. 진짜 배신자가.
“흠.”
은우는 잠깐 고민해 보았다. 상호작용 시도를 그만 떠올렸을 린 없고. 그렇다면 다른 이들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가 뭘까?
은우는 그 원인을 셈해 보았다.
첫 번째론 망설임 없이 선택해서 말 걸 틈이 없었던 것. 두 번째는 고민하는 동안 말은 안 한 것. 세 번째는 말을 했는데 키워드가 충족되지 않은 것일 테다.
“잠깐 시도해 보고 가겠습니다.”
─넹
─시간낭비 말고 선택ㄱㄱ
─안 될텐데
─스트리머가 하겠다는데 냅둬
─근데 키워드 진짜 뭘까
─있으면 레전드
보통 사람들은 여기서 뭐라 말할까. 시청자들의 반응까지 더해 예상해 본다면 아마… 이름을 부르지 않거나, 행동거지의 원인을 묻지 않거나일 것이다.
그렇지만 혼잣말로도 왜 그랬어! 등의 말을 할 가능성이 있지 않나? 또 제작사는 그런 우연을 호락호락하게 허락해 줄까?
보통 이런 우연을 막기 위해서 사람은 키워드를 늘리거나 복잡하게 만든다.
“스칼렛, 왜?”
은우는 한번 던져 보았다. 반응은 없었다. 이게 아닌가?
그는 목덜미를 쓸던 손가락으로 뒷목을 톡톡 쳤다.
“시즐링, 왜.”
혹시 몰라 이름으로 불러 보았다. 반응이 없다. 제작사에서 넣어 둔 게 없는 건가? 그의 오판인가?
“너무 광범위하긴 합니다. 단서도 딱히 없고.”
─선택밖에 없다니까
─단서 정말 없냐?
─어서 능지 모아!
─내 아이큐 150 네 아이큐 150 총 300의 머리로 완벽한 단서를 찾아야 해!
─50 50 해서 100 아니고?
─팩트 자제요!
“…이미 한 말에서 찾아야 하나.”
그렇지만 아무리 은우라도 한 사람이 했던 모든 말을 기억하진 못한다. 기껏해야 그 사람의 호불호, 성향, 대략적인 행동거지 정도를 기억하는 거지. 물론 스칼렛은 붙어 다닌 시간이 긴 만큼 좀 더 세세히 기억하는 편이지만… 스칼렛을 흔들 수 있는 단어 내지 행위가 있었던가?
지금껏 밝혀진 것 중 그런 건…….
“하나 찾긴 했는데 될까 모르겠습니다.”
─찾은 게 더 대단한데
─뭐에요 우리도 알려줘요
─ㅁㅇㅁㅇ
“난 역시 이렇게 눈을 마주치면서 대화하는 게 좋더라고.”
첫 임무를 마친 후 기지에서 마주쳤을 때 들은 말이다. 그가 기억하는 스칼렛의 호불호 중 유일한 호였다.
“눈, 시선?”
단어로 중얼거려도 답이 없다. 혹시 행동까지 충족시켜야 하나?
헬멧을 벗는 건 달갑지 않으나, 궁금함은 참을 수 없다. 그의 손이 헬멧을 벗었다. 스칼렛은 아직 미동도 없다.
“시즐링, 왜?”
시선을 마주하고─상대가 어딜 보는진 잘 모르겠지만─물었다. 반응이 없다. 정말로 대화가 가능하단 가정하에 아마 조건 충족이 덜 되어서일 것이다.
시청자들이 그의 행동을 이해 못 한 채 웅성거렸다.
“앞에서 흘린 말이 기억나서요. 눈 마주치는 게 좋다고 했으니 그에 관한 건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랬음?
─그랬나....?
─그걸 어케 기억하누;;
은우는 키워드를 다시 골라냈다. 시선을 마주치려면 스칼렛도 헬멧을 벗어야 하는데. 헬멧을 언급하면 되나?
“시즐링, 헬멧.”
그는 거기까지 말한 후 시선을 언급했다.
“눈, 마주쳐야지. 시선, 왜.”
그러자 처음으로 스칼렛이 반응을 보였다. 총을 든 손이 눈에 띄게 부르르 떨린 것이다.
“아, 됐네요.”
─???
─이게? 이걸?
─?
─뭐임?? 뭔데??
스칼렛과 더불어 사람들이 혼란에 휩싸였다.
▣ 099. 그건 추억이야
“음, 이다음은 ‘헬멧 벗어’인가?”
은우의 말에 스칼렛이 끝끝내 총을 쥐던 손 하나를 회수했다. 키워드가 맞은 모양이다. 손을 부들거릴 때보다 더 확실한 차이였다.
─먼데먼데먼데
「‘켄그는’ 님이 ‘1,000원’ 투척!
신인가?켄은신인가?켄이신인가?신이켄인가?신은켄인가?」
─신인가충 뇌절왔누;;
─근데 나도 뇌절옴,,,,이게 돼??
「‘다필요없고’ 님이 ‘10,000원’ 투척!
대체 뭐 때문에 갈린 거임?」
─와중에 헬멧 벗어 나만 웃기냐
─또 히든엔딩이냐구~~!!
한 손으로도 헬멧을 쉽게 잡는 은우와 달리, 그녀는 끙끙대며 헬멧을 벗었다. 손이 작은 편이라서 어쩔 수 없었다.
총구는 여전히 엄버를 향해 있다.
─결국 헬멧이 모든 근본인가...?
─근-본
─(금지된 채팅입니다)
─헬멧본체설은 진실이었던 거임;;
─제작사 약했냐?
「‘어쩌면’ 님이 ‘1,000원’ 투척!
아임휴먼 켄한테 감명받은 걸지도」
─킹능성 있다
─(금지된 채팅입니다)
기어코 스칼렛이 헬멧을 벗었다.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이 드러났다. 빨간 홍채가 줄었다 늘기를 반복했다.
“넌……!”
당연하게도 엄버는 경악했다. 스칼렛이 붉은 머리카락이란 걸 이제야 알았을 테니 당연한 놀람이다.
“닥쳐.”
그녀의 입이 열리려는 걸 막은 이는 스칼렛이었다. 엄버에게 총구를 겨누되, 은우를 바라보는 스칼렛은 어쩐지 울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자, 네 말대로 벗었어. 그래서? 켄, 바뀌는 건 아무 것도 없어. 전부 저 여자가 문제라는 걸 알잖아.”
이제부턴 키워드로 대화를 이어 나가야 한다. 실수했을 때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르겠지만, 최고 난이도란 점을 생각했을 때 좋은 반응이 나올 것 같진 않다.
“왜 문제라고 생각하지?”
그렇지만 이것도 인디고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하면 답은 쉽다.
은우는 어렵지 않게 키워드─왜─를 골랐다. 아무렴 진짜 인디고라면 갑작스러운 스칼렛의 반응에 당황해할 것 아닌가. 스칼렛이 수상한 점 몇 가지를 들긴 했지만, 그것으로 엄버를 버릴 생각이 들지는 않을 테니.
“너도 들었잖아! 솔직히 기계장치들의 지능이 갑자기 오른 이유가 이 연구소의 데이터 때문일 때, 누가 제일 의심스럽겠냐고!”
스칼렛은 총의 방향을 고정하되 총을 흔들며 외쳤다. 은우는 그것을 보며 본능적으로 자세를 잡으려다가 시스템의 방해로 뚱하니 섰다.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건 키워드를 찾아 머리를 굴리는 일이었다.
“의심?”
“켄, 생각해 봐. 정찰 결과 전투의 흔적은 있었지만, 파괴의 흔적은 없었단 보고를. 파괴의 흔적이 없다는 건 건물 벽이나 문을 뚫지 않고 들어갔단 소린데, 비밀번호를 알고 있지 않고서야 그게 말이 돼?”
그녀는 다시 번트 엄버를 바라보았다. 엄버는 아까부터 어딘가 깊게 고민하는 표정이다.
“저 여자야. 저 여자라고! 인간인 척하는 저 여자가 우리를 전부 죽이려 드는 거라고!”
증거를 잘 드는 듯하면서도 판단이 이성적이지 않다. 은우는 스칼렛을 보며 키워드를 고민해 보았다. 대화를 잇는다고 생각하면 너무 가짓수가 많으니, 스칼렛의 말이 힌트다.
“이 연구소가 지키고 있는 데이터는 내가 없으면 뚫을 수 없다. 내가 아무리 수상해도 나를 죽이면 지장이 생길 텐데?”
그때 엄버가 입을 열었다. 플레이어에게만 맡기면 대화 진행이 난해할 것임을 염두해 둔 모양이다.
“웃기지 마. 이 정도 수준쯤은 나도 뚫을 수 있어.”
“불가능해.”
총구가 제게 겨눠졌음에도 엄버는 퍽 담담했다. 그게 그녀의 강인한 육체를 믿는 것인지 다른 걸 믿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돼!”
“안 될걸?”
“날 우습게 보는 모양인데, 난 이미 여길 뚫었─”
덕분에 필요한 정보는 다 얻었다. 시스템의 금제가 풀리는 건 동시였다.
“오염됐구나, 너.”
엄버의 말이 흩날리며 은우가 달려 나갔다. 그의 발이 스칼렛의 총을 올려 찬다.
퍼억!
총이 위로 솟아오르고, 그는 연이어 스칼렛을 돌려 차기로 때렸다. 본능적으로 목을 차려다가 목뼈가 부러져 죽으면 어떡하나 싶어서 옆구리를 때렸다.
배신자는 죽여도 상관없으나, 확실하지 않은 걸 죽여 버리기엔 마음에 걸린다. 죽이지 않아야 좋은 쪽의 엔딩을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끄악!”
─ㅗㅜㅑ;;
─여자한테도 가차없죠?
─반사신경 보소
─울 스칼렛 언니한테 왜 그래욧!
─그 사람이 지금 트롤하고 있잔아;
“아니야, 아니야. 나는 오염이. 오염이.”
보통은 여기서 나름 고전할 만한 교전이 벌어져야 하나, 너무 빠른 반사 신경이 제작사의 안배 하나를 후려쳤다.
“오염이, 아니.”
스칼렛의 총을 가장 먼저 빼앗은 덕에 어려웠어야 할 싸움이 난타전으로 바뀐 것이다. 양상이 단순한 맨손 격투가 돼 버린 시점에서 없어진 것과 다름없다.
결국 스칼렛이 바닥을 굴렀다.
『숨겨진 도전 과제를 달성함! -귀 기울여 듣는 사람』
업적 달성과 동시에 컷신이 시작됐다.
인디고B가 스칼렛을 제압하는 컷신이다.
“너, 네가 어떻게……!”
“시즐링.”
인디고는 스칼렛의 몸을 찍어 누르며 손을 묶었다. 그녀가 장비하고 있는 무장을 전부 제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난 널 믿는다.”
“그렇다면 어째서 나를……!”
“믿기에 죽이지 않는 거다.”
“……!”
“네가, 그럴 리 없다고 믿으니까.”
인디고는 그렇게 말한 후 이를 악물었다. 중오염부터는 되돌릴 수 없다.
“아직, 기회가 있을 거라고.”
그걸 알면서도 미련하게 움직이는 건 인간의 특성이었다.
더 이상 스칼렛의 외침을 듣기 싫다는 듯 인디고는 스칼렛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그러곤 뒤돌아 번트 엄버와 시선을 마주했다.
만약 엄버가 배신자였다면 인디고가 스칼렛을 제압하는 사이 기습했을 터. 다행히도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다만 복잡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킁킁킁’ 님이 ‘1,000원’ 투척!
히든엔딩의 냄시가 난다」
「‘히든엔딩딱대’ 님이 ‘5,000원’ 투척!
켄은 절대 놓치지 않는다구」
─(금지된 채팅입니다)
「‘반밀반구’ 님이 ‘30,000원’ 투척!
진짜 말도 안되는데 이게 되네」
─이쯤되면 제작사도 한통속인 거 아님?
─아몰라ㅠㅠ둘다 살았어ㅠㅠ
─ㄹㅇ 히든엔딩각
“…진입 후 13분 43초 경과. 스칼렛R이 휴머노이드 번트 엄버의 사살을 시도. 방어 및 제압에 성공했다. 원인 파악은 불가. 스칼렛R이 특수 기계장치 발생의 원인일 가능성이 추가로 밝혀졌다.”
연구실에 진입한 직후 통신은 끊겼다. 인디고는 그것을 알고 기록으로만 남겨 두었다.
“변절의 원인 불명. 만일의 가능성을 대비해… 강제 링크 해제는 보류. 포박 상태로 동행한다.”
[기록 완료.]
─스칼렛 링크해제가 외 위험한 거임?
─트로이목마 될까봐 그러는 듯?
─아직까진 조종당한게 확실하지도 않고;;
─아니라고 해줘요ㅠㅠㅠ
인디고B의 손이 무기를 꽉 쥐었다. 벗은 직후 스칼렛과 엎치락뒤치락 싸우느라 바닥을 굴러다니던 헬멧이 그의 다른 손에 잡혔다.
뒤통수 부분이 금 가 있지만 착용엔 문제없다. 오히려 스칼렛의 헬멧이 더욱 심하게 망가진 상태였다. 그의 눈매가 헝클어졌다.
“…왜 이렇게 된 거지.”
정말 스칼렛이 범인이라면, 그녀가 모든 사태의 원흉이라면. 그렇다면.
인디고는 스칼렛을 살려 둔 걸 후회하기라도 하듯 뒤를 돌아보았다. 스칼렛은 현재 꽁꽁 동여매진 채 V2053과 스칼렛의 바이올렛을 통해 공중에 동동 떠 있다. 저런 식으로 이동하는 모양이다.
지켜보던 번트 엄버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아마… 오염일 거다.”
“단순한 추측은 옳지 않다.”
“아니. 단순한 추측은 아니야.”
번트 엄버는 인디고와 시선을 마주했다.
“이에 대해 말하려면 이 연구소에 대해서 먼저 설명해야 한다. 시간이 제법 걸리니 이동하면서 말하는 게 낫겠지.”
“어차피 스칼렛을 기지에 인도해야 한다. 가면서 듣지.”
“그건 안 돼.”
엄버가 스칼렛 쪽을 힐끗 보았다.
“내 추측이 맞다면… 우리는 최대한 빨리 안으로 진입해야 한다.”
그녀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렇지 않으면 저 인간 같은 피해자가 속출할 수 있어.”
“…근거를.”
“방금 말했을 텐데. 시간이 제법 걸린다고.”
엄버는 눈꺼풀을 한 번 깜빡였다.
“날 믿을 수 있나?”
“뭐?”
“나를 믿을 수 있고 안으로 진입할 수 있나?”
인디고는 헬멧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결국 스칼렛의 깨진 헬멧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진입은 계속 진행하기로 결정. 스칼렛R은 기계장치에게 발견, 수거, 분석당할 가능성을 대비해 포박 상태로 계속 동행한다.”
대신 쥐어진 것은 인디고의 멀쩡한 헬멧이었다.
“이번 건 좀 길었네요.”
은우는 숨을 내뱉었다. 스칼렛의 안부를 두고 울던 일부 청자들이 바로 반색했다.
─방장 돌아옴?
─이틀째 사이트 지분 실화냐ㅋ
「‘회장님’ 님이 ‘1,000원’ 투척!
해명은 해야할 것 같습니다」
─형님, 칼들까요?
─제한 안 풀어왔음 난리났겠는데;;
“아, 후원 감사합니다. 근데… 해명이라 하심은…….”
컷신 동안 채팅 창 반응을 보고 있었으므로 뭘 해명하란 건진 안다. 어이가 없을 뿐.
은우는 목덜미를 쓸었다. 본인도 혹시 하며 던진 게 맞아떨어졌을 뿐인데 해명하라 하면, 글쎄. 그건 어떻게 하는 걸까.
“글쎄요. 초반에 스칼렛이 시선 마주치는 걸 좋아한다고 말해서 그걸로 시도해 봤을 뿐이다, 라고 말하면 됩니까?”
─언제 그랬누
─지금 찾아보고 왔는데 그 부분 있긴 있음....
─ㄹㅇ??
─말해도 그걸 기억해?
“첫 임무 직후 기지에서 들은 말입니다. 글쎄요, 다들 기억하지 않습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구울왕은 구울과 다르다 이거야
─기만을 너무 자연스럽게 하셔서 뭐라 말도 못함
─피지컬도 오지는데 뇌지컬 미쳤누
─저중 하나만 되도 감지덕지인데ㅠ
그는 대답과 함께 헬멧을 착용했다. 출발하자마자 번트 엄버가 뒤따르며 입을 열었다.
“이 연구소는 기계장치에 대해 연구하는 곳이다. 마지막으로 연구하던 내용은 인간의 감정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기계장치였지.”
스칼렛을 짊어진 바이올렛들이 그들의 달리기 속도에 맞춰 부유했다. 애벌레처럼 묶여서 대지와 수평이 되도록 떠다니는 모습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감정을 스스로 자각한 기계장치완 달라. 이 연구소의 사람들이 원한 건 본인의 감정을 자각한 기계장치 정도가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바란 건 타인의 감정을 공유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치료할 수 있는 기계장치였다.”
보안 장치에 의한 적이 나타났다. 은우는 나서서 그것들 제거를 시작했다. 놀랍게도 엄버 역시 참전했다. 세계관 파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비명 지르기 딱 좋은 사태였다. 싸우느라 이야길 못 들을 테니까.
“기계장치가 반란을 일으키기 일주일 전, 우리는 그것을 완성했다.”
콱콱! 콰지직!
엄버의 손에 기계장치의 머리통이 부서졌다. 소리가 험악했다.
“녀석은 우리의 의도대로 인간의 감정을 공유하고 공감했다. 그렇지만 딱 한 시간 만에 미쳐 버리고 말았지.”
─아 못 들었어ㅠㅠㅠ
─자막 틀어놓길 잘했다...ㅎ
─자막충 쳐내!
─뭐라고 했냐
─거슬려서 꺼놨더니;
“스스로 감정을 자각한 수준이 아니라 타인의 감정에 공유, 치료할 수 있는 기계장치를 개발했답니다. 그게 한 시간 만에 미쳤고.”
역시나 못 들은 자들이 속출했다. 자막을 켜 둔 자들만이 우승자였다.
─ㄳㄳ
─사플도 지리네
─인간의 잣대로 재면 안 된다니까??
─저게 맞따
“여기서 미쳤다는 건 말 그대로다. 아니, 어쩌면 타락이란 단어가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군. 본래 긍정적인 쪽으로 이끌었어야 할 녀석은 인간에게 부정적인 말을 속삭이며 안 좋은 영향을 주었으니까. 심지어 일부 실험 참여자의 정신을 조종하기까지 했다.”
엄버는 숨을 고쳐 쉬며 머리카락을 쓸었다.
“조종이라.”
듣고 있던 은우의 시선이 힐끗 스칼렛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아직도 꿈틀대며 발악하고 있다.
“우리는 녀석의 이름을 선악과의 뱀이라 명명, 일주일간의 시험 끝에 파기를 결정했다. 기계장치들의 반란으로 인해 어려움이 생기긴 했지만… 그것은 내 어머니가 대피를 포기하고 이 연구실에 남으시는 걸로 일단락되었다.”
은우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문득 떠오른 걸 말했다.
“선악과의 뱀이면 성경 아닙니까?”
시청자들이 긍정했다.
─아벨과 카인, 셋 나온 시점에서 뭐;;
─걍 이름만 따온 수준인 것 같은데
─기계들 그리스도였냐
─인간도 종교 안 믿는데ㅋㅋ
─지금 켄 안 믿는다고 말한 거임?
─아 ㅈㅅㅈㅅ 켄교는 킹정이지ㅋㅋ
─왕국에서 언제 신앙으로 업글됐누
성경을 읽은 적 없어서 그 세 개의 이름이 성경 쪽인 줄도 몰랐다. 은우는 눈동자를 데굴 굴리며 모른 척했다. 언제나처럼 그의 무지는 덮어졌다.
그사이 엄버는 손가락으로 팔뚝을 두드리더니 입술을 짓씹으며 다음 문장을 내뱉었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파기한 게 아닐지도 몰라.”
그 얼굴이 형언할 수 없는 감정으로 일그러졌다.
“내가 인간들을 피해 탈출할 적, 묘할 정도로 탈출이 쉬웠다. 본래 잠겼어야 할 문이 열려 있었고 꼭 통과해야 할 골목의 감시카메라가 돌아가 주거나 했지. 당시의 난 경황이 없어 그게 우연이라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던 거야."”
“선악과의 뱀이 도왔을 것 같진 않은데.”
“기계장치 기술자는 보통 뛰어난 해커다. 어지간한 이들은 이 정도의 설비를 이용하면 정부의 시설마저 해킹할 수 있다. 물론 나중에 걸리겠지만. 뭐, 반란이 일어난 시점에서 걸리든 말든 신경 쓸 리 있나.”
그 말을 듣고 은우는 단번에 이해했다. 아마 연구소에 남은 엄버의 어머니가 그녀를 살리기 위해 정부를 해킹한 거다. 파기를 맡은 사람이 정부나 해킹하고 있으니 파기가 제대로 안 된 거고.
“맞네요. 어머니가 하신 거군요. 파기가 안 된 이유는 역시…….”
벽에서 보안 장치가 튀어나오려 했다. 은우는 창을 던져 레이저 쏘는 기계를 부쉈다.
“시간이 부족해서?”
“해당 기계를 파기하기 위해선 몇 시간 정도 소요될 것이란 게 우리의 예상이다. 내가 어머니와 같이 탈출하지 못한 이유지. 그렇지만 그럴 경우 연구소에 있는 시설 전반을 사용하지 못한다.”
“이것도 맞군요.”
“어머니는 내 생존을 위해 선악과의 뱀 파기를 포기하신 거다.”
─어머님ㅠㅠㅠㅠ
「‘어머님’ 님이 ‘1,000원’ 투척!
걱정 마십시오 따님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자연스럽게 레이져 뿌수는 것 보소;; 뭔가 했네
─슬픈 이야기다.
─엄버가 널 책임질 것 같은데?
「‘어딜감히’ 님이 ‘1,000원’ 투척!
우리 딸을 넘봐! 비수는 취급 안 한다!」
─안돼!
시청자들이 노는 동안 이야기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어머니는 녀석의 위험성을 잘 알아. 파기는 포기했어도 어떻게든 제한을 두셨을 거다. 다만 세월이 흘러 그 녀석이 그 제한을 풀거나 제한을 무시할 만큼 성장했다면…….”
엄버는 힐끗 스칼렛을 보았다.
“이 연구소의 시스템을 벗어나 인간에게 접근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겠지. 연구소의 보안 시스템이야 절대 못 건드렸겠지만… 조작이 불가능한 거지, 피해 가는 건 얼마든지 가능해.”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마침 이 연구소엔 나로 인해 전투용 신체에 대한 정보도 일부 실려 있다. 인간에게 접근한 후 세뇌를 통해 보안을 뚫었다면 그 정보를 복사해 공장에 전달하는 것도 가능했겠지.”
“결과적으로 스칼렛은 일단 피해자란 말이네요.”
─근데 조작당했다 해도 저정도까지 일 터트렸으니ㅠ─살아난다 해도 좋지는 않을 듯.
─중오염은 어차피 치료 안 된댔잖아?
─그건 글타.
“여러분 말씀대로 딱히 살아남아서 좋을 건 없어 보입니다.”
그녀로 인해 입은 피해가 얼마이며 죽은 자가 몇인데. 만약 그녀가 치료를 통해 최면이나 조종에서 풀려난들 기뻐할 수 있을까? 애초에 살아날 가능성조차도 적다마는.
“오염당했다는 게 확실하지도 않고.”
본의일 가능성도 재 봐야 한다. 그녀는 지금까지 어떤 검사에서도 오염 판정을 받은 적 없으므로.
어쨌건 어중간함만큼 스칼렛의 생존은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니었다. 요컨대 최선을 고른 게 아니라 차악을 고른 쪽인 거다.
“뭐, 알아서 전개될 테니 신경 쓸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우리가 할 일은 녀석이 다른 인간이나 휴머노이드에게 접근하기 전에 녀석을 파괴하는 거다. 나나 너쯤 되는 정신력이면 쉽게 넘어가진 않을 테니까.”
“중요한 건 목표가 데이터베이스를 찾아 날려 버리는 것에서 선악과의 뱀 제거로 확정된 쪽이겠죠.”
은우는 코너에서 뛰쳐나오는 적의 목을 꿰뚫었다.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목덜미를 뒤덮었던 강철 외피가 떨어져 나갔다.
“방금 전 설명도 다른 엔딩에서 나옵니까?”
─녜
─ㅖ
─엄버 루트 타면 나와용
─ㅇㅇ
“그럼 스칼렛이 살아 있다는 사실만 다르고 엄버 루트랑 비슷하게 흘러가나 봅니다.”
애초에 진엔딩이나 히든 엔딩이라고 새로운 걸 만들어 두진 않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새로운 에피소드 하나 만들 때마다 들어가는 자본과 인력이 얼마인데 완전히 다르게 만들겠나.
전작에서도 거의 혁명군 루트를 따라간 걸 생각하면 이쪽도 비슷할 것 같다. 단지 적이 바뀌거나, 결말이 조금 달라질 테지.
“그보다… 아, 도착인 것 같습니다.”
‘언제 도착할까?’라고 물으려던 말은 펼쳐진 광경에 쏙 들어갔다. 엄버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마지막 문을 열었다.
“크네요.”
“여긴… 일종의 시범 공간이다. 어차피 우리가 개발하는 건 일상생활에 쓰이거나 감정에 관련된 것에 불과한데도, 어머니는 굳이 넓은 공간을 고집하셨지. 유산이 썩어 넘치게 많은 덕에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어.”
우연이겠지만 은우의 중얼거림에 엄버의 대답이 이어졌다. 유산이 썩어 넘치게 많다는 대목에서 사람들이 갑작스레 동냥아치가 되었다.
“멸망해서 남은 게 없을 텐데요.”
─앗 그렇네;;
─ㅎㅎㅎ
─부스러기라도 남아있지 않을까?
─금이라든가 금이라든가
─부동산은 영원하다고 babyS2
비수들의 자존심에 값을 매긴다면 대체 얼마일까. 은우는 쓸모없는 의문을 품었다가 곧장 버렸다.
“참 이상하지. 몇 백 년 만에 온 것인데도… 기억이 이렇게나 생생하단 건.”
엄버는 시범 공간에 너저분히 있는 물건을 매만졌다.
[그건 추억이야.]
누군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너……!”
곧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늪을 천장에 거꾸로 붙여 둔다면 저것과 비슷한 형태로 흘러내릴 것이다.
천장에서부터 진흙처럼 점성과 물기 있는 무언가가 투둑 떨어졌다. 바닥에 쌓인 것은 꾸물거리며 하나의 형태를 이뤘다.
[안녕, 누나.]
엄버와 닮은 소년이 만들어졌다.
보스전의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