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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자도 방송할 수 있습니다-109화 (109/233)

109화

그것은 물과 기름처럼 그에게 닿되 그를 적시진 않았다. 요즘 복고풍이랍시고 유행한다는 액체 괴물을 온몸에 두르면 이런 기분일지도 모르겠다.

─촉감 극혐!!

─어두워서 뭐가 보이질 않네

─통과하면 바로 니플헤임이 나와야하는 거 아님?

─뭔가 기분 조타ㅎㅎ

호불호가 갈리는─주로 VR 시청자에게─사이, 은우는 휘적휘적 걸었다. 곧 빛이 시야를 물들였다.

“눈이 조금 아프네요.”

─촉감테러에 이어 눈뽕 실화냐

─으악!! 내눈!!

─마이 아이즈!!

─눈뽕 ㅇㄴ

대비할 틈도 없이 빛이 쨍하니 들어온 거라, 은우뿐 아니라 시청자들 모두가 질색했다. VR 유저도, 모니터 유저도 전부 그랬다.

“나의 대지에 온 것을 환영하노라.”

그사이 소녀 혹은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두어 번 껌뻑인 후 고개를 들면 목소리의 주인을 볼 수 있다. 뻔하게도 그 정체는 니플헤임의 주인, 헬이었다.

─하나도 안 보인다.

─왤케 어두움

─니플헤임 도착한 거임?

─도착한 거야 뭐야

─뭐가 보이긴 하는데 뭔지 몰겠음

그녀는 자잘한 뼈들을 엮어 만든 옷을 입고 얼음을 깎아 만든 옥좌에 앉아 있었으니. 주위가 워낙 어두워 자세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게 시청자들에겐 다행이었다.

“당신이… 헬입니까?”

“그래……. 헬이 나다. 내가 헬이다.”

은우는 그 대사를 듣는 순간 이상한 데서 아쉬움을 느꼈다. 외국 버전에서 보면 ‘Hell’, ‘Hel’로 앞뒤 문장의 헬이 다르단 걸 알 수 있을 텐데.

한국 버전에선 그냥 퉁친 모양이다. 발음 때문에 어쩔 수 없긴 하지만.

이벤트 신 속 주인공이 뒤늦게 예를 취했다.

“죽음에는 예가 없으니, 고개를 들라.”

헬은 제법 관대하게 굴었다. 어둠에 가려져 얼굴이 보이지 않는지라 정말 관대함에서 우러나왔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캐릭터는 그것에 용기가 난 모양이다. 당당하게 제 용건을 먼저 꺼내 들었다.

“헬이시여, 제게 부디 발리의 위치를 알려 주십시오.”

“아주 흥미로운 요구로다……. 그것은 어디서 들었느냐?”

“미미르께서 안식에 들기 전, 제게 일러 주셨습니다.”

“하면 발리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느냐?”

미미르는 발리의 위치를 알아내라고만 했지, 무엇인지는 알려 주지 않았으므로 캐릭터는 잠깐 머뭇거렸다. 다행히 그는 수르트에게 그 사실을 들은 상태였다.

“로키의… 자식이 아닙니까?”

“맞다. 나의 이복동생이기도 하지…….”

헬은 가볍게 긍정하더니 갑작스레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노기를 드러냈다.

“한데 왜 그의 위치를 나에게 묻느냐?”

“발리는 라그나로크 당시 죽었다 하니, 죽음의 권역에 있다면 헬께서 아시지 않겠습니까.”

“하면 더더욱 내가 말해 줄 이유가 없다. 나는 기만에서 태어난 죽음의 지배자이자, 죽은 자들의 세계를 통치하는 장난의 딸이니. 나는 질서를 수호하고 진리를 유지하며 순환을 보호한다. 죽은 자의 개입은 그것들을 무너트리는 일이다.”

서리의 대지를 지배하는 이답게 공기의 온도가 순식간에 내려갔다.

“함에도 감히 내게 청하는 것이냐?”

─ㅗㅜㅑ,,,,

─성우 진짜 잘 뽑았다

─목소리만 들었는데 무섭누ㄷㄷ

─지렸다

─언니 목소리 오져요ㅠㅠㅠ

─얼굴 왜 안 보여줌

방관자로서 이 이야기를 지켜보기만 할 뿐인 시청자마저 약간의 위압을 인정했다. 그렇지만 캐릭터는 달랐다. 그는 고압적인 추위 속에서도 또박또박 말을 고했다.

“그것이 당신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는다면, 예. 감히 청하고자 합니다.”

캐릭터의 태도는 분명했고 꿋꿋했다. 한참 후에 얕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어쩌면 이것도 운명일지 모르지…….”

그건 개미의 날갯짓 소리만큼 작은 중얼거림이었다. 옥좌 왼쪽의 푸른 불꽃이 한 번 거세게 타올랐다.

이윽고 헬이 상체를 세웠다. 푸른 불꽃이 광원이 되어 얼굴의 절반을 드러냈다. 푸른색 때문에 음산한 느낌이 드는, 그럼에도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이었다. 다만 희미하게 비친 반대쪽의 뺨은 주름으로 자글자글하다.

“필멸자야, 이 자리에 대해 아느냐? 나에 대해 아느냐?”

“저는 당신에 대해 많은 것을 들었지만… 그것은 들은 것일 뿐, 제가 보진 못했습니다. 하여 저는 알지 못합니다.”

“마음에 드는 태도로고.”

헬은 손을 튕겼다. 그러자 옥좌 왼쪽에 있던 불꽃이 꺼졌다.

“네게 하나 묻고자 한다, 예정자여…….”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헬은 다른 이들과 달리 캐릭터를 구원자라 부르지 않았다. 그저 예정자라고 부를 뿐. 그게 그에게 구원을 기대하지 않는 것인지, 단지 지상의 구원이 그녀와 관계가 없어서인지는 알 수 없다.

“창세가 있다면 멸망도 오기 마련. 그것은 결코 바꿀 수 없는 진리이며 질서이니라. 함에도 너는 발버둥 치고자 하는가?”

순간 세계가 멈추고, 선택지를 띄웠다.

『⦁단호하게 긍정하기

⦁온건하게 긍정하기

⦁지혜롭게 긍정하기』

전부 긍정인 시점에서 이 선택지로 뭐가 달라지진 않을 것 같다. 높은 확률로.

“뭘 고를까요.”

─1111

─뭘 골라도 상관 없을 듯

─222

─1번이용

─지혜?

은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제일 많은 듯한 의견을 골랐다. 단호하게 긍정하기였다.

“그것이 제 운명이기에.”

정말 단호한 긍정이었다.

“하면 좋다……. 네게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마.”

그녀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어둠에 묻힌 눈이 우울한 푸른빛을 잔잔히 머금었다.

“내 이복동생… 발리는… 오딘이 시긴의 뱃속에 심어 놓은 아들이다. 그래, 그는 로키의 아들이 아니다. 그는 오딘이 복수를 위해 낳은 아들이며, 오딘이 복수를 위해 시긴의 뱃속에 넣어 로키와 시긴의 아들로 위장시킨 자다.”

─ㄴㅇㄱ

─출생의 비밀

─캬 막장

─신화가 다 그렇지 뭐ㅋㅋ

─오딘 진짜 개새끼네

시작부터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동시에 오딘의 아들인 발리가 V로 표기됐던 이유가 설명된 순간이었다.

“그것은 오딘이 골라 내린 복수자의 운명을 가지고 있으니, 운명에 따라 나리를 죽였다. 로키 또한 그의 운명이 노리는 대상이었지.”

“그렇지만 그는 운명을 따르는 대신 내게로 왔다. 운명의 제물이 되어 죽은 불쌍한 나리의 시신을 든 채로. ‘나는 이것을 사랑하게 되었고, 감히 로키를 아버지로 섬기게 되었으니. 이 운명에서 벗어나고 싶다.’라 말하며.”

“헬이 나이고, 내가 곧 헬이니. 나는 언제나 질서를 수호하고 순응해야만 한다. 나의 판단, 나의 결정, 나의 의지. 그 어떤 것도 없이…….”

“그렇지만 그 순간의 나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나는 감히 진리를 거슬러 발리의 간청을 들어주었다. 신의 운명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나리를 살려 준 것이다.”

손 튕기는 소리가 다시 났을 때, 오른쪽 불이 켜졌다. 헬의 다른 쪽 절반이 드러났다. 노파였다.

“나는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하기에… 그가 죽는 걸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나리를 살리는 대가로 발리를 막았다. 그러나… 동시에 이게 옳지 않음을 알고 있다. 나는… 헬은 이래선 아니 된다…….”

노인 특유의 주름이 그녀를 지쳐 보이게 만들었다. 이 점을 노리고 만든 거라면 훌륭한 연출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돌이킬 수 없다. 돌이키고 싶지 않다……. 그렇기에 네게 맡기는 것이다, 예정자여.”

불꽃이 다시 꺼졌다.

“발리의 위치를 알려 주마. 네가 진정 세상을 구할 운명이라면 복수를 포기한 복수자의 운명을 본래 궤도에 올려놓을 수 있겠지.”

꺼졌던 불꽃은 다음 순간 양쪽에서 켜졌다. 고운 여인의 얼굴과 추하게 늙은 노파의 얼굴이 양쪽에서 그를 응시했다.

“창세와 멸망이라는 인과가 이길 것인가, 인과를 구성하는 운명이 이길 것인가. 그것은 네 손에 달려 있느니라.”

▣ 109. 얕보이고 있다

헬이 알려 준 발리와 나리의 위치는 정말 생각도 못 한 곳이었다.

“네가 사명을 위해 길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언제나 네 곁에 머물렀느니라.”

길을 떠나기 전까지라 함은 시작 장소를 말했으니.

결국 집에서 키우던 쌍둥이 개였던 것이다.

─이걸 단번에 찾으시네;;

─그럼 뭐하뮤ㅠㅠㅠ

─켄님,,,,이거 못 깨요ㅠㅠ

─2회차 요소 필요하네됴ㅠㅠ

은우는 쌍둥이 개에게 말 걸기 전 올라온 채팅에 눈을 껌뻑였다. 2회 차 요소?

“1회 차에서 불가능한 겁니까?”

─네ㅠㅠㅠ

─슬레이프니르가 필요하대요ㅠㅠ

─그래서 지금 선두권들 다들 그거 구하는중ㅠㅠ

─구하는 법이 2회차 해야지만 나온대요

그는 잠시 목덜미를 쓸었다.

“이론적으로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압니다만.”

채팅 창이 대부분 부정의 의사를 토해 냈다. 은우의 머리가 차게 식었다. 2회 차 요소라면 그는 죽어도 따라잡지 못한다. 이제 와서 엔딩을 보는 건 어렵지 않지만, 다시 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 테니까.

“하.”

배신감보다 허탈감이 먼저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질타했다. 그건 단지 개발자의 말이었을 뿐 공식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걸 믿고 덤벼든 건 그였다. 멍청하고 한심하기 그지없다.

은우는 잠시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분노로 인한 열은 없으나 가벼운 현기증은 일었다. 팽팽히 당겨졌던 고무줄이 끊어지기 직전인 것과 비슷하다.

이때 이걸 끊어지도록 하면 안 된다. 그러면 정말 진다.

─켄님 어캄ㅠㅠㅠ

─1회차에 가능하다면서ㅠㅠ

─꼴 좋다 나대더니

─슬레이프니르 진짜 뭐냐ㅡㅡ

─윗 놈 말을 왜 그따구로 하냐?

─ㄴㄴ 병먹금 모름?

“…채팅 창에서 싸우시면 밴입니다.”

은우는 가볍게 심호흡을 하며 이성을 잡았다. 이 상황에서 제작진을 탓해 봤자 달라지는 것 없이 추해지기만 한다. 애당초 그들 탓도 아니고.

그래. 이건 제작진의 탓이 아니다. 할 수 있을 거라고 자만한 것도, 가능성을 잘못 잰 것도, 그들의 말을 완전히 신용한 것도 전부 그였으니까.

“2회 차를 고려하지 않은 제 실수입니다.”

은우는 안면 가리개를 들어 올린 후 눈을 꾹꾹 눌렀다. 담담함을 넘어서 담백한 태도에 사람들이 오히려 ‘ㅠㅠ’ 따위의 채팅만 올렸다.

“근데 정확히 뭐라고 합니까?”

그는 담담히 패배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며 마지막으로 질문했다. 그의 잘못에서 비롯된 패배인 만큼 확정된다 해서 유감이 남진 않겠지만, 그래도 알아 두고 싶다. 나중에 비슷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슬레이프니르 가져와야 한다고 해요

─펜리르를 구속할 수 있는 밧줄 가져오라고 포션줌

─? 지금 보고 왔는데 꼭 필요한 느낌은 아닌데?

─발키리들이 쉽게 내주지 않을 거다,,,없이 싸우는 것보단 낫다?

“…말만 보면 꼭 필요한 느낌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의 이성이 미묘함을 품었을 때, 영상 후원이 날아왔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영상을 담고 있었다. 외국 것인지 아래에 번역이 따라왔다.

[운명이 불가능해 보이나?]

영상 속 플레이어는 그는 훌다족 NPC 앞에 서 있었다. 얼굴 반쪽을 검게 칠하는 훌다족 고유의 문신과 북의 추위를 막기 위한 두꺼운 옷은 아무리 봐도 평범한 훌다족 노인이었다.

그저 주변 광경이 시어족의 마을일 뿐.

[운명은 늦출 수 있으나 막을 순 없어. 그러나… 대체할 운명이 있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지지. 한번 실현된 운명은 다른 시간대에 재현되더라도 똑같이 흘러가니. 만약 그대가 헤임달의 운명을 가지고 로키와 싸운다면 그대는 비록 죽겠지만, 로키를 막을 수 있을 게야. 그건 지금 걷는 운명보다 쉽겠지.]

[…그렇습니까.]

[그건 싫나 보지? 하긴 유예는 근시안적인 해결책에 불과하니까.]

훌다족 노파는 낄낄 웃곤 무언가를 건넸다. 포션이었다.

[이것을 마시면 자네는 발할라에 있을 걸세. 그리고 발할라엔 펜리르를 구속할 수 있는 밧줄, 슬레이프니르가 있지.]

[펜리르를 구속할 수 있는……?]

[물론 발키리들은 순순히 그것을 내주지 않을 게야. 그렇지만 없이 싸우는 것보단 더 낫겠지. 그들이 펜리르보다 강한 건 아니니까.]

캐릭터가 포션을 건네받을 때, 훌다족 노파가 갑자기 얼굴을 들이밀었다.

[명심하게. 슬레이프니르는 자네의 고난을 조금 수월하게 만들어 줄 뿐이야. 없애 주는 게 아니라.]

그러곤 물러났다. 영상은 거기서 끝이었다.

“…그러니까.”

은우는 방금 본 걸 정리했다. 조금 피곤해서 정리가 잘 안 됐다. 그는 2초 후에 입을 열었다.

“제가 보기엔 슬레이프니르가 없으면 못 잡는 게 아니라 잡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만. 2회 차가 필요한 게 아니라. 일단 제가 이해한 건 그런데, 더 있습니까?”

─근데 진짜 이거 잡지 말라고 해둔 수준이에요ㅠ

─공격 맞출 타이밍을 주질 않으뮤ㅠ

─정상컨디션도 아니신데....

그는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순간적으로 머리의 지끈거림이 강해졌지만, 다행히 그는 이런 것을 무위로 돌리는 데 능했다.

은우는 강제로 감정을 억누르고 피로를 외면했다. 너무 간만에 하는 행위라 약간 시간이 소요됐지만, 그는 훌륭히 해냈다.

눈에 다시 빛이 돌아왔다. 아니, 빛이 꺼졌다. 살육을 앞둔 도살자의 눈이었다. 헬멧을 쓰고 있지 않았다면 아마 사람들이 밤잠을 설쳤을 수준의.

“적어도 하나는 확실히 알겠습니다.”

─?

─켄님 목소리가 저세상갔는데요

─뭐, 뭐요,,,,?

「‘잠깐생각해보니까’ 님이 ‘1,000원’ 투척!

켄님 예전에 어둠 잡은 거 있잔아,,,?」

─잠깐 형님

─어?

“제가 여러분께 믿음을 덜 드렸다는 것.”

얕보이고 있다는 것.

그건 검을 빼앗겼기 때문일까, 무기가 별로 없어서일까? 피로 때문인지 금 간 자존심 때문인지 필터링이 안 될 뻔했다. 은우는 그것을 인지하고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대체 어떤 수준이기에 안 된다고 말하셨는지 한번 보고 싶네요.”

─오우쉣;;

─에팟 끼고 있다가 순간 빼서 던짐;; 내 3만원,,,,

─구울왕 화났다

─다들 ㄹㅇㅋㅋ만 쳐!

─ㄹㅇㄷㄷ

─ㄹㅇㅋㅋ으로도 안 될 각인데

─아직 모릅니다 저희 다같이 영차해보죠 영

─차

─영차고 나발이고 저희 다 좆된 것 같습니다만....

그는 약간의 두통을 안고 강아지 앞에 섰다. 그리곤 냅다 말을 걸었다. 이벤트 신이 자동으로 진행되었다.

“발리.”

개 두 마리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부족을 구해 준 대가로 부족원의 감시하에 개 두 마리와 만날 수 있게 된지라 그의 뒤쪽에는 시어족이 도열해 있다.

개 두 마리는 꼬리를 왕왕 흔들며 그를 빤히 보았다.

“발리.”

그중 한 마리는 캐릭터의 다리에 엉겨 붙었으나, 한 마리는 한 걸음 떨어져서 시선만 마주했다.

“알고 왔습니다, 발리.”

개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캐릭터가 결국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다.

“헬이 보내서 왔습니다.”

개의 얼굴이 무너졌다.

“미미르께 맹세코, 대화는 허락해 주셨습니다.”

덧붙인 말에 개는 결국 한숨과 함께 엉덩이를 바닥에 붙였다.

“나는 약속을 잘 지키고 있어. 이제 와서 날 찾아온 이유가 뭐지?”

개의 얼굴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건 참 기묘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캐릭터는 쉽게 받아들였다. 걸린 일이 일이다 보니 이런 건 넘어가는 걸지도 모르겠다.

“운명의 이행을.”

개가, 발리가 벌떡 일어섰다.

“안 돼.”

그는 완강히 저항했다.

“나는 나리를 두 번 죽일 수 없어.”

나머지 개가 왜 그러냐는 듯 옆으로 다가와 다리를 휘적였다. 그 모습이 못내 사랑스럽다가도, 얽힌 이야기를 보면 안타깝다.

“발리, 미안합니다. 그렇지만 당신밖에 없습니다.”

캐릭터는 한쪽 무릎만 꿇던 것에서 양쪽 다 꿇는 것으로 자세를 바꾸었다.

“제가 죽어 로키를 완전히 살해할 수 있었다면 저는 당신을 그대로 두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게 안 됩니다. 로키를 완전히 죽일 수 있는 건 당신뿐입니다.”

“내게 동생과 아버지를 죽이란 거냐! 꺼져! 나는 그러지 않을 거다! 다신, 다신 그러지 않을 거야!”

발리는 이를 드러내며 울부짖었다. 캐릭터가 슬픈 눈빛으로 다시 입장을 반복했다.

“당신밖에… 없습니다, 발리.”

발리가 컹컹 짖었다.

“발리, 제발! 당신도 이미 아시잖습니까! 운명은 미룰 수 있을지언정 막을 수 없어요! 지금 당신이 거부한들 언젠가는 이뤄질 거란 말입니다!”

“꺼져!”

“지금의 제가 물러난들, 다음 세대의 제가 당신을 다시 찾아올 겁니다! 저는 헤임달의 운명을 가지고 로키를 막을 테고, 로키는 오랜 시간 뒤에 다시 세계를 멸망시키려 들 테니까요! 그리고 그때, 저와 같은 자가 다시 나타나겠죠!”

“꺼지라고!”

발리의 외침은 미치광이의 발악과 진배없었다. 고성에 흐느낌이 얼핏 섞이기 시작했다.

“알아, 나도 안다고! 사실 내가 로키를 막아야 한다는 것! 애초에 그리 태어났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 그렇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노성은 어느새 통곡으로, 비탄으로 변했다.

“처음에 나는 분명 오딘의 뜻을 인지하고 동의해서 로키의 아들이 되었어……. 하지만, 하지만 나는 그들을 사랑하고 말았어! 오딘과 달리 나를 자식으로 대해 주는 그들을 사랑하고 말았다고!”

“발두르, 발두르! 어째서 같은 아들인데도 죽은 자는 숭배받고 산 자는 도구로만 쓰였지? 나는 어째서 호드를 죽여야 했고, 나리를 죽여야 했어? 어째서 로키를 죽여야 해!”

“로키는 좋은 아버지야. 그는 어떠한 자식도 박대받는 걸 용납하지 못했고, 어떠한 자식도 사랑해 주었지. 그래, 나 같은 것마저도……. 그렇지만 내가 돌려준 건 뭐지? 난, 나는…….”

발리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에 캐릭터는 발리를 측은히 바라보았다. 운명은 때론 잔혹하고 또 잔혹하기만 했다.

“…헬은, 나리의 영혼을 잘 보살펴 주실 겁니다.”

“…오, 헬. 상냥하고 위대한 누이. 그녀라면 나리를 나 따위보다 더욱 잘 돌봐 줄 거야. 그녀는 그런 사람이니까. 애당초 내 이기적인 간청을 들어준 것도 그녀였는걸. 그런 그녀를 나보고 배신하란 거야?”

“헬도 동의한 일입니다. 그녀는 이 일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헬은 질서의 수호자니까. 그렇지만 안 돼. 나는 용납할 수 없어. 내가, 내가 어떻게 나리를 두 번 죽일 수 있겠어.”

“원래 있던 자리로 돌려보내는 것일 뿐입니다.”

설득은 계속 이어졌다. 백기를 든 건 발리였다. 어차피 해야만 하는 일이란 게, 언젠가 벌어질 일이라는 게 그를 체념하게 만든 것일 테다.

“…하나, 문제가 있어.”

이벤트 신이 아니었기에 은우는 잠자코 들었다. 나름 불쌍한 설정의 발리 때문에 시청자 그 누구도 은우가 이벤트 신 전에 했던 발언을 신경 쓰지 않았다.

“헬이 나리를 살려 줄 당시… 나리의 육체를 쓰지 않았거든.”

발리는 지친 얼굴로 바닥에 퍼진 채 말을 이어 나갔다.

“아무리 헬이라도 소생에는 조건이 필요해. 육체가 온전할 것, 영혼이 멀쩡할 것. 그렇지만 나리는 육체가 온전하지 못했지.”

“…오딘이 창자를 뽑았죠.”

“오딘이… 아버지를 묶기 위해 나리의 몸을 찢고 창자를 뽑아냈거든.”

단순히 찢긴 정도라면 바느질로 이어 붙이면 되나, 창자라는 중요 부위가 분실된 건 큰 문제라고 발리는 덧붙였다.

“온전하다고 해서 아무 육체에 담아선 안 돼. 나리는 신이었으니까. 그리고 기질도 맞아야 해서… 오랜 고민 끝에 헬은… 소생에 쓸 육체로 펜리르의 육체를 골랐어. 형제라서 기질이 맞고, 펜리르의 시신은 입이 찢어진 것 외에는 결점이 없었거든.”

“이래서 슬레이프니르와 비다르의 신발이 필요한 거였군요. 펜리르를 상대해야 하니까.”

“문제는 여기서 발생해. 소생을 위해 헬은 그 육체에 힘을 불어넣어 버린지라……. 나리의 영혼이 빠져나가면 자연히 흩어질 힘이지만, 그 흩어지는 기간 동안 펜리르의 육체는 미쳐 날뛸 거야. 그리고 그 기간 안에 지상의 절반을 날리겠지.”

헬도, 자신도 상상하지 못했던 문제라며 발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렴 신의 육체와 영혼을 가지고 소생을 시도한 건 처음이었을 테니 모를 법도 하다.

“…나는 제압할 수 없어. 난 펜리르도 사랑했으니까……. 그는 정말 좋은 형이었거든. 그러니까… 네가 해 줬으면 해. 설마 그 정도도 못 해 주는 건 아니지?”

─아니 어차피 할 거면 걍 니가 죽이지 왜

─윗놈 인성ㄷㄷ

─강제 패륜아,,,

─진짜 켄님 가는 거냐고;;

시청자들의 의견이 어떻든 선택지는 떠올랐다. 은우는 그것을 보며 물었다.

“발키리 잡은 사람 나왔습니까.”

─방금 어떤 스트리머 아슬아슬하게 실패한듯,,,

─곧 잡힐 듯,,,?

─아직 올라온 건 없어요

“그럼 됐습니다.”

그는 망설임 없이 ‘하겠다’를 눌렀다. 그러자 발리가 눈을 감았다.

“좋아.”

그가 몸을 일으키자 개의 다리가 점차 길어지고 등이 부풀어 올랐다. 완전히 몸을 일으켰을 땐 한 명의 인간이 앞에 서 있었다.

“내가 힘을 썼으니 나리의 영혼은 곧 돌아갈 거야. 그 전에…….”

발리는 손뼉을 쳤다. 세계가 일그러졌다.

“장소를 옮기자.”

순식간에 일그러졌던 세계가 재구성되었다. 슬쩍 살펴보면 니플헤임의 땅임을 알 수 있다. 녹지 않는 얼음이 즐비한 채로 눈이 한 송이, 두 송이 내렸다.

아우우우우!

그 속에서 울부짖는 건 나리의 육체였던 것이자 펜리르인 것이다.

은우의 손에 활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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