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은우는 눈꺼풀만 퍼뜩 들어 올렸다. 그리 오래 잔 건 아닌지 여전히 졸리고 몸이 무겁다.
그는 눈가를 더듬다가 자기 전 있었던 일들을 차분히 정리했다.
그러니까… 최초로 히든 엔딩을 봤는진 모르지만, 최초로 1회 차 히든 엔딩을 본 건 확실하다. 그 후에는 잔다는 말과 함께 방송을 끄고, 형의 도움을 받아 침실까지 왔었지.
“아.”
은우는 평소보다 늦게 시계를 확인했다. 시침과 분침은 12에서 살짝 엇나간 상태다.
이 시간이라면 형은 출근해서 없다. 애초에 없어야 할 사람이기도 하고.
그는 목덜미를 쓸었다. 잠결에 본 거라지만 환각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그를 낑낑대며 여기까지 옮겨 준 건 형이 맞다.
다만, 그래. 방송 끝났을 때가 아마 야밤이었을 텐데 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그라면 모를까 형 정도 체력으론 밤새면 힘들 텐데.
그는 그에 대해 조금 고민하다가 일단 배부터 채우기로 했다. 다시 자고 싶어도 배가 고파서 쉽게 잠이 안 올 것 같다. 아무렴, 그는 몸무게만 근 100kg가 나가는 체격의 소유자였다.
슬쩍 확인해 본 노트에는 휴방 공지 올렸으니 푹 쉬라는 박기철의 문자가 와 있었다. 당연히 휴방할 거라 생각했지만, 확정되니 마음이 편하다.
은우는 하품을 연달아 하며 주방으로 나갔다. 매 끼니를 그때그때 해 먹는 타입이라 냉장고에 빠르게 먹을 만한 게 있을지 모르겠다.
정 없으면 죽이라도 끓여 먹어야지. 그는 냉장고를 열었다. 놀랍게도 편의점에서 파는 인스턴트 죽이 다섯 통 있었다.
일단 그가 사 둔 건 아니다. 그 자신은 사 먹더라도 편의점보단 식당을 선호하는 편이었기에, 은우는 어렵지 않게 이 죽의 구매자를 알아냈다.
형이구나. 은우는 잠결에 봤던 형을 떠올리며 목덜미만 재차 쓸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배가 고픈데도 배부른 기분이다. 위장 안쪽을 간질간질 긁는 것 같기도 하고.
그는 인스턴트 죽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양이 부족할까 봐 다섯 개나 사 둔 것도 좀 웃기다. 웃긴데, 조금 더 간질거린다.
은우는 한참 죽통을 지켜보다가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나쁘지 않다. 가족이 이런 거라면, 정말 나쁘지 않다.
아니, 좋다. 그때 거래를 빌미로 죽음을 택했던 게 더 이상 후회되지 않을 정도로.
그는 죽 다섯 통을 싹싹 긁어 먹은 후 형에게 고맙다는 문자를 보내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언제나처럼 혼자인 집이지만, 어쩐지 평소보다 온후하고, 포근하게 느껴졌다.
집이었다.
그의 세계였다.
▣ 112. 너 때문이야
다시 깨어났을 땐 저녁이었다.
슬슬 정신이 멀쩡해졌기에 은우는 저녁을 차리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문자 폭탄이 와 있었다.
아싸는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조용히 껐다. 밥은 편하게 먹어야 했다.
다만 아무리 미뤄도 미루지 못할 때가 있는 법이라. 그는 잘하지도 않는 SNS에 생존 신고까지 한 뒤에 문자를 하나하나 확인했다.
친분 있는 스트리머들의 축하 인사는 적당히 답가했고, 레드바가 제의한 합동 방송은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보냈다.
지금쯤이면 방송 중일 것이므로, 답장은 아마 내일쯤 오지 않을까 싶다.
발신자 중에는 설마 문자 할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도 껴 있었다. 희수였다.
『희수>
https://news.never.com/main/read.n…….』
『희수>
https://news.never.com/main/read.n…. 』
관련 기사만 보낸 게 정말 그 녀석다웠다.
슬쩍 무슨 기산가 살펴보니 제작사에서 발표한 사과 기사다. ‘논란을 일으켜서 죄송하다’와 관계자를 처벌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조목조목 실려 있다.
기사를 낸 건 제작사뿐만이 아니었다. 코니사도 공식 발표를 내걸었다. 대충 이런 유감스러운 일이 벌어져서 슬프다는 내용이었다.
엄밀히 따져서 코니사는 관련 없는 제3자지만, 굳이 발표한 건 한국을 의식한 게 분명했다. 대신 기자한테는 손해배상을 걸지 않을까 싶지만.
은우는 그것을 시큰둥하게 보다가 기사를 껐다. 홍보에 섣불리 그를 써먹은 자가 경질당하든 말든 그 알 바는 아니다. 남을 짓밟으려 했던 만큼 짓밟히는 것도 각오했으리라 믿을 뿐.
그는 감흥 없이 다음으로 넘어갔다. 다음 차례는 형의 문자다. 아직 창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유쾌해진다.
은우는 그것을 꾹 눌렀다. 온갖 잔소리로 도배된 문자 창은 끝에 가서 ‘수고했다’는 말과 ‘멋있다’는 문장이 붙어 있다.
그는 그것을 정확히 세 번 읽었다. 뺨에 꽃다발을 문지르는 것처럼 부드럽고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웃음은 희미하게 입술을 비집고 나온다. 걱정받는다는 건 생각보다 기분이 좋다.
두꺼운 손가락이 서투르게, 그렇지만 최대한 부드러운 단어들을 골라 문장을 완성했다.
『나> 1시간 전에 일어나서 저녁 챙겨 먹었어. 아픈 데는 없는 것 같아.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 내 걱정 말고 형도 건강 챙겨.』
물론 부드럽다고 해서 정말로 다정한 수준은 아니었다. 모든 잔소리에 일일이 답장해 주는 정도가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부드러움이었으니. 부디 오해받지 않길 바랄 따름이다.
확인의 마지막은 가장 중요한 박 팀장이었다. 낮에 확인했다는 문자를 보냈더니 그에 대한 답장을 보내 놨다.
『박 팀장님> 장담하건대 은우 씨처럼 미친 스트리머는 없을 겁니다.』
평소 같았다면 길게 설명했을 사람이 이번엔 한 줄만 달랑 보냈다. 거기서 얼마나 충격받았던 것인지 대충 알 것 같다.
은우는 답장으로 『어떤 의미입니까?』라고 보냈다. 노트를 가까이 두고 있었는지 답장이 곧바로 왔다.
『박 팀장님> 당연히 좋은 의미죠.』
『박 팀장님> 어제 피크 시청자 수가 몇이었는지는 기억하십니까?』
『박 팀장님> 21만 명이었습니다. 무려 21만 명이요. 심지어 인기 있는 ‘네뷸라 워’나 ‘와’, ‘Uol’도 아닌데!』
박기철은 그가 감을 못 잡을 때까지 대비할 요량인지 부연 설명을 보내 주었다.
대충 MOBA(Multiplayer Online Battle Arena) 장르의 게임이라면, 스트리밍하는 사람이 해당 게임에서 이름이 제대로 알려진 사람이라면. 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21만 명의 숫자는 심심찮게 나온다는 것.
그러나 ‘After Daybreak’ 같은, 멀티가 지원되지 않는 게임의 경우 15만 명만 해도 가뭄에 콩 나는 수준이라는 것. 20만 명쯤 되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
이 두 가지였다.
『박 팀장님> 사실 MOBA 게임도 20만 명은 달성하기 어려운 숫자입니다. 요즘은 하도 인기 끄는 사람이 많아서요. 스트리머계의 빈부 격차가 심해 중간층이 없는 것처럼, 혼자서 시청자 독식하는 사람도 적거든요. 물론 한국은 은우 씨랑 탄산 님, 빌리 님이 절대 독식 하고 있죠^^』
그 설명 덕에 이 시청자 수가 가지는 가치를 깨달았다. 그렇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시청자 수가 많아 봐야 돈 더 벌리는 것밖에 더 되나.
아, 그래도 이거 하나는 마음에 들었다.
“제대로 엿 먹었겠네요.”
『박 팀장님> 바로 그겁니다.』
그들이 이 미친 짓을 시작했던 소기의 목적은 초과 달성 됐을 것이다.
『박 팀장님> 그래서 말입니다. 게임사에서 논란이 커지자 화들짝 놀랐는지 뭘 좀 보내 왔지 뭡니까?』
은우는 그 문자를 보며 예전에 만들어 뒀던 푸딩을 꺼내 들었다. 켠왕 때문에 며칠이 지나서야 먹게 됐지만, 상하진 않았을 거다. 아마.
“뭡니까.”
『박 팀장님> 특전이요. 구매 특전이었던 사운드 팩, 피규어, 포스터뿐 아니라 게임 내에서 쓸 수 있는 아이템 등등.』
그는 푸딩을 입에 넣으며 입술을 삐뚜름하게 올렸다.
“자세한 건 들어 봐야겠지만… 딱히 유감이 있어서가 아니라, 특혜 논란일 것 같아서 조금 걱정이 되네요. 제가 심지어 어제 너무 졸려서 마지막에 ‘그런 말’까지 해 버렸잖습니까. 가능하면 거절하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박 팀장님> 아휴, 물론이죠^^ 저희 다이아박스에 맡기십쇼.』
『박 팀장님> 대신 공식 사과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대처 방법으로…….』
미리미리 선 그어 주는 걸 볼 때면 참 든든하다 싶다. 은우는 입안에 몽글몽글 퍼지는 푸딩의 존재를 느끼며 표정을 미세하게 풀었다.
『박 팀장님> 아참, 피로하실 텐데 내일까지 쉬시겠습니까?』
“아뇨. 할 겁니다.”
6, 7시간까진 아니더라도 3, 4시간 정도는 할 것이다. 사람들이 이해해 준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박 팀장님> 그러면 내일 방송 말입니다. 피로가 완전히 가신 건 아닐 테니 간단한 걸로 추천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아, 병맛은 아닙니다. 마침 요청 들어온 게임이 괜찮더라고요.』
“아, 숙제입니까?”
『박 팀장님> 네, 숙제입니다.』
“장르는?”
『박 팀장님> 오컬트 추리 장르입니다.』
안 그래도 액션물이 아닌 게임을 할 생각이었는데, 딱 좋았다.
* * *
─켄하~
─구울왕님 오셨읍니까
─(금지된 채팅입니다)
─(금지된 채팅입니다)
─켄님 사과문 올라왔던데
─머임, 오늘은 PC겜임?
─사과문 보셨어요??
─오늘까지 좀 쉬시지;;
─(금지된 채팅입니다)
─와 시청자 수 미쳤누
다음 날, 방송을 켜자마자 매니저의 적절한 검열 속에서 채팅 창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After Daybreak의 파급력은 어마어마해서 채팅의 대부분이 그에 관한 이야기였다. 채팅 제한을 풀어놨더니 더욱 심하다.
“안녕하세요. 좋은 저녁입니다.”
이 정도는 이미 예상한 바다.
은우는 모르는 척 푹신한 의자에 늘어진 채로 인사했다. 마이크가 그의 목소리를 방송으로 흘려보냈다.
잡담 때 송출되는 대기 화면은 채팅 창이 반을 채우고, 반은 외주로 받은 그림이 채웠다.
─(금지된 채팅입니다)
─안녕하세요
「‘あっぷる’ 님이 ‘33,677원’ 투척!
펜리르 사냥 감명받았어요! 팬이 됐습니다!」
─(금지된 채팅입니다)
─오늘도 캠은 없군,,,,
「‘뭐받으셨어요?’ 님이 ‘1,000원’ 투척!
게임사에서 머 안 준대요?」
은우는 방송에 나가는 화면과 별개로 송출을 기다리는 화면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모니터가 여러 개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미 다 준비를 해 둔 상태인지라 크게 건드릴 만한 건 없다. 기껏해야 채팅 창 크기나 위치 정도일까.
PC 게임을 자주 하진 않으나, 그래도 몇 번 해 봤다고 퍽 자연스럽게 설정해 두었다. 이렇게 해 놔도 게임 하다 보면 상황에 따라 건드릴 일이 생기겠지만 말이다.
“후원 감사합니다. 기사는 봤습니다. 오해가 풀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렇다 쳐도 같이 논란에 휘말리셨던 제작진분들께 정말 죄송했거든요.”
그는 박 팀장이 일러 준 대로 순진한 답을 내놓았다. 그가 저 사과문을 이끌어 내기 위해 했던 미친 짓이 마치 없는 일인 것처럼.
물론 목소리 자체가 배부른 맹수처럼 흡족함을 띠고 있어서야 별 설득력은 없었다.
“그 일 덕분에 많은 걸 배웠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특전이라든가 이런저런 혜택이라든가, 되도록 받지 않으려 합니다. 저뿐 아니라 제작사분들께도 폐가 될 수 있으니까요.”
─해석) 특전으로 해결할 생각 말아라
─마지막까지 완-벽
─너무 시원해서 지금 북극 온줄
─(금지된 채팅입니다)
─시베리아 잠깐 갔다왔다. 여기가 더 시원하다.
─ㅋㅋㅋㅋㅋㅋ러시아 좌 드립 미쳤냐고ㅋㅋㅋㅋ
“이 이야긴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앞으로는 자제 부탁드립니다. 매니저님들 힘드십니다.”
검열 단어를 설정해 두면 싹둑 자르는 시스템이 있긴 하지만, 우회해서 말하는 자들을 대비해 매니저들도 상시 지켜보고 있다.
은우는 그들을 거론하며 해당 주제를 끝마쳤다. 물론 한 번에 알아들으면 비수가 아니었다.
그는 탄산수를 왕창 섞은 콜라나 마셨다. 콜라는 마시고 싶고, 잔소리 때문에 줄이긴 해야겠고 해서 해 본 건데… 별로 맛은 없다.
“건강 조심하라고 잔소리를 좀 들어서, 오늘은 가벼운 걸로 준비했습니다. 오컬트 미스터리 어드벤처 게임, ‘유랑화가’입니다.”
─맥주 준비했는데ㅠ
─ㅋㅋㅋㅋㅋㅋ특전 어림도 없지!
─잔소리ㅋㅋㅋ졸라 귀여워
─방송 켜준 것만으로도 감사할뿐,,,
─ㄴㄴ 저거 잼있음
─(금지된 채팅입니다)
슬쩍 방송 화면을 살피면 대기 화면에서 게임 화면으로 전환된 상태다. 은우는 정상적으로 전환이 마쳐졌음을 확인하고 고개를 버릇처럼 주억였다.
“옴니버스식 구성이고, 첫 에피소드 외엔 전부 유료입니다. 다운로드는 무료고요. 참고로 숙제입니다.”
오컬트가 들어가는 시점에서 약간의 공포가 있겠지만, 이 정도면 형도 볼 수 있을 거다.
사극에서 나올 법한 동양풍 로딩 화면이 화면을 스쳐 지나갔다.
─ㅋㅋㅋㅋㅋㅋㅋ숙제방송ㅋㅋ
─돈 많이 썼겠네 켄 이제 진짜 몸값 장난 아닐 텐데
─그 전에 들어온 걸지두
─오컬트면 무서우려나?
─(금지된 채팅입니다)
─이 게임 갠춘해요
─외국인 수 ㄷㄷ하다
─켄님 추리 잘하심?
“추리 게임은 처음이라서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답답하셔도 참아 주세요. 스포는 절대 금지, 훈수는 제가 요청할 때만 부탁드립니다.”
건조한 목소리가 스치는 동안 메인화면이 출력됐다. 검은 머리카락을 올려 묶은 장발의 사내가 화면을 꽉 채우도록 그려져 있다. 형광색으로 빛나는 옥색 눈동자와 왼뺨에 그려진 문신이 특징적이다.
“일러스트가 굉장히 예쁘네요.”
무테에 가까운 그림은 굉장히 신비로운 분위기를 품고 있다. 사람들이 일러는 통과라며 벌써부터 쑥덕거렸다.
은우는 화면을 채우고 있는 사내를 가만히 보다가 마우스로 빙글빙글 가리켰다.
“이 친구가 주인공 같은데…….”
‘유랑화가’라는 제목에 걸맞게 사내의 등에는 화구통이 걸려 있다.
“동양풍인데 녹색 눈이네요.”
─그렇게 치면 화구통부터....ㅋㅋ
─(금지된 채팅입니다)
─방장이 그만하랬는데 계속 얘기 꺼내는 놈들 뭐냐
─무시가 답임 병먹금ㄱㄱ
─이런 겜에 머리색눈색 고증따위,,,,
─그럴꺼면 화구부터 태클 걸어야함ㅋㅋ
“아, 그렇습니까? 그림은 배워 본 적 없어서 몰랐습니다.”
시청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그는 화면 오른쪽에 세로로 나열된 글자들을 확인했다.
고풍스러운 글씨체로 이야기, 상점, 갤러리, 환경 설정, 게임 종료가 하얗게 적혀 있다.
“갤러리부터 확인하겠습니다.”
그는 키보드를 눌러 갤러리를 눌렀다. 스토리 진행에 앞서 사람들에게 구경을 시켜 주기 위해서다.
그러자 글자들이 사라지고 옆에서부터 종이가 펼쳐졌다. 두루마리 종이가 왼쪽에서부터 파라락 펼쳐지는 이펙트는 제법 근사하다.
“스토리 진행으로 얻을 수 있는 일러스트와 특전 일러스트로 나뉘어 있네요.”
해금되는 일러스트가 있는가 하면 특전 일러스트는 구매로만 얻을 수 있다. 은우는 아직 하나도 열리지 않은 갤러리를 몇 개 뒤적여 보다가 뒤로 가기를 눌렀다.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두루마리가 돌돌 말리며 치워졌다.
“그럼 바로 스토리 진입하겠습니다.”
이야기를 누르자 새로운 글자가 생겨났다.
『본편』
⊱ 첫 번째 장. 고양이 우는 소리 ⋖
⊱ 두 번째 장. 아이는 노래하고
⊱ 세 번째 장…….
제목 옆에는 ‘구매’라는 글자와 가격이 적혀 있다. 무료로 풀려 있는 건 첫 번째 장뿐이었다. 나머지는 잠금 표시로 글씨가 짙은 회색이 되어 있다.
─나온게 꽤 많넹
─재밌어보인다
「‘E.s’ 님이 ‘11,990원’ 투척!
외국어 지원도 합니까?」
─광고 효과 벌써 오죠ㅋㅋㅋ
“아, 외국어 지원도 해 준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잠깐 뒤로 가서 환경 설정 칸으로 들어갔다. 가장 아랫줄에 ‘언어 변경─한국어’란 글자가 정확히 적혀 있다. 변경 가능한 언어도 꽤 많았다.
─오ㅋㅋ갓겜
─번역기만 돌려도 어지간한 커버되는데 뭘ㅋㅋ
─번역기는 킹정이지ㅋㅋ
─(금지된 채팅입니다)
“그럼 바로 가겠습니다.”
은우는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 첫 번째 장을 눌렀다. 화면이 변하며 하얀 글자를 띄웠다.
『본 게임은 픽션입니다. 실존 역사, 지명, 인물, 사건, 단체, 기관과 무관합니다.』
『본 게임에는 다소 잔인하거나 깜짝 놀라는 장면이 있습니다.』
익숙한 경고 문구는 금방 사라졌다. 곧 등장한 배경은 산길이었다. 단출한 차림의 주인공과 엑스트라가 아닐까 싶은 인물이 나란히 걸어가고 있다.
돌과 풀을 밟는 효과음이 귀를 간지럽히고, 화면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까만색으로 칠해진 사람의 실루엣이다. 아래에 대사 창이 떠올랐다.
『???: 어휴, 힘들어라. 자네는 짐이 가벼워서 덜 힘들겠구먼.』
나오는 모든 캐릭터에게 목소리가 주어진 건 아니었기에 은우는 그것을 따라 읽었다. 조연 주제에 성우보다 더한 목소리를 가지게 됐다며 사람들이 농을 지껄였다.
『유랑화가: 하하, 그렇긴 하죠.』
“화가는 목소리가 있네요.”
─오 보이스 굳
─목소리 좋누
─기계 아니라 전문성우 쓴듯?
은우는 달칵거리며 다음 대사로 넘어갔다.
『???: 그보다 자네, 담도 크군. 성씨 가문이 모반죄로 날아간 후 도적 떼가 들끓고 있는데 말이야.』
『유랑화가: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환쟁이가 도적 떼를 신경 쓸 수나 있겠습니까? 굶어 죽나 도적 떼에게 당해 죽나 거기서 거깁니다.』
『???: 그건 맞는 말이야. 하여간 높으신 분들도 너무들 하시지. 그놈의 금인에게 눈이 멀어 나랏일을 등한시할 것은 무엇이며, 그렇다고 군을 책임지는 가문을 몰살시킬 것은 뭔지. 덕분에 도적이 늘어나서 우리들만 이리 힘들지 않나.』
“나라 상황이 썩 좋은 편은 아닌가 봅니다.”
그는 흘러가는 정보도 일단 뇌리에 입력해 두며 대사를 하나하나 넘겼다. 쓸모없는 대사가 몇 줄 지나간 후 배경이 바뀌었다. 이젠 주막이었다.
평상에 걸터앉아 주막 주인과 대화를 나누는 화가 일러스트다.
『주막 주인: 어이구, 화공 양반이신감? 어언 일로 왔수?』
퉁퉁하여 친근감 있는 얼굴의 주막 주인이 떠올랐다.
“일러스트랑 더빙이 있는 걸 보니 지나가는 인물은 아닌 듯합니다. 자주 출연하려나.”
─더빙학ㅋㅋㅋㅋ
─더빙학은 진리지ㅋㅋㅋ
─ㅇㅈㅋㅋㅋㅋ
“다들 화공이라 부르는 것도 그렇고, 시대 배경상 화공이 좀 더 맞는 이름 같은데… 제목은 왜 화가일까요.”
화공보단 화가가 사람들에게 더 익숙한 단어라서 그런가. 은우와 시청자들은 그 점에 대해 토론하며 다음 대사로 넘겼다.
『유랑화가: 이 마을에 유명한 기방이 있지 않습니까. 어디 일거리라도 있지 않을까 하여 왔습니다.』
『주막주인: 아휴… 그런 거면 때를 잘못 맞췄수다. 지금 기방에 가 봤자 의뢰는 못 받을 거요.』
“기방에 무슨 일이 터진 것 같은데.”
『유랑화가: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주막 주인: 말도 마쇼. 얼마 전에 기생 하나가 죽은 뒤로 마을이 죄 흉흉해져선…….』
『유랑화가: …어쩌다 그런 일이?』
『주막 주인: 낸들 알겠소? 그래도 범인이 잡혀서 망정이요. 하여간 천한 백정 놈이 고기를 자르다 기어코 피 맛 들려서 사람까지 자르고 만 게지.』
“백정이 기생을 죽였나 봅니다.”
그렇지만 이 게임은 추리 게임이다. 괴이를 쫓는다는 게임 소개 글이 있긴 하지만, 정말 그것뿐일 리는 없을 터. 은우는 정보를 체크해 가며 대사를 넘겼다.
『유랑화가: 백정은 죽었습니까?』
『주막 주인: 당연한 이야기지 않소? 사또 나리께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목을 치셨수다.』
『유랑화가: 흐응… 그렇다면 문제 될 건 없지 않습니까?』
『주막 주인: 맞는 말이긴 한데, 사람 말이란 게 워낙 그렇잖수. 심지어 그 뒤로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도 돌고 있고……. 덕분에 기생이란 기생은 죄다 몸 사리는 중이요. 저 위쪽 저잣거리에는 그래도 곧잘 나왔는데, 요즘은 보이지도 않는다더군. 아마 화공도 안 받고 있을 거요.』
『유랑화가: 이것 참 곤란하게 됐군요.』
순간 일러스트가 바뀌었다. 의미심장하게 웃는 화가의 얼굴 그림이었다.
『유랑화가: 한데 귀신 소문이 돌고 있다니……. 자세히 들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주막 주인: 잉? 그런 소문 좋아하쇼?』
『유랑화가: 하하, 원래 귀신 같은 괴이 이야기가 제일 재밌지 않습니까.』
『주막 주인: 으음… 그건 그렇지.』
고민하는 주막 주인의 일러스트를 마지막으로 화면 구성이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 배경은 완성된 일러스트 그 자체였다면 이번 것은 배경과 캐릭터가 약간의 이질감을 가진 상태다.
초가집 앞에 주막 주인 캐릭터가 서 있고 평상에는 주인공 캐릭터가 앉아 있다. 두 캐릭터 다 배경과 그림체가 약간 달라졌다. 동글동글하고 원색이다.
『목표: 귀신에 대해 조사하자.』
그때, 그 글자가 화면의 중심에 떠올랐다가 휙 하고 왼쪽 상단으로 움직였다.
『유랑화가: (정보를 새로 얻기 전에 미리 얻은 정보를 일지에 기록해 두자. 찾기 쉽도록.)』
오른쪽 하단에 돌돌 만 종이 두 뭉치와 그 앞에 펴진 종이가 겹쳐져 있는 아이콘이 떠올랐다. 세계관의 배경이 되는 시대에는 수첩이 없어서 종이 낱장을 묶어 쓰는 모양이다.
“튜토리얼이네요.”
그곳을 눌러 달라는 표시로 일지 아이콘이 반짝거리길래 은우는 마우스를 가져다 대어 꾹 눌렀다.
화면이 검게 물들며 일지를 떠올렸다. 검은 배경에는 양손의 손가락을 붙인 채 코와 입 쪽으로 가져다 댄 자세의 화가가 희미하게 비친다.
“제법 상세히 정리되어 있네요.”
─저거슨 셜록홈즈의 자세....!
─오, 시스템 괜찮은데?
─프랑스어 번역판 있습니까?
─있다.
─외국인들 시끌시끌 하다ㅋㅋ
─제작사들 숙제 내주는 맛 있을 듯ㅋㅋㅋ
일지에는 마을 지도와 인물 칸, 단서 칸, 소문 칸이 존재했다.
“마을 지도는… 아직 개방된 게 주막밖에 없습니다.”
대신 이동할 수 있는 것들이 상당히 많았다. 물음표로 표기된 것들은 전부 이동할 수 있는 곳이 아닐까 싶다. 맵이 상당히 크다.
“인물에는 아직 주막 주인밖에 없고, 단서도 없네요.”
주막 주인에 대한 정보도 별로 없었다. 은우는 일단 일지를 닫았다.
다시 배경이 펼쳐졌다. 이번엔 주막 주인이 반짝거렸다. 은우는 그녀를 눌러 보았다.
『주막 주인: 내가 아는 건 별로 없수다. 다만 고년이 죽은 뒤로 마을에서 종종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지 뭐요?』
『유랑화가: 이상한 일이란 건?』
『주막 주인: 고양이들 수십 마리가 모여 울지를 않나, 고양이 새끼들이 찢겨 죽지를 않나. 인간인지 귀신인지 모를 것이 밤길을 돌아다니며 ‘너 때문이야.’라고 말하는 걸 본 사람도 있다고 하더이다.』
『유랑화가: 그렇군요…….』
『주막 주인: 내가 아는 건 여기까지요. 혹시 더 알고 싶음 마을이라도 돌아다니면서 알아보는 게 좋을 거요.』
『유랑화가: 네, 감사합니다.』
그걸로 대화가 끝났다. 튜토리얼이 아직 안 끝났는지 일지가 반짝거렸다.
“그런데… 배경에 고양이가 있네요.”
주막 옥상에도 있고, 주막을 둘러싼 싸리나무 담 앞에도 고양이가 굴러다닌다.
은우는 튜토리얼을 진행하기 전에 그것들을 눌러 보았다. 고양이 일러스트가 꼬리를 흔들었다. ‘웨옹’거리는 효과음은 덤이었다.
“꼬리 흔들린다.”
─고양이 커엽ㅠ
─웨웅ㅠㅠ
─일러스트 퀄 ㄷㄷ;;
그는 혹시 몰라 다른 것도 눌러 보았다. 싸리나무를 누르면 대사 창이 떠오르며 ‘싸리나무로 만들어진 담이군.’ 따위의 말을 토해 냈다.
“상호작용이 굉장히 많이 되네요.”
심지어 이런 상호작용에도 보이스가 입혀져 있다. 좀 더 해 봐야 알겠지만, 첫 장이 무료로 풀려 있다고 믿기 힘든 퀄리티다. 이래야 사람들이 다음 챕터를 몇 만 원씩 주고 구매하겠지만.
“누를 거 다 눌렀으니 마저 진행해 봅시다.”
은우는 반짝거리는 주인공 캐릭터를 눌렀다.
『유랑화가: (방울이 딸랑거리는 걸 보니 뭔가가 이 마을에 있는 건 분명하군.)』
화가가 화구통에 달려 있는 방울을 건드렸다. 방범용인 줄 알았더니 게임 내에서 사용되는 도구였나 보다.
『유랑화가: (방울의 딸랑거림을 따라가자.)』
왼쪽 하단에 방울 아이콘이 생겨났다.
『유랑화가: (이동은 지도를 보면서 하면 된다.)』
은우는 튜토리얼을 따라 착실히 하단의 일지 칸을 통해서 마을 지도로 들어갔다.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은 많았으나 누르라는 듯 반짝거리는 건 하나였다.
“가 보겠습니다.”
그는 반짝거리는 물음표를 눌렀다. 마을 지도에 있는 캐릭터의 얼굴 아이콘이 누른 곳으로 이동했다. 뚜벅거리는 발소리가 귀에 울렸다.
곧 배경이 뒤바뀌었다.
『§ 불타버린 집터』
화면 중간에 글씨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덕분에 은우는 이 장소가 누군가의 집터임을 알 수 있었다.
앞에 ‘불타 버린’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대로, 드러난 배경은 잿더미에 가깝다. 불에 타다 만 기둥들이 무너져 있고 흙더미들이 봉긋하게 쌓여 있다.
화면 왼쪽 하단의 방울 아이콘이 주기적으로 떨리며 딸랑 소리를 내었다.
“뭘 누르라고 알려 주는 건 없네요.”
─튜토리얼 끝났다 이마리야~
─(금지된 채팅입니다)
─암거나 눌러보셈ㅋ
─방울 소리가 듣기 좋습니다www
─집터 누르는 거 아님?
은우는 시청자의 말마따나 불타오른 집터를 눌러 보았다.
『유랑화가: 잘도 태우셨군.』
유랑화가가 독백을 시작했다. 주막 주인과 대화할 때와 달리 독백하는 그의 표정은 무표정했다. 더빙된 목소리 또한 건조하고 서늘한 게, 꼭 딴 사람 같았다.
반전미에 사람들이 술렁일 때, 화면 속 화가가 다음 대사를 쳤다.
『유랑화가: 그렇지만 원과 한은 태우려 해도 태워지지가 않으니……. 그래, 무엇이 당신을 그리 붙잡으셨소? 어떤 한에 이끌리시어 그의 원을 그릇 삼으셨소.』
순간 화면이 뒤바뀌었다. 애니메이션이라고 하기엔 조금 부족한, 그러나 옷자락이라든가 배경이 조금씩 움직이는 일러스트였다.
화가의 옥색 눈동자가 시뻘게지고 문양의 색이 반전되었다. 동시에 불타 버린 집터에서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 너 때문이야…….』
그것은 검은 연기로 이뤄진 거대한 무언가였다.
『???: 너 때문이야아아─!』
일렁이는 검은 몸체에는 칼날과 고양이 시체가 들려 있으니. 그것의 시뻘건 눈이 피눈물을 뚝뚝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