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멋지네요.]
나름 친구 놈 방송이라고 공강 기념 삼아 오랜만에 봐 주러 들어갔다가 들은 소리였다.
김희수는 이 새끼가 뭘 잘못 먹었나, 하며 귀를 후볐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그녀가 들은 말이 달라지진 않았다.
“…이 자식이 이렇게 감상 넘칠 리가 없는데.”
이게 한 번이면 그녀도 오늘따라 감성 넘치네, 하고 넘겼을 것이다. 그러나 VAV는 그녀가 좋아하는 게임이었고, 서은우 이 자식은 게임 하나만큼은 기똥차게 잘해서 볼 만했다.
다른 건 몰라도 VAV 편은 다 지켜봤단 말이다.
“가을 타나? 아니, 가을이 아닌데.”
여행을 좋아하느냐면 그것도 아니요, 사진 찍는 것도 꺼려 하는… 아마 그랬던 것 같은 녀석이다. 그런데 이번 게임에선 묘하게… 정말 묘하게 여행 가고 싶은 사람처럼 굴고 있다.
12년 지기의 직감이었다.
『감정 똘추> 여행 가는 데 보통 경비 얼마나 드냐.』
이것 봐. 얘 좀 이상하다니까.
김희수는 운동 좋아하는 주제에 묘하게 집돌이인 친구 새끼의 기행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집돌이가 보통 여행을 가고 싶어 하는 데는 이유가 있지.
『나> 말해라』
『나> 1. 형한테 엿 먹어서 도피하고 싶다.』
『나> 2. 방송에 써먹을 게임이 떨어졌다.』
『나> 3. 센치해졌다.』
『나> 4. 일이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저 집돌이 새끼가 여행을 고민할 만한 건 저런 이유밖에 없었다.
한참 만에 친구 놈이 답을 보냈다.
『감정 똘추> 사진 찍고 싶어서……?』
『나> …누구랑.』
『감정 똘추> 형밖에 없지.』
희수는 잠시 침착해지려 했다. 이 자식이 왜… 형이랑 사진을 찍고 싶어서 여행을 가고 싶어졌을까. 보통 이럴 땐 추억을 쌓고 싶다고 말하지 않나?
물론 이 똘추가 이런 쪽에서 단어 선택을 종종 잘못하긴 하는데… 왜인지 참 촉이 안 좋단 말이지.
『나> 왜 뜬금없이?』
『감정 똘추> 생각해 보니까 형이랑 찍은 사진이 하나도 없더라고.』
이 세상 대답이 아니었다.
“아, 이 또라이가.”
『나> 또라이 새끼야, 아주 멋진 답이다.』
보통 여행 가서 사진 남기고 싶어 하긴 하는데, 이건 전후가 바뀌었잖아. 이건 그냥 여행 가고 싶은 게 아니라, 아!!
친구 놈이지만 이럴 땐 뇌를 뜯어 보고 싶다. 김희수는 타자를 치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한편, 그녀의 답장을 본 은우는 애먼 목덜미만 쓸었다. 이게… 이게 그렇게 이상한 말이었나?
『희수> 아니, 이 머저리 새끼가. 그림이 너무 커서 도화지가 아주 찢어지겠어요. 이 또라이야, 가족사진이 없어서 그거 찍겠다고 여행 가자고 하는 인간이 세상에 얼마나 있겠냐고!』
결국 진실을 듣고 만 희수가 분노를 토해 냈다.
『희수> 추억 쌓고 싶어서 여행 가고 싶다는 내가 봐주겠는데, 가족사진 없어서 그거 찍자고 여행을 가냐? 진짜 스케일 돈 새끼 아냐, 이거. 돈 존나 썩어 나서 부럽네요. 나는 우리 지수랑 가지도 못하고 있는데!』
“나름 추억도…….”
그는 소심하게 반박을 시도했다.
『희수> 어휴. 그래서 추억이 먼저세요, 가족사진이 먼저세요? 솔직히 목적에 후자가 포함된 시점에서 백이면 백, ‘아니, 이건 좀;;’ 할 텐데?』
바로 격침당했다. 그에게 희수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대상이었다.
『희수> 가족사진을 겸사겸사< 인 시점에서 비정상이거든? 아니, 물론 시발, 첫 가족사진을 찍기 위해 여행 갈 수도 있긴 한데! 그런데! 시발, 네 나이가 몇인데!』
『희수> 아니, 그리고 너네 형은 염병할! 사진 찍는 게 취미라면서 아직도 사진을 안 찍었어? 저번에 놀러 갔을 땐 뭐 했는데?』
그때는 생각이 없었다. 형도 별로 생각 없어 보였다. 그렇지만 희수에겐 그게 통할 것 같지 않았다.
은우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 희수가 장문─3문장 이상─의 문자를 우다다 보내 왔다. 분노가 그녀의 타자 속도를 2배로 만든 게 분명하다.
그는 결국 팩트로 후려 맞아 가며 형에게 문자를 보냈다.
여행 가자고 말하면 형 성격에 무리해서라도 시간을 낼 것 같으니 제의 못 하겠고, 사진이라도 찍자는 문자였다.
▣ 133. 공부, 또 공부
『은우> 다음에, 사진 하나 찍자. ₁』
바빠서 메시지를 못 보나 보다. 은우는 사라지지 않는 1을 보다가 슬근슬근 그의 할 일을 찾았다.
스트리머들 영상을 찾아보며 공부를 할까. 다다음 할 게임들을 미리 선별할까. 그것도 아니면 간식거리를 조물거리며 만들어 볼까.
전부 해서 나쁠 건 없는 일들이지만, 오늘따라 묘하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운동은 새벽에 일어나서 몸이 땀에 젖을 정도로 한 상태라 더 하고 싶지 않았고. 오현은 저번에 만났고.
그렇다면 뭘 할까? 은우는 소파에 엎어진 채 잠시 고민했다.
보통 이렇게 시간이 날 때 그는 뭘 하고 보냈더라……. 작년이라든가, 재작년이라든가.
그는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시간 나기는 개뿔, 공부밖에 안 했음이 떠올랐다.
머리에 담기지도 않는 지식들을 억지로 눌러 담느라 바빴더랬지.
그는 대체 무슨 소린지 몰라 하염없이 보기만 했던 문제들을 떠올리며 머리를 꾹꾹 눌렀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악몽이다.
은우는 이렇게 괴로움에 몸부림치느니, 차라리 생각의 방향을 바꿔 보기로 했다. 보통 사람들은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보낼까.
독서? 독서도 나쁘지 않다. 그는 아직 상식이 부족하니까. 남는 시간에 그런 것을 채우는 것도 좋을 것이다. 좋을 것인데…….
걔도 공부잖아. 그는 슬그머니 독서를 뒤로 밀었다. 꼭 지금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뭘 하지? 뭐 하지?
차라리 낮잠을 잘까도 고민해 보았지만, 그랬다간 밤에 못 잘 터.
이래서 친구를 사귀라고 한 건가. 그는 지루함에 몸을 옆으로 굴렸다. 그러자 조금은 건조한, 장식들이 거의 없는 집 풍경이 보였다.
본래라면 별생각 들지 않고 앞으로도 별로 없었을 것이나, 광공 뭐시기를 들은 이후론 매번 마음에 걸렸다.
뭐라도 사서 진열해 둘까? 굳이 인형이 아니더라도 장식품은 많으니까.
은우는 몸을 일으켰다. 목적이 정해지니 뭘 해야 할까 고민하던 머리가 깨끗해졌다. 그렇게까지 대단한 목표가 아님에도 그랬다.
혹시 이런 게 무기력인가. 그는 옷을 껴입으며 난생처음 겪어 보는 것에 대해 고찰했다. 뭐, 그래도 좋았다. 일단 할 일은 생겼으니까.
그는 희수가 예전에 추천해 줬던 조합을 걸쳤다. 하얀색 얇은 티와 카키색 면바지였다.
그 상태로 버스를 타니 어김없이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당연하게도 그들의 시선이 닿는 곳은 주변인들과 머리 하나는 차이 나는 키다.
다만 방송을 통해 시선에 너무 익숙해진 탓일까. 은우는 예전처럼 눈치를 보는 대신 목덜미만 살짝 쓸고 말았다. 오히려 그가 신경 쓰이는 건 허전한 얼굴이었다.
역시 헬멧을 쓰고 나오는 게 나았을까? 그렇지만 헬멧을 쓰고 나오겠다 다짐했던 건 주변 스트리머들에게 걸리기 싫어서였다. 이미 공개한 지금, 굳이 헬멧을 쓰고 나올 이유가 없었다.
“어, 케…….”
없었다.
“에에에이준 치킨!”
이 시간에 마주친 것도 신기하지만, 타인의 존재를 의식하고 자연스럽게 본인의 뻘짓으로 돌려 버린 순발력도 신기하다.
허리를 옆으로 뒤틀며 인사하려 올리던 손을 완전히 위로 뻗고 검지만 치켜든 자세라니. 누구도 의심하지 못할 거였다.
“아, 갑자기 케이준 치킨 먹고 싶어서 그래. 뻘짓이라니, 너무들 하네 진짜. 쉬는 날에도 켜 준 것에 기뻐하진 못할망정 그럴 거야?”
야방이라도 하는 모양이다.
어째 됐건 레드바의 순발력에 감탄하며 은우는 슬그머니 그곳을 돌아 돌아 빠져나갔다. 조금 뒤에 슬그머니 문자가 왔다.
『레드바> 행님, 아깐 실수, 실수. 죄송 >.ㅇ』
『나> 괜찮습니다. 순발력 좋으시네요.』
『레드바> 아, 제가 좀 한 순발력 합니다 ^^)>』
『레드바> 뭐 사러 오셨나 봐용?』
『나> 네. 레드바 님은 오늘 야방이신가 봅니다.』
백화점이 보인다. 그는 그 안을 밟았다.
『레드바> 아 그게ㅋㅋ』
『레드바> 오늘은 놀러 나온 거예용. 방송이 내일로 미뤄져서ㅋㅋ』
『레드바> 근데 오늘 놀기로 한 사람이 약속 펑크내뿟네요.』
『레드바> 이왕 나온 거, 들어가기도 싫고 쫌쫌따리 심심해서 잠깐 방송 키고 놀고 있었죱.』
에스컬레이터를 찾으려는 발이 잠깐 느려졌다.
『나> 그러십니까.』
상대방이 펑크내서 할 게 없어진 레드바. 휴방일인데 할 게 없어 지루하던 자신.
그는 이게 타이밍이란 걸 알았으나, 그 타이밍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그사이 띠링, 하고 문자가 하나 더 왔다.
『레드바> 혹시 켄 님, 괜찮으심 저 좀 주워 주실 수 있으신지.』
『레드바> 방해 안 하고 쥐 죽은 듯 따라만 다니겠습니다.』
『레드바> 물론 부담되시면 편히 거절해 주세용.』
『레드바> 저는 혼자도 잘 놉니다…….(이모티콘)』
은우는 그것을 보며 눈을 껌뻑였다. 이 사람은… 부러울 정도로 친화력이 좋다. 사람에게 접근하는 방법을 안다고 해야 할까.
『나> 저야 괜찮습니다.』
『레드바> 헉헉, 진짜요?』
『나> 다만, 제가 살 게 있는지라.』
『레드바> 제 별명이 안 사 본 거 빼고 다 사 본 레드바임니다. 엔간한 건 제가 사용 후기 들려 드릴 수 있습니다.』
글쎄. 장식품에도 사용 후기가 붙나.
그렇지만 후기가 없어도 보는 눈은 그보다 나을 거다. 은우는 괜찮다면 백화점으로 오라 문자를 남겼다.
『레드바> 앗, 근데 제가 거기까지 가는 데 좀 걸릴 것 같습니다. 먼저 구경하고 계세용.』
『나> 네.』
『레드바> 도착하면 문자 드리겠습니다.(이모티콘)』
은우는 넙죽 절하는 이모티콘을 마지막으로 창을 껐다. 본인이 조금 걸릴 것 같다고, 먼저 구경하라 했으니 그 말 그대로 할 참이다.
그의 발이 백화점 안을 거닐기 시작했다.
* * *
『레드바> 행님, 저 백화점 도착했습니다.』
『레드바> 몇 층에 계신지.』
넘쳐 나는 게 시간이고, 마음에 딱 집어 둔 상품도 없었기에 한 층, 한 층 차례로 돌아다녔다. 그러길 20분 정도 지속하니 레드바가 도착했노라 문자를 보내 왔다.
은우는 혀로 볼을 찬 후 그가 있는 층을 말해 주었다. 엘리베이터 있는 쪽으로 가 조금 기다리면 곧 승강기 하나가 그가 있는 층에서 멈춘다.
“크, 오늘도 간지 폭풍이십니다.”
그 안에서 내린 레드바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감사합니다. 근데 그것들은?”
은우는 레드바의 얼굴에 씌워진 안경과 모자를 보았다. 머리를 다 가릴 정도로 커다란 벙거지 모자는 그렇다 치자. 별 모양 선글라스는 게임 룩으로 밖에 접해 보지 않았던 것이었다.
“흐. 제 얼굴은 퍼져 있으니까용. 혹시라도 알아보면 곤란하잖습니까.”
레드바는 턱에 검지와 엄지를 얹으며 ‘움후후핫핫’ 하고 웃었다.
“완벽한 변장이죠. 이거면 절대 안 들킬 겁니다. 크헤헤헤.”
글쎄. 저건 저것대로 시선 끌지 않을까 싶다. 그렇지만 의도를 자세히 따지면 결국 그를 향한 배려였다.
은우는 생경한 마음에 목덜미를 주물렀다. 정말로 익숙하진 않지만, 나쁘지 않다.
“그, 감사합니다.”
“엥, 저야말로 감사하죠. 뜬금없이 놀아 달라 부탁한 건데 흔쾌히 들어주셨으니까.”
레드바는 손을 마구 휘저었다.
“참고로 유진성이라 불러 주십쇼. 만일은 없는 게 낫잖아요?”
“…네.”
의외로 철저하다고 말해야 하는 걸까, 배려심이 정말 주옥같다고 해야 하는 걸까. 은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레드바의 실명을 혀로 굴려 보았다.
“진성 님.”
일반적인 호칭은 아니었으나, 아직은 이게 최선이었다. 레드바가 양손으로 엄지를 착 치켜들었다.
“그보다 뭐 사고 계셨슴까?”
“…그냥 집이 허전해서 장식을 조금.”
“아따, 장식 하면 또 이 애벌레 아니겠습니까. 행님, 이 동상한테 맡겨만 주이소.”
“네.”
레드바의 허물없는 태도는 정말로 사람의 경계심을 푸는 데 적합하다.
은우는 희미하게 입술을 올렸다. 희수랑 다닐 때와 비슷한 기분이다. 편안하다.
“행님 취향이… 음, 근데 어떤 장식품 사실 거예요?”
“글쎄요. 그냥 보면서 고를까 했던 거라.”
“음음. 아, 요기에 장난감 코너 있는데, 보셨을까요?”
“아뇨, 아직 덜 돌아봤습니다.”
“그럼 거기부터?”
“네.”
장식 하면 또 이 애벌레라며 잘난 척했던 게 빈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레드바는 바로 장난감 코너로 안내해 주었다.
아동용 장난감부터 성인용 장난감─청소년에게 노출되기 부적절한 것들은 없다─까지, 장난감 코너가 층의 절반을 넘게 차지하고 있다.
워낙 크다 보니 성인 쪽으로 넘어가려면 아동용 매대를 지나쳐야 했다. 정확힌 복도 부분이지만, 매대 사이사이에 있는 상품과 구매자들을 보는 게 가능한 점에서 반쯤은 구경하는 것도 되었다.
“아구, 귀여워.”
아동용 코너에 삼삼오오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본 레드바의 입가가 헤벌쭉해졌다. 아무래도 레드바는 아이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반면 은우는 뺨만 멋쩍게 쓸었다. 그라고 애들이 싫은 건 물론 아니었다. 부모 손을 붙잡고, 혹은 부모의 시야 앞에서 도도도 뛰어다니는 아이들은 실제로 퍽 어여뻤다. 차마 울까 싶어 다가가지 못할 뿐.
단지 생애 처음으로 보는 장난감 코너가 조금 신기했다. 그리고 그 사이를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보니 무심코 감상 하나가 들고 말아서…….
“아빠! 나, 이거 사 주세요!”
“엄마! 나는 이거!”
“어디, 뭐 골랐어?”
“보자……. 귀여운 거 골랐네?”
은우는 눈을 껌뻑거렸다. 그의 걸음이 그나마 아이들이 없는 진열대 사이로 들어갔다.
“어, 뭐 사실 거 있으세용?”
“…아뇨, 그냥 잠깐.”
전자 노트가 상품의 정보를 띄우는 사이 은우는 인형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별의별 인형이 다 있었지만, 그중 눈에 밟히는 건 다람쥐와 고양이였다.
다람쥐는 사실 별다른 이유 때문에 본 건 아니었다. 생긴 게 묘하게 형이랑 닮아서 조금 웃기다 싶었다. 묘하게, 묘하게 익숙하기도 했고.
다만 고양이는… 입술이 조금 삐뚤어서 그런가. 띄워진 정보에 구매 수가 현저히 적었다. 인기 많은 토끼 인형과 비교하면 거의 3배 차이였다.
그는 잠깐 고민하다가 의아한 얼굴의 레드바를 보았다.
“…희윤이가 좋아할까요.”
“아, 희윤이 주시려고요?”
레드바는 단번에 납득했다.
“엄청 좋아해요.”
“…다행이네요.”
“앗, 생각난 김에 저도 하나 사 줘야겠다. 행님, 뭐 사 주실 거예요? 안 겹치게 사려고요.”
레드바의 물음에 은우는 잠깐 고민했다. 그런 그가 끝내 찍은 제품 코드는 총 3개였다.
다람쥐, 고양이, 토끼. 물론 3개나 사 주면 개불이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겠지만… 정 그러면 하나만 주고 나머진 환불하면 된다. 은우는 그것으로 생각을 마무리했다.
“3개나 사 주시게요?”
“저를… 무서워하지 않은 아이는 그 애가 처음이라.”
“아… 행님이 좀 크긴 크시니까요.”
레드바는 토끼 옆 곰 인형을 구매했다. 이제 이 매대에 볼일은 없다.
은우는 레드바를 따라 인형 매대를 나가다 말고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렸다. 매대 반대쪽 끝에서는 남자아이 하나가 부모님과 손을 잡은 채 인형을 고르고 있다.
그는 그것을 보다가 그 자리를 나왔다.
“행님! 피규어는 어떠십니까!”
그러면 묘하게 들뜬 레드바가 그를 기다린다. 은우는 어딘가 가라앉으려던 기분이 순식간에 덮어지는 걸 느꼈다. 아니, 느낀 건 아니었다. 다만 그의 무의식은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띄웠다.
“피규어는 관심 없습니다.”
“까비!”
레드바가 과장된 동작으로 아쉬움을 표했다. 정말이지,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까지 긍정적 에너지로 넘치는지 신기하다.
“진성 님은 피규어 좋아하십니까?”
“흐.”
까불거리는 애벌레는 대답 대신 엄지를 척 추켜세웠다. 너무 당당해서 들어 줄 마음이 절로 든다.
“아, 그리고 피규어 파는 코너 옆에 게임도 파니까요.”
다르게 말하면 본인이 피규어 고를 때 넌 게임 찾아보는 게 어떻냐는 의미이리라.
나쁘지 않았다.
“그럼 전 게임 보고 있겠습니다.”
“네!”
마침 그들 위치도 성인 쪽 코너에 다다른 상태였다. 레드바가 헐레벌떡 피규어 매대로 달려가고, 은우는 게임 쪽 매대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게임 플레이 영상이나 홍보 등을 송출하는 홀로그램들 수십 개가 늘어지고, 그 앞에는 관련 상품도 진열되어 있다. 그게 피규어건, 포스터건, 뭐건 간에 말이다.
그렇게 게임 하나하나를 뜯어 보며 관찰하던 은우는 한 게임과 게임기 앞에서 멈춰 섰다. 추천받은 적도 없고 따로 들어 본 적도 없지만, 안면은 익힌 게임이다.
그는 샘플용으로 놓인 것을 들고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VR 아니면 PC 게임만 하던 그에게 전용 게임기가 존재하는 이것은 제법 새로운 존재였다.
화면에서 보여 주는 홍보 영상도 색달랐다. 게임기와 게임 칩의 외형만 익혔지 한 번도 관련 정보를 찾아본 적은 없던 까닭이다.
“저 왔습니다아… 아?”
마침 피규어를 고르고 온 레드바가 끼익거리며 걸음을 멈추었다.
“케, 으으애행님, 그 게임은 대체 왜…….”
이상한 게임인가? 그는 목 옆쪽을 긁적였다.
“이상한 게임입니까?”
“그건 아닌데요… 따지자면 게임 중에서 제일 건전할걸요?”
건전한 게임? 은우는 다시 게임 칩 케이스로 고개를 돌렸다. 확실히 홍보 영상만 보면 그렇긴 했다.
“아, 방송용으로 쓰시게요?”
“아… 그것보다는 형이랑 할까 해서요.”
정확힌 형이 그의 집에 이걸 가져온 것을 어쩌다 봤다. 어째선지 하자고 말을 꺼내지 않아서 하진 못했다만.
“…와.”
그사이 레드바의 표정이 변했다. 마치 흥미진진한 무언가를 본 것 같기도 하고 이 세상 발언이 아닌 것을 들은 자의 안색 같기도 하다.
“그, 이건…….”
레드바는 한참을 끙끙거렸다. 뭔가 말하고 싶은데 차마 말하지 못하겠는 심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결국 레드바는 말하는 걸 포기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행님의 형님께 명복을…….”
그렇게 끔찍한 게임인가? 홍보 영상만 보고 ‘상당히 취지가 좋다.’라고 생각했던 은우의 얼굴이 묘해졌다.
“별로 추천하지 않습니까?”
“어… 친한 사이라면 해 볼 만합니다. 안 친한 사이라도 이 게임을 한 후면 굉장히 솔직해질 거라……. 대신 후자의 경우 역효과도 날 수 있긴 하죠.”
은우는 레드바의 조언에 잠시 그와 형 사이를 되짚어 보았다. 그들은 과연 친한 걸까, 친하지 않은 걸까.
그는 숙고 끝에 그 게임을 구매했다. 형이랑 해도 좋고, 할 수 없다면 방송용으로 쓰면 그만이었다.
“그럼 여기서 살 건 다 산 건가요?”
“그런 것 같습니다.”
이제 다시 본 궤도로 돌아가 장식품을 고를 차례다. 레드바가 잘 모르는 은우를 대신해 이리저리 고민해 주기 시작했다.
“화분은 어떠십니까? 물 주는 게 귀찮으시면 조화도 괜찮고, 아니면 자동으로 물 주는 화분도 있으니까요.”
“괜찮은 것 같습니다.”
애당초 그는 꾸미는 것에 별다른 취향이랄 게 없다. 단지 광공 소리를 벗어나고자 사고 있는 거지.
은우는 레드바의 추천에 따라 자잘한 화분과 장식들을 구매했다. 유일하게 취향이라 할 만한 건 재질 정도라, 대개 유리 혹은 금속 재질의 장식이었다.
“커어. 행님, 취향 엄청 고풍스러우시네요.”
“별거 아닙니다.”
그래도 장식품을 열댓 개나 샀다. 이 정도면 광공은 탈출일 것이다, 아마.
은우는 집에 생겨날 장식들을 상상하며 나름 흡족해졌다.
“그보다 커피 드시겠습니까?”
“앗, 사 주시는 거?”
“네. 도와주셨으니까.”
마침 저번엔 들르지 못했던 카페도 있다. 은우는 레드바와 함께 그 카페로 올라갔다.
“나, 운전면허 딸까 봐.”
“면허?”
앞쪽에서 주문하던 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그들 귀를 때렸다. 우연의 일치로 그들의 수다는 은우가 퍽 관심 가질 주제였다.
운전면허라니. 안 그래도 VAV 하면서 그가 따 보려 했던 것 아닌가.
“…레드바 님도 면허 있으십니까?”
“앗, 아뇽.”
레드바가 팔짱을 끼더니 볼을 슬슬 긁었다. 입술 늘어진 꼴이 퍽 곤란한 쪽에 가까워 보인다.
“그, 누나 말로는 기능이랑 실기야 요즘 VR이 오지니까 그걸로 연습하면 충분히 딸 수 있긴 한데요…….”
그의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줄었다.
“저는 그, 필기가… 너무 어려워서.”
필기? 은우는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주문대를 조작하려던 손을 멈췄다.
필기가 있다는 건 알았는데, 생각 자체는 안 하고 있었다. 사람이 태양이나 구름을 일상생활에 잘 언급하지 않는 것처럼, ‘너무 당연해서 놓치고 있었다’에 가까웠다.
“제가 기억하기론 일단 흔히 쓰이는 교통법규 다 외워야 한다고 보면 됩니다. 그리고…….”
그리고 은우가 잠깐 당황한 사이 레드바가 좔좔 필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결론은 공부, 또 공부였다.
공부하기 싫어서 밖으로 나왔던 이의 머리 위로 천벌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