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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자도 방송할 수 있습니다-145화 (145/233)

145화

사람의 마음을 눈으로 읽는다는 것에 그녀는 상당히 회의적인 사람이었다. 물론 눈에 물기가 차면 슬퍼 보이고 눈매가 곱게 휘어져 있으면 기분 좋아 보이긴 할 거다.

근데 눈동자만 보고 그 사람이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렇지만 그 순간만은, 그 순간만큼은 알 수 있었다. 어쩌면 단순히 ‘안다’를 넘어서 뇌에 쑤셔 박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옛 중세의, 오래 항해했던 배에 타면 독한 럼주 향과 물기에 젖어 썩어 가는 나무 내음이 나겠지.

수십 번을 휘둘러지고 적을 처리한 검에는 날 서린 예기와 닦아 내고 갈아 내도 빠지지 않는 핏빛이 있을 것이고.

사람의 입을 타고 전해지는 이야기는 갈수록 허풍과 과장이 덧대어지며 더는 최초의 것과 같지 않는 문장의 나열일 뿐일 테다.

그런 것이었다. 그 눈동자는 그런 부류의 것이었다. 세월이 흐르면 묵은 떼가 남는 것처럼, 너무도 당연하게 감정을 흘려보냈다.

하염없는 슬픔과 고독, 사무친 외로움.

공감과 이해가 아닌 납득과 순응을 강요하는 아픔.

“…가.”

그리고 그 속을 볼품없는 목소리가 거닐었다. 숨소리에 가까운 한 글자가 유독 선명했다.

가지 마. 참 선명한데 그녀의 머리는 상반되게 해석했다.

“말해. 말하면 들어 줄 테니까.”

서은우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눈으로 말했다.

그래도 떠나갈 거잖아.

희수는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마저 피하면 더는 저 눈을 봐 줄 사람이 없었다.

찾아오지 않는 부모님, 떠나간 친구들, 선생으로서의 관심만 주는 교사들. 적어도 너를 봐 줄 사람은 같은 자리에 있는 그녀밖에 없다.

“들어 줄 테니까 말하라고.”

검은 눈동자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녀는 결국 잡았던 멱살을 놓았다. 서은우는 그대로 무너졌다. 무릎을 꿇다만 자세로 어정쩡하게 널브러진 꼴이 참 한심했다.

“존나 답답한 새끼.”

그리고 결국 못 놓아서 이 장단에 맞춰 주는 그녀도 한심했다.

희수는 그 옆에 털썩 앉았다. 바닥을 적신 빗물이 그녀의 옷도 적셨지만, 개 같은 친구 새끼가 자리를 옮겨 줄 것 같진 않았다. 우산이 그녀와 그녀보다 좀 더 큰 머저리를 가려 주었다.

“누가 이기나 해 보자.”

빗소리가, 비가, 빗물이.

“네가 입 여는 게 빠른지, 해 져서 부모님들이 오시는 게 빠른지 함 보자고.”

시끄러운 고요가, 소란스러운 적요가, 젖어서 스러지는 평화가.

“좆 같은 새끼, 내가 질 것 같냐?”

비가 더 강해졌다. 우산이 채 가리지 못한 신발 끝과 양말의 색이 더욱 진해졌다. 튄 물방울들이 그들의 팔다리를 차갑게 식혔다.

손을 뻗으면 세찬 빗방울이 피부를 때렸다. 늦은 여름 장마였다. 후덥지근하던 공기는 계속해서 빗물에 노출되니 얼음보다 더한 냉기를 가져온다.

“가.”

“입 열 때까지 안 가 새끼야.”

“…가.”

“안 간다고 좆 같은 놈아.”

아, 슬슬 춥다. 희수는 팔짱을 낀 채 팔뚝을 문질렀다.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서은우한테 붙을 생각은 안 했다. 솔직히 비에 젖은 생쥐 꼴이라서 붙었다가 옷만 더 젖을 것 같기도 했다.

“왜, 안 가는데.”

웅크린 채로 묻는 말에 그녀는 잠깐 고민했다. 역시 답은 하나뿐이었다.

“더럽고 좆 같아도 일단 친구니까.”

끊기기 직전이지만, 지금 마지막 기회를 주고 있으니까 아직은 친구다. 아직은.

“떠날 거잖아.”

“네가 계속 그따위로 굴면 당연히 떠나지, 멍청한 새끼야.”

그녀는 발끈해서 쏘아붙이곤 한숨을 흘렸다. 최대한 나직하게 발음한 목소리가 슬슬 파래지는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근데 네가 이따위로 구는 거에 이유가 있으면, 내가 진짜 진짜 관대하게 봐준다.”

“…뭘 봐줘.”

“남아 주겠다고.”

이 새끼랑 만난 지 9년 다 되어 가나. 그 세월을 걸고 하는 말이었다.

이 정도면 정말 9년 세월값 했다. 희수는 자신의 관대함에 고개를 주억였다. 정말 자비로운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철저히 중학교 3학년(만 15세)의 뇌에 의거한 생각이었다.

“…너도 결국 떠날 거야.”

“아, 시발 놈아! 아니라고.”

그녀는 멱살을 다시 잡고 싶어졌다. 자조하는 모양새로 이어지는 말만 아니었어도 그랬을 거다.

“날 배신하고 가 버릴 거야.”

배신을 말하는 목소리는 여리지 않았다. 법 시간에 봤던 판사의 법봉 소리처럼 맑았고, 구형하던 검사처럼 단호했다. 마치 스스로에게 판결을 내리는 것 같았다.

“또다시, 혼자가 될 거야.”

빗줄기가 사그라들었는지, 아니면 그녀의 무의식이 빗소리를 밀어 버렸는지 모르겠다. 또렷하게 들리는 한 마디가 절절함 하나 없이 담담하게 현실을 고했다.

그녀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라이 아냐. 네가 뭣 하러 널 배신하냐?”

신의 하면 그녀고, 의리 하면 또 그녀였다. 물론 선 안에 들어온 사람들 한정이긴 한데, 일단 서은우는 선 안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 감히 배신의 오명을 씌워? 이놈의 자식을 조사 버려야 마땅하다.

“널 배신하면 금이 나오냐, 은이 나오냐? 뭐 얻을 게 있다고 배신해. 뒤늦은 중2병 왔냐?”

“얻는다면?”

“뭐?”

“얻는다면, 그땐 돌아설 거잖아.”

상식적으로 중학교 꼬맹이 뒤통수 친다고 얻을 게 있을 리 없다. 하물며 서은우는 돈 없는 중학생이었다.

잘생기고 운동을 잘해 봤자 경계심 많은 성격 덕에 친구도 없었다. 배신해 봤자 그녀가 얻는 건 없고 서은우 쪽만 잃는 게 많단 소리다.

“뭐래.”

그래서 그녀는 그리 지껄였다. 그러곤 빡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너는 내가 배신할 새끼로 보였냐?”

지금까지 해 준 게 얼만데. 그들 사이의 믿음이 이따위일 줄 몰랐다. 지금껏 당한 무시보다 쟤가 그따위로 생각하고 있었단 게 제일 빡쳤다.

결국 희수는 머저리의 멱살을 다시 잡았다.

“야, 시발 놈아. 좆 같아서 내가 때려치우려다가 네가 갑자기 이렇게 굴 새끼가 아닌 거 알고, 그럼에도 이렇게 생각하게 된 원인이 있을 테니까 진짜 진짜 진짜 마지막으로 봐준다.”

그럼에도 봐준다고 말한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네가 내 친구가 되어 준 게 내가 가진 최고의 행운일 거야.」

희수에겐 그녀를 편하게 만들어 주는 친구가 많았지만, 서은우 저 새끼한테는 그런 친구가 그녀밖에 없었다. 그런 녀석을 버리면 그녀는 찝찝해질 것이다.

“절대 안 돌아설게.”

아니, 그게 아니다.

쉬는 시간에 종종 마주칠 때마다 장난치고, 남매처럼 싸우다가도 다시 화해하고, 힘쓸 일 생기면 부려 먹은 다음 대가 안 줬다고 왁왁거리는 거 비웃고, 성별이 달라도 말이 잘 통하고, 심심할 때 연락해서 놀기 좋던 녀석이 사라지면.

이유도 알지 못하고 그냥 인연이 끊어지면.

그녀는 많이 아쉬울 것이다.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미련이 남을 거다.

“네 목에 억만금이 걸려도 배신 안 친다.”

그래서였다. 여기에 남아 있는 것도, 이 말을 하는 것도. 그래서였다.

멱살 잡힌 나머지 들려진 고개 속 까만 눈동자가 빗물을 흘렸다. 아마도 빗물이었을 거다.

“그러니까 내가 배신할 거라고 생각하지도 마. 니가 그따위로 생각하는 거에 나야말로 배신감 드니까.”

희수는 진짜 개 같은 친구놈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 모지리 같았다.

“억만금이 걸려 있어도?”

“그래.”

“누가 탐내서 날 죽이려 들어도?”

이 새끼가 만화를 너무 많이 봤네. 애초에 사람 모가지에 억만금이 어떻게 걸린다고. 아니면 뭐, 재벌가 숨겨진 아들내미라도 되냐? 사생아? 쩔게 오지네.

희수는 혀를 차면서도 긍정해 주었다.

“그래, 시발아. 안 도망치고 안 배신하고 내가 같이 뒈져 준다.”

만에 하나 억만금이 걸리고 같이 있을 때 그 돈을 노리는 살인마가 온다면, 그녀가 바라지 않아도 나란히 죽게 될 거다. 그녀보다 월등한 능력치의 저 새끼가 살해당하는 판에 약골인 그녀가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그러니 입에 발린 말 하나쯤은 어렵지 않다.

“내가 같이 죽어 준다고, 개새끼야.”

사람 하나를 구하는 데 그깟 말, 하나도 아깝지 않다.

세상을 부술 것처럼 내리던 비가 차츰차츰 멎었다. 일어서느라 뒤로 넘어간 투명 우산 위로 바닥과 하늘이 동시에 비쳤다.

무지개가 걸려 있었다.

▣ 145. 단 한 번도 감사하지 않았던

“사생아는 개뿔.”

재벌가 사생아면 차라리 유산 이어받을 가능성이라도 있지. 알아보니 그냥 노답인 가족이었다.

“사생아?”

“…아니에요. 헛소리였어요.”

그녀는 눈을 깜빡거리며 부정했다.

그래도 그 새끼, 스트리머 일 시작하고 나서는 많이 사람 됐다. 그 전에는 막말로 비바람 부는 바다에 하체를 담근 사람 같았는데.

“확실히 기억나는 건 저한테 배신하지 말라고, 혼자 죽기 싫다고 한 것뿐이네요.”

문득 손이 살짝 저렸다. 오직 그녀만이 마지막 희망이라는 듯 절박하게 붙잡아 오던 과거의 손이 아직 그녀의 오른손을 잡고 있는 것 같았다.

그에 희수는 손을 잼잼 쥐었다 폈다. 그날의 그녀가 미쳐 보지 못했던, 깨진 유리창의 건너편은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짐작도 가지 않기에 대신 밀크티를 쭈욱 들이켰다. 향이고 자시고 가라앉은 속부터 차가움으로 채워야 살 것 같았다.

“…혼자 죽어요? 호, 혹시 자살 시도라도 있었나요?”

서은우의 창백한 형이 덜덜 떨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만 말하면 그렇게 들릴 법도 하다.

“그건 아닐 거예요. 다들 자길 배신할 거라고, 그래서 혼자가 될 거라고 한 거니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됐건 그날 이후로 그녀는 녀석과 멀어지는 것도, 녀석에게 너무 간섭하는 것도 그만두었다. 멀어져도, 너무 가까워져도 죽어 버릴 것 같아서다.

대신 그냥 편을 들어 줬다. 사람 돼라고 잔소리도 좀 해 주고, 죽지 말라고 말 좀 걸어 주고, 그렇게라도.

“더 궁금한 거 있어요?”

오랜만에 그 시절을 떠올렸더니 기분이 다운됐다. 희수는 서은우의 제발 꺼져 줬으면 하는 형이 말을 잇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외에 기억나는 건 걔가 스트레스 때문에 기억이 날아가기라도 한 건지 시험지 전부 백지로 낸 거랑, 고등학교 때 유도부에서 선배 다섯 명 사지 아작 낸 거? 그것밖에 없는데.”

“…네? 유도부요? 사지를 아작?”

이것도 몰랐다니 참담하다. 희수는 서은우의 답 없는 형을 보며 밀크티를 더 들이켰다. 머리가 찡했지만, 답답한 것보단 나았다.

“그건 본인한테 듣든가. 저도 잘 몰라요.”

그녀도 걔가 날뛴다는 소리 듣고 급하게 달려가 말린 기억밖에 없다. 말리지 않았다면 그중 죽는 놈 하나 나왔을 거란 것도.

그렇지만 먼저 덤빈 새끼가 잘못 아닌가? 쪽수 믿고 후배 괴롭히는 일진 놈들은 뒈져 버리라지.

“오늘 일은…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하지 말래도 감사하는 건 사람 열받으라는 고의적 엿 먹이기인가?

희수는 삐뚜름한 얼굴로 의자에 몸을 완전히 기댔다. 아무래도 좋다.

“감사하면 어서 가세요. 불편하니까.”

이제 영원히 보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녀가 저 면상을 다시 보는 날은 은우 그 새끼가 저 못 미더운 형님 놈한테 엿 먹을 때뿐일 테니까.

* * *

[…해서 이렇게 말해 줬다.]

“…그래.”

은우는 희수가 알려 주는, 그녀가 형에게 말해 줬다던 일들을 곱씹었다.

오현 관장은 뒤에서 오늘 일을 복기하고 있기에 더 이상 신경 써 줄 필요 없다. 형은… 먼저 연락할 때까지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게 나을 것 같고.

다만, 그래.

「그래, 시발아. 안 도망치고 안 배신하고 내가 같이 뒈져 준다. 같이 죽어 준다고, 개새끼야. 그러니 좆 같은 의심은 관둬. 한 번만 더 의심하면 그땐 네 명치 후드려 팰 거니까.」

과거를 곱씹다 보니 비가 멎은 하늘 아래서 손을 뻗던 소녀가 대신 눈앞에 어른거렸다.

「일어나. 집에 가자.」

뻗어진 작은 손, 바람결에 흩날리던 머리카락, 그를 똑바로 응시하던 검은 눈까지.

「정말로, 같이 죽어 줄 거야?」

믿지는 않았다. 고작 한 마디만으로 신뢰감을 쌓기엔 그는 너무 많은 것을 겪었다.

「지금 간다고 말 안 하면 거절할 거임.」

그러나 그 이상으로 간절했다.

그 당시의 그는 삶의 전반적인 부분들을 전부 잊은 채 혼자 방황하고 있었으니. 모든 것이 의심 가는 상황에서 가장 끈질기게, 가장 가깝게 다가와 준 소녀는 일종의 희망이었다. 혹은 빛이었다.

그게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한번 믿어 보자 다짐할 정도로.

「약속했어.」

누가 늦었다 말할까 봐 냉큼 손을 잡았다. 그러자 한 조각의 온기가 차게 식은 피부 위로 떨어졌다. 혼란과 처참한 슬픔만이 가득한 세계에 처음 닿았던 온기였다.

그가 죽어 가던 날에 가장 갈구했던 것이었다.

「징그러운 새끼. 그래, 약속했다.」

「정말로 약속했어…….」

지금 와 돌아보면 참 드라마틱한 날이었다. 방금 전까지 장대비가 왔다는 게 의심 갈 정도로 빠르게 개인 구름도, 일곱 갈래로 갈라져 부서지던 햇살도.

「옛다, 이거나 처먹어라.」

전쟁을 자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가 감정을 추스르지 못할 때, 그것을 정확히 눈치챈 너도.

「단 거 먹고 정신이나 차려.」

만약 네가 조금만 늦었다면 그땐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테지. 여러모로 많은 우연이 겹쳤다.

은우는 희수가 마지막으로 던져 줬던 초콜릿과 그것을 베어 물었을 때 나던 맛을 떠올렸다. 그건, 정말로 달았다.

[맞다. 갑자기 궁금해진 건데, 넌 연애 안 하냐?]

상념을 깨고 희수가 다짜고짜 물어 왔다. 은우는 뜬금없는 소리에 눈썹만 치켜들었다. 어른거리던 과거의 잔상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직장도 해결됐겠다, 가족 문제도 해결됐겠다. 보통은 연애에 눈 돌리잖아.]

“…내가 보통에 속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속하고 싶었던 거 아님?]

그건 그렇지만, 되고 싶다고 해서 되면 그가 그렇게 고생할 일도 없었을 거다.

무엇보다 오늘 일 덕분에 한동안 형 쪽에 신경 써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여자가 별로면 남자 소개해 주랴?]

“관심 없어.”

기실 그게 아니더라도 여자고 남자고, 연애란 것에 관심 자체가 없다. 애당초 그 자신의 감정조차 해석하지 못해 쩔쩔 매는 자에게 연애가 가당키나 한가?

사랑의 기본 형태라 불리는 스토르게storge, 필리아Philia, 아가페Agape를 모르는 사람이, 똑같이 기본 형태 중 하나인 에로스Eros를 알 리 없다. 느낀다 한들 그것을 정확히 인지하고 정상적으로 이어 나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적어도 지금은 그래.”

개선돼 가는 형과의 관계만으로도 그는 많이 벅찼다. 좀 더 추가해서, 얼굴 공개한 뒤로 유난히 친근해진 스트리머들과의 교분도 그렇다.

그것들을 다 배운 뒤라면 모를까, 지금 섣불리 색다른 인연을 맺고 싶진 않다.

[뭐, 그럴 수 있지.]

그가 단칼에 잘라 내자 친구는 손쉽게 물러났다.

[그래도 혼자 죽기 싫으면 연애에 관심 있어야 할걸.]

그녀는 다만,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충고를 건넸다.

[나도 네가 연애할 거라곤 상상 안 해. 솔직히 안 해도 내 알 바 아니고. 요즘 세상에 독신주의자가 한둘이냐. 근데 확률적으로 친구보단 애인이나 배우자가 죽을 당시 같이 있어 줄 가능성이 높잖아.]

형 때문에 과거를 되짚을 때 사고가 저기까지 닿았나. 은우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런 의미로 같이 죽어 달라고 한 게 아닌데.”

[말 잘했다. 그럼 그런 의미가 아니면 뭐였냐? 아니다, 애초에 너 그때 왜 그랬는지부터 말해 봐라.]

그는 갑자기 그 당시 일을 캐묻는 친구를 보며 눈동자를 굴렸다. 그렇게 말하면 또 할 말이 없다.

“…왜 이제 와서?”

[이제 와서는 개뿔, 처음부터 궁금했어. 그냥 네가 말하기 싫어할 것 같아서 안 물어본 거지.]

그래, 그럴 것 같았다. 4년간 묻어 놨다고 해서 궁금하지 않았던 아니겠지.

그렇지만 이제 와서 갑자기 물어봐도 답을 짜내기가 어렵다.

은우는 그때도 발설하지 않았던 과거를 또 한 번 삼켰다. 친구가 못 믿어 줄 거라고 생각해서는 아니었다. 단지 갑자기 말하기엔 각오도, 정리도 안 됐다.

해서 과거를 변명으로 제거하면 댈 만한 이유가 사라진다. 그의 머리가 필사적으로 답을 지어냈다.

“배신… 당하기 싫다는 의미에 더 가깝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전생의 그는, 그리고 지금조차도 배신에 상당히 신경을 썼다. 정확히 따지자면 그것으로 인해 혼자 남게 되는 걸 싫어하는 거지만.

겨우겨우 대답하니 전화기 너머로 허, 하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에 한해선 정말 면목없다. 은우는 괜히 시선을 돌리며 목덜미만 쓸었다.

[아니, 개새끼야. 그거야 당연하지. 배신당해서 혼자 남기 싫다는 게 배신당하기 싫다는 거랑 뭐가 다른데.]

“그런가…….”

[내 말은, 내가 왜 배신할 거라 생각한 거였냐고.]

그땐… 기억이 없었으니 그냥 다 경계했을 뿐이다. 기억이 있었다면 희수는 믿었겠지.

“그때, 기억이 백지가 돼서.”

[오오냐. 기억이 날아갔다? 그럼 멀쩡하게 잘 살던 새끼 기억이 왜 사라지고, 기억이 사라졌는데 배신에는 왜 트라우마가 생겼을까?]

“…미안.”

[이딴 걸 친구라고, 확 그냥. 절교해 버릴까 보다.]

은우는 협박으로만 그칠 절교 타령을 묵묵히 들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희수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으리라. 형이 일종의 안식을 제공해 줬다면, 희수는 그 안식을 찾을 때까지 그를 여기에 발붙이게 해 준 밧줄이었다.

구원이라고 하면 거창하나, 달리 부를 이유도 없으리라.

“…그럼 넌 무슨 의미로 이해하고 죽어 주겠다고 했는데?”

[나? 나는… 염병, 네가 재벌가 숨겨진 아들내민 줄 알았지. 그래서 킬러라도 오는 줄 알았다.]

“뭐?”

은우는 상상도 못 한 이유에 입가를 손으로 꾹 눌렀다. 다른 것도 아니고 재벌가라니. 헛웃음이 나온다.

더 우스운 건 그 오해 덕분에 그는 이 세상에 적응할 마지막 기회를 받았단 것이다.

[아니, 애가 이유 없이 쪼그라들었는데 거기서 내가 뭔 생각을 하겠냐?]

“그건 그렇네.”

[좆 같은 새끼, 말해 주고 웃든가. 열받네.]

그는 희수의 말을 들으며 희게 웃었다. 네 말이 다 맞다.

“…항상 고맙다.”

[고마운 거 알면 잘하자.]

그래서 원수 같이 굴어도 미워할 수가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김희수가 서은우의 친구가 되어 준 건 그가 가질 수 있던 최고의 행운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괜찮다 싶음 말해 주고, 개자식아.]

“…응.”

해서, 네가 친구란 사실에 단 한 번도 감사하지 않았던 적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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