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아, 그래서 어디까지 말했더라.”
“나까진 그럴 필요 없다고.”
“그래, 거기.”
건우는 입안에 있던 음식물들을 삼켰다. 매콤해서 그런지 혀에 침이 고였다. 젓가락은 얼마 남지 않은 고기 더미에서 적당한 크기의 닭갈비를 찾아 헤매고 있다.
“봉사 좋지. 아예 그걸 직업으로 삼는 분들은 완전 존경스럽고.”
“그렇지.”
“근데… 존경스러운 것과 별개로 그게 쉽겠어? 객관적으로 유기 동물보호소 같은 데는 돈을 벌 수가 없잖아. 지금 시대는 돈이 없으면 사는 게 고달픈 시대고.”
은우는 그 말에 눈을 껌뻑였다.
부모님의 관심이 없다 뿐이지 돈이 없어서 고생한 적은 없다. 물론 성인이 되며 용돈이 끊긴 후에는 조금 걱정이 되긴 했는데… 그마저 방송을 시작함으로써 해결됐다.
실질적으로 그가 빈곤으로 고생한 적은 없단 소리다. 그래서 은우는 건우가 말하는 가난의 고달픔을 쉽게 떠올리지 못했다.
“그분들이 그렇게 일하는 걸 보면 최소한의 생계 유지는 된다는 거 아니야?”
“뭐… 그렇겠지?”
“그럼 괜찮지 않아?”
“으음…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하지. 너, 유기 동물 보호하는 걸로 보람을 느껴? 막, 먹는 거 줄이고 사고 싶은 거 안 사 가면서 동물들을 평생 책임질 수 있어? 비난하는 게 아니라 그냥 물어보는 거야.”
그는 형의 질문을 듣고 잠시 고민해 보았다. 먹는 것, 입는 것, 삶의 질 따위를 줄이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다. 한때 해 보았던 것들이니까.
그렇지만 그게 오롯이 타인에게 헌신을 하기 위해서라면…….
“…할 수는 있겠지만, 하고 싶진 않아.”
희수나 형 정도라면 모를까, 동물을 대상으로는 굳이 그러고 싶지 않다. 박애주의자도 아닌 그가 지성도 못 갖춘 동물을 위해 희생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그치? 나도 그럴 자신 없어. 그리고 우리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같은 입장일 거고.”
은우는 양배추 사이에 끼어 있던 우동 사리 쪼가리를 들었다. 건우가 그것을 보곤 고기와 사리를 슬쩍 추가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대충 이런 거야. 그분들은 분명 대단하고 존경스럽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 수는 없고, 그렇게 살지도 않아. 그건 너무 힘드니까. 그러니까 그분들을 보고 ‘아, 내가 너무 안이하게 사는 건 아닐까?’ 이런 식의 고민은 할 필요 없다고 생각해. 그분들이 대단한 거지 우리가 못난 게 아니니까.”
“…이해했어.”
그는 형의 설명을 이해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불만 비슷한 감정은 남았다. 여전히 이대로도 괜찮은가에 대한 질문은 해결되지 않았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껄쩍지근한 표정이네.”
“…그래?”
“평소가 1뚱이면 지금은 2뚱 정도?”
무슨 비유인지 잘 모르겠다. 은우는 노릇노릇 탄 떡을 씹었다.
“그냥, 이대로 가도 되나 싶어서.”
형의 설명으로 본인의 일에 대한 사명감이나 열정을 가지고 임하는 사람이 적다는 건 알았다. 그러나 여전히 의구심이 들었다. 이대로 계속 방송을 해도 될까 하는.
“처음엔 돈이 필요해서 시작했는데… 지금 와선 딱히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니까.”
통장에 쌓여 가는 돈은 점점 늘고 있는데, 정작 그가 돈 쓸 곳은 그다지 없다. 집은 이미 생겼고, 차? 관심이 생기긴 했지만, 그것을 꼭 사야 하느냐 물으면 그것도 아니다.
결국 돈을 목적으로 삼기엔 애매해져 버리는 것이다. 그는 돈의 필요성을 상대적으로 덜 느끼고 있으니까.
“치고받고 싶다는 것도 이젠 어느 정도 해소된 상태고.”
강함의 추구는 이미 포기한 상태거니와, 싸우고 싶어지면 그냥 게임 하면 그만이다. 방송을 켜지 않아도 충족시킬 수 있었다. 이 또한 의미가 없다.
“부럽다…….”
“뭐가.”
“돈 걱정 안 하는 거.”
부모님 집에 얹혀사는 덕에 적금을 넣을 수 있는 건우는 잠시 눈물을 훔쳤다.
얘가 나보다 더 잘 사네. 장하다, 내 동생.
“이게 아니고, 그러니까, 현타라도 온 모양이네.”
“뭐… 그렇게 볼 수도 있나.”
아니, 건우가 보기엔 빼도 박도 못하게 현타(현자 타임)였다. 이룰 거 다 이루니까 몰려오는 허무함 같은 거.
“음, 근데 내가 보기엔 괜찮은 것 같은데? 아니면 방송 때려치우고 싶은 이유 있어? 막 스트레스 받는 부분이라거나.”
건우의 얼굴이 심각해지고 은우는 모호해졌다. 스트레스 받는 부분이라.
“소재 찾기.”
“…그래, 그건 그럴 만하지. 그것 외엔? 방송인들 보면 악플 때문에 고생이 많다던데.”
“악플은 그다지?”
남의 질시나 험담 따위 익숙하다. 수면으로 떠오르면 귀찮아지니까 싫어할 뿐이지, 지금처럼 채널에서 알아서 관리해 주면 별 신경 안 쓰인다. 거기에 무엇보다도…….
“칼 들고 내 앞에서 설치거나 음식에 독 타거나, 협잡 부려서 전장 한가운데 떨구진 않잖아.”
전생의 열등감 넘치는 녀석들에 비하면 텍스트에 불과한 악플은 가소롭다.
“이걸 좋게 받아들여야 할지 나쁘게 받아들여야 할지…….”
은우의 말에 건우가 역풍을 맞았다.
그, 전생이 굉장히 험했다는 건 아는데… 덕분에 악플을 신경 안 쓰는 건 다행인데… 아니, 뭔가 좀… 아니지 않아, 이건?
“딱히 스트레스 받는 건 없는 것 같은데. 기껏해야 유행어 공부하는 것 정도?”
“…와, 부럽다.”
스트레스 없고─완전히 없진 않겠지만─돈은 많이 받는다니. 상대가 은우만 아니었어도 복에 겨운 소리 한다며 책상 엎었을 거다.
건우는 그의 조그만 월급을 떠올렸다가 그만 고개를 저었다.
“그럼 그냥 해.”
“…그래도 될까?”
“‘그래도 될까’가 아니라, 돼.”
그는 뺨을 긁적였다. 아무래도 그의 동생은 직업이란 것에 굉장히 거창한 의미를 두는 모양이다. 그거 아닌데.
“은우야, 직업이란 말 들으면 되게 커 보이지? 무겁고?”
“그렇지……? 어, 그런 것 같아.”
그럴 줄 알았다.
“근데 은우야, 직업이란 게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야. 직업은 그냥 일종의 수단이야.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게 해 주는 수단.”
그는 동생의 아리송한 표정을 보며 말을 덧붙일 필요성을 느꼈다.
“나를 예시로 들어 보면, 나는 특별히 갖고 싶은 직업은 없어. 근데 하고 싶은 일은 꽤 있거든? 여기 오면서 말했지만, 강아지도 키우고 싶고, 여행도 가고 싶어. 근데 이것들을 이루려면 돈이 필요하잖아.”
“아.”
어딘가 깨달은 얼굴을 하는 걸 보니까 단박에 이해한 모양이다. 동생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머리 좋다.
“그래, 감 잡히지? 직업이란 건 그런 의미에서 수단인 거야. 내가, 네가 하고 싶은 걸 이루기 위한 수단. 당장 하고 싶은 게 없을 수도 있지만, 그게 언제 생길지 어떻게 알아? 그것을 위한 대비라고 생각해 봐.”
건우는 목이 타는 느낌에 음료로 입을 축였다.
“가끔 직업과 하고 싶은 게 일치하는 사람들이 있긴 한데… 그건 그 사람들이 운이 좋은 거지, 네가 막 잘못하고 그런 게 아니야. 네가 아까 네 입으로 말했잖아. 하고 싶은 게 뭔지 모르겠다고.”
본인이 하고 싶은 게 뭔지 모르는데 어떻게 하고 싶은 일과 직업이 일치할 수 있을까?
“물론 하고 싶은 걸 찾기 위해서 이것저것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근데 그걸 시도하는 동안 네 삶은? 생계는? 결국 네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돈은 필요해. 그래서 사람들이 직장을 가지는 거고.”
건우는 그의 대학교 교양 과목을 담당하던 교수님께 속으로 절을 올렸다.
조별 과제에서 B+인 점수, C+인 애랑 바꾸어서 주셨지만. 정정 메일 보냈는데 읽씹하고 정정 기간 지나서 수정 불가 됐지만.
그래도 덕분에 동생에게 도움이 되고 있지 않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택한 직업이 네 적성에 맞지 않다고 해서 불행한 게 아니야. 돈만 보고 하는 일이라고 자괴감 가질 필요는 더더욱 없어. 어차피 세상 사람들 절반은 돈만 보고 일해. 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거나 하려면 돈이 필요하니까.”
“…그렇게 해도 되는 거야?”
“당연하지. 그렇다고 네가 방송을 대충 하는 건 아니잖아.”
“대충 하진 않지. 그건 예의가 아니니까.”
“그래, 그거면 됐어. 시청자들도 네가 방송에 막 미쳐 사는 걸 바라진 않을걸? 지금 정도가 딱 좋아.”
건우는 담담한 얼굴의 동생과 시선을 마주했다.
곰 같은 덩치와 화난 거 아닌가 싶은 표정 사이를 열심히 더듬어 보면 몸만 자란 애가 하나 보인다. 나이가 차서 민증도 받고 성인 인증도 받았지만, 여전히 어리숙하고 풋풋한 아이가.
“은우야, 넌 아직 어려. 이렇게 말하는 나도 어리긴 한데, 넌 진짜 어려.”
그게 참 슬프다가도, 그나마 어른이 되기 전에 손을 뻗을 수 있게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막 조급해할 필요도 없고 막 무게감 있게 생각할 필요도 없어. 하고 싶은 것, 원하는 것, 다 천천히 찾아도 돼.”
네가 어른으로 서려는 순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감사하다.
“이 삶은 이제 시작이니까.”
▣ 181. 이제 막 시작한
그들은 밥까지 야무지게 볶아 먹은 후 닭갈비 집을 나왔다. 며칠 동안 끙끙대던 고민이 어느 정도 해소돼서 그런가, 은우는 후련한 기분마저 들었다. 물론 찾아야 할 건 남아 있지만, 형 말대로 시간은 많으니까.
“시간 좀 남았네. 커피라도 마시자.”
“응.”
“…커피는 내가 산다.”
“해 봐.”
형의 선언에 은우는 찡그리듯 웃었다. 우월한 팔 길이와 힘 덕에 형을 제치고 밥값을 결제한 것이 방금 전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밥은 보통 생일인 사람이 내거든?”
“선물이라고 쳐.”
“이미 줬잖아, 이 자식아.”
“이것도 선물이라고 쳐.”
은우는 느긋하게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눈치 보던 형이 주문도 전에 점원에게 카드를 건네려 했다.
당연하지만 은우는 재빠르게 카드를 가로챘다.
“야!”
“이걸로 결제 부탁드립니다. 캐러멜 마끼아또랑, 형은 뭐.”
“내가 산다니까 진짜.”
“제일 비싼 거 시키기 전에 그냥 시켜.”
“환장하겠네.”
건우는 그의 여분의 카드로 결제를 시도했지만, 역시 그것도 빼앗겼다.
은우는 카드를 손가락 사이에서 빙글빙글 돌리며 주문을 재촉했다. 패배한 건 결국 형이었다. 소심한 반항으로 가장 싼 아메리카노를 시키긴 했지만 말이다.
카페에 자리가 없었으므로 그들은 그냥 회사까지 걸어가며 마시길 택했다. 도보에는 칙칙한 길을 조금이나 산뜻하게 만들어 줄 나무와 꽃들이 심어져 있다.
건우는 커피 잔을 매만지며 조심히 물었다.
“그, 질문이 있는데… 물어도 될까 모르겠네.”
“뭐?”
“그으, 저번에 네가 보여 준 책 있잖아. 거기서 나온 그 사람 말이야, 그, 그, 친구 같은 사람. 이름 안 적은 이유가 뭐야? 계속 떠오르더라고.”
“아.”
── 얘기구나. 은우는 목덜미를 긁적였다. 물어봐도 상관은 없지만, 뜬금없긴 하다.
그는 캐러멜 마끼아또를 홀짝이며 답했다.
“기억이 안 나서 어쩔 수 없었어.”
“거래로 줘서?”
“내 이름은 그렇고, 그 사람은 글쎄…….”
그의 전 이름이야 거래를 위해 넘겼으니 잊어버린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의 이름은 어째서 잊어버리게 된 걸까. 이 몸으로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분명 기억하고 있었는데.
대체 왜 그는 그 사람의 이름을 잊었지? 마치…….
“나처럼 거래라도 했나 보지.”
그 사람도 이름을 두고 거래를 한 것처럼.
“진짜?”
“…형, 나도 죽어서 몰라.”
“아… 그렇지.”
죽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그 사람의 이름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므로, 그 사람이 이름을 두고 무언갈 한 건 그가 죽은 이후일 것이다. 은우로서 알 방도가 없다는 말과 같다.
“…그 사람은 슬프겠네.”
“왜?”
“네가 죽었으니까.”
은우는 형의 말에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확실히, 그의 죽음이 유감스럽긴 했겠다. 그 사람 입장에서 그의 죽음은 그 자신을 죽여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의 소실을 뜻할 테니까. 별로 관심은 없지만.
“그 사람이랑… 살아 볼 생각 같은 건 안 했어?”
“글쎄. 해 본 적 없어.”
미운 정도 정이기에 그는 ──를 싫어하지 않았다. 나약한 일반인임에도 지인이라는 선 안에 넣어 줬다는 게 그들 사이를 증명한다. 사람들의 ‘친하다’라는 말을 부정하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은우는 그를 친한 지인 이상의 존재로 여길 수 없었다. 여기지 않았다.
아무렴, 은우는 그 자신을 장기 말처럼 쓰려는 이들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것이 선인이건 악인이건 간에.
“날 이용하려 한 사람이니까.”
──는 결국 그를 수단 삼아 자신의 소망─죽음─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상실을 두려워하는 그에게 상실을 주려고 했단 말이다.
물론 그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그가 망가진다거나 하진 않을 것이다. 옆에서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사라지면 허망하긴 할 테지만, 그 사람의 목적은 처음부터 알고 있던 바니까. 욕 몇 번 하고 말겠지.
그러나 그가 진정 불쾌한 점은, 그 사람이 그것을 끝까지 숨긴 점과 멋대로 그를 재단하고 평가한 끝에 빌붙은 점이었다. 심지어 그게 틀렸다는 걸 안 후에도 어떻게든 자기가 보고 싶은 부분만 보려 한 점도.
“…생각이 달라졌을 수도 있지.”
“음, 형. 그 사람의 목적은 죽음이었어. 죽음을 위한 조건이 태생신인 건 의아해지는 부분이지만, 어쨌거나 내 곁에 머문 이유는 내가 태생신으로 각성하길 기다린 거라고.”
은우는 달고 쓴 커피를 삼켰다. 쓴맛이 좀 더 강한 것 같다.
“만약 내가 그 사람의 목적을 눈치채지 못했다면 어땠을 것 같아? 내가 그 사람과 친해지지 않은 건 그 사람이 날 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여겨서인데.”
눈치채지 못했다면 일단 친해졌을 거다. 그만큼 그 사람은 그에게 잘도 다가왔으니까. 그리고 그는 혼자인 것이, 외로운 것이 싫었으니까.
“그 상태에서 만약 내가 태생신이 됐다면?”
“…….”
“생각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는 건 가능성에 불과해.”
그 사람은 지혜로웠고 재밌었으므로 친한 지인으로 여겼다. 그러나 근본적인 목적이 부딪쳤으므로 좋게 봐 줄 수는 없다. 그뿐이었다.
은우가 그 사람의 목적을 알면서도 외면한 것도, 그 사람을 두고 죽음을 망설이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에게 있어 그 사람은 끝까지 이기적인 지인에 불과하다.
“…그래.”
“그 사람이 불쌍해?”
“아니… 그것보다는…….”
형의 손이 커피 잔을 더듬었다.
“뭔가 더 있지 않을까 싶었거든. 네겐 불쾌한 말이겠지만…….”
은우는 형의 말에 턱을 괴었다. 어차피 전(前) 세계의 일이고 더는 연관될 일 없으니 굳이 생각하지 않았지만… 형은 성격이 성격이니까 신경 쓰였을 수도 있겠다.
“왜, 일단 죽음의 조건이 태생신이라면 그… 네가 죽인 그 괴물도 있잖아.”
“…그렇지.”
“왜 그 괴물에게 가지 않은 걸까?”
은우는 목덜미를 쓸었다.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지 단서를 찾는 솜씨가 제법이다. 물론 저건 쉬운 부분이긴 하지만.
“갈 수 없는 걸지도 모르지.”
“죽지 못하는 몸이라고 했잖아.”
“그건 내가 들은 부분이지 목격한 부분이 아니야, 형.”
온갖 신과 성직자를 봤던 시점에서 은우가 아는 ‘죽지 못하는 것’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다.
“죽지 못하는 몸은 여러 개가 있어. 먼저, 어떤 상처를 입든 회복할 수 있는 몸. 두 번째로, 상처 자체를 입지 않는 몸. 죽을 수 있으나 다른 몸에서 깨어날 수도 있고, 시간을 두고 부활하는 형식일 수도 있지.”
마지막으로, 팔다리가 잘리고 내장이 찢긴 상태 그대로 목숨만 붙어 있는 형태일 수도 있다. 몇 년이고 몇 십 년이고 그렇게.
“그 사람의 무력은 북부 일반 주민의 수준도 못 돼. 괴수신까지 다다를 수 없어. 정확힌 다다르지 못한 거겠지.”
재생하는 형식이거나 부활하는 형식이라면 몬스터들에게 먹히든 말든 야금야금 뚫고 갈 수라도 있었을 터. 그럼에도 그 사람은 그러지 않았고, 그건 결국 그의 ‘죽지 않는 몸’이란 게 그리 써먹을 수 없음을 뜻한다.
어쩌면 그냥 용기가 없는 걸 수도 있지만.
“괴수신은 또 제 둥지를 떠날 수 없었어. 신이지만 근본이 구울인 이상 베낄 게 필요했으니까. 내가 가기 전까지 한낱 괴물에 불과했던 걸 생각하면, 우리가 가지만 않았어도 계속 그런 형태였겠지. 시간이 지나면 또 달라졌을 수 있지만.”
하여 괴수신은 그 사람의 선택지가 될 수 없다. 그 사람이 다른 태생신을 찾은 건 그래서일 거다.
또한 그에게 빌붙었던 건, 태생신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고, 만들어져도 이계신의 견제에 곧잘 살해당하기 때문일 테다. 아마 각성하는 대로 그에게 죽을 심산이었던 거겠지.
“그렇다면 이름이 사라진 건?”
“그건…….”
그 부분은 은우가 차마 짐작할 수 없다. 본인에게 듣지 않는 이상 영원히 모를 것이다.
“네가 그랬잖아. 태생신을 앞둔 네게 이계신이 좋은 일을 해 줄 리 없다고.”
“맞아.”
“난 그게 계속 걸려.”
형은 뺨을 긁적였다.
“소설을 너무 많이 읽어서 그런가… 그냥, 그 사람이 개입한 건 아닐까 싶고…….”
은우는 그 말을 듣고 눈을 껌뻑였다. 그 사람이 왜? 마지막까지 그가 ‘영웅(신)’이 되어 자신을 죽여 주길 바란 그 사람이 왜?
“만일 그렇다 해도…….”
그는 눈을 느리게 껌뻑였다.
문득 그의 머리를 스치는 것은, 구백구십만의 구더기가 들끓는 눈동자와 삶의 끝에서 희미하게 비쳤던 적안이다.
“달라지는 건 없어.”
그렇지만 그가 마지막에 가서 마음을 고쳐먹어 무언가를 했고, 그것으로 그가 이 기회를 얻었다 해서 무엇이 달라질까?
“내가 그에 대해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그는 단 한 번도 그 사람에게 다음 기회를 갖게 해 달라고 매달린 적 없거니와, 그건 이제 더는 돌아갈 수 없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과거에 불과하다.
은우는 지금이, 이제 막 시작한 이 삶이 더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