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자도 방송할 수 있습니다-186화 (186/233)

186화

〚그게 뭐라고 그렇게까지 매달리는 거야!〛

소년 형상의 나이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얼굴은 형편없이 일그러진 채였는데, 윽박지른 쪽치고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마나워딘이 널 부르고 있어!〛

〚그래, 프러데리. 그녀와 약속한 게 있잖니. 더 나은 나라를 만들겠다고. 혹시 그녀가 브란 왕처럼 변했을까 봐 그런 거야? 그런 거라면…….〛

나이안의 외침에 힘입어 샤를로테가 나섰다. 그녀는 특유의 다정한 말씨로 무언가에 몰두 중인 프러데리의 어깨를 잡았다. 무언가 부산스럽던 프러데리의 손이 그제야 멈췄다.

〚그런 게 아니야.〛

그녀의 목소리는 제법 말라 있었다. 단순히 감정이 부족하단 의미가 아니라, 실제로 물기 자체를 빼놓은 느낌이었다. 바싹 마른 입술은 그녀에게 가벼운 열이 감돌고 있음을 말해 준다.

〚단지,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프러데리의 차분한 응답에 나이안이 울컥했다.

〚그 인간이 대체 뭔데! 그 인간이 네게 해 준 게 뭐냐고!〛

〚나이안, 진정해라.〛

〚널 믿지 못하고 걷어찬 인간 따위가 뭐가 좋아서! 믿지 못하고 살길을 버린 건 그 인간이야! 네가 이러고 있을 이유가 없다고!〛

〚나이안…….〛

이그리트가 나이안을 말렸지만, 나이안의 눈에서 방울방울 떨어지는 전깃불만큼은 막지 못했다.

〚그 인간을 살리지 않아도 평화는 유지할 수 있어! 마나워딘… 마나워딘도 훌륭한 왕의 자질이 있잖아! 심지어 걘 네 의견도 존중하고 있다고! 브란 왕 때보다 훨씬 조건이 낫단 말이야!〛

나이안은 옷소매로 눈가를 닦아 냈다. 고함은 어느새 히끅거리는 간절함으로 바뀐 상태다.

〚이렇게 몸 버려 가면서 연구하지 말고, 그냥 마나워딘한테 가면 안 돼? 왜, 왜 귀네드 따위를, 네 호의를 거절한 귀네드의 왕 따위를 고치려 하는 건데.〛

그 절실함 때문일까. 프러데리는 결국 고개를 돌려 나이안을 마주했다. 안색이 좋지 않은 얼굴은 그 표정마저 서글픈 상태다.

〚그래서야. 마나워딘이 훌륭한 자질을 가진 왕이라서 내가 이러는 거야.〛

그녀는 나이안에게 다가서면서도 나머지 정령들에게 눈을 한 번씩 마주쳐 주었다. 걱정으로 애가 닳는 눈들이다.

〚브란 왕이 오랜 전쟁을 이끌어온 만큼 나와 마나워딘은 전쟁이라면 질색하는 중이지. 그러니까, 내가 꼭 그녀에게 가지 않더라도 마나워딘은 전쟁을 회피하는 쪽으로 나라를 다스릴 거야. 왕의 자질 또한 훌륭하니 곧 태평성대가 오지 않을까.〛

그 걱정이 오롯이 자신의 것임을 알아 프러데리는 상황에 맞지 않게 얄팍한 미소를 머금었다. 가슴 안쪽이 따스해져서 어쩔 수 없었다.

〚그렇지만 나이안, 태평성대라는 건 한 나라가 원한다고 이뤄지는 게 아니야. 마침 더베드는 침략하기 좋을 정도로 군사력이 약해진 상태고, 귀네드는 막 떠오르고 있는 나라지. 이대로 가면 전쟁이 터질 게 분명해.〛

〚그럼 더더욱 귀네드의 왕을 살려 주면 안 되는 거잖아! 그 인간이 배신할지 어떻게 알고!〛

프러데리는 나이안을 끌어안았다. 소년의 몸은 그녀보다 체구가 작아 얼마든지 감싸 안을 수 있다.

〚그러게. 그 남자가 배신할지 어떻게 알고 이렇게 열심히 치료하려 하는 걸까. 침략하지 않는다는 약속 따위, 전부 구두에 불과한데.〛

〚진짜, 멍청아…….〛

나이안의 쏟아지는 비난에도 프러데리는 굴하지 않았다. 그녀 스스로도 자각하고 있다는 양.

그것에 이그리트가 나섰다.

〚우리는 너의 그런 올곧음을 사랑한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비탄스럽구나. 단순히 평화를 위함이라면 그 남자를 치료하는 것만큼의 도박수는 많다. 나이안이 지적하고 네가 긍정한 것처럼.〛

상당히 조용한 어조였지만, 그 또한 만류였다. 프러데리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무언가를 재는 사람처럼.

〚대의? 대의라……. 사실 잘 모르겠어. 이게 대의를 위한 행동일까? 분명 난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이렇게 움직이고 있지만… 솔직히 대상이 그 남자만 아니었어도 이렇게까지 열성적일 것 같진 않거든. 정말 내 행동은 대의를 위한 걸까? 나는 정말 그 남자를 대의 때문에 살리려 하는 걸까?〛

〚그렇다면… 그 남자를 사랑하는 거니, 프러데리?〛

바람이 조용히 물었다. 그것에 프러데리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젓는 듯, 혹은 끄덕이는 듯 애매하게 목을 움직였다.

〚글쎄. 그런 거려나?〛

〚프러데리…….〛

〚그 남자랑 결혼하고 싶다는 건 확실히 아냐. 만약 천지가 개벽해서 그 남자가 나한테 입을 맞춘다고 해도 내 심장은 뛰지 않을걸? 단지, 단지 그런 거야.〛

그녀는 거기까지 말한 후 희게 웃었다.

〚그 남자가 보여 준 청사진이, 미래가, 달라질 가능성들이 너무 빛났어. 그것을 위해 달려 나가는 모습이 너무 눈부셨어.〛

더없이 처연하고,

〚그 과정을 전부 지켜보고, 전부 기억하고 있는데, 내가 그것이 망가지도록 어떻게 내버려 둘 수 있겠어?〛

더없이 밝게 빛나는 미소였다.

〚마음이 가는 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어. 그러니까 할 수밖에.〛

익숙한 연구실이 아닌, 새로운 장소를 배경으로 하던 기억이 저물었다.

▣ 186. 심으면 되지 않나요?

『흙의 정령, 탄

가호: 수호. 대지는 모든 것이 살아가는 터전이라.

흙벽을 만들어 모든 공격으로부터 지켜 낸다.』

【봉인… 그래서… 자주 못 써……. 세 번까지는… 어떻게 되겠지만… 그 이상은… 쉬어야 해……. 미안…….】

알림 창 뒤에서 탄이 우물쭈물 발언했다. 흔히 아메리카 원주민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깃털 장식과 뺨의 붉은 점토 무늬가 그의 특징이다.

은우는 탄이 준 가호와 설명을 머릿속에 구겨 넣으면서도, 방금 본 회상을 가만 더듬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었다.

배신까진 아니지만 버려진 건 동일하다. 한데 그런 대상을 위해 약 개발을 이어 나가다니? 심지어 꼭 그것만이 길이 아니라는 걸 알고도 그리 움직였다.

그 모든 걸 알고서도, 단순히 과정을 지켜보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헌신을 택한 연유는 대체 무엇인지.

납득할 수는 있으나 이해는 불가능하다.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는 목을 긁었다. 득시글한 벌레 사이로 선연히 빛났던 적안이 난데없이 떠올라 머리 한편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당신도 그런 이유에서 그랬나? 당신도 그런 마음으로 그런 선택을 했나?

대체 왜?

“일단 예상대로 이번 가호는 방어기네요.”

난 한 번도 당신에게 다음 기회를 달라 매달리지 않았는데.

그는 그가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머리 쓰기보단 그저 납득한 채 넘어가기로 했다. 그러면 편하다. 삶의 끝에서 들었던 마지막 목소리를 외면하면 미련조차 남지 않고 그렇게 끝난다.

밤을 뒤척이게 만든 그 사소한 의문마저 그리 스러진다.

그렇게 될 것이다.

─뭐야 프러데리 완전 개호구 아님?

─저걸 왜 살려줘ㅋㅋㅋㅋㅋ

─사랑 아님?

─본인이 사랑은 아니라잖아

─사랑은 맞는데 성애가 아닌 듯

반대로, 자신의 몰이해에 대해 타인에게서 답을 구하는 자들도 있었다. 은우가 꺼낸 화제에 따라온 사람들도 있지만, 원체 사람이 많다 보니 아닌 자들도 많다.

은우는 그들의 의문을 방치했다. 그가 답해 줄 수 있는 게 아닌데 굳이 건드릴 이유가 없다.

“이동기가 하나 더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이건 좀 아쉽습니다.”

─ㅇㅈ 말로는 부족해 솔직히...

─나이안 가호 쿨탐 좀 줄여달라고

─월드가 넘 넓어서;;

─한번도 안 쓰인 마나카보단 그래도 낫다

─아ㅋㅋㅋ마나카ㅋㅋㅋㅋㅋ

“뭐, 말씀하신 대로 마나카보다 낫긴 합니다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네요.”

‘이그리트 가호: 정화’야 광역 공격기라서 나름 쓸모는 있었다. ‘나이안의 가호: 섬광’이야 오픈 월드에서의 쓸모를 말할 것도 없다.

반면 마나카와 지금 막 얻은 탄의 가호는 은우로선 쓸모를 찾기가 어려웠다. 물론 방어기란 점에서 탄의 가호는 난전 정도에선 꺼내 들 가능성이 있긴 하다. 그러나 마나카는…….

“과연 엔딩 보기 전에 마나카 스킬 쓸 일이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떨어진 체력을 원상 복구 시켜 주는 것도 모자라 추가 체력까지 덧붙여 주는 ‘가호: 부활’. 보통 플레이어라면 두 손 들고 환영할 스킬이나, 은우에겐 흡사 계륵이었다.

효과가 너무 뻔하다 보니 앞선 정령들처럼 시험해 볼 기회도 안 줬다. 즉, 부활 스킬은 지금까지 발동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정 안 되면 엔딩 보고 나서 한 번 죽는 걸로 가겠습니다. 안 보여 드릴 순 없으니까.”

─ㅋㅋㅋㅋ아ㅋㅋㅋ

─절대 안 죽는다는 킹신감 보소

─하,,, 이 자신감 보려고 이 방송 보지

─너모 좋구연

은우는 가볍게 결정을 내리며 샤를로테가 펼쳐 준 미리 보기를 닫았다. 흙벽이 사방에서 솟아올라 시전자를 보호하던 영상이 그대로 흩어졌다.

【프러데리는 귀네드에서 추방당한 후에도 마스 밥 마소누이를 치료하기 위해 연구를 이어 나갔지. 다만 그 연구는 라보르자 산맥의 연구실에서 하지 않았어. 왕위를 그위디온이 노린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언제든 그 남자가 죽을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스토리 진행을 위한 것인지, 샤를로테는 창이 닫히자마자 흐리게 말을 덧대었다. 비록 마스 밥 마소누이를 지칭할 때마다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긴 했지만 말이다.

【그녀는 치료법이 개발되기 전에 그 남자가 죽지 않도록, 최대한 가까이서 연구를 이어 나갔단다.】

그녀는 두 손을 휘저어 지도를 펼쳤다. 동쪽 제도와 서쪽 제도를 있는 좁은 땅─천공섬─을 넘어, 이제 가야 할 곳은 역시 단 한 곳밖에 없다.

【그녀의 모든 연구가 남겨진 장소. 그곳은 귀네드의 수도란다. 내 생각엔 네가 그곳에서 나머지 기억들을 전부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니?】

『새로운 임무 획득!

귀네드를 향해서

스카이 캐슬을 탈출하자』

“결국 저기까지 가는군요.”

─적국 수도까지 보내버리네ㅋㅋㅋ

─시련과 고난 겪게 만들기 싫다면서 이걸 이렇게?

─??: 일단 가

─십년 전 일로 가자마자 잡히는거 아님?

“뭐, 프러데리는 이미 죽은 사람 아닙니까? 생김새도 달라져서 추적받을 걱정도 없고.”

웃고 떠드는 동안 서쪽 제도의 한가운데, 아마도 귀네드의 수도일 곳에 목적지가 표시됐다. 직후 귓속을 파고드는 건 시끌벅적한 바깥이다.

【바깥에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어. 자세한 이야기는 탈출하고 나서 하는 게 좋겠구나.】

아무래도 그가 처리한 경비 두 명이 발각된 모양이다.

은우는 무기를 꺼내려다가 ‘저어…….’ 하며 소심하게 말을 걸어오는 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저 아래 땅 정돈 아니지만… 내가 깨어난 상태니까… 그… 벽에 달라붙는 거… 할 수 있을걸……?】

그건 그들의 탈출을 돕는 발언이었다.

쿵쿵쿵쿵!

마침 계단 쪽에서 누군가 올라오는 소리가 잔뜩 들려온다.

“갑시다.”

은우는 서둘러 창가로 뛰어내렸다. 스태미나가 소모됨과 동시에 그의 몸은 탑 벽에 딱 달라붙었다.

저 탑에 들어가면서 옷도 갈아입혀진 채라, 치마가 나풀거릴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 나풀거리는 건 뒤트임 있는 코트 자락이다.

“어서 안을 수색해!”

“여기, 상자가 열려 있습니다!”

“뭐?”

은우가 탑을 뛰쳐나간 사이, 역으로 들어간 병사들의 목소리가 우렁찼다. 당장 찾아내라는 외침은 흡사 백 리 밖에서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성량이다.

【가장 안전한 탈출구 쪽으로 안내하마. 아직 사용법을 잊진 않았겠지?】

그사이 샤를로테는 그녀의 능력을 이용해 만든 나침반까지 만들어 주었다. 비록 가호는 없으나, 이 게임에서 가장 도움이 되는 사람을 꼽으라면 역시 샤를로테밖에 없으리라.

“나갑시다.”

나침반과 무기를 쥔 채 은우는 달리기 시작했다.

* * *

허찬수는 일주일이 되도록 집구석에 틀어박히는 것을 택했다. 도저히 밖에 나가고 싶지 않았다.

방송에는 건강 문제로 잠시 쉬겠다는 공지를 올렸다. 사흘 전까지는 그래도 방송을 어떻게 했는데, 이틀 전 아침에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판단이 섰던 까닭이다.

평소였다면 1분 안에 해치울 수 있던 적을 3분이나 걸려 잡은 시점에서 이대론 안 되겠다 결론 내리긴 충분하다.

주말에 놀러 온 친구는 돈도 그렇게 많이 버는 주제에 뭐가 문제냐는 말을 던지고 떠났다. 배부른 소리라던가.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금 방송을 그만둔다 해도 몇 년은 넘게 먹고 살 수 있는 게 그의 재력이니까.

그러나 달리 말하면 몇 년만 버틸 수 있는 게 그의 한계였다. 집안과는 절연했고, 방송 외 분야엔 특별한 재능이 없다. 이제 와서 취업이 될 리도 없었다. 그 몇 년이 지나면 그는 결국 실패자에 불과해질 거란 말이다.

허찬수는 이를 갈았다. 그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무슨 소리를 들어 가며 방송을 시작한 거였는데.

그는 그가 악착같이 노력해 쌓은 탑을 내려가기 싫었다. 여기서 무너지고 싶지도 않았다.

명예와 부 또한 이유가 되겠지만, 본질적으로 방송이란 일 자체가 주는 쾌감을 놓치기가 싫었다.

그가 유일하게 재능 있다 여긴 분야에서마저 밀려나고 싶지 않단 말이다.

그렇지만 탑이 무너지느냐 무너지지 않느냐를 택하는 건 그가 아니다. 그 탑을 떠받치던 사람들이지.

하여 그가 시도할 수 있는 건, 그저 무너지려는 탑에 판자를 기우고 덧대는 것밖에 없다. 사람들이 떠나지 않기를 기도하고 그들의 발목을 잡는 게 끝이다.

그의 재능은 다했고, 그보다 더한 재능이 나타나 버린 이상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으니까.

그것밖에 없다. 없다.

정말로?

허찬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이 쌓은 탑이 그것보다 더 높이 쌓인 남의 탑에 의해 무너질 위기에 처했을 때, 대처 방법은 보통 3가지로 나뉜다.

체념하고 붕괴하길 기다리거나.

포기하지 않고 탑을 보수하거나.

『켄 ㅈㄴ 클린하다고 하다는데ㅋㅋㅋㅋ저런 새끼가 꼭 뒤져보면 뭐 있더라ㅋㅋㅋㅋ』

내 탑이 무너지기 전에 남의 탑을 무너트리거나.

* * *

아마 막바지에 달했을 스토리를 따라 은우는 귀네드의 수도 근방까지 움직였다. 그 과정에서 잠시 길을 튼 건 ‘바람이 모이는 곳’을 발견한 탓이다.

“나이안의 가호를 자주 못 써서 아쉽습니다.”

─ㅇㅈ

─나이안...당신은 그저 빛....

─특) 실제로도 섬광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바람이 모이는 곳’은 그 이름과 달리 발견하기가 쉽다. 바람은 본래 육안으로 목격되지 않은 것이지만, 이 게임에선 아니기 때문이다.

샤를로테를 구성하는 녹색 선들이 용오름의 형태로 구성되어 하늘을 뚫을 것처럼 존재하는데, 못 발견하는 게 이상하다.

─이럴 거면 마나카 가호는 빼지

─마나카 노냐;;

─마백수

─우리 나카 기는 왜 죽여욧! 나름 예쁘다구욧!

─네 다음 피규어

‘가호: 섬광’이 재사용 대기 시간이라 지상으로 직접 걸어가는 수밖에 없으니. 사람들은 불만을 토해 냈다. 그네들 눈에는 마나카의 가호가 가장 쓸모없어 보인 것이다.

아무렴 나이안은 무려 이동기고, 샤를로테와 탄은 가호를 빼더라도 유용한 기술─시스템과 벽 타기─들을 제공한다. 이그리트 또한 자주는 아니어도 종종 가호 써먹기 좋았다.

그러나 부활기인 마나카는 발동할 일 자체가 없다 보니 졸지에 백수 취급을 받았다. 은우가 어떻게 해 줄 수 없는 부분이었다.

“마나카도 뭐… 스킬이 나쁜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마나카도 나름 억울할 터였다. 대상이 은우여서 그렇지, 일반 플레이어라면 꽤 자주 써먹을 테니까. 사용량이 가장 많은 건 역시 나이안의 가호겠지만 말이다.

“여러분은 상당히 애용하실 것 같은데.”

─아 팩트 에반데;;

─스플뎀 깜빡이 키고 주랫지!

─마백수vs마천사 뭐가 더 좋은가

─자강두천......

─은근슬쩍 켄과 같은 급에 놓이려는 것 보소ㅋㅋ

은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흔들리는 말의 등을 발로 밟았다. 그러곤 타이밍에 맞춰 말의 등을 박차고 땅으로 뛰어내렸다.

게임적 특혜로 절대 떨어지지 않는 모자가 날개만 살짝 팔락였다. 우샨카, 흔히 군밤 모자라고 부르는 모자의 귀 덮개 부분이다. 물론 철판을 살짝 덧대고 이것저것 장식을 다는 등 일반적인 우샨카완 다르다.

참고로 입은 옷은 설산 등반 때 입었던 것인데, 이게 다 같은 위도더라도 서쪽 제도가 좀 더 추운 탓에 벌어진 사태였다.

퍼억!

어쨌거나 은우는 착지하면서 창대를 휘둘렀다.

바람이 모이는 곳을 지키던 마물 중 하나의 머리에 창이 내리꽂혔다. 임팩트가 남지 않으니 쑤욱 뽑혔을 때 상처 또한 없지만, 그렇다고 대미지가 안 들어간 건 아니다.

트롤 위에 떠오른 빨간 피가 조금 줄어들었다.

은우는 그 상태에서 뽑아낸 창을 빙글 돌렸다. 그러곤 뒤에 접근하려던 마물을 견제하고, 휘두름으로써 또 다른 한 마리를 내쳤다.

무기의 장점이자 단점인 거리를 오롯이 장점으로만 승화하는 모양새였다.

“오픈 월드라도 여기까지 오니까 좀 빡세네요.”

오픈 월드답게 기본적으로 출현하는 몬스터들 전원 낮은 근접 재능 수치로도 처리가 가능하다.

그러나 후반부 지역인 만큼 잡몹 처리하는 것치고 시간깨나 걸리는 건 어쩔 수 없다. 1씩 들어가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잡몹한테 시간 너무 쓰긴 한다..

─근데 뭐 총 플탐은 이분이 제일 짧죠?

─당연한 말이다.

─구울들 켄부심 보소ㅋㅋㅋ

─앞으로 더 가면 시간 더 끌 텐데 그땐 재능 찍으실?

“글쎄요. 그땐 다 무시하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은우는 트롤의 곤봉을 피했다가 그 위로 잽싸게 올랐다. 하필 돌도끼여서 이것도 밟으면 발이 붙었다. 나무 부분을 밟으면 다시 떨어지겠지만, 그거야 균형 감각으로 버티면 그만이다.

은우는 트롤이 ‘으엉?’ 하고 들어 올린 순간, 나무 손잡이를 밟고 내달렸다. 그의 창이 한 번 트롤의 관자놀이를 후려치고, 어깨를 밟은 후에는 창을 짧게 고쳐 잡아 그대로 쑤셨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3m 넘는 키에 살이 뒤룩뒤룩 붙은 트롤의 몸뚱이는 그보다 1m는 작은 인간을 얼마든지 지탱해 냈다. 트롤 입장에선 참 안타까운 일이나, 은우 입장에선 이보다 편한 게 없었다.

크엉!

다른 트롤이 제 동료의 어깨로 몽둥이를 휘둘렀다. 은우는 재빨리 그가 타고 있던 트롤의 민둥머리를 짚고 반대쪽으로 넘어갔다.

머리를 짚은 채 몸을 빙글 돌리며 다리를 반대쪽 어깨로 옮기는 모습은 마치 춤을 추다 턴하는 이처럼 자연스럽다.

“다른 애들은 머리가 거뭇거뭇 나 있는데, 얜 머리가 맨들맨들해서 잡기가 좋네요.”

─너어는...진자 나빴다아....

─쥬륵...

─울지마! 너를 두고간 머리카락이 나쁜 거야!

─산다는 건 다 그런거야!

─저 새끼들은 위로를 하는 거냐 놀리는 거냐

─ㅋ들켯냐?

2050년대지만, 탈모는 여전히 치료가 불가능한 병이었으니. 민머리들의 애환이 쏟아졌다.

“왜 화내십니까? 머리, 심으면 되지 않나요?”

─심는 거랑 같냐고ㅋㅋㅋ

─아 이 발언은 좀 에반데;;

─야발 가발이 진짜랑 같냐고ㅠㅠ

─자라나라 머리머리!

─젊다고 지금 자랑하냐? 이십 년 뒤에 보자

─그땐 너도 더 빠졋겠지...

─(쥬륵.....)

다를 것도 없지 않나? 5분이면 심고, 심지어 교체도 가능한 점에서 헤어 스타일링도 편한데.

은우는 사람들의 분노에 공감하지 못한 채 민둥머리 트롤을 기어코 죽였다. 전생엔 머리가 지독히 튼튼했고, 현생 또한 아직 젊어서 탈모가 안 온 상태기에 할 수 있는 기만이었다.

다른 트롤들이 분노해서 무기를 치켜들었다. 트롤의 정의 구현을 바라는 시청자들의 응원은 덤이었다.

“드디어 이쪽 제도 길을 밝히네요.”

물론 시청자들의 응원은 부조리한 무력 앞에 스러졌다.

은우의 손이 눈에 띄게 모여 있는 바람을 건드렸다.

그러자 마치 용오름처럼 모여 있던 바람이 폭발하듯 흩어졌다.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형상이 꼭 나무가 가지를 뻗는 것과 닮았다.

【이 근방의 대지 정보를 입수했단다. 지도에 추가되었으니 확인하렴.】

밝혀진 지도를 보면 프러데리의 마지막 연구실은 이제 코앞이다.

오랜 여정의 끝이 보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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