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녀석을 쳐라!”
그위디온은 역시나 혼자 덤비지 않았다. 강당 벽면, 2층 통로에서 강화 병사 둘이 뛰어내린 것이다.
또한 여기까지 뚫린 것을 통해 학습한 것이 있는지 그위디온도 직접 공격에 동참했다.
그는 마스 왕의 방에서 마법을 발현했던 지팡이를 추켜세웠다. 그것을 내려찍자 각종 마법이 발현됐는데, 대체로 불 계열이었다.
은우는 그것을 가볍게 피하며 병사 둘을 빠르게 해치웠다. 앞으로 자주 나올 걸 암시라도 하는지 병사의 피통은 그렇게까지 크지 않았다.
그위디온이 이를 갈며 그를 피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걸 놓칠 은우가 아니었다.
“죽어라!”
일정 반경 이상으로 접근하는 데 성공하면 그위디온은 지팡이를 들고 휘둘렀다. 지팡이 자체도 마법이 걸려 있는지 순식간에 길어져 바닥을 내려쳤다.
단단한 나무가 아니라 넝쿨 종류라 마치 편을 휘두른 것 같다. 채찍은 저렇게까지 두껍진 않지만.
─얍삽하누
─여기까지와서도 도망가는것 보소
─패턴 ㅈ같네;;
─근데 나 같아도 튈듯...
─상대가 켄이면 킹정이지
“글쎄요. 2페이즈에 뭔가 있지 않겠습니까? 다른 보스라면 몰라도 그위디온은 강화병 만드는 걸 주관한 사람이니.”
은우는 그위디온의 몸을 레이피어로 찌르고 베었다. 찌르기가 좀 더 대미지를 잘 냈지만, 이건 한 번에 한 동작만 가능한 PC게임이 아니었다. 적절히 섞어 가면 물 흐르듯 유려한 연계가 가능했다.
“익!”
그렇게 보스의 피가 정말 조금 깎였을 때, 그위디온이 경직 따위를 모조리 무시하고 바닥을 찍었다.
쿵!
바닥이 뒤흔들리며 그위디온을 중심으로 강렬한 힘이 몰아쳤다. 은우의 몸을 강제로 미끄러트리는 힘이었다.
그으으윽-
미끄러운 강당 바닥 덕에 5m는 물러난 상태로 은우는 자세를 잡았다. 그위디온이 가슴을 붙잡은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뭘 꼴아봐
─콱 씨
─눈 깔아 안 깔아?
그위디온이 썩 잘생긴 편은 아닌지라 시청자의 반응은 싸늘했다.
“발악해 봐야 무소용이다!”
─응 반사
─본인 미래를 잘 아네
─맞말추
또다시 2층에서 병사가 뛰어내렸다. 이번에도 둘이었다. 플레이어를 배려한 것인지, 아니면 보스의 피가 아직 조금밖에 안 달아서인지는 알 수 없다.
은우는 그것을 보다가 투구 위를 살살 긁었다.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스틸레토가 샹들리에의 빛을 쨍 반사했다.
“시간당 소환인지, 체력 소모량에 따른 소환인지, 잡았을 때 재소환인지.”
은우는 그에게 다가오던 병사의 다리를 걸어 넘어트렸다. 그러곤 병사의 조력에 힘입어 마법을 준비하는 그위디온에게로 검날을 뻗었다.
“시험 좀 해 볼까요.”
─시험관 모드on
─아ㅋㅋㅋ이 방송은 보스가 시험당합니다
─??: 도망가...!
검날이 새파랗게 빛났다.
▣ 189. 부디 이 선택이 틀리지 않기를
“이럴, 이럴 순 없다!”
은우의 낮은 대미지로 인해 2페이즈 진입까진 약간의 시간이 소요됐다. 그러나 그 수모를 뚫고 2페이즈에 들어선 대가는 컸다.
“나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아까 그가 말했던가. 병사나 기사의 신체 강화를 주관한 그위디온에게 비장의 한 수가 없을 리 없다고.
그건 맞는 추측이었다. 그위디온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그 자신을 위한 신체 강화 약을 들고 다녔다.
그것이 복용자를 마물화시킨다는 걸 알 텐데도 소지한 걸 보면, 죽는 게 그만큼 싫었던 모양이다.
“흐으, 흐으으, 흐아아악!”
다만 그위디온의 약 주사는 너무 빠른 효과를 보였다. 원래 저렇게까지 극렬한 반응을 보이나 싶을 정도였다.
─좆됏누;;
─변신!
─켄 원래 변신시간 안 주지 않냐?
─지금 컷신임
─아 ㅇㅋ
주사기가 떨어지고 그위디온은 허리를 구부렸다. 두 손은 머리를 붙잡고 있는 게,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결과물 같아 보이진 않는다.
연구의 모든 것을 총괄─연구 면이 아니라 돈줄로서─하는 사람의 것인 만큼 가장 좋은 것을 가지고 있었을 텐데도 그렇다.
하기야 이유를 따진다면 한도 끝도 없을 터. 연출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이윽고 그위디온의 몸이 울룩불룩 부풀기 시작했다. 그 부피를 버티지 못한 옷들이 뜯어질 때쯤이면, 뼈로 보이는 골격이 잠깐 드러난다.
【흐아아아아악!】
그의 성대는 갈라지고 두꺼워져 본래의 목소리마저 잃어버렸으니. 들고 있던 지팡이는 뿌리를 뻗듯 자라나 그것의 뿔이 되었다.
【내애애애 것이이이이야아아아!】
사슴의 뿔과 돼지의 머리, 늑대의 몸을 섞어 둔 듯한 형상의 괴수가 울부짖었다.
─실제 설화에서 사슴, 돼지, 늑대가 됏엇는데 그거 반영햇나보네
─저렇게 될 거 모르고 쓴 건 아니겟고, 왜 씀?
─죽느니만 못한데;;
“삶을 향한 욕구란 때론 인간이라는 존재성마저 침범하지 않습니까.”
물론 살고자 인간임을 포기하느니, 인간으로 죽는 게 더 낫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사고방식을 모두에게 바랄 수는 없다.
은우는 무기를 다시 잡았다. 지금까진 컷신 때문에 강제로 지켜만 봤으나, 이제부턴 다르다.
그는 가장 먼저 인챈트부터 걸었다. 역시나 고른 속성은 공속에 관여하는 전기 속성이다.
폭딜 경향이 있는 화염 속성보단 대미지 상승량이 낮아도 속도가 올라가는 전기가 낫다. 물 속성은 초당 회복, 대지 속성은 방어력 상승이라 고려할 가치도 없다.
스틸레토를 손아귀에 끼어 엄지로만 잡은 채, 은우는 네 손가락으로 레이피어의 검신을 쓸었다. 그의 손이 지나간 자리에는 샛노란 문자들이 새겨진다.
【주우우욱어어어어라아아아아!】
은우는 재빨리 몸을 옆으로 굴렀다. 스태미나 다는 게 보였다가 금방 채워졌다.
그는 그 상태에서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거대해진 그위디온의 눈알이 검에 찔렸다. 안타깝게도 추가 대미지는 없으나, 약점을 찌른 듯한 쾌감은 남는다. 은우는 검을 회수하며 뒤로 물러났다.
“죽여야아…….”
그위디온이 약 먹는 것에 맞춰 필드로 내려온 병사들의 공격은 덤이다.
“갑자기 4마리로 늘었네요.”
─선 넘네;;
─고인물들은 이거 어케 깨냐
─켄이 재능 안 찍어서 그렇지 적정레벨만 되면 쉽게 깸
─기사 2마리 실화냐
초반에 2마리, 후반에 3마리, 2페이즈 때 4마리. 언뜻 보기엔 그럴싸한 밸런스 같으나, 자세히 까 보면 절대 아니다.
3마리가 전부 강화 병사일 때와 4마리 중 2마리가 강화 기사일 때의 차이는 크다.
【끄아아아아아!】
“처리할 필요는 없어 보이네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위디온이 피아 안 가리고 공격한다는 점이었다.
대체로 은우에게 집중되었지만, 그 사이에 병사나 기사가 끼거든 그것들에게도 피해를 주었다.
심지어 이성을 잃은 게 확실한지 그는 꼭 짐승처럼 은우를 공격해 왔다. 거대한 고개를 휘젓거나, 앞발을 들어 내려치거나, 돌진하는 식으로.
부하들을 은근히 끼워 죽이기 딱 좋은 공격들이었다.
─팀킬 ㄱㅅ
─팀킬 감사용
─병사들 뭔죄냐
“팀킬도 팀킬이지만… 이 병사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내려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저걸 보고도 떠받들 생각이 드는 건 아닐 텐데.”
은우는 그를 향해 달려오는 기사를 발견하곤 역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기사가 대검을 휘두른 순간, 그것을 겅중 밟고 위로 뛰어올랐다.
탁!
어깨를 밟은 은우의 몸이 위를 향해 뛰어올랐다. 날개도 뭣도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은우의 레이피어가 그위디온의 뿔을 갈랐다. 그러자 보통 들어가던 대미지의 1.5배 정도가 한 번에 뽑혀 나왔다. 아까 지팡이가 자라나는 걸 봤던지라 혹시 싶었는데, 호재였다.
“뿔이 약점이네요.”
은우는 바닥에 착지한 후 빠르게 굴렀다. 그 자리에 그위디온의 앞발이 내려찍혔다가 다시 들린 후 새로운 자리를 찍었다.
패턴을 이미 암기한 은우로선 구르기만 연속으로 사용하면 되었다.
“파이어볼.”
몸을 굴려 일으킨 곳에는 병사가 서 있었다. 은우는 그것이 공격을 가하기도 전에 먼저 움직였다.
불꽃이 쾅 터지며 병사들 뒤로 밀어냈다. 체력은 반 좀 안 되게 까인 채다.
─마법 진짜 개극딜이다;;
─근접 재능은 약점 맞추기 힘들겟다...
─그치만 고인물들은 그걸 해냅니다
─싸가지는,,,솔직히 나온지 너무 오래됐지
“약점까지 알아냈겠다, 빨리 갑시다.”
은우는 연이어 스틸레토로 녀석의 안면을 찍고 레이피어로 가슴팍을 꿰뚫었다. 그런 후 빠르게 떨어지면 병사가 있던 자리를 그위디온이 쓸고 지나간다.
【주우우욱어어어어라아아아아!】
“슬슬 결말을 봐야 할 때도 된 것 같으니까.”
하늘 같던 그위디온의 피통이 기어코 바닥으로 끌어내려졌다.
* * *
【아아… 아… 이럴 순 없어……. 이럴 수는…….】
죽음이 목전에 들이밀어지고 나서야 이성이 돌아온 걸까. 그위디온은 괴물처럼 변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비명을 지르고 자신의 실패에 절망하며 울부짖었다.
【내가, 내가……!】
【…그에게 마지막 자비를 베풀어 주렴.】
샤를로테의 말을 들으며 주인공은 쓰러진 그위디온의 거체 앞에 섰다. 두 손으로 꼭 쥐어 든 무기는 옆으로 엎어져 있는 그위디온의 목을 정확히 겨냥했다.
푸욱!
핏줄기가 튀고, 그위디온이 눈을 부릅떴다. 촤악 소리가 연이어 들리면 그 목은 완전히 베이고 만다. 작지 않은 강당을 괴물의 피가 질퍽이게 적셨다.
끼이익!
그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까드득 하며 철창 특유의 쇳소리까지 이어지면 주인공의 몸은 반쯤 틀어져 뒤를 보고 있다.
“허억.”
“…….”
열린 강당 문 너머로는 하얗게 빛이 번져 들어오니. 빛을 가리며 서 있는 이는 병사의 부축을 받고 있는 마스 왕이었다. 빛에 눈이 적응하거든 그 뒤에 도열해 있는 병력과 귀족들 역시 확인할 수 있다.
“…그 뒤의 괴물은, 그위디온인가?”
주인공은 대답 대신 괴물의 잘린 머리, 그것도 뿔 부분을 툭 쳤다. 뿔에는 그위디온이 항상 들고 다니던 지팡이의 보석 장식이 달려 있다.
“그렇군……. 그런 거야.”
그 뜻을 알아들었는지 아닌지 마스 왕은 고개를 살짝 주억였다. 그러나 퀭한 얼굴과 산발이 된 머리 사이론 아까 침대에서 봤을 때보다 더한 안광이 번쩍이고 있다.
“오래전, 나는 너의… 그대의 말을 믿지 않았지.”
그에 대해 후회했다 말하려는가? 주인공은 가만히 듣고, 시청자들은 혀를 차거나 그의 뒤늦은 후회를 비웃었다. 그렇지만 은우는 그가 어쩐지 후회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그대는, 이 나라를 구했군.”
후회란 건 그때 그 상황─기억도 포함하여─, 그 선택지를 다시 마주하게 되거든 다른 걸 고를 수 있을 때나 언급할 수 있다.
이것도 고를 수 있고 저것도 고를 수 있을 때, 한순간의 실수라고 할 수 있는 선택 따위여야 후회란 말이 정당해진단 말이다.
그때 그 처지가 되거든 한쪽으로만 몰릴 선택 따윈 후회할 수 없다. 후회해도 그 시기의 그는 반드시 그것만을 고를 것이므로.
프러데리를 믿지 않을 것이므로.
“그대가 이 나라를 구했어.”
“폐, 폐하……!”
마스 왕의 발언에 병사들을 비롯한 사람들이 죄다 놀랐다. 그러나 마스 왕은 거침없었다.
그는 병사의 부축을 거절한 뒤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왔다. 비록 힘이 없어 금세 주저앉았지만, 본인 행동으로 보아 그냥 주저앉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대가 없었다면… 이 나라는 형언할 수 없는 마에 집어 삼켜졌을 테지.”
그는 입술을 움츠린 채 손을 모았다. 시청자들이 기대한 후회한다 발언은 조금도 토로하지 않았다. 은우가 예상했던 것처럼.
“나라를 좀먹고 진리를 거스른 악한 마법사를 해치운 것에 지대한 감사를.”
절이라고 보기엔 조금 애매한, 그러나 분명 왕이 하기엔 매우 과한 감사 표현이 이어졌다. 뒤에서 눈치를 보던 병사와 귀족들이 서둘러 마스 왕을 따라 했다.
그건 제법 장엄한 광경이었다.
【저주의 시전자가 사망한 반동으로 일시적이나마 힘을 되찾은 모양이구나. 그렇지만… 저주는 시전자가 죽어도 이어지는 것. 금세 앓아눕겠지.】
시점이 다시 캐릭터에게로 돌아오고 몸이 움직였다. 샤를로테가 옆에서 전해 주는 말은 그에게 선택지를 강요하는 것이다.
【그에게 약을 주든, 주지 않든, 우리는 너의 선택을 지지하마.】
『새로운 임무 획득!
선택
마스 왕과 대화하자』
그녀와 정령들은 언제나처럼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채팅 창이 급속도로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약 왜 줌 주지 말죠
─주지 맙시다
─그래도 주는게 진엔딩일 것 같은데
─주는게 진엔딩일듯
─주기 싫다 근데...
은우는 그런 채팅 창을 잠시 외면했다. 대신 마스 왕에게로 다가갔다. 주황색 금이 그의 발아래에 깔렸다.
마스 왕이 병사의 부축을 받아 다시 일어났다.
부득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그 사람을 다시 만난다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대의 구원이 아니었다면 이 나라는 어찌 되었을까……. 아니, 그대에게 물을 일은 아니군. 그대는 이미 그대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주었으니까.”
아마 눈앞에 있는 이와 비슷할 것이다.
“용서를 구하진 않겠네. 그때의 선택은 분명 틀렸지만, 나를 유일하게 지지했던 신하에 대한 믿음마저 잘못이라 할 순 없으니까. ”
그는 여전히 그의 선택에 후회 한 점 없으니까.
“다만, 그래……. 그대가 높이 사 주었던 것이 송구할 정도로 내겐 왕의 자질이 없던 모양이야. 그런 마음 하나 눈치채지 못해 나라를 이 지경으로 내몰다니.”
단지, 단지 문제는 그거였다.
“조금은 슬프군. 그때의 나와 그대가 믿을 수 있는 관계였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까?”
후회는 없을지언정 슬픔은 느낄 수 있다. 그렇기에 미련이라 부르기엔 모호한, 그러나 되짚기엔 너무도 안타까운 마음만이 남고 만다.
“…감상이 길었군. 그대의 말대로 많은 것이 달라지고 바뀌어 버렸어. 그에 대한 내 심정 따위를 토로한들, 이 사실은 변함이 없겠지.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 잔존할 뿐.”
마스 왕처럼 대화할 기회조차 받지 못한 자의 아쉬움이.
“먼저 그대의 모든 죄를 사면하겠네. 왕궁을 침입한 것은 엄벌로 단죄해야 할 극악한 범죄이나, 그 덕에 나라에 암약하던 마의 무리를 처단하였으니 죄를 물어선 안 되지. 또한 나라를 구한 영웅에게 그에 맞는 영광과 재물을 내리겠네. 그대가 달가워할진 모르겠지만.”
마스왕은 말을 잇다 말고 기침을 했다.
【반동이 끝나 가는 거야. 곧 다시 쓰러지겠지.】
샤를로테는 그것을 냉정히 분석해 냈다. 확실히 마스 왕의 목소리는 아까에 비해 더욱 가늘어지고 숨소리도 거칠어진 상태다.
“…달리 바라는 게 있다면 무엇이든 말하게. 힘이 닿는 대로 들어줄 테니.”
─나라 반환
─땅 반환해야하는 거 아님?ㅋㅋㅋ
─전쟁 벌인거 사과각
─나라 병합 가즈아ㅏㅏ
은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그렇게 쉽게 되진 않을 거다. 일단 차지한 영토고, 이미 귀족들이 분배받았을 테니까.
하물며 상인들은 땅에 투자했을 테고 성공을 찾아 이민을 택한 자유민들도 있을 터. 이제 와서 반환한다고 하면 반발이 꽤 거셀 것이다.
“그보다 물약 주는 선택지는 언제…….”
『“…살고 싶어?”
“왜 내게 약을 달라고 하지 않지?”』
“양반은 못 되는군요.”
─ㅋㅋㅋ빨리 내놓으라 이거야
─이와중에 달라곤 안 함
─먼저 준다고 할 때까지 입 다무는 것 보소
─고수네;;
은우는 선택지를 가만 보다가 후자를 골랐다.
“왜 약을 달라고 하지 않습니까.”
연신 기침을 하던 마스 왕이 퀭한 얼굴을 들었다. 새빨간 눈동자는 왕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했다 말한 것치고 군주로서의 위엄만이 가득하다.
“내가 그걸 달라고 할 자격은 있나?”
또한, 염치도 있었다.
“내 입으로 말했던 모든 것을 지킨다는 약속하에 그대는 치료제를 약속했지. 그렇지만 난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네.”
─염치는 잇다
─ㅋㅋㅋ염치까지 없었으면 킬각
─그래도 난 싫음...
─주지 말죵
마스 왕은 처음으로 시청자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 냈다. 그러나 그 얼굴에는 쓴웃음만이 가득한 상태다.
“그러니 마음 쓰지 말게. 그대는 이미 베풀 만큼 베풀었으니.”
그의 시선을 따라가면 앙상하게 마른 손목과 손등이 보인다. 아마 그도 그의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리라.
“내가 그대의 자비에 부응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 이새끼 멕이는데요 형님?
─이걸 이렇게 멕이네
─??: 안 주면 자비에 부응 못해
─아 ㅁㅊㅋㅋㅋㄹㅇ 멕이는 거다
─지능적 안티ㅋㅋㅋ
멕이는 것보다는 그저 자조가 아닐까 싶지만…….
은우는 떠오른 알림 창을 보았다. 주거나, 주지 않거나. 엔딩을 가르는 가장 큰 선택지였다. 동시에 한쪽으로 정해진 선택지기도 했다.
“부디, 이 선택이 틀리지 않기를.”
문득, 그 사람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가 지금까지 외면해 온 그 목소리가 사뭇 듣고 싶어졌다.
우리가 대화를 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해서.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는 걸 그때의 우리가 알았다면 뭐라도 달라졌을까 싶어서.
“…왜?”
아니. 달라지는 건 없다. 그때의 그는 결코 대화라는 선택지를 떠올리지 않을 것이므로. 지금의 깨달음은 지금이기에 존재할 뿐이므로.
그러니 후회하진 않아.
후회하진 않지만.
“마음 가는 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주는 거야.”
「잘 살아야 해.」
달라지는 게 없더라도, 할 수 있는 게 없더라도.
그럼에도 알고 싶은 게 있다.
“고…맙다……. 정말로, 정말로 고맙다. 절대로, 절대로 네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마.”
전하고 싶은 게 있었다.
* * *
[어, 입양이요? 진짜 하시게요?]
한 번도 다음 기회를 달라고 매달린 적은 없다.
“…네.”
그렇지만, 그게 감사하지 않다는 건 아니야.
“때를 놓쳐서, 완전 헤어져 버리면… 그땐 후회조차 할 수 없게 되니까요.”
은우는 기억을 더듬어 그린 그림을 벽에 걸었다.
액자 속에는 웃고 있는 한 사람과 ‘고맙다’란 글자가 작게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