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건물 안에 들어왔다고 해서 각오가 다 된 건 아니다. 허찬수는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복도를 거닐었다.
돌아갈까? 아직 되돌릴 수 있을 때, 저지르기 전일 때.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돌아가 버릴까.
그렇지만 인생이란 무릇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었다.
“빌리 님!”
그는 그와 가장 친한 사원이자 담당자인 사람과 마주치고 말았다.
“며칠 연락이 안 돼서 걱정했습니다.”
허찬수는 반사적으로 주머니 속 물건을 세게 쥐었다. 그게 혹시라도 주머니 밖을 향해 삐져 나가지 않도록.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죠?”
그는 요즘 힘드냐는 담당자의 말에 입을 열 수 없었다. 정기적으로 가야 하는 병원도 안 가고, 방송도 쉬고, 정말 일 있는 거 아니냐는 말 또한 대답할 수 없었다.
다만, 그의 시선은 어느 순간 한쪽에 고정됐다. 예의가 아닌 건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빌리 님, 진짜 무슨 문제 있으시면…….”
“…잠시만요.”
그는 담당자의 말을 끊었다. 그러곤 홀린 듯 복도에 선 다섯 명에게로 다가갔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들 모두에게, 혹은 그중 한 명에게 용건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딱 한 명. 그의 모든 관심을 앗아가 버릴 만한 사람이 있긴 하지만, 그에게 아직 할 말이 있진 않았다.
그럼에도 가야 했다.
목에 꽉 막혀 걸린 무언가가 그의 다리에 실을 묶어 억지로 끌고 가는 기분이다.
“응? 켄 님, 왜 그러세요?”
“…먼저 가세요.”
새까만 헬멧은 제법 위협적이나, 그 속에 든 얼굴만은 아니다. 아닌가?
허찬수는 딱 두 번 보았던 얼굴을 떠올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무서운 얼굴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렇지만 처음 마주쳤을 때 그를 보던 눈동자가, 그곳에서 고요히 전해지던 은근한 압박이 숨을 틀어막던 건 확실히 기억난다. 도저히 건드릴 엄두가 안 나던, 그런.
“어, 빌리 님…….”
“자, 자. 갑시다.”
노인장들이 젊은이들을 납치하듯 끌고 갔다. 물론 그들이 간다 해서 모든 구경꾼이 사라지는 건 아니나, 대부분 거리를 두고 있었다. 대화에 방해될 수준도, 신경에 거슬릴 수준도 아니다.
덕분에 복도엔 켄과 그만 남는 듯 보였다. 허찬수는 땀이 흥건한 손을 옷에 쓱 문질렀다.
“오랜만에 뵙네요, 켄 님.”
그는 버릇처럼 예의를 챙겼다. 켄의 헬멧이 백열등에 하얀 빛무리를 지었다.
“예, 오랜만입니다.”
허찬수는 식은땀을 훔치며 가늘게 웃었다. 어떻게 인사는 했는데, 그다음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제게 용건 있으신지.”
“…….”
그러나 그의 사정 따위 모르는 켄은 거침없었다. 허찬수의 말문이 턱 막혔다.
용건? 사실 없었다. 친한 사이는커녕 시시콜콜한 안부 대화 할 사이도 못 되니까. 더구나 그가 먹었던 마음을 생각하면…….
“…….”
그는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고, 켄은 그 침묵을 묵묵히 받아 주었다. 헬멧 때문에 표정이 보이지 않는단 건 안도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가져온다. 그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고요를 지켜 주는지 알 수 없으니까.
몰아치는 초조함 속에서 주머니 속 물건이 바스락 소리를 내었다.
▣ 199. 뇌물용 간식을 좀 사 가야
강렬한 시선이 느껴져서 용건이 있나 했더니, 가늘게 웃기만 할 뿐 대답 없는 상대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은우는 그 앞에 선 빌리를 보고 미간을 좁혔다. 용건을 말하지 않으니 짐작이라도 해 봐야 하는데, 주어진 단서가 너무 많았다.
그가 알기로 빌리가 휴방 때린 건 대략 2주 전이다. 그런데 그 사이에 빌리는 최소 6kg는 빠진 모양새가 됐다.
야윈 뺨과 가늘어진 팔다리를 보고 어림짐작한 것이나, 오차는 크지 않을 거다. 그는 그의 눈을 신뢰했다.
긍정적으로 본다면 단순히 살을 빼기 위함일 수 있다. 그러나 빌리 같은 사람이 뭐 하러 건강 망쳐 가며 살을 빼겠나.
아니면 뭐, 와병 중인가? 요즘 죽을 병이 얼마나 있다고?
은우는 재차 빌리를 살폈다.
눈가의 근육은 뭉쳐 있고 눈동자는 고정되지 않은 채 흔들리고 있다. 확대된 동공이나 평소보다 빠른 호흡은 그의 불안정함을 고스란히 표현하는 중이다.
그와 마주하길 꺼리는 시선은…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으로 꽉 막혀 있는 것 같다. 상당히 익숙한 눈빛이었는데 저걸 어디서, 어떤 때에 봤었는지는 기억이 모호하다. 분명 자주 접했던 것 같은데…….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부정확한 정보는 일단 뒤로 미뤘다. 기억을 더듬는 건 나중에 해도 된다.
은우의 눈동자가 빌리를 좀 더 분석했다.
깔끔한 차림새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최악의 최악까지는 몰리지 않았단 증거일까, 아니면 최악으로 물려도 품위는 잃지 않겠다는 발악일까.
“용건이 있으신가 물었는데, 못 들으셨는지.”
“아… 죄송합니다. 제가 깜빡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네요.”
그는 멋쩍은 척하는 빌리를 보고 그의 손을 보았다.
후덥지근한 여름에도 구태여 후드 집업을 입고 온 채 주머니에 손 넣은 이유가 뭘까. 주머니 속 손은 뭘 쥐고 있을까.
형태로 보아 길진 않고, 두께가 두껍지도 않다. 하나 손이 쥔 것에 맞춰 둥글게 곡선을 그릴 수 있다. 그런 재질은 보통… 종이 정도려나.
“제게 주시려는 겁니까?”
“…아뇨, 아닙니다. 이건…….”
빌리의 눈동자가 한차례 출렁이더니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이건 켄 님께 드릴 게 아닙니다…….”
그럼 빌리는 그 앞에 대체 왜 서 있는 걸까.
은우는 빌리의 눈길이 방향을 바꾸는 걸 보며 숨을 내뱉었다. 배고픈데.
“용건이 없으시다면 가도 됩니까?”
빌리의 몸이 얕게 부르르 떨렸다. 그렇지만 그 시선은 여전히 은우 자신이 아니라 빌리 본인의 주머니에 맺혀 있다.
아무래도 중요한 물건은 맞는 듯한데… 그에게 전달할 건 아니라 하니 더 캐물을 이유가 없다.
은우는 한 번 더 숨을 뱉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최소한의 예의는 지켰다고 본다. 대답 안 한 건 애당초 저쪽이니까 뭐라 할 수도 없겠지.
“다음에 뵙죠.”
“아…….”
빌리가 놀란 얼굴로 그를 다시금 쳐다보았지만, 붙잡진 않았다. 그거면 됐다.
은우는 몸을 느긋하게 돌렸다. 그러자 멀리서 그와 빌리의 눈치를 보던 사원 중 하나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는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빌리랑은 아는 사이일 테다. 아까도 대화하는 것 같았으니까.
둘이서 해결 보겠거니 하며 그는 신경을 껐다. 구둣발이 아스타일을 또각또각 밟았다.
그리고 세 발자국 정도 나아갔을 때, 은우의 발이 멈추었다. 조금 더 고민해 본 결과, 지금 자리를 뜨는 건 올바른 선택 같지 않았던 탓이다.
전생에서야 타협으로 안 되면 직접적인 무력 행사로 방해꾼들을 치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으니.
반면 빌리가 작정하고 그를 무너트리려 할 경우, 그 여파는 가볍게 끝나지 않을 거다. 빌리가 요즘 슬럼프에 빠지는 기색이 있다 한들 그의 구독자 수는 여전히 굳건했다.
아직이야 그럴 낌새는 보이지 않으나, 그렇다고 안심해서야 쓰나. 사람이란 무릇 작은 일로도 회까닥 돌아 버리는 수가 있다. 염두에 둬야 했다.
다만 그 방법이 문제인데……. 단순히 가능성을 재 두고 대비하는 것이 차선이라면, 초장부터 차단해 버리는 것은 최선이다. 전자는 피해를 줄이지만, 후자는 피해를 아예 없게 하니까.
또한 살아오며 겪은 바, 필요가 있지 않다면 모를까, 적은 최대한 만들지 않는 게 좋았다. 상대가 만만하건 만만하지 않건 간에.
더구나 빌리는 지금까지 그와 악연 한 번 쌓은 적 없다. 외려 빌리의 방송을 통해 그가 배우면 배웠지.
즉, 그가 무언가 저지를 예정─그에게 피해를 줄지 안 줄지는 모르지만─이라면 이번이 그것을 저지할 마지막 기회란 소리다.
하지 않을 이유는 없는데 하면 좋은 이유는 많다. 약간의 시간 투자가 유일한 리스크니까.
대화를 솜씨 좋게 이끌어 갈 재주가 없다는 게 살짝 걸리나, 대신 그에게 남아도는 것이 시간이었다. 말할 게 없는데 붙잡은 건 아닐 테니, 기다려만 주면 뭐라도 토해 낼 거라 생각한다.
마침 빌리를 보고 익힌 것들─직접 배우진 않았다 해도─이 있겠다, 한두 시간쯤은 어울려 줄까.
은우는 결국 몸을 다시 돌렸다.
“여기서 말씀하시기 뭐 하면 카페라도 가시겠습니까?”
빌리의 얼굴이 조금 벙찐 상태로 변했다.
* * *
허찬수는 켄이 우유가 들어간 차를 시키는 걸 멍하니 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따라온 건지 모르겠다. 분명 받아들인 건 그일 텐데, 왜 그랬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마치 기억을 필름 형태로 뽑아내어 중간 과정만 딱 잘라 낸 기분이었다.
“빌리 님.”
왜 여기까지 따라왔을까. 뭐 할 말이 있다고. 내가 켄을 만나서 뭐 한다고.
가시지 않는 생각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박혀 들어왔다. 허찬수는 그것이 켄의 것임을 반 박자 늦게 알아차렸다.
“안 시키십니까?”
“아… 시켜야죠, 네.”
그는 가까스로 정신을 다잡고 블랙티를 주문했다. 평소 즐겨 마시던 것을 고른 건 아니었다. 그냥 눈에 가장 먼저 보이는 게 그것이었다.
“음료 나왔습니다.”
음료는 순식간에 제조되었다. 허찬수는 그것을 받아 들었다.
뜨거운가, 차가운가. 향은 나나? 잘 모르겠다.
그는 지금 차의 맛과 향을 즐길 상태가 아니었다. 솔직히 1인 1음료 제도만 아니었어도 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안쪽으로 들어가죠.”
“…네.”
룸은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지만, 카페는 한산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여기서 그의 팬이라도 마주치면 그땐 정말, 정말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천만 명이 사는 수도에 그의 팬 비율이 얼마나 되겠냐마는, 그냥 그 가능성만이라도 싫었다. 그의 팬에게 이런 꼴을 보여 주고 싶지 않다.
“그래서, 하실 말씀은?”
카페로 자리를 옮겨 주긴 했으나, 켄은 여전히 직설적이었다. 애초에 눈치 볼 것도, 직설적이지 않을 이유도 없을 테니 당연하다.
문제는 그거였다. 저 질문에 대고 그가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애초에 할 말 따윈 없었는데.
“그…….”
뭐라도 말해야 했다. 거절도, 부정도 못 하고 여기까지 따라온 건 다름 아닌 그였으니까. 그러니 최소한 시간 낭비 하게 된 상대방의 기분이 덜 나쁘도록, 뭐라도 이유를 찾아내야 했다.
한데 대체 어떻게?
“그러니까…….”
뭐라도 말을 해야 한다. 그래야 한다. 그렇지만 할 말을 도저히 만들 수가 없다.
허찬수는 그 자신이 한 마디조차 잇지 못할 만큼 한심한 인간이었나 되돌아보았다.
절대, 아니었다. 과거의 그는 정말 괜찮았다. 괜찮았다 수준이 아니라 정말 좋았다. 제 자랑 같지만, 시청자 사이에서 위트 있고 매너 넘치기로 유명했던 게 그니까.
하지만 지금은 어떻지? 매끄러운 대화는커녕 간단한 문장조차도 지어지지 않는다. 머리는 하얗게 질리고 뇌는 단어를 조합하는 대신 분해하여 자음과 모음만을 나열했다.
이건 생각도 사고도 아니었다. 그저 살아 있기만 하다는 증명이었다.
“아.”
그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냥, 소리를 지르고 싶어졌다. 그의 온몸을 옥죄고 그의 폐를 짓누르는 무언가를 토해 내고 싶다.
켄의 멱살이라도 잡고, 이게 다 당신 때문이라도 외치고 싶다 이거다. 정말 말하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닌데도.
아, 정말이지… 엉망이다. 모든 게, 모든 것이. 그란 사람이.
어떻게라도 말을 잇기 위해 뻐끔거리던 입이 결국 닫히고 말았다. 허찬수의 눈이 질끈 감겼다.
“제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켄만 없었으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라는 생각.
아니다. 없을 필요도 없다. 켄이 조금만이라도 상식적인 피지컬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가 아득바득 찔러 볼 수라도 있는 실력 차였다면. 한국인이 아니라 외국인이었다면. 조금만이라도 늦게 나타났다면.
그가 이렇게 무너질 일은 없었다. 정말 없었다.
정말로, 없었는데…….
왜. 대체 왜.
왜 하필이면 켄 같은 사람이 나타났을까? 그가 아직 이 자리를 공고히 하지 못했을 때, 왜 켄이란 거물이 나왔나? 왜, 대체 왜.
그 빌어먹을 집구석을 비웃어 줄 만큼 잘살게 되자마자 이러는 건데.
“볼일이, 없다고… 뜻을 정확하게 표현했어야 했는데…….”
엄밀히 따졌을 때 이 모든 건 켄의 잘못이 아니었다. 켄도 알고 그도 알고, 다른 사람들도 다 인정할 부분이었다.
켄은 그저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했을 뿐이다. 자신은 실패했으나 넌 내 뒤를 이어 집안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어머니의 강요를 과거의 그가 거부했듯. 집안을 나온 뒤 더 큰 성공을 위해 프로를 거절하고 방송을 지향했듯.
그렇지만 열등감이란 건, 그리고 처지에서 나오는 부조리의 원망은 그렇게 합리적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켄의 잘못이 아닌 걸 알면서도 원망하게 되고, 책임 전가 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건 켄 때문이라고. 켄만 없었다면 이렇게 될 리 없다고.
“켄 님 시간을 빼앗아 버렸네요.”
아.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한심해질 수 있을까. 어머니처럼 추하고 비참해지기 싫다고 한 주제에, 어떻게 이렇게까지 구질구질해질 수 있나.
남 탓 하지 말고 깔끔하게 인정하자던 과거의 다짐은 어디로 가고 그는 이렇게까지 추락해 버렸나.
“죄송합니다. 기분, 나쁘실 텐데…….”
허찬수는 파들파들 떨리는 입꼬리로 말을 겨우 마쳤다. 그러곤 블랙티가 담긴 잔을 잡았다.
힐끔 내려다본 찻잔에는 그의 얼굴이 고스란히 비치고 있다. 정말로 청승맞고 처량한, 그리고 참담한 얼굴이.
아. 그의 동공이 커지려는 순간,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땀방울 하나가 콧날을 타고 내려와 잔 위로 떨어졌다. 작은 파문에 그의 심연이 잠시 흐려졌다. 찰나간 주어진 도피의 시간이었다.
“…죄송합니다.”
혹시라도 찻잔 속 자신과 마주칠까.
허찬수의 손이 그의 눈을 가렸다. 도저히 자기 자신을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망가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해서, 그래서.
“죄송합니다…….”
질척이는 혐오가 가득 배인 목소리는 오롯이 그 자신만을 향하고 있다.
* * *
은우는 갑자기 사과하는 빌리를 보며 목덜미를 쓸었다.
어디서 많이 봤나 했더니… 이제야 기억났다. 전생에서 진짜 죽도록 많이 본 눈이었다.
예술가든, 개발자든, 전사든. 대충 처절하게 노력했음에도 원하는 걸 이루지 못했을 때… 정도일까.
보통은 그게 바깥으로 터지던데 빌리는 안쪽으로 터진 모양이다.
은우는 숨을 조금 크게 뱉었다.
이 방면의 전문가는 아니나, 워낙 자주 봐서 무슨 상태인진 감이 잡혔다. 조금 안 좋은 건, 저 뒤에 어떻게 될지 또한 예상이 간다는 점이다.
저런 눈을 한 놈은 빠른 시일 내에 죽었단 소식이─자살이든 타살이든 실종이든─들려오거나, 은퇴를 선언했다. 아주 드문 확률로 정신 차려서 더 나아지는 경우도 있고, 안으로 파고들었던 게 회까닥 돌아서 바깥으로 터지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은우가 제일 많이 본 케이스는 역시 1번이었다. 아니면 반 바퀴 돌아서 폭주해 버리는 4번이나.
“음…….”
문제는 저런 눈이 어떤 것인지 안다 해서 그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점이었다.
위로? 공감을 못 하는 사람이 해 봐야 뭔 효과가 있을까. 무엇보다 저런 감정은 타인이 섣불리 공감해 줄 수 있는 종류도 못 됐다. 오롯이 본인이 세운 자존심이고 본인만이 꺾을 수 있는 집착이었다.
그렇다면 외면? 나쁜 방안은 아니다. 그가 외면한다 한들 빌리가 뭐라 할 상황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비난하지도 않을─모르니까─테니까.
다만 이렇게 되면 빌리가 문제인데……. 설마 이 상황을 눈치채 줄 사람이 하나도 없을까?
은우는 밀크티를 홀짝였다. 솔직한 말로 그가 왜 빌리의 상대로 있는지 모르겠다.
아무렴 그처럼 사교력이 떨어지는 것도, 인간 불신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빌리가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을 것 같진 않았다.
아니면 빌리도 그처럼 병원을 신뢰하지 못하는 걸까? 혹은 그가 희수를 의지할 만한 대상으로 여기는 것처럼 빌리도 그를 높게 쳐주고 있던가.
한데 후자의 경우 그럴 이유가 별로 없다. 엮인 적 자체가 거의 없는데 당연하다.
오히려 빌리가 저렇게 망가진 데엔 그라는 존재가 크게 차지할 거란 생각이 든다.
당장 며칠 전, 우유에탄산에게 들은 이야기도 있지 않나. 그가 너무 자연재해처럼 치고 들어왔다고.
입지가 흔들렸다고 평정을 잃어버리는 사람을 여럿 봐 왔기에 빌리가 유독 정신력 약하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한국 스트리머 중 절정의 인기를 구가한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경지에 상관없이, 상황과 불행이 겹쳤을 때 사람은 쉽게 무너지곤 한다.
하여 결국 중요한 건 그 사람의 처지와 상황이다. 그가 이룬 업적과 걸어온 길들이 아니라.
그러나 그걸 알고 있다 해서 구태여 도와주고 싶지도 않다. 그의 잘못도 아니고 그가 빌리에게 개입할 이유도 없지 않나.
빌리의 방송 보고 좀 배웠단 이유로 해 줄 만한 일은 아니다.
『레드바 님> 행님, 집에 들어가셨나요?』
『나> 아뇨. 빌리 님이랑 잠시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레드바 님> ㅇㅎ 아직 대화가 안 끝나셨구나』
『레드바 님> 배고프시겠다. 무슨 얘기 하시길래 아직도 이야기 나누고 계세요?』
『나> 글쎄요……. 말하긴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레드바 님> ㅇㅎ… 그러실 수 있죱』
다만, 이 자리를 쉽게 뜨지 못하는 건…….
『레드바 님> 근데 켄 님, 괜찮으시다면 빌리 님께 이야기 좀 전해 주시지 않으실래요?』
『레드바 님> 네뷸라 국제 대회라고 하시면 아실 거예용. 전화 안 받으셔서 부득이하게 누나 쪽으로 연락한 거 같은』
『레드바 님> 크, 드뎌 대회 열리려나 봐욧. 어느 나라에서 열리려나』
『레드바 님> 한국이길 바라는 건 좀 노양심이겠죠?』
은우는 눈을 굴려 빌리를 보았다. 지금 말해 봤자 안 통할 것이다.
애당초 듣는다 하더라도 저 상태의 빌리가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것 같진 않다. 저러다 빌리가 거절이라도 하면 레리를 비롯한 친분 있는 몇 스트리머가 분명 실망할 테고.
그건 별로 바라지 않는다. 자주 연락하진 않으나, 간간이 전해 듣는 그들 소식은 꾸준한 연습으로 가득했다. 빌리 하나 때문에 꺾이기엔 너무 아깝다.
하면 달래야 하나? 그건 자신이 없는데.
그는 목덜미를 긁적였다.
일단 진정할 때까지 기다리기라도 해야겠다. 어차피 오늘 방송은 전부 끝나 눈치 볼 것도 없었다.
그답지 않은 행동이지만… 뭐 어떤가? 손해는 없었다. 민식이랑 로건이에겐 뇌물용 간식을 좀 사 가야겠지만.
뭐, 그 앞에 있는 이에게도 단 걸 먹여 두는 게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