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팔꿈치를 테이블에 대고 양손으로는 얼굴을 받친 채 눈을 감으면 퍽 깔끔한 어둠만이 보인다. 칠흑이라고 하기엔 새어 들어오는 빛이 있는, 그러나 빛줄기 자체는 찾을 수 없는 그런 어둠이.
그런 상태에서 의자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찬수는 그것을 듣고 생각했다.
켄이 가는구나. 하긴, 가야지. 그가 볼일이 없다고 한 마당이니까.
동시에 다른 생각도 했다.
정말 최악이다. 본래 하려던 일조차 못 하고 이게 뭐 하자는 건지.
벼르고 별러서, 없는 기력 있는 기력 다 짜내서 겨우 계약 해지를 말하러 간 다이아박스 본사였건만. 정신 차리고 보니 앉아 있는 데가 카페다.
심지어 남에게 민폐 끼치는 것과 더불어 궁상은 궁상대로 떨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최악이 아닐 수 있을까? 본인이지만 진짜 쓰레기 같았다. 그가 그렇게 경멸하고 증오하던 어머니와 똑같은 짓거리를 하고 있었단 말이다. 미련만 덕지덕지 남아 끝조차 못 낸 채로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짓거리를.
그는 켄을 향해 품었던 질투와 열등감, 원망 따위를 삼켰다. 어머니가 밟았던 절차를 곧이곧대로 밟기는 죽어도 싫었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 늦지 않았단 점이리라. 그는 켄에게 그 무엇도 하지 않았다. 비록 약간의 민폐는 끼치긴 했지만, 그의 구차함을 완전히 드러내진 않았다.
그거면 됐다. 그거면 된다.
그거면…….
그리고, 허찬수의 머릿속으로 몇 가지의 단어가 파고들어 갔다.
여전히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대회라든가. 그간 기존 이미지 탈피를 위해 했던 노력이 무위로 돌아갔다든가. 켄이 등장한 이래 곧잘 들어오던 비교라든가.
그것에서 그는 아주 약간의 깨달음을 얻었다. 어쩌면 깨달음보단 사소한 진리 같은 것이 그의 뇌리를 치고 지나간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모든 문제는 켄이 아니라 그가 아닐까? 그렇게나 어머니를 경멸하고 싫어했지만, 결국 그녀의 피를 이어받은 그이므로 처음부터 이렇게 될 수밖에 없던 건 아닐까?
뜬금없는 사고방식이나 자기 혐오에 짙게 절여진 뇌는 그걸 몰랐다. 단지 한 번 든 가설은 그의 자괴감을 먹고 꾸역꾸역 설득력을 자아낼 뿐이었다.
모든 것에는 유통기한이 있다. 그건 사람에게 있어서 비단 육체적인 의미의 생명뿐 아니라 사회적 생명을 뜻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유통기한이 다 돼 버린 걸지도 모른다. 켄 때문이 아니라 본래 끝나 버릴 시기가 돼 버리고 만 거다.
그렇게 생각하자 탈력감만이 몸에 감돌았다. 밖으로 표출하지 않고 그의 머릿속에서만 오가던 생각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기력 소모는 심했다. 심지어 그 사고의 결과가 부질없음에야 더더욱.
허찬수는 음울히 고뇌했다.
이제 그는 뭐를 하면서 살아야 할까. 대체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나. 이제 와서 취업이 될 리도 없고, 어떤 일이건 게임 방송만큼 잘할 자신이 없는데. 근데 꼭 살아갈 필요가 있을까.
쏟아지는 미래의 막막함은 그를 더욱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의 호흡이 더욱 느려졌다.
드르륵.
그 상태에서 호흡과 엇갈리는 박자로 무언가가 쑤욱 치고 들어왔다. 의자 끌리는 소리였다.
“……?”
허찬수는 손을 얼굴에서 살짝 떼며 손가락 사이의 시야로 너머를 살폈다. 달칵, 하고 유리그릇 내려지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드세요. 기분이 좀 나아질 겁니다.”
꿀에 절인 빵과 초코 과자 가루가 하얀 생크림과 섞여 층진 케이크, 각기 다른 색의 마카롱 다섯 개.
“마저 이야기하죠.”
그의 고민을 묵묵히 들어 줄 청자 한 명.
▣ 200. 오롯이 진실만을 담아낸
그 자신의 결정에 따라 은우는 타인을 위로해 줘야 한다는 중대한 일과 당면했다. 다만 그에겐 공감하는 것에 대한 재능이 없었으니.
그는 그것에 절망하기보단 꼼수를 썼다. 지식인의 힘이라도 빌리고자 위로하는 방법에 대해 슬쩍 검색해 본 것이다. 부족함에 굴하지 않고 방법을 찾아내는 끈질김은 전사의 중요한 덕목이었다.
『명료화(Validation), 정상화(Normalizing), 지지(affirmation).』
그러나 안다고 해서 실행에 옮기기 쉬운 건 아니었다.
은우는 심리학자가 말하는 위로의 원칙 3단계를 읽었다. 직관적인 정보─가령 드레이크의 약점은 목 아래 비늘이 오밀조밀 결합되어 물결치는 부분이다 같은─였다면 모를까, 이런 추상적인 말은 와닿지 않는다. 전문가가 아니니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그는 조용히 노트를 종료하며 희수가 어떻게 했는지나 떠올렸다. 답은 역시 달달한 간식이었다.
“드세요. 기분이 좀 나아질 겁니다.”
은우는 빌리 앞에 디저트들을 늘어놓았다. 그의 취향이 반영된 선택이었으나, 대신 가짓수가 많다. 저 중 하나쯤은 빌리 입맛에도 걸릴 거라 생각한다.
“마저 이야기하죠.”
그는 케이크를 포크로 푹 찔렀다. 음식을 앞에 두고 지켜봐야만 하는 고문을 당하는 건 아까로 충분했다. 작전 중도 아니고 굳이 굶을 이유는 없으니까.
“무슨 이야기를…….”
“있으실 것 같아서.”
좋은 청자는 보통 시선을 마주하고 부드럽게 웃어 주겠지만, 은우는 그러지 않았다. 그래야 한다는 자각조차 없는데 뭘 바라겠는가.
그는 덤덤히 대답하며 케이크를 잘라 입에 넣었다. 시선은 케이크에 고정되어 있고 음식물을 담은 채 우물거리는 볼은 대화에 별로 집중한다는 느낌이 없다.
“…….”
그렇지만 때론 그런 무심함이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 때가 있는 법이었다. 특히 남에게 말 꺼내는 게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소가 뒷걸음질하다가 쥐를 밟았다.
“켄 님은, 진짜 절 나쁜 놈으로 만드네요.”
은우는 뜬금없는 비난에 고개를 들었다. 딱히 빌리에게 뭘 한 적은 없는 걸로 기억하는데. 상처받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어이없다는 감정이 안 들진 않는다. 뜬금없다.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아뇨. 켄 님이 잘못하신 게 있으실 리가.”
그럼? 은우는 눈을 껌뻑였다. 빌리가 그에 푸핫, 하고 웃었다. 제대로 된 웃음보단 실소에 더 가깝다.
“…원망도 못 하겠네.”
“원망하고 싶으셨습니까?”
은우는 무던한 태도로 물었다.
원망하고 싶다면 솔직히 그래도 상관없다. 원망이란 감정 하나만으론 그가 어떻게 되지 않으니까.
레리나 레드바에게 저런 말을 들었다면 조금 섭섭했을 것이나, 빌리에겐 유대는커녕 제대로 된 친분도 없다. 그런 그에게 들어 봤자 별 타격이 있을 리가 있나.
하나,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그에게 피해를 입히려 한다면 그땐 가만히 안 있을 거다. 타인에게 감정 소모 하기 귀찮을 뿐, 호구가 되어 줄 생각은 없다.
“아뇨… 안 할 겁니다. 절대 안 그럴 거예요.”
다행이라 해야 할지. 빌리는 그러지 않았다. 은우로선 아무래도 좋았다.
디저트를 건드리지 않되, 그것을 물끄러미 보던 빌리의 눈동자가 복잡해졌다.
“켄 님은 어떻게 그렇게 강합니까?”
한참 뒤, 빌리가 물었다. 그건 원망보다는 한탄에 더 가깝다. 전장에서 그만 번번이 생환하자 주변 이들이 질시에 잠겨 자주 던지던 말이기도 하다.
“저는, 아무리 해도 안 되던데.”
은우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저런 말을 던지는 사람은 대부분 그의 대답을 바라고 저러는 게 아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 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냥, 말 그대로 한탄이다, 저건.
“…그렇게 강하셔서, 제게 한 번도 연락 안 하신 거겠죠.”
푸욱-
허니브레드를 쪼개던 포크가 잠시 멈췄다. 그건 오핸데.
“하긴, 켄 님 같은 분이 저랑 어울릴 이유가 없죠. 콘텐츠는 겹치고, 실력도 제가 더 떨어져서 매번 같은 전개만 나올 테니까.”
“…어.”
확실히 빌리의 전화번호를 받아 놓고 한 번도 연락한 적이 없긴 하다. 그렇지만 그건 빌리도 마찬가지 아닌가?
은우는 억울했다. 그가 연락하지 않은 건 순전히 사람 대하기 어려워서였다. 빌리가 필요 없던 것도 물론 영향을 끼치긴 했지만.
“…하하. 이렇게 말하니까 저, 진짜 한심하네요. 왜 전 켄 님처럼 못 할까… 왜 이렇게 한심할까요.”
그가 연락하지 않은 것에 대한 해명을 하기도 전, 빌리의 말이 궤도를 틀었다. 그를 향한 불만 토로는 댐이 붕괴하기 전 나는 균열 같은 거였는지도 모르겠다.
“어머니한테 보란 듯이 성공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어요. 본인도 실패한 주제에, 내가 하려는 일 따윈 패배자의 것이라며 얕잡아 보는 게 정말 싫어서……. 당신이 그렇게 무시하던 일로 나는 이렇게나 성공했다고, 그렇게 보여 주고 싶었어요.”
봇물 터지듯 빌리의 말이 쏟아졌다. 가족 언급에 은우가 또 한 번 빵 자르던 손을 멈춘 건 당연하다.
“그랬는데 왜, 왜…….”
빌리는 숫제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나름 자존심은 있다고 곧 손으로 눈가를 짚어 가리긴 했지만, 일그러진 입가까진 가리지 못했다.
“켄 님이 부럽습니다. 켄 님이 부러워요.”
부모님이 자식에게 관심을 가진다고 해서 그게 꼭 옳은 방향의 효과를 낼까. 빌리의 말을 듣고 있자니 별로 그런 것 같진 않다.
그렇다고 그의 부모가 올바른 게 되진 않겠지만.
“저도 켄 님처럼 재능이 있었다면… 이렇게 도망치듯 그만두지 않아도 될 텐데…….”
그만둔다라. 은우는 빌리를 보았다.
“그만두실 겁니까?”
“…네.”
“왜?”
“왜긴 왜예요. 제가 켄 님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그건 이유가 안 되는데요.”
그런 논리였다면 빌리보다 실력이 낮은 스트리머들은 방송 다 접었어야 한다. 그가 나타나기 전까진 빌리가 실력파 스트리머 중 피지컬 1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실력파 스트리머에서 실력이 빠지면 남는 게 없는데, 어떻게 이유가 안 되겠어요.”
빌리의 말을 듣고도 은우는 영 이해하지 못했다.
확실히 빌리가 그보다 피지컬이 떨어지긴 한다. 그러나 언변이라던가 방송감은 빌리가 훨씬 낫지 않던가?
그가 부족한 넉살과 친화력을 실력으로 때우는 거라 생각하면, 빌리가 꼭 부러워할 것도 없었다. 압도적인 실력은 당연한 것으로 금세 받아들여지는 반면, 구김살 없는 태도는 사람을 안정적으로 정착시키니까.
빌리가 대체 왜 이걸로 고민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어머니가 사업에 실패하신 후, 구차하게 돈 꿔 가면서 새로운 사업을 벌이시고, 또 벌이시는 걸 보면서 다짐한 게 있습니다.”
그사이 빌리는 그의 사정을 허심탄회하게 고백했다.
“실패할 것 같은 순간이 오면, 구질구질하게 발버둥 치지 말고 깔끔하게 끝을 보자고.”
아마 그가 편해서는 아니리라.
다만 그들이 서로를 알고 있되 모르는 사이에 더 가깝고, 이 일을 그만두거든 다시 만날 일이 없다는 것이 그의 심정 고백을 편하게 만들었을 테다.
켄이란 대상이 그의 열등감에 일조했단 것도, ‘내가 이런 사정을 가지고 있는데 너 때문에 그만두는 거다.’라고 외치며 골탕 좀 먹어 보라는 심리도 조금은 있을 테고.
“어차피 끝은 정해졌는데, 발버둥 쳐 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본인은 추해지고 주변은 괴로워질 뿐입니다.”
대개, 인간은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자신에 의해 누군가가 좌초되면 입안이 써지곤 하니까.
아쉽게도 은우의 무심한 성격은 그런 얕은 심술이 통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태어나서, 방송할 때만큼 즐거웠던 적이 없어요. 시청자들과 교감할 때만큼 행복했던 적도 없고요. 그러니까, 절 좋아해 준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어머니처럼 비굴해지기 전에… 좋은 인상만 남긴 채 그렇게 떠나고 싶어요.”
은우는 여전히 빌리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게, 그에게 있어 실패란 다음 단계로 나아갈 단서였다. 좌절하고 체념할 무언가가 아니라.
“그게 빌리 님 생각이라면.”
그러나 그가 그렇다 해서 남에게 왈가불가할 수는 없다.
은우는 쉽게 납득했다.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서만 그런 건 아니었다. 단지, 그는 알고 있을 뿐이었다.
예술가나 개발자들, 가끔 전사 쪽에서도 나오는 소위 ‘장인’들은 어딘가 맛이 가 있다.
“어쩔 수 없죠.”
하락세를 견디지 못한 유리 멘탈이라고 누군가는 말할 수도 있겠으나, 은우가 보기엔 꼭 그렇지만도 않다.
아무렴, 장인 기질을 가진 사람들 중엔 저런 부류가 은근 많다. 추하게 망하느니 본인이 생각하기에 최선인 순간에 그만두는 부류가 꽤 있단 소리다.
공감하진 못할지언정 어리석다며 낮잡아 볼 생각은 추호도 없다. 대부분의 인간은 추해질 걸 각오해서라도 부산물인 돈과 명예 따위에 매달리는데, 저런 부류는 얼마가 걸려 있든 제 자존심을 위해 전부 포기할 수 있으니까.
말이 자존심이지, 그 분야에 얼마나 진지한 것인지는 말로 표현이 불가하다. 아둔함 따위의 단어로 깎아내릴 게 못 된단 소리다.
그건 심지어 은우가 부러워하는 순수와도 맞닿아 있는 부분이 있다.
“존중하겠습니다.”
방송을 업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수단으로 생각하는 입장으로서 더더욱 대단하게만 보이는 순수.
실력 고하를 떠나 마음가짐으로는 저런 이들을 이길 수 없다. 그러니 존중할 수밖에.
푸욱.
생크림을 가르고 허니브래드의 마지막 조각이 포크에 찍혔다.
* * *
허찬수는 꿀에 절여진 빵에 은빛 금속이 꽂히는 걸 보았다.
“존중하겠습니다.”
귓가에 메아리치듯 들려오는 목소리는 참으로 건조하다. 그게 참 속 시원 하다가도 마음속 어딘가는 부글부글 끓고 만다.
잡아 줬으면 좋겠다고, 이렇게 포기하지 말라고 다그쳐 주면 좋겠다고, 너는 그 정도로 가치 없지 않다고.
그만두겠다 말한 입장에서 도저히 부탁할 수 없는 모순된 욕망이었다.
빌리의 손이 그의 얼굴을 꾹 눌렀다. 켄에겐 그를 잡아 줄 이유가 없다.
“다만, 아쉽게 됐네요.”
문득, 지금까지 흔들림 한 점 없던 메마른 목소리가 크게 울려 왔다.
“레리 님이나 슬리퍼 님이나… 팀원분들이 슬퍼하시겠습니다.”
“……?”
얼굴을 짚은 손의 손가락 사이로 홀로그램 하나가 비쳤다. 켄이 그쪽으로 밀어 준 화면이다. 누군가와의 대화 내역이 떠올라 있다.
『레드바 님> 근데 켄 님, 괜찮으시다면 빌리 님께 이야기 좀 전해 주시지 않으실래요?』
『레드바 님> 네뷸라 국제 대회라고 하시면 아실 거예용. 전화 안 받으셔서 부득이하게 누나 쪽으로 연락한 거 같은』
『레드바 님> 크, 드뎌 대회 열리려나 봐욧. 어느 나라에서 열리려나』
『레드바 님> 한국이길 바라는 건 좀 노양심이겠죠?』
“네뷸라 워 국제 대회, 열리려는 모양인데 빌리 님이 빠지시면 의미가 없어지잖습니까.”
허찬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뷸라 워 국제 대회가 열린다고? 정말로? 그렇게 소식이 없다가 이제 와서?
왜?
그는 서둘러 그의 전자 노트를 꺼냈다. 이런저런 연락들 오는 게 싫어서 무음으로 돌려 놓고 화면에 뜨지도 않도록 설정해 놨더니 몰랐다.
정말로, 문자가 와 있었다.
“…왜?”
이제 와서 왜? 어째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간신히 전부를 포기했건만, 하필이면 지금 와서 개최라고?
빌리는 노트 화면을 한동안 응시했다. 그의 이가 앙다물리고 눈은 찌그러지듯 좁아진다. 정말로, 싫다. 어떻게 먹은 마음인데. 어떻게 토로한 심정인데.
어찌 지금 와서 그걸 비웃듯이 희망이 날아드느냔 말이야.
“안 나가실 겁니까?”
“…제가 이걸 나가 봤자 의미가 있을까요?”
그는 마른세수를 했다. 나가고 싶다. 사실은 대회에 출전하고 싶다. 출전해서 다시 활약하고, 다시 사람들의 응원을 받고 싶다.
하지만 슬럼프에 빠진 그가 대회에 나가 봤자 눈부신 성적을 거둘 수 있긴 할까? 다들 켄과 비교하는 건 아닐까? 켄이 나갔다면, 켄이 그 대신 출전했더라면. 다들 그런 말을 떠드는 건 아닐까.
“글쎄요. 저야 모릅니다.”
그거야 당연히 모르겠지. 그도 모르는 걸 켄이 어떻게 알겠는가.
허찬수는 그를 농락하는 듯한 타이밍에 화가 나다 못해, 죄 없는 켄에게도 가시를 비죽 세웠다. 티가 나진 않았으나 도저히 이 상황을 좋게 볼 수가 없었다.
정말, 이유 없이 분하다.
“다만, 제 개인적인 판단으론 빌리 님을 패퇴시킬 수 있는 건 얼마 없을 겁니다.”
이유 없이 분한데.
“다른 나라 사람들을 제대로 본 적이 없긴 한데… 당신이 가진 재능은 널리고 널린 수준이 절대 아니라서.”
위로도 아닌 평가 한 마디에 그 분함이 전부 녹아내렸다.
그보다 어리고 방송 경력도 짧은. 그렇지만 그가 절대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의 평가라서 외려 깊게 다가왔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허찬수는 켄을 보았다.
정말로 그의 재능이 널리고 널린 수준이 아닌가? 켄에 비하면 한참은 못 미치는 그인데, 그런 그의 재능이 정말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걸까?
“음.”
어딘가 고민하는 듯한 얼굴은 그와 전혀 친분도 없고, 그에게 위로를 건네줄 정도의 상냥함도 없다. 애초에 타인을 어르고 달래 기운을 북돋아 줄 수 있는 성격 같지도 않았다.
“전 앞으로 살면서 당신만큼 강한 사람을 만나긴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그 말은 더욱 가치가 있다.
오롯이 진실만을 담아낸 인정일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