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당연하지만, 다이아박스가 나섰다고 해서 사람들 전부가 납득한 건 아니었다.
아무렴, 저쪽은 여럿이서 동시에 덤볐단 사실을 철저히 숨겼다. 대신 그들이 당시에 입었던 상처를 부각시켰다. 그러자 가해자 다섯이 아닌 피해자만 다섯이 나왔다.
그게 가능한 건, 은우뿐 아니라 가해자들도 당시엔 미성년자였기 때문이다. 미성년자의 경우 기소유예를 받은 지 3년이 지나면 해당 기록의 조회가 불가능했다.
심지어 저쪽의 중심에는 학창 시절 대회에 나가 1위를 따 왔던 선배─가해자─가 있었다.
비록 그 사건 이후 딱지가 붙어서 운동계에선 퇴출당했다지만, 모르는 사람에겐 그때의 부상으로 길이 막힌 것처럼 보일 테다.
한쪽은 커다란 체구와 피지컬의 조합으로 이름 높인 스트리머, 한쪽은 출셋길이 막힌 운동계의 유망주들. 이 얼마나 떠들기 좋은 조건인가.
언론은 벌써 그를 때려죽여도 마땅할 학폭범으로 몰고 있는 중이다.
물론 은우에게 있어 언론보다 무서운 건 광고주들이었지만.
법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혹시 손해에 대해 책임을 물으면 어떡하나 싶다. 돈을 펑펑 쓰지 않아서 다행이다.
“수사 재기를 요청했습니다만… 아마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문제는 그사이에 이미지가 콱 박혀 버릴 가능성이 높다는 건데…….”
그동안, 집까지 방문한 박기철이 부정적인 의견을 내었다. 누가 보면 이번 사태가 걷잡을 수 없는 상태인 줄 알 것이다.
그러나 은우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정말 위기였다면 박기철이 이러고 있진 않을 거다. 애초에 그를 들이지도 않았을 테고.
“일단 판도를 뒤집을 방법은 있습니다.”
역시나, 박기철은 은근슬쩍 방법을 찾아내 왔다.
“문제는 이 방법의 효과를 부풀리려면 은우 씨의 동의가 필요해서요.”
그는 슬쩍 노트 화면을 띄웠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어떤 영상이었다.
“아, 이건 정말 어렵게 입수한 겁니다. 예에전에 얻어 둔 거지만요. 저쪽에서 다 삭제하려던 모양인데… 요즘은 기록이 너무 잘돼서 다행이죠.”
그건 그 당시의 순간이었다. 고1 때의 그가 유도부원 다섯을 외딴 교실에서 마주하고 있던 그 순간.
“이건… CCTV 영상인가요.”
“네.”
하긴, 요즘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다 두는 편이지. 특히 유도부나 태권도부같이 사건 사고가 터지기 좋은 장소엔 다 마련해 둔다. 그게 학교라도.
은우는 영상에 시선을 고정했다. 때마침 작은 소년의 고개가 두툼한 손에 얻어맞아 그대로 돌아갔다. 영상엔 소리가 없었지만, 귀에는 뺨 맞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지는 듯하다.
아무렴, 당시의 그가 맞는 입장이었으니 당연하다. 은우는 뺨 맞는 소리를 당사자가 되어 듣고, 볼의 욱신거림까지 느꼈었다.
“싸우는 장면까지 다 담겨 있습니다. 아, 물론 싸우는 장면까지 내보내면 반응이 그리 좋진 않겠지만요.”
화면 속 그는 뺨을 잠자코 얻어맞았다. 그걸 보며 다섯 명의 사람이 이죽거리고 비웃고 건들거렸다.
병신 새끼, 또라이, 어쩌다 이런 병자가 들어와서. 잊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잊고 있었으나, 영상을 보니 선명하게 기억이 되살아난다. 입 모양을 본능적으로 읽어 내는 탓인지도 모른다.
은우는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날 선 비난들을 묵묵히 들었다. 손가락이 목을 더듬었다.
그때, 우연하게도 화면 속 그 역시 목을 더듬었다. 함부로 손 올린다며 뺨을 한 번 더 맞았지만, 목을 쓰는 손은 내려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손이 목을 조르듯 휘감은 순간, 뺨을 한 대 더 때리기 위해 손이 날아왔다.
“하지만, 적어도 다섯이 은우 씨에게 동시에 덤비는 장면을 보여 주면 사람들은 돌아설 겁니다.”
「죽고 싶지 않아요.」
소년의, 과거 그였던 이의 손이 3학년의 손을 낚아챘다. 무의식적으로 힘이 들어갔는지, 붙잡힌 녀석 입에서 약간의 비명이 떨어졌다. 떨어졌었다.
「혼자 안 죽어요.」
「이 새끼가, 선배한테!」
작금에 이르러 나이 차이, 학년 차이로 인한 수직 구조는 거의 사라졌다. 다르게 말하면 아주 적게 존재했다.
과거 은우의 불행은, 들어간 동아리가 하필 그 소수에 포함됐다는 것이었다.
「날 죽일 자신 있어?」
「하, 시발. 너, 진짜 죽여 버린다!」
「있는 거지?」
처음엔 하나.
「분명, 있다고 했어.」
형편없이 밀리는 기색이 보이자 동시에 다섯.
꼴에 유도부라고 덩치는 컸다. 학창 시절에 1위를 빈번하게 타 왔던 이는 그 모두를 아우른 채 가장 앞장서서 그를 핍박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가 움직였을 때 가장 먼저 당했지만.
“문제는 이게 얼굴을 공개해야 한다는 점인데… 공개를 한다 해도 은우 씨 같지 않아 보이는 문제가 있습니다. 얼굴이야 비슷하지만, 체구가 워낙 다르잖습니까? 대중은 은우 씨 얼굴도 모르고 있고.”
안 믿을 사람들은 다른 사람 영상 아니냐고 외칠 거다. 환장할 노릇이지만, 정말 그랬다.
저쪽이 가해자라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야 하는데, 사람들은 항상 피해자가 맞는지에만 관심을 뒀다.
“그 문제는 제쳐 두죠. 저쪽에서 이 이후 영상을 공개했을 땐 어떡합니까.”
“절대 못 합니다. 그들은 특수 폭행 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 사람이 당하는 걸 ‘우연히’ 목격하고, 그걸 말리기 위해 왔다가 폭력에 휘말렸다는 변명을 대고 있잖습니까.”
그렇지만 영상은 5명 전원이 있는 걸로 시작된다. 전제부터가 달라질뿐더러, 말리는 장면조차 없다. 일방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려다가 역으로 당하는 것만 존재할 뿐.
“대중은 피해자가 큰 피해를 당했다 호소할 때보다, 자신들이 기만당했을 때에 더 분노합니다.”
은우가 본격적으로 그들의 팔다리를 작살 내기 전, 박 팀장은 영상을 멈췄다. 이 영상을 본 게 이번이 처음 아니지만, 이다음은 솔직히 봐도 봐도 살 떨렸다.
싸움 자체가 막 거친 건 물론 아니다. 7분 남짓한 영상에서 싸움은 총 2분도 차지하지 않을 만큼 짧았다. 그 정도로 일방적이고 압도적인 싸움이 이어졌단 소리다.
그러나 외려 그렇기에 더욱 무서웠다. 약간, 맹수가 도심에 내려와 사람 사냥하는 걸 보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귀신과 좀비 같은 공포 호러 장르가 싫은 거지, 폭력엔 별생각 없던 박기철도 이 영상만은 제대로 보기 싫었다.
그는 사람 팔다리가 그렇게 잘 부러지는 건지 몰랐다.
“거기에, 큼! 그쪽에선 이 영상을 아득바득 삭제하려 했으니까요. 가진 게 없을 겁니다. 다만 역시 저 영상 속 소년이 은우 씨인지 아닌지 갑론을박이 벌어질 것 같아서… 덧붙일 자료로 이걸 고려하고 있습니다.”
박기철은 헛기침과 함께 화면을 전환했다. 현재 이쪽 증인으로 활동 중인 사람이자, 은우의 동창인 희수에게 얻어 낸 사진이 떠올랐다.
“졸업 사진과 학급 문집은 거짓말을 못 하니까요.”
그것은 중학교 졸업 사진과 고등학교 입학식 사진, 고등학교 재학 중 찍은 사진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중반 즈음부터 폭발적으로 자라난 터라, 1학년 때의 그는 퍽 왜소한 체구를 자랑하고 있다. 적어도 5 대 1로 싸웠을 때 이길 것 같진 않은 체구다.
“마침 고3 때가 돼서야 190이 넘으셨더군요. 순차적으로 보여 주면 누구든 믿을 겁니다. 문집에 실린 거니 편집의 여지도 없고.”
중학교 말, 고등학교 1, 2, 3학년 때의 성장 사진을 차례로 보여 주면, 그 누구도 영상 속 소년이 지금의 은우임을 부정하지 못할 거다.
지금 얼굴을 공개할 필요도 없다. 은우의 동창 중 190이 넘는 남학생은 서은우 혼자였다. 저 190짜리가 자동으로 은우가 된단 소리다.
“문제는 역시 하나뿐이죠. 공개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은우는 그걸 좀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니까… 학창 시절에 찍은 사진도 있긴 있었다. 휘말리듯 찍은 거라 이 또한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면 레드바를 비롯한 스트리머랑 찍은 건 첫 단체 샷이 아니게 되나. 그는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다.
“이 방법은 별로일까요?”
그사이, 박기철은 역시 무리수였을까 곱씹어 보았다.
하기야 현재 얼굴을 공개하지 않더라도 고3 때 사진이 공개되는 순간, 현 얼굴 공개나 다름없게 된다. 몇 년 단위가 흐른 것도 아니고, 은우는 저 때보다 고작 1년 더 나이를 먹었을 뿐이니까.
기철이 보기에도 은우는 고3 때보다 얼굴선이 더 날렵해진 차이밖에 없었다.
“괜찮습니다.”
“역시 싫으시겠… 네?”
“괜찮다고 했습니다.”
은우는 전자 문집을 다시 훑었다. 고등학교야 그립진 않다. 그렇지만 중학교 1, 2학년 때 문집은 쉽게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그가 잃어버린 한때의 파편이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박기철이 시선을 마주해 왔다. 콧대에 걸린 안경이 유난히 시리게 빛났다.
“공개를 꺼리신다면, 안 하셔도 됩니다. 어차피 당시 가해자 중 한 명을 포섭한 상태니까요.”
넷은 이미 사건을 벌인 상태지만, 하나는 그래도 이쪽으로 넘어왔다. 그가 당시의 사건에 대해 증언하면 사건은 반전될 거다. 쪽수가 밀려서 조금 불안하긴 해도.
“아뇨. 이미 학교도 다 까발려졌지 않습니까.”
은우는 그런 기철의 배려를 거부했다. 이름도 알음알음 다 퍼졌을 테니, 더는 숨겨 봤자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거다.
“알아서 처리해 주세요.”
은우는 눈을 감았다. 얼굴을 공개해도 상관없게 된 지는 오래였다. 그렇지만 이런 순간에도 그는 공개할 각오가 되어 있을까?
“더 효과적인 방식으로.”
아니. 각오가 안 되었더라도 작금의 순간엔 선택권이 없다. 그게 가장 효과적인 공격이자 그가 덜 피해 입고 승리할 수 있는 길이니까.
까만 눈이 공기와 닿았다.
“용서는 없습니다.”
얼굴을 드러내는 건 이제 아무래도 좋다. 스트리머 일을 계속하든 안 하든, 그는 이미 그에 대한 두려움은 극복해 냈으니까.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걸 그의 의지가 아닌, 타인의 의도로 벗게 된 것은 조금 불쾌할지도 모르겠다. 정체를 철저히 숨기지 못한 그의 탓이 제일 크니 뭐라 탓하진 않겠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봐주지도 않을 거다.
“건드린 값은 치러야죠.”
“…절대 합의 없도록 하겠습니다.”
“네.”
정말이지, 법이 존재함에 그들은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번엔 사지가 아니라 목뼈가 부러졌을 테니.
“그렇다면 은우 씨.”
그리고, 얄미울 정도로 능글맞은 이의 눈매가 좀 더 휘었다.
“이왕 밝히는 거, 좀 더 나아가 볼 생각은 없으십니까?”
그건 이익을 위해 감성 따윈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사업자의 눈이다.
“가령, 가족사라든가?”
▣ 217. 우리 그냥
“은우야.”
낮에는 박기철이 왔다 갔는데, 저녁에는 형이 방문했다. 열린 현관문 사이로 허겁지겁 들어온 형의 얼굴은 창백했다.
“어.”
은우는 두 강아지가 작살 낸 베개를 마저 정리했다. 로봇 청소기가 베게 솜을 우물우물 빨아들이는 형상은 퍽 답답하다. 민식이랑 로건이가 청소기를 따라다니며 이리저리 방해했기에 더욱 그랬다.
“너, 괜찮아?”
“괜찮은데… 잠깐, 형.”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은우는 두 강아지를 마당으로 내쫓았다. 아까 김치 담근다고 겨울 마당에 둔 게 미안해서 마구 뛰어다녀도 뭐라 안 했더니, 그새 사고를 쳤다.
끼이잉.
“나가자, 나가자.”
집에 막 들어왔을 땐 사고를 안 치던 녀석들이 요즘은 하루가 멀다 하고 사고 치는 덕에 1일 1검거가 일상이다.
그들은 익숙하게 은우의 손에 들려 바깥으로 내보내졌다. 애당초 오늘 날씨가 가을 수준으로 온후하단 걸 알아 마당 방생에는 망설임이 없다. 그래도 자기 전엔 반드시 들여야겠지만.
끼잉.
유리창 앞에 앉아 불쌍한 눈을 하는 것도 참 익숙해 보인다. 나름 단호해진 주인은 고개를 저었다.
“잠깐 반성해.”
은우는 두 강아지를 반성하길 요구한 뒤, 몸을 돌렸다. 귀여운 장난꾸러기들을 차단했으니 이제 제대로 대화할 수 있다.
“어, 형. 뭐라고?”
“…그, 괜찮냐고.”
강아지들 덕에 걱정으로 호들갑 떨기도 애매해진 상태라, 건우는 어물어물 안위를 물었다.
은우는 눈썹을 위로 들었다가 그대로 내렸다. 하루 종일 질리도록 들은 말이었다. 그렇다고 그게 기분 나쁘냐면, 그건 아니지만.
“괜찮아.”
애당초 그의 허락을 구한 뒤, 박기철이 곧장 터트려 버린 자료는 대세를 뒤집고 있는 중이다. 아직까진 비등비등하나, 후속타로 들어갈 기사들을 생각하면 금방 해결될 거다. 시간만이 남은 셈이다.
물론 저 피해자가 켄이냐 아니냐 하는 의문도 거두되긴 했다. 그러나 박기철 말론 그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단다. 믿을 놈들은 믿고, 안 믿을 놈들은 끝까지 안 믿는다는 게 그의 논조였다.
거기에 공판일도 곧 잡힐 거다. 언론이 뭐라 하는 것과 별개로, 검사는 이번 일을 좌시할 수 없다며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다분히 정치적 이유지만, 저쪽엔 자신들을 지켜 줄 백도 없고 언론도 거하게 탔으니, 이름 날리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해 줄 거다.
“그럼 다행이지만…….”
가볍게 일을 설명하자 형은 목소리를 줄였다. 굴러가는 형의 눈은 진위를 파악하는 듯하다.
“저녁 먹었어?”
그를 눈치챈 은우는 더욱 여상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걱정이 기쁜 것과 별개로, 정말 괜찮은데 걱정받는 건 조금 귀찮다.
“어, 어? 어… 너는?”
“아직 안 먹었어.”
“…그래? 그럼 뭐 시켜 먹을까?”
그는 형의 제안에 잠시 고민했다. 오늘 김장을 막 한 터라, 저녁은 수육으로 결정한 상태였는데…….
“수육 삶고 있는데, 모자랄까.”
“어… 글쎄? 근데 웬 수육?”
“오늘 김장했어.”
“…김장?”
동생의 말을 들은 건우의 눈이 흔들렸다. 보통… 혼자 사는 사람이 김장까지 하던가?
“보통 사 먹지 않아?”
“별건 아니고, 절인 배추가 싸더라.”
“아니, 보통 절인 배추가 싸도 직접 해 먹진 않을 텐데.”
“총각김치도 만들었어.”
“배추김치만 담근 게 아니야……?”
“이왕 한 거, 무말랭이도.”
“대체 오늘 뭘 한 거야.”
그냥 겨울맞이 김장 얘기가 TV에서 많이 나오기에, 별러 두고 있었을 뿐이다. 사 먹는 것도 좋지만, 그건 MSG 맛이 심해서.
이번 사건에 대해 대략적인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요 며칠 시간이 남겠다 싶었던 것도 있다. 아무렴, 이 일이 해결되든 안 되든, 그는 최소한 며칠간은 방송을 못 할 것 아닌가. 어쩌면 영원히, 계속 못 할지도 모르고.
그래서 이참에 김장이라도 하자 하며 시켰다. 어젯밤에 주문한 것이 오늘 올 줄은 은우도 몰랐지만.
“동치미도 만들었어.”
“…아니 뭐, 혼자서 먹는데 그렇게 많이?”
“어쩌다 보니.”
김장하는 건 그도 처음이라 이것저것 보면서 했는데, 그러다 보니 점점 스케일이 커졌다. 배추 열 포기 담그는 것에 이어 총각김치, 무말랭이, 심지어는 동치미도 담그게 된 것이다.
이게 다 김치들이 맛있어 보이고, 배송은 쓸데없이 빨라서 그렇다.
“종류별로 맛이 다 다르잖아.”
화면 속 김치들은 갖가지 맛을 낼 것 같이 생겼고, 실제로도 다 다름을 은우는 안다. 그래서 한 번 하는 김에 여러 가지를 다 해 버렸다. 이것엔 빠른 배송도 톡톡한 역할을 했다.
“나중엔 열무김치도 담글 거야.”
“장사하게?”
은우는 갓김치와 깍두기, 고들빼기, 백김치 얘긴 집어넣었다. 거기까지 들었다간 형이 정말 질려 할 것 같았다.
“1년이 뭐야, 몇 년은 먹겠다…….”
“배추는 김치찌개에 넣고, 볶음밥 먹고, 밑반찬으로 먹으면 금방 동나. 몇 포기는 몇 년 묵힐 거기도 하고. 거기다, 맛있잖아.”
거기에 레드바한테 나눠 줄 생각도 있다. 인연이 끊기지만 않는다면.
“하긴, 넌 많이 먹으니까……. 아, 김치찌개 맛있겠다.”
“끓여 줘?”
“김치찌개는 익은 걸로 해야 맛있어.”
“그건 그렇지만.”
슬슬 시간이 됐다. 은우는 문을 열어 민식이와 로건이를 다시 들여보내 주었다. 잘못했어, 안 했어. 잠깐의 검문이 있었다.
“맞다. 보쌈 무랑 겉절이도 있어.”
“…우리, 그냥 수육 먹을까?”
“그래.”
결국 그들은 야들야들하게 삶아진 돼지 수육을 저녁으로 삼았다. 갓 담근 김치들은 익은 김치 특유의 신맛은 없을지언정, 아삭아삭하고 시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