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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통령 태양의 사제-4화 (4/441)

# 4

힐통령 004화

1장. 착한 사람을 위한 엔딩(4)

카이는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순백이 왜 순백인가? 하야니까 순백이다.

말 그대로 그 공간은 온통 하얀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늘도, 바닥도, 저 멀리 보이는 지평선마저 모두 하얀색이었다.

“언덕 위의 하얀 집은 들어봤어도…….”

멀뚱거리는 카이의 눈앞에 다시 한번 메시지가 떠올랐다.

[거룩한 태양의 신 헬릭은 아무에게나 지상 대리자의 권한을 주지 않습니다. 검증을 받기 위해 마력 구슬 위에 손을 올려 주십시오.]

“마력 구슬?”

고개를 갸웃거리자 바닥에서 갑자기 허리 높이 정도의 기둥이 솟아났다. 기둥 위에는 붉은빛을 뿜어내고 있는 마력 구슬이 보였는데, 그 구슬만이 순백색 세상에서 유일하게 색(色)을 지니고 있었다.

‘여기다가 손을 올리라고?’

아무 생각 없이 마력 구슬 위에 손을 슬며시 올려놓는 순간, 카이의 눈앞으로 수백 개의 영상이 떠오르며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이 영상들은…….”

카이가 미드 온라인에서 행했던 선행의 순간들을 담고있었다.

숲속에서 길을 잃고 늑대에게 포위당한 초보자를 구해줬던 일,

북적거리는 시장에서 울고 있는 소녀를 그녀의 엄마에게 데려다준 일.

독거노인 NPC를 간호하며 그가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게 도와준 일.

상인의 죽어가는 아내를 살리기 위해 늪지대에서 약초를 캐왔던 일까지!

그 모든 것이 카이가 미드 온라인을 플레이하면서 자발적으로 행했던 선행들.

‘이게 다 기록되고 있었다고?’

자신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던 기억들 아닌가.

마지막 영상이 흘러감과 함께 마력구슬 위로 문자가 떠올랐다.

[플레이어 카이의 시험 성적 채점 중…….]

[플레이어 카이의 성향은 ‘순수’, ‘선’, ‘계산적’.]

[플레이어 카이에게 친근함을 느끼고 있는 NPC 총 458명.]

[플레이어 카이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NPC 총 47명.]

[헬릭의 시험 달성률 250% 도달.]

[달성률이 100%를 초과했습니다. 추가 보상을 획득합니다.]

[태양의 사제로 전직할 수 있는 조건을 모두 갖추었습니다.]

[태양의 사제로 전직하시겠습니까?]

“…….”

카이는 입을 꾹 다물었다.

현실의 몇몇 친구들은 남을 돕는 자신을 호구라 불렀다.

물론 친구들과 사이가 안 좋았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정작 마음을 터놓을 만큼 깊은 관계를 지닌 친구는 몇 없었다.

머리가 자라면서 카이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있었다.

‘그야, 내 옆에 있으면 피곤하겠지.’

적당히 친한 관계로 지내면 때때로 이용할 수 있어서 편하지만 너무 깊어지면 피곤한 존재.

사람들은 자신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한 번은 카이도 남을 도와주는 것을 그만두려고 했으나, 차마 그러지를 못했다.

‘……꽃.’

누군가를 도와줬을 때, 그들의 얼굴에 환하게 피어나는 한 송이의 꽃.

그 웃음꽃을 보는 순간이 가장 즐거웠고, 살아있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카이는 저도 모르게 그 꽃이 뿜어내는 향기로운 내음에 푹 빠져버린 것이었다.

순백의 공간에 덩그러니 놓인 카이의 눈에서 돌연 치기가 솟아올랐다.

“……그래서 뭐 어쨌다고.”

남을 도와주는 것이 무엇이 나쁜가?

호구 같다고? 답답하다고?

그럼 곤경에 빠진 사람을 자신들이 직접 도와주면 될 것 아닌가.

하지만 타인의 선행을 비하하는 이들은 절대 먼저 행동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타인의 도움을 바라는 사람들은 대체 누가 도와주는가?

“결국 답답한 놈이 뛰는거지.”

카이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메시지창을 다시 한번 쳐다봤다.

“봐. 내가 틀린 게 아니잖아.”

보아라. 선행을 베푼 결과가 무엇인지.

0과 1로 이루어진 냉철한 데이터의 세계가 그를 인정했다.

카이가 지나온 길은 누군가 바보라 부르고, 누군가는 부질없다 부르던 길이었다.

하지만 시스템은 그의 선행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오히려 잘해주었다고 인정을 해주었다.

“내가 잘못 살아온 게…… 아니라는 말이지.”

카이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억지로 웃지 않으면 눈물이 나올 것 같았기에 그는 도리어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전직 한다. 태양의 사제로.”

선언과 동시에 하늘에서 쏘아진 태양빛이 카이의 전신을 휘감았다.

봄날의 포근함과 한여름의 열정, 가을의 고독과 겨울의 따스함.

다양한 햇볕을 쬐는 기분이 한 번에 느껴졌다.

띠링!

[직업 사제(이)가 태양의 사제로 변경되었습니다.]

[태양의 사제로 전직하여 직업전용 스탯과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선행 스탯이 개방됩니다.]

[햇살의 따스함 스킬을 획득했습니다.]

[태양의 축복 스킬을 획득했습니다.]

[태양의 갑옷 스킬을 획득했습니다.]

[추가 보상으로 '친근한 형제' 스킬을 획득했습니다.]

[신화 등급의 직업을 획득하여 모든 스탯이 10 상승하셨습니다.]

[칭호, 신의 대리자를 획득했습니다.]

“뭐가 이렇게 많아?”

메시지창이 너무 많아서 한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카이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스탯창을 불러냈다.

[카이]

직업 : 태양의 사제

레벨 : 46

칭호 : 견습 사제

생명력 : 9,100

신성력 : 17,600

능력치

힘 : 21 체력 : 91

지능 : 21 민첩 : 21

신성 : 176 선행 : 0

“……정말로 모든 스탯이 10만큼 늘어났어.”

시스템 메시지의 말처럼 태양의 사제로 전직을 하자 모든 능력치가 10개나 상승해 있었다.

‘역시 신화 등급 직업.’

미드 온라인에서는 평범한 직업으로 전직을 할 시 모든 능력치가 하나씩 오른다.

가끔씩 커뮤니티나 게임 뉴스에 공개되는 히든 직업들의 경우에는 세 개 정도가 올랐다.

‘하지만 나는 열 개나 상승했지.’

게임을 처음 시작하면 모든 스탯이 10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후로 레벨이 하나 오를 때마다 스탯 포인트가 5개씩 주어지고, 그 포인트를 이용해 마음껏 자신의 스탯을 올리는 것이 미드 온라인의 시스템이었다.

‘한 마디로 모든 능력치가 10개씩 올라갔다는 건, 레벨이 10개 오른 것과 마찬가지야.’

카이는 짜릿한 기분을 느끼며 스탯창을 다시 한번 둘러봤다.

‘아, 그러고 보니 사제로 전직할 때 이미 모든 능력치가 하나씩 올라간 적이 있었지?’

한 마디로 얼떨결에 전직을 두 번이나 해서 스탯이 총 11개나 올랐다는 소리!

스탯을 하나도 투자하지 않은 힘과 지능, 민첩이 21이나 되는 이유였다.

소가 뒷걸음치다가 쥐를 밟은 격이었지만, 기쁘기는 마찬가지.

카이는 스탯창에 새롭게 추가된 스탯을 주시했다.

“선행 스탯이란 건 뭐지? 모든 스탯이 상승했는데 이것만 그대로잖아.”

카이는 손가락으로 선행 스탯을 가볍게 터치했다.

[선행]

선행을 베풀면 상승하는 능력치입니다.

(다른 방법을 통해 스탯 포인트를 올릴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선행을 베풀어야만 올라가는 능력치다, 이건가.”

그 부분은 이해가 되었지만 무엇을 위한 스탯 인지는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카이는 찜찜한 기분을 억지로 지워내며 스킬창을 불러냈다.

[햇살의 따스함 LV.1]

대상의 HP를 치료하고 모든 상태이상을 해제합니다.

언데드/악마족 몬스터에게는 치유량 만큼의 피해를 입힙니다.

숙련도 0/100

[태양의 축복 LV.1]

대상의 공격력과 마법 공격력, 신성 공격력을 상승시킵니다.

숙련도 0/100

[태양의 갑옷 LV.1]

대상의 물리 방어력과 마법 방어력을 상승시킵니다.

숙련도 0/100

[홀리 익스플로전 LV.1]

거룩한 신의 빛을 쏘아내 적들을 심판합니다.

숙련도 0/100

“흠.”

설명만 읽어보면 사제의 기본 스킬인 힐과 축복, 빛의 방어막이나 빛의 광선과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

‘뭐, 나중에 써보면 알겠지. 그나저나 사제 때 익혔던 스킬도 사라지지는 않았네.’

카이는 새롭게 추가된 스킬 밑으로 원래 즐겨 쓰던 스킬들이 고스란히 존재하는 것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내가 스킬 숙련도 올린다고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사라졌으면 섭섭할 뻔했어.”

게다가 전직을 하면서 새롭게 획득한 칭호까지 있었다.

“칭호 도감.”

펑!

허공에 두꺼운 책 한 권이 소환되었다.

카이는 한 손으로 책을 받친 뒤, 반짝거리며 빛나는 페이지를 펼쳤다.

반짝이는 페이지는, 그곳에 새롭게 추가된 칭호가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신의 대리자]

등급 : 신화

내용 : 신을 대리하는 이에게 주는 칭호.

효과 : 선행 스탯의 수치만큼 모든 능력치 상승.

“……응?”

멍한 표정을 지은 카이는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기를 잠시, 가출했던 정신이 돌아오는 것과 동시에 목울대가 크게 출렁였다.

‘이게 대체 무슨?’

두 눈을 부릅뜬 카이는 다시 한번 칭호의 효과를 살폈다.

교과서를 이렇게 읽었다면 진작 한국대에 합격했을 정도의 집중력!

‘…이게 사실인지 실험을 한 번 해보고 싶은데, 선행 스탯이 없어.‘

그렇다면 우선 선행 스탯부터 쌓아봐야 한다.

“그럼 이곳을 나가야겠지. 출구는 어느 쪽이지?”

사방이 순백으로 이루어져 있는 검증의 공간에는 당연히 문이라 칭할 만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카이가 나가고 싶다고 생각을 하는 순간,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검증의 공간에서 나가시겠습니까?]

“어.”

[이동할 장소를 선택해 주십시오.]

“이런 것도 해주나?”

역시 고객을 만족시키는 건 애프터서비스!

가볍게 감동을 먹은 카이는 자신이 원래 활동하던 영지를 터치했다.

[프리카 마을로 이동합니다.]

“그래.”

파앗!

새하얀 빛이 터지며 카이의 신형을 감싸 안았다.

태양의 사제로 전직을 마치느라 정신이 없던 카이는, 수없이 떠오른 메시지창 밑에 떠오른 몇 줄의 문장을 미처 읽지 못했다.

[올바르지 않은 경로로 직업을 획득했습니다.]

[태양의 사제(신화)의 능력이 일부 봉인됩니다.]

[봉인된 능력은 차후 전직 관련 NPC와 만나 해제하실 수 있습니다.]

***

“파티원 구합니다! 레벨 45 이상 사제나 드루이드 구해요!”

“탱커 구합니다! 붉은 놀 세트 5부위 이상 장비한 단단한 분 모셔요!”

“붉은 놀 치프 레이드 하실 딜러 한 분 구해요! 당신만 오면 출발!”

“모험가분들을 위해 마론 제과점에서 갓 구운 빵 팔아유! 달달한 팥이 들어 있는 부드러운 빵이 5개에 3실버!”

정신을 차리자 주변은 순식간에 시끌벅적한 장소가 되어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카이가 파티원들을 구했던 프리카의 중앙 광장에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광장에는 NPC와 플레이어들이 한데 어우러져 파티원을 구하거나 물건을 거래하고 있었다.

“자 그럼…… 아, 그러고 보니 추가 보상을 확인 안 했구나.”

신의 대리자 칭호를 장착한 카이는 추가 보상을 확인했다.

[친근한 형제]

태양신을 믿는 NPC들이 당신에게 친근감을 느낍니다.

“친근감을 느낀다? 추가 보상치고는 뭔가 애매한데…….”

고개를 갸웃거린 카이는 곧장 스킬을 활성화했다.

‘사용이 된 거야, 안 된 거야?’

자신의 몸을 훑어봤지만, 딱히 눈에 띄는 변화는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고민을 하던 카이가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채소 가게의 로라 아줌마가 태양교 신자였으니 채소 가게에 가보면 확인이……?’

생각을 이어가던 카이는 주변의 공기가 뒤바뀐 것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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