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힐통령 019화
10장 프리카의 영웅(1)
신성한 빛 덕분에 어둡지는 않았으나, 동굴 특유의 적막감 때문에 괜히 오한이 들었다.
‘폐가를 탐험하면 이런 기분일까.’
해본 적은 없지만, 을씨년스러운 산골짜기의 폐가를 탐험하는 기분.
눈을 가릴 쿠션이 없으면 공포 영화도 보지 못하는 카이로서는 반갑지 않은 곳이었다.
내부를 천천히 걸어가던 카이의 눈에 낯익은 장소가 보였다.
“여긴…….”
순식간에 앞으로 달려간 카이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해. 헬릭의 시험에서 데이록이 몸을 기대고 있던 벽이다.’
단순히 비슷하게 생긴 장소라고 하기에는 바위의 위치나 생김새가 똑같았다.
“하지만…….”
데이록이 깔고 있던 모포나 피워놨던 모닥불의 흔적은 일절 없었다.
카이는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길눈이 밝은 그가 에이미와 처음 만났던 장소에 도착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네.”
시체도, 뼈도.
그 어떠한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같은 공간일뿐. 환상이었구나.’
이어서 안도감이 느껴졌다.
“후우, 다행이다.”
그것이 모두 환상이라는 건, 에이미가 꽃다운 나이에 이 차디찬 바닥에서 죽지 않았다는 소리였으니까.
‘그럼 이제…….’
고개를 돌린 카이의 입가에 미소가 내려앉았다.
잊혀진 신전과 연결되는 포탈이 여전히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장소 자체는 같아.’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카이는 이제 익숙하게 부하들을 소환했다.
[놀 스켈레톤 6마리가 소환됩니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카이는 그들에게 버프를 걸었다.
딱딱딱!
따다닥!
기쁘다는 듯 턱뼈를 움직이는 놀 스켈레톤들!
카이는 그 모습이 기특하다는 듯 싱긋 웃으며 턱을 까딱였다.
“자, 그럼 이제 수색해.”
딱, 따닥?
“목표는 아이템이다.”
명령을 받은 놀 스켈레톤들이 꽤 넓은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무너진 벽면이나 부서진 돌덩이를 뒤집으며 아주 샅샅히 수색했다.
3분이 흘렀을까.
놀 스켈레톤 하나가 제법 고급스러워 보이는 투구를 들고 카이에게 달려왔다.
“오!”
확실했다.
그것이 아우의 투구였다는 것을 기억해낸 카이가 미소를 지었다.
“아이템 감정.”
[강철 투구]
등급 : 레어
방어력 320
마법 방어력 289
착용 제한 : 레벨 45 이상, 힘 93 이상.
내구도 2/84
“역시.”
레벨 제한 45의 레어 투구! 최소 100만 원은 받을 수 있는 레어 아이템이다.
카이는 투구를 발견한 놀 스켈레톤을 칭찬했다.
“잘했어. 넌 수색 작업에서 열외다. 푹 쉬렴.”
덜그럭, 덜그럭!
어깨뼈를 들썩이며 기뻐하는 놀 스켈레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다른 놀 스켈레톤들의 움직임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역시 건전한 경쟁은 일의 능률을 높이는 법이지.’
카이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느긋하게 기다렸다.
이어서 발견된 나머지 두 개의 레어 아이템도 그의 수중에 들어왔다.
[미풍의 신발]
등급 : 레어
방어력 95
마법 방어력 87
이동 속도 25 상승
민첩 +3 상승
바람의 힘이 미약하게나마 깃든 신발입니다. 신는 것만으로도 이동속도가 빨라집니다.
착용 제한 : 레벨 46 이상. 민첩 100 이상.
내구도 15/97
[학자의 장갑]
등급 : 레어
방어력 87
마법 방어력 82
주문력 5% 상승
지능 +2
고명한 학자이나 마법사였던 ‘스티그마’가 강의를 할 때 즐겨 쓰던 장갑입니다. 그의 경험이 깃들어 있어 사용자의 주문 완성도를 약간이나마 높여줍니다.
착용 제한 : 레벨 43 이상. 지능 90 이상.
내구도 7/79
“……!”
카이는 이제야 왜 그들이 자신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는지를 이해했다.
“이런 아이템들을 드랍했다면, 눈이 돌아갈만 하지.”
물론 그것이 그들을 용서해줄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자, 그럼 이제 가자.”
이 아이템들은 이제 각자 주인의 품으로 떠나야만 했다.
“얼마에 팔리려나?”
물론 돈 많은 새 주인의 품으로 떠날 것이다.
***
카이는 산을 내려오는 내내 긴장감을 늦추지 못했다.
혹시나 붉은 노을 길드에서 다른 길드원들을 보낸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던 탓이었다.
그래서 프리카 마을에는 거의 점심 무렵이 되어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그래도 무사히 돌아왔네.”
카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인벤토리를 다시 한번 쳐다봤다.
번쩍이는 레어 아이템의 모습만 봐도 배가 저절로 불러왔다.
‘우선 경매장에 등록하는 건 나중에 해야겠다.’
경매장 특성상 판매자와 구매자의 정보는 모두 익명 처리가 된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에 따르면 경매장 주변엔 붉은 노을 길드원들이 쫙 깔려있을 것이다.
‘괜히 긁어부스럼을 만들 이유는 없지.’
며칠 후에 판다고 가치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카이는 아이템들을 안전하게 다른 장소에서 팔기로 결정했다.
살짝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카이는 곧장 대장간으로 향했다.
막심은 잠시 의자에 앉아 땀을 닦으며 목을 축이고 있는 중이었다.
“왔나? 요즘 자주 보는 것 같군.”
“하하, 그러네요. 오늘도 좋은 재료를 구해왔습니다.”
“오, 그런가? 그럼 우선 재료부터 보도록 하지.”
대장장이 막심은 웜 리자드가 남긴 전리품들을 자세히 살펴봤다.
그것들을 유심히 살펴보던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네라서 해주는 말이니 새겨 듣게. 이 재료들을 들고 도시에 가게나. 그곳이라면 이곳에서 만드는 것보다 더 높은 품질의 장비를 만들 수 있을 거야. 시설이 열악한 이런 시골에서 온전히 다룰 수 있는 재료들이 아니거든.”
“아……!”
한 마디로 장비가 충분하지 못해 이 재료들을 완벽하게 다룰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카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재료들을 회수했다.
“그럼 아저씨의 말처럼 도시로 가야겠군요.”
“솔직히 말해서 나도 아쉽네. 하지만 그게 자네를 위해서는 더 좋은 선택일 거야.”
“충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뭘. 다른 도시에서도 지금처럼 행동한다면, 자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또 잔뜩 생길 걸세.”
만약 카이의 마을 평판도가 높지 않았다면 절대 해주지 않았을 충고였다.
카이는 감사한 마음으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대장간을 나왔다.
‘그럼 더 이상 이 마을에 있을 이유는 없어.’
촌장인 분터에게 찾아가 퀘스트 완료를 보고한다면, 더 이상 붉은 노을 길드가 도사리고 있는 이곳에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레벨도 다음 지역으로 건너가기에 적당한 레벨이 되었으니, 더 큰 세상으로 갈 시간이었다.
“우선은 퀘스트 완료부터.”
카이는 촌장의 집 쪽으로 이동했다.
***
“고맙네, 정말 고마워! 자네야말로 이 마을의 영웅일세!”
띠링!
[프리카 마을을 구하라!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완료하셨습니다.]
[110,000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10골드를 획득했습니다.]
[프리카 마을의 모든 유료시설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스페셜 칭호, ‘프리카 마을의 영웅’을 획득했습니다.]
카이는 자신을 얼싸안고 기뻐하는 분터 촌장에게 마주 웃어줬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주민들이 언제까지고 두려워하면 안 되는 거니까요.”
“아암. 그렇지. 그렇고말고! 하지만 그런 일을 이렇게 멋지게 해낼 수 있는 이가 어디에 있겠는가!”
분터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카이의 손을 쓰다듬었다.
“혹시라도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하게. 무엇이든 도와줄 테니!”
“아, 사실 제가 이번 의뢰를 끝으로 다른 도시로 거점을 옮길까 합니다.”
“이런…….”
분터는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혹시 생각해 둔 도시가 있는가?”
“음…….”
카이는 근방에서 자신이 갈 수 있는 도시 중에, 레벨 업도 편하게 할 수 있는 곳을 떠올렸다.
‘대영주가 통치하는 바덴은 엄청 큰 도시라서 활동하기 편하겠지만 너무 멀고 거길 가기엔 내 레벨도 너무 낮아. 그렇다면 가까우면서도 규모가 적당한 글렌데일인가.’
결론을 내린 카이는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글렌데일 쪽으로 먼저 가보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 잘되었군!”
분터는 환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자신의 책상에 앉아 서랍을 열었다.
“글렌데일을 통치하는 영주님과는 제법 안면이 있는 사이이거든.”
“촌장님께서요?”
카이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바덴 성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글렌데일도 제법 규모가 큰 도시였다.
때문에 프리카 마을의 촌장이 글렌데일의 영주와 친분이 있다는 건 제법 의외였다.
분터는 뿌듯한 표정으로 봉투 하나를 건넸다.
“현 글렌데일의 영주님이신 아르센 남작님께서는 어렸을 때 패트릭 님의 무덤을 방문하고자 프리카 마을에 오신 적이 있네. 그때 닿은 인연이 어쩌다 보니 지금까지 이어졌네.”
“패트릭? 그게 누구입니까?”
“이런, 그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나?”
분터 촌장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설명을 했다.
“미안하네. 태양교의 사제라고 해서 당연히 알고 있을 줄 알았네만…… 패트릭 님은 태양교의 전설적인 성기사라고 불리는 분이시네. 수백 년 전 마족들의 군세가 대륙을 침공했을 때 활약했던 영웅 중 한 분이시지. 게다가 이 마을을 세운 분이시기도 하네.”
“태양교의 전설…….”
“그분의 무덤이 마을 근처에 성대하게 지어져 있네. 그래서 그분을 존경하는 이들이나 수행 중인 사제들이 성지들을 순례할 때 한 번씩 방문한다네.”
“그렇군요.”
적당히 맞장구를 쳐준 카이는 분터 촌장이 내미는 봉투를 건네받았다.
촛농으로 입구가 봉해져 있는, 이런 시골 마을과는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운 편지지였다.
“이건 뭡니까?”
“내 추천장일세. 그걸 들고 아르센 남작님에게 간다면 자네를 도와주실 걸세.”
“……!”
한 마디로 이 봉투는 무려 귀족과 만날 수 있는 퀘스트 아이템인 셈이었다.
일개 병사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플레이어가 귀족과 만나기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와 같다.
그런데 귀족이란다. 그것도 보통 귀족도 아니고 무려 글렌데일을 통치하는 남작!
‘피고 있다, 내 인생의 꽃이 활짝 피고 있어!’
22년 동안 물만 냠냠 처먹던 꽃이 드디어 그 찬란한 꽃잎을 만개했다.
카이는 애정이 듬뿍듬뿍 담긴 눈빛으로 분터를 쳐다봤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촌장님.”
“나야말로 자네의 노고를 잊지 않겠네. 고맙네. 언제든지 들려주게.”
촌장은 집 앞까지 나와 카이를 배웅했다.
“아, 그러고보니 촌장님.”
“음? 왜 그러나.”
분터 촌장의 질문에 카이는 잠시 그의 귀를 빌려 속삭였다.
“호오…… 붉은 노을이라고? 알겠네. 내 그 놈들을 지켜보겠네.”
띠링!
[프리카 마을에서 붉은 노을 길드의 영향력이 대폭 하락했습니다.]
[붉은 노을 길드원들을 향한 분터 촌장의 호감도가 매우 낮아졌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카이는 촌장의 집을 떠났다.
물론 마을을 바로 떠나지는 않았다.
마을을 한 바퀴 돌며 안면이 있는 NPC들과 모두 인사를 나눴고, 보상으로 받은 시설 무료 이용권을 통해 챙길 수 있는 포션과 수리 키트 등을 양심이 허락하는 선까지 최대한 챙겼다.
‘이제 준비는 끝났어.’
모든 준비를 마친 카이는 프리카 마을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으로 올라갔다.
“프리카 마을…….”
30레벨 후반에 마을에 들어와서 55레벨인 지금까지 생활했다.
동시에 그가 게임을 하면서 가장 오랜 기간 머물러 있던 지역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인생이 뒤바뀐 장소이다.
“고마웠다.”
이곳에는 많은 추억이 있다.
많은 플레이어와 파티를 맺어 사냥을 했고, 마을 NPC의 이름은 모두 외우고 있을 정도다.
모습만 봐도 질리던 놀이었지만, 막상 떠난다고 생각하니 그조차도 그리웠다.
‘하지만 지금은 떠나야 할 때야.’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다.
그리고 이별이 있어야 새로운 만남도 생기는 법.
“…….”
언덕위에는 더 이상 마을에 처음 들어올 때의 어수룩한 초보자는 없었다.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닫고, 노련해진, 훌륭한 모험가 한 명만이 존재했다.
잠시 마을의 풍경을 눈에 담던 프리카의 영웅은, 조용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