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힐통령 022화
11장. 글렌데일(2)
“본론이라고 하시면……?”
“어차피 나에게 원하는 것이 있어서 찾아온 것 아닌가?”
아르센 남작은 웃으면서 별것 아니라는 듯 물었지만, 카이는 바짝 긴장했다.
‘아무리 편하고 쉬워 보여도. 이 사람은 귀족이야.’
미드 온라인의 NPC들은 철저한 신분제로 나뉘었다.
그리고 눈앞의 남자는 지금 카이가 밟고 있는 땅의 주인.
‘저 사람 좋아보이는 얼굴 아래에 무슨 생각이 도사리고 있을 지는 아무도 몰라.’
침을 꿀꺽 삼킨 카이는 머리를 굴렸다.
‘돌려 말하는 걸 좋아할까? 아니, 어쩌면 구차한 걸 싫어하는 성격일 수도 있어.’
잠시 생각을 정리한 카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예, 솔직히 말씀드리면 남작님의 말이 맞습니다.”
“그 말은 역시 나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는 소리겠지?”
“예.”
“훗, 시원해서 좋군. 가감 없이 말해보게.”
카이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구차하게 빙빙 돌려 말하는 건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는 예상이 꼭 들어맞은 것이다.
긴장이 한결 풀린 카이는 편하게 말을 꺼냈다.
“우선 던전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습니다. 그리고 남작님께서 혹시 무언가로 인해 고민에 빠지셨다면, 제가 그 고민을 해결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 어려운 요구는 아니군.”
아르센 남작이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자 카이의 안색이 환해졌다.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릴 줄이야!’
하지만 기쁨도 잠시, 아르센 남작이 다음으로 내뱉은 말에 카이의 얼굴이 미묘해졌다.
“그런데 분터 촌장에게 이 말을 듣지는 못한 모양이군?”
“예? 말이라뇨?”
“그의 추천장을 들고 온 사람은 내가 내리는 시험 한 가지를 통과해야 도움을 받을 수 있네.”
“그, 그런 말은 처음 들어봅니다만…….”
“하하. 이거 분터 촌장도 제법 늙은 모양이군. 이 중요한 이야기를 빠트리다니 말이야.”
아르센 남작은 차를 홀짝이더니 말을 이었다.
“만약 내 시험을 받는 것이 영 께름칙하다면 거절해도 좋네. 다만 그 경우에는 자네가 원하는 것들을 얻어낼 수 없겠지.”
“으음…….”
예상치 못한 상황에 카이가 신음했다.
분터 촌장, 나이가 지긋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이렇게 중요한 말을 빠트리다니!
하지만 아르센 남작이 무엇을 요구한다고 하더라도, 애초에 이 자리에서 절대적인 갑은 카이가 아닌 남작이었다.
“시험을 받겠습니다. 애초에 중요한 정보들을 아무런 대가 없이 받으려고 한 제 욕심이 문제겠지요.”
“호오, 남자답구만.”
아르센 남작이 싱글벙글 웃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 긍정적인 사람이야. 마음에 드네. 사실 시험이라고 해봐야 별거 없어.”
곧장 자신의 책상으로 다가간 그는 서랍에서 초상화 한 장을 꺼내 들었다.
“받게나.”
[밀튼의 초상화를 획득했습니다.]
그곳에는 깐깐해 보이는 남자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이 초상화, 대체 무슨 의미지?’
잠시 남작의 눈치를 살피던 카이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칭찬을 남발했다.
“허어. 풍채가 장성하신 것이 그야말로 영웅의 기개가 느껴지는 대단한…….”
“자네가 잡아야 할 건달일세.”
“콧수염부터 졸렬해 보이는 게 딱 좀도둑의 상이옵니다.”
카이가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자, 남작이 다시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내 도시에서 불법 도박장을 운영하기 시작한 건달일세. 조만간 병사들을 보내 따끔하게 혼을 내려고 했는데…… 이 일, 자네가 한 번 맡아보게.”
“생포해 오면 되는 겁니까?”
“그건 전적으로 자네의 판단에 맡기도록 하지. 죽여도 되고.”
띠링!
[글렌데일의 치안 강화]
난이도 : D+
아르센 남작은 자신의 영지에서 불한당 짓을 하는 밀튼을 곱게 보지 않습니다. 그를 적당히 혼내줍시다.
퀘스트 보상 : 던전의 위치나 히든 퀘스트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 할 수 있음.
실패 페널티 : 아무런 보상도 획득할 수 없음.
퀘스트창을 읽어내리던 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습니다.”
[퀘스트가 수락되었습니다.]
***
“어디 보자…….”
카이는 아르센 남작에게 받아든 불한당의 정보를 차근차근 읽었다.
“밀튼은 글렌데일에서 가장 큰 도박장 사장이네.”
퀘스트가 생각보다 귀찮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솔플을 하려면 본격적인 무기술을 하나쯤은 배워야 될 텐데.’
사제의 기본 무기인 메이스는 사실 전투에서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추가 피해를 입히는게 힘드니까.’
도검류에 베이면 그 즉시 출혈 상태에 빠지며 추가 피해를 입는다.
하지만 메이스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게다가 무기에도 신성 스탯과 체력 스탯이 주로 달리다보니, 사제들이 메이스를 장비하는건 전투를 위함이 아니라 힐 관련 스킬들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가장 중요한건, 내가 아직 메이스를 다루는 스킬이 없어.’
물론 미드 온라인에서는 반복된 행동으로도 스킬을 생성시킬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최소한의 규격이 필요했다.
‘한 마디로 동작이 일정해야 한다는 소리지.’
마구잡이로 무기를 휘두르며 사냥을 해봤자 백날이 지나도 스킬은 생성되지 않는다는 소리.
‘맨 땅에 헤딩을 하는거라면, 메이스를 배우는 것보단 훨씬 위력적인 무기술이 더 많아.’
간단한 예로 창술과 검술이 있다.
카이는 어떤 무기술을 배워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솔플을 하는 거라면 역시 검이나 창이 가장 무난하긴 한데.’
우선 이와 같은 문제는 전문가에게 묻는 것이 빠르다.
카이는 곧장 미니맵을 펼쳐 대장간의 위치를 수색했다.
‘이참에 웜 리자드의 뼈들도 의뢰를 맡겨야 하니까 말이지.’
프리카의 대장장이인 막심은 기술과 설비의 부족으로 이 재료들을 다루지 못했다.
그는 대도시의 대장장이를 찾아가라고 충고해 준 바가 있었다.
‘글렌데일 정도면 충분히 대도시야.’
가공된 장비 중 쓸 수 있는 장비는 쓰고, 나머지는 경매장에 올려서 팔면 된다.
‘조만간 지갑이 두둑해지겠어.’
카이는 지도를 보며 대장간으로 이동했다.
***
어느 도시가 되었든 간에, 대장간 근처로 다가가면 들려오는 소리는 항상 같다.
쇠를 두드리는 망치질 소리, 광석이라 불리는 덩어리들이 장비로 탈바꿈을 하는 탄생의 소리.
그런 소리가 들려와야 정상이다.
하지만 글렌데일의 대장간은 무언가 달랐다.
“이렇게 조용한 대장간은 또 처음이네.”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린 카이는 미니맵을 확인했다.
‘대장간의 위치는 여기가 맞는데.’
미니맵은 확실히 눈앞의 건물이 대장간이라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응당 들려야 할 망치질 소리도, 연기가 흘러나와야 할 화덕도 조용했다.
그때 대장간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거 참, 뭔 NPC가 저 따위냐? 이거 운영자한테 신고하는 각 아니냐?”
“게임 하면서 NPC가 일 안 한다고 배짱부리는 건 처음 봤다.”
투덜거리며 대장간을 나오는 유저들.
카이는 그들을 불러 세우고는 연유를 물었다.
“저기, 그게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NPC가 일을 안 하다뇨?”
“그쪽도 대장간에 볼일 있어서 왔나 봐요?”
“예. 장비 제작을 맡기고 싶어서요.”
“포기하세요.”
그들은 씩씩거리며 대장간을 노려봤다.
“대장장이랍시고 꼬장꼬장한 노인네 한 명이 있긴 한데, 장비 제작은커녕 수리도 안 해줍니다.”
“예? 하지만 여기 대장간이잖아요?”
“저희 말이 그겁니다. 대장간에서 대장장이질 하라고 만들어진 NPC 주제에…….”
“아침부터 열 받네. 그냥 경매장 가서 수리 킷이나 사자.”
유저들이 사라지자 카이는 멍한 표정으로 대장간을 쳐다봤다.
‘마을의 NPC가 일을 안 한다고? 대체 왜?’
이런 경우는 카이도 처음이었다.
보통 NPC의 건강이 나빠 일을 못 하는 경우, 그 병을 치료하는 퀘스트가 게시판에 등록된다.
하지만 유저들의 반응을 보니 그것조차 아닌 듯하다.
‘그럼 내 웜 리자드 장비는?’
카이는 황급히 커뮤니티를 열어 대륙 지도를 살폈다.
‘조그마한 마을들을 제외하고, 여기서 가장 가까운 도시는…….’
무려 20일 거리에 있는 물의 도시 아쿠에리아!
카이의 안색이 꺼멓게 죽었다.
“뭐야, 여기서 장비 제작을 못 하면 저기까지 가야 돼?”
물론 웜 리자드를 해치우고 10골드를 보상으로 받았기에 돈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텔레포트의 가격은 심장에 해로운데.’
침을 꿀꺽 삼킨 카이가 커뮤니티를 통해 텔레포트 요금을 미리 계산해봤다.
‘글렌데일에서 아쿠에리아까지는 무려 9골드.’
한화로 90만 원!
카이의 손이 제멋대로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용돈도 못 받는 백수가 지불하기에는 턱도 없는 금액이었다.
“방법이 없나?”
물론 모든 일에는 방법이 있다.
카이의 고개가 굳게 닫힌 대장간으로 돌아갔다.
‘만약 대장장이가 일을 안 한다면…….’
일을 하게 만들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굳이 도시를 옮기지 않아도 되는 것이 당연했다.
‘좋아, 한 번 해보자.’
카이는 곧장 커뮤니티를 뒤져 글렌데일의 대장장이에 대한 정보를 모두 조사했다.
‘대장장이의 이름은 솔리드. 장비의 품질은 왕실에 납품할 정도로 뛰어나. 그런데 왜 갑자기 일을 그만둔 거지?’
그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을 뒤져보아도 나오지가 않았다.
‘이건 직접 부딪혀 볼 수밖에 없겠어.’
카이는 대장간에 노크를 세 번 하고는 문을 살짝 열었다.
“실례 하겠습…….”
“꺼지라고! 왜 말귀를 못 알아들어!”
문을 열고 대장간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맹렬한 속도로 무언가가 날아왔다.
기겁을 한 카이는 숨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까아앙!
카이의 머리통 대신 벽면을 후려친 쇠망치는 돌 부스러기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뭐, 뭐야…….”
머리카락이 쭈뼛 선 카이가 몸을 부르르 떨고 있자, 안쪽에서 누군가가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