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23화 (23/441)

# 23

힐통령 023화

12장 울지 않는 화덕(1)

“응? 뭐야, 방금 그놈들이 아니군.”

술병을 들고 코가 시뻘게져 있는 노인이 걸어나왔다.

몸집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온몸에 가득 들어차 있는 근육이 그를 얕볼 수 없게 만들었다.

그 노인은 불을 닮아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커피를 타온 바리스타에게 물의 향기가 물씬 나듯, 평생을 불 옆에서 생활한 그에게서는 화끈한 불의 냄새가 난 것이다.

‘……그리고 성격도 불같네.’

바닥에 떨어진 망치를 주워든 카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혹시 이곳의 대장장이신 솔리드 님이십니까?”

“맞다. 망치를 던진 건…… 흥! 내 실수다.”

사과를 하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은 지, 노인은 오히려 소리를 치듯 사과를 마쳤다.

“뭐, 여기 온 걸 보면 뭔가 원하는 게 있는 것 같은데, 미안하지만 장사는 접었다.”

노인은 반론의 여지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날 카이가 아니었다.

‘뭔가 이유가 있어.’

게시판에 따르면 이 대장간은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정상적으로 영업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난 일주일 사이에 저 노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뜻이다.

‘그게 무엇인지 알아내야 해.’

NPC의 문제를 알아차리고, 그들에게 공감을 하며 퀘스트를 끌어내는 것.

그것은 미드 온라인의 노련한 플레이어라면 누구나 갖고 있어야 할 기술이었다.

카이는 괴팍한 노인을 눈앞에 두고도 미소를 지으며 망치를 건넸다.

“실력이 굉장히 출중하시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라시온 왕실에도 직접 납품을 하신다고.”

“입에 발린 소리는 좋아하지 않는다.”

상대와의 거리를 좁히는 데 가장 잘 먹히는 것은 역시 칭찬을 마구마구 퍼붓는 것!

실제로 솔리드는 퉁명스럽게 대꾸했지만 자부심이 담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해.’

조금 더 솔리드의 호감을 끌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카이는 그 방법을 찾기 위해 대장간 안을 열심히 둘러봤다.

“뭘 그리 둘러보는 거지? 어쨌든 영업은 하지 않으니까 썩 꺼져라.”

카이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던 솔리드가 명백한 축객령을 내렸다.

조급해진 카이의 눈에, 한 줄기 구원의 빛처럼 느껴지는 무언가가 들어왔다.

‘저건!’

대장간의 구석 벽에 걸려있는 조그마한 장식 하나.

그것은 바로 태양을 조각한 장식품이었다.

그 뜻은 솔리드가 태양교의 신자라는 뜻!

대번에 얼굴이 밝아진 카이가 친근한 형제 스킬을 사용했다.

“음?”

당장에라도 카이를 쫓아낼 것 같던 솔리드의 표정이 살짝 누그러들었다.

이를 본 카이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어, 통한다!’

반면 솔리드는 자신의 감정 변화 상태를 이해하지 못했는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친근감을 강제로 느끼게 한다는 것은 상당히 미묘한 부분이다.

카이는 그의 기분이 다시 나빠지기 전에 재빨리 말을 붙였다.

“솔리드 님. 그러지 마시고, 저에게 어떤 일이 있으셨는지 설명을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왜 그런 말도 있잖아요.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절반이 된다고.”

말을 하는 카이는 연신 방긋방긋 미소를 짓고 있엇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했던가.

솔리드는 잠시 고민을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모험가 놈들은 믿지 않아. 게다가 처음 보는 너를 어떻게 믿고 내 고민을 말한단 말이냐?”

“말씀대로 전 비록 모험가이지만, 태양신 헬릭의 말씀을 따르는 충실한 종입니다. 저에게 고민을 털어놓으시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한결 나아지시지 않을까요?”

카이가 태양교의 사제라는 말에 솔리드가 그의 전신을 훑어봤다.

“……태양교의 사제라고?”

“예. 신성한 빛.”

신성력을 머금은 밝은 빛이 떠오르며 먼지 덮인 작업대를 밝게 비췄다.

“…흥. 네놈은 모험가 중에서도 제법 싹수가 있어 보이는군. 잠깐 정도라면 이야기를 해도 괜찮겠어.”

솔리드의 표정은 여전히 퉁명스러웠지만, 그는 몸을 돌려 대장간 안쪽으로 이동했다.

“뭐해! 안 따라오고.”

“네! 갑니다!”

카이가 눈을 반짝이며 그의 뒤를 쫓았다.

***

“알아서 대충 앉아라.”

솔리드는 술을 하도 마셨는지 연신 비틀거리며 소파에 무너지듯 앉았다.

대충 주변의 의자 하나를 끌어와 앉은 카이는 공방을 둘러봤다.

‘……춥다.’

보통 공방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뜨겁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24시간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화덕의 열기는 일반인이 감당하기에는 무척 뜨겁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의 화덕은 마치 죽어 있는 것처럼 고요했다.

불꽃들을 세차게 뿜어댔을 화덕은 활동을 정지한 채 오랜만의 휴식을 만끽하고 있었다.

흔들흔들.

술병을 흔들어보던 솔리드는, 병이 비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것을 대충 바닥에 던지며 눈을 감았다. 표정을 보니 금방이라도 잠에 들 것 같았다.

‘이런!’

지금 잠들면 깨어날 때까지 꼼짝없이 기다려야 한다.

마음이 급해진 카이가 재빨리 햇살의 따스함 스킬을 사용했다.

[햇살의 따스함 스킬을 사용했습니다.]

[대상의 체력이 회복되었습니다.]

[대상의 '숙취' 상태가 해제되었습니다.]

“으음? 갑자기 술이 확 깨는군.”

머리를 두어 차례 흔든 솔리드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대충 일주일 정도 지났나 싶군. 공방에 한 꼬맹이가 찾아왔다. 본인을 대장장이라고 주장하는 웃기는 놈이었지. 망치를 휘두를 힘도 없어 보이고, 오래도록 불을 가까이 한 냄새조차 나지 않는 풋내기 모험가였어.”

‘모험가…… 그럼 나 같은 플레이어라는 말인데?’

카이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하던 솔리드는 뭔가 기분 나쁜 기억을 떠올린 듯, 미간을 찌푸리더니 말을 이었다.

“그래, 그 건방진 녀석이 나에게 대결을 요구하더군.”

“……대결이요?”

카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검사들이 대결을 한다면 이해를 하겠지만, 대장장이들이 대결이라니?

솔리드가 대충 손을 휘두르며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말이 대결이지. 각자 똑같은 화덕과 재료들을 이용해서 무기를 하나씩 만들어보자는 일종의 놀이와 같은 거다. 나도 어렸을 때는 다른 대장장이들과 몇 번이나 해봤지. 물론 나이가 들어 서로의 명성이 쌓이면서부터는 해본 적이 없지만.”

“그래서 그걸 받아들이셨군요?”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걸 받아들일 리는 없지.”

솔리드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카이를 쳐다봤다.

“상대는 이름도 모르는 모험가 대장장이. 그런 반면에 나는……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는 부끄럽지만 왕국 기사단의 장비를 납품하는 이름 있는 대장장이다. 시간이 아까울뿐더러 이겨도 건질 것이 없는 그런 대결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지.”

카이가 듣기에도 솔리드의 말은 타당했다.

하지만 대결이 성사되지 않았다면 왜 솔리드가 이런 무기력함에 빠져있는 걸까?

그에 대한 궁금증은 곧장 해소되었다.

“거절의 의사를 표하자, 녀석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이 차고 있던 검을 뽑더군.”

“설마 그 검으로 협박한 겁니까?”

“만약 그런 식으로 협박을 했다면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대결을 수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솔리드는 마치 눈앞에 무언가가 보이는 것처럼, 풀린 눈으로 허공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정말 아름다운 검이더군. 평생 망치를 휘두른 나조차도 만들 수 없을 것 같은, 아름다우면서도 검 본연의 성질을 잃지 않은…… 검을 예술의 경지까지 끌어올린 모양새였지.”

솔리드는 황홀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그 표정은 조각조각 깨져버렸다.

“녀석을 다그쳤지. 그 검이 어디서 났느냐고. 대체 어떤 대장장이가 만든 것이냐고.”

“설마?”

“짐작하고 있나 보군. 맞네, 그 꼬맹이는 본인이 그 검을 만들었다고 했다.”

맙소사! NPC 대장장이를 감탄하게 만들 정도의 무기를 플레이어가 만들었다고?

‘그게 가능한 일인가?’

카이가 재빨리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대장장이 랭킹 1위인 모루라는 플레이어의 실력조차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가 만든 아이템은 커뮤니티에 스크린샷으로 종종 올라왔기에 확실히 단정할 수 있었다.

“웃기지 말라고, 이 검을 만든 이를 모욕하지 말라고 쏘아붙였지. 하지만 놈은 끝까지 자신이 만들었다고 우기더군.”

“그래서 대결을 하셨군요.”

“맞네. 내가 대결에서 이기면 그 검을 만든 이가 누구인지 알려달라는 조건으로 대결을 시작했지.”

솔리드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벽으로 다가갔다.

대충 선반을 뒤지던 그는 두 자루의 검을 쥐고는 카이에게 다가왔다.

“보게.”

“…….”

본능적으로 그것이 대결의 결과물임을 알아차린 카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두 검을 쳐다봤다.

하나는 세련된 손잡이와 검신에 물결무늬가 깃들어 있어 고급스러워 보였다.

반면 다른 하나의 검은 투박했다.

아무런 장식도, 무늬도 깃들어 있지 않은, 그냥 검.

‘우선 감정부터 해보자.’

카이는 우선 더 고급스러워 보이는 검의 정보부터 읽었다.

[물결무늬가 들어간 롱소드]

등급 : 레어

공격력 103~124

힘 + 10

민첩 + 5

체력 + 2

*날카로움 효과가 부여되어 있습니다. 베기 공격력이 10% 증가합니다.

검신에 물결무늬가 새겨져 있어 예술적인 가치가 높은 검입니다.

착용 제한 : 레벨 60 이상. 힘 110 이상.

내구도 100/100

“와……!”

카이는 검의 능력을 확인한 순간 감탄사를 터뜨렸다.

‘설마 이게 그 플레이어 대장장이의 검인가?’

솔리드의 말을 들어보면, 그는 꼬맹이와의 대결에서 패배하고 자괴감에 빠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 정도의 검이라면 이해가 된다.’

무려 레어 등급의 검이다.

게다가 날카로움 효과까지 부여되어 있어, 검을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욕심을 낼 수밖에 없는 엄청난 검이었다.

‘안타깝지만…… 부정할 수는 없겠어. 이건 상대방의 압승이야.’

카이가 그렇게 결론을 내렸을 때, 솔리드가 입을 열었다.

“그것이 내가 만든 검이라네.”

“……!”

카이는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솔리드를 쳐다봤다.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턱짓으로 옆에 놓여 있던 투박한 검을 가리켰다.

“살펴보게.”

카이는 서둘러 솔리드의 검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옆에 놓여 있던 투박한 검을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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