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힐통령 034화
16장. 거미의 숲(2)
수풀에 몸을 숨긴 카이는 거미 한 마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숲 거미 LV.54]
머리부터 털끝까지 보라색인 숲 거미!
기본적으로 거미의 숲에서 나오는 거미들은 모두 현실의 거미와 비슷하게 생겼다.
게다가 덩치 또한 오토바이에 비견될 정도로 커다란 놈이었기에 여성이나 비위 약한 남자라면 보는 것만으로도 기겁을 할 정도의 생김새였다.
물론 카이에게는 통용되지 않는 소리였다.
‘경험치는 잘 주나?’
귀신은 무서워해도 벌레는 안 무서워하는 카이!
그는 곧장 신성 폭발을 제외한 모든 버프를 사용하며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크롸아앗!”
카이가 별안간 수풀 속에서 튀어나오자, 깜짝 놀란 거미가 다급히 독침을 뱉어냈다.
한 번 공격을 허용하면 중독까지 당하는 치명적인 공격!
“더럽게 어디다 침을 뱉고 난리야!”
버럭 소리를 지른 카이는 여유롭게 침을 피하며 녀석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목표는 급소!’
머리와 심장 같은 급소 부분을 공격하면 1.5배의 추가 피해가 들어가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상식! 카이의 철검이 거미의 머리 부분을 크게 베었다.
서걱!
“크리리릿!”
비명을 내지르는 숲 거미!
하지만 카이의 안색은 생각보다 밝지 못했다.
‘후우, 데미지가 하나도 안 박히잖아.’
급소를 공격했으니 녀석의 체력이 10% 정도는 까지기를 원했는데, 체력 창을 확인해 보니 고작 4% 정도가 줄어든 상태였다.
“아, 못해 먹겠다.”
결국 항복을 선언한 카이가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후이의 말이 옳았어.’
지금 카이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선택을 망설인 자의 말로!
“이대로는 안 되지.”
하루라도 빨리 강해져서 랭커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은 게 카이의 욕심이었다.
그런데 고작 거미의 숲에서 잡몹 하나에 전전긍긍한다?
이 상태로는 앞으로 마주칠 더 강한 몬스터들을 절대 상대할 수 없었다.
“……지르자.”
결심을 내린 카이는 곧장 스탯창을 열었다.
“남아 있는 스탯 포인트를 모두 힘에 투자해.”
[총 50개의 스탯 포인트를 소유하고 계십니다. 정말로 모두 힘에 투자하시겠습니까?]
“그래.”
[사제 클래스에게 추천드리는 스탯은 신성과 체력…….]
“도움말 무시. 모두 힘에 투자.”
[힘이 50 상승하셨습니다.]
이게 정말 현명한 선택인지는 알 수 없다.
만약 커뮤니티에 올린다면 정신 나간 놈이라는 댓글이 수천 개는 달릴만한 일!
‘올힘 사제라…… 제대로 미쳤다는 소리 들을 만하지.’
하지만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가인 장 폴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이란B(Birth:탄생)과 D(Death:죽음) 사이의 수많은 C(Choice:선택)이라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마주칠 수많은 선택지 중 하나와 직면했을 뿐이었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선택지를 택한 것뿐이었다.
“뭐, 망하면 선행 스탯으로 메꾸면 되겠지.”
프리카 마을에서부터 모으기 시작한 50개의 스탯이 고스란히 힘에 투자되었다.
동시에 온몸에서 끓어오르는 압도적인 활력!
잠시 눈을 감고 그 기분을 마음껏 만끽하던 카이가 감상을 내놓았다.
“이야, 전사 유저의 비율이 높은 이유를 이제야 알겠네.”
마치 중독될 것 같은 기분이다.
온몸의 근육은 마치 고무줄이라도 된 것처럼 유연하고, 질겼다.
오죽하면 검의 무게가 가벼워진 것이 체감이 될 정도!
기분 같아선 당장에라도 눈앞의 거미를 두 동강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진짜 되는 거 아냐?”
궁금하면 시험해 보면 될 뿐.
카이가 다시 한번 거미에게 달려들었다.
“크리릿, 크라아아악!”
아가리를 크게 벌리며 포효하는 녀석!
몸을 뒤로 돌린 녀석은 엉덩이 부근에서 거미줄을 발사했다.
“신성 폭발!”
콰아아아아!
초당 1,000이나 되는 신성력을 잡아먹고, 모든 스탯을 30이나 올려주는 유니크 등급의 스킬!
“미안한데, 내가 지금 무서운 게 없거든!”
신성 폭발은 아주 잠시지만 그를 30레벨 이상의 유저들과도 어깨를 나란하게 만들어준다.
레벨 54의 숲 거미 따위는 절대 감당할 수 없는 힘과 속도!
카이는 자신의 모든 힘을 검에 쏟아부었다.
검은 여태까지와 차원이 다른 파공음을 토해냈다.
쐐애애애액!
“키리릿!?”
거미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을 때는 이미 녀석의 왼쪽 다리 세 개가 잘려나간 후!
[상대방이 상태이상 ‘슬로우’에 빠졌습니다.]
[4,485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4,542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호우!”
데미지는 상상 그 이상! 카이가 환호성을 내질렀다.
급소가 아닌 곳을 공격해도 15%씩 쑥쑥 빠져나가는 거미의 체력!
신이 난 카이의 손놀림이 점점 빨라졌다.
“크리릿!”
기동력을 잃어버린 거미는 도망을 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궁지에 몰린 녀석의 공격이 더욱 거세졌다.
피잇, 피잇, 피잇!
잠시도 쉬지 않고 쏘아지는 거미의 독!
“그래가지고 맞겠어?”
발목을 튕긴 카이의 몸이 산들바람처럼 부드럽게 움직이며 공격을 모두 피해냈다.
회피와 동시에 시원하게 뻗어 나가는 철검!
서걱!
검은 거미의 오른쪽 다리 두 개를 그대로 절단하며 지나갔다.
동시에 반가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상대방이 ‘이동 불가’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렇지!”
전투에서 상대방의 눈을 공격하여 실명 상태를, 다리를 공격하여 슬로우 상태를 유발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다리 한쪽을 끊어버리면 슬로우지만, 양쪽을 모두 공격하면 이동 불가 상태에 빠지지.’
카이의 가슴이 크게 뛰었다.
커뮤니티와 방송을 통해 이론으로만 배우던 것을 자신의 손으로 펼쳐냈기 때문이다.
‘이 고양감, 이 떨림!’
파티원에게 힐과 버프만 주던 때에는 절대로 맛볼 수 없는 스릴감과 해방감이 그의 전신을 물들였다.
카이는 쌓아놓은 둑이 터진 것처럼 가슴 한쪽이 뻥 뚫리는 쾌감을 느꼈다.
동시에 그의 검이 공격 일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한 번을 휘두르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검을 휘두르자!’
여명의 검술관에서 검을 배울 때 자연스럽게 습관이 된 검격이 매 차례 휘둘러졌다.
그곳에서는 검을 휘두를 때 제대로 집중을 하지 않으면 퀘스트가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걱! 서걱!
[여명의 검법의 숙련도가 2 상승합니다.]
[여명의 검법의 숙련도가 1 상승합니다.]
[여명의 검법의 숙련도가 1 상승합니다.]
한동안 정체되어 있던 여명의 검법 숙련도도 빠른 속도로 오르기 시작했다.
검술관에서 목검을 휘두르는 것과 실전에서 적을 베는 것의 차이였다.
“크르…… 릇.”
[경험치를 5,542 획득하셨습니다.]
“후우, 끝났다.”
한 마리를 잡자 경험치가 무려 5%나 올라가는 기적의 사냥터!
카이는 자연스럽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지 않았다.
***
“홀리 익스플로전!”
콰아아아앙!
숲 거미를 그대로 강타한 백색 광선은 근처의 나무와 땅을 한참이나 더 쓰러트린 후에야 힘을 다하고 사라졌다.
“후우…… 강하긴 한데 확실히 요란하단 말이지.”
특히나 거미의 숲처럼 어두운 장소에서는 더욱 부각되었다.
어깨를 으쓱거리는 카이의 눈앞에 반가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5,817의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스탯 포인트를 5개 획득했습니다,]
“드디어 레벨 업인가.”
카이는 한나절 동안 쉬지 않고 내리 사냥에만 전념했다.
다른 전사들이라면 중간에 스테미너를 채우기 위해서 휴식을 취해줘야 하지만, 카이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원기 회복의 샘.”
스킬을 시전하자 눈앞에 설치되는 조그마한 샘!
카이는 이제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샘의 주변에 주저앉았다.
[1초마다 생명력이 회복됩니다.]
[1초마다 스테미너가 회복됩니다.]
눈을 한 번 깜빡거릴 때마다 올라가기 시작하는 체력과 스테미너!
카이는 원기 회복의 샘을 통해 빠르게 스테미너를 채우고, 사냥하는 것을 반복했다.
“흐음, 사제가 근접 기술까지 익히면 솔플이 상당히 편하구나.”
카이도 몰랐던 사실이었지만, 태양의 사제는 의외로 솔플과 잘 맞았다.
다른 직업 같으면 체력이 떨어질 때마다 비싼 포션을 먹거나 붕대를 감아야 할 텐데, 사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올힘 사제…… 진지하게 한 번 생각해볼까.’
지난 이틀간의 사냥을 통해 카이의 자신감은 크게 상승한 상태였다.
[초급 여명의 검법 LV.6. Passive.]
검으로 공격할 시 적에게 공격력의 160% 데미지를 준다.
숙련도 12/100
검만 사용하여 적들을 잡다 보니 검법 스킬의 레벨이 크게 올랐고, 실전 경험도 풍부해졌기 때문이다.
‘홀리 익스플로전의 숙련도가 뒤처지고 있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그 때문에 방금처럼 간간히 사용은 해주고 있었지만, 검을 사용하는 와중에 홀리 익스플로전을 쓰는 건 영 익숙하지 않았다.
다만 사냥 속도만은 발군이었기에 현재 카이의 경험치 상승 속도는 웬만한 파티보다 빨리 오를 정도!
“레벨도 올렸으니 사냥은 여기까지 할까. 지금부터는 로디도 찾아봐야하고.”
카이는 미니맵을 펼쳤다.
‘드디어 거미의 숲 중앙 부근까지 들어왔어. 언제 어디서 로디를 찾아도 이상하지 않지.’
중앙 부근의 거미들은 레벨이 최소 60이 넘어가기에 카이도 우습게 볼 수는 없었다.
‘정신 바짝 차리고 긴장하자.’
거미의 공격은 한 번이라도 맞는 순간 치명상을 입을 수 있었다.
카이는 긴장감을 끌어올린 채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부시럭.
한참을 걸어가던 중, 뒤쪽의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를 감지한 카이!
스르릉!
이제는 제법 손에 익은 철검이 순식간에 뽑혀 나왔다.
하지만 만반의 준비를 마친 카이를 기다리고 있는 건 몬스터가 아니었다.
“도, 도와주세요!”
전형적인 궁수로 보이는 남자는 가죽 갑옷을 입은 채 조악한 활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붉은 노을 길드에게 필드에서의 PVP를 당해 본 적이 있고, 이 근처에는 붉은 주먹 길드의 녀석들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카이는 긴장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예요?”
“제발 도와주세요! 지금 저희 파티가 위험에 빠져 있습니다!”
카이는 그때서야 남자의 차림을 다시 한번 쳐다봤다.
옷은 흙과 먼지로 얼룩져있었고, 무릎 부근은 찢어져 있기까지 하다.
‘하지만 파티가 위험에 빠지는 건 사냥을 나온 이상 각오를 했어야지.’
자신들의 능력에 맞지 않는 곳에서 사냥을 할 때는 항상 전멸의 위험도 각오해야 하는 법!
매정한 말일 수도 있지만, 카이는 남자의 파티를 구해줄 가치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미안하지만 몬스터를 잡다가 실패한 건 온전히 그쪽 파티의 잘못…….”
“몬스터가 아닙니다!”
남자는 자신의 울분과 분함이 절실하게 느껴지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붉은 주먹 길드의 녀석들 짓입니다. 놈들이 저희 파티를……!”
“……응?”
남자에 대한 관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던 카이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놈들이랑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카이가 자신의 말에 처음으로 관심을 보이자, 남자는 이것이 기회라는 것을 눈치챘는지 아주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선 저는 휴고라고 하는 궁수입니다. 약소하지만 조그마한 파티 하나를 이끌고 있지요. 사실 저희 파티가 몇 주 동안 진행하고 있는 퀘스트가 하나 있었습니다. 거미의 숲을 지배하는 존재에 대한 퀘스트였는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저희는 던전을 발견했습니다.”
“던전……!”
“기뻤습니다. 당연히 기쁘죠. 무려 던전이잖습니까. 그간의 고생이 모두 씻겨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휴고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말을 이었다.
“문제는…… 던전의 입구에서 붉은 주먹 길드원들과 마주쳤다는 것입니다.”
“……아하.”
카이는 이런 상황을 두고 옛 조상님들이 즐겨 하던 말을 떠올렸다.
‘안 봐도 블루레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