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힐통령 043화
20장. 약탈자들의 왕(2)
전신을 덮고 있는 흑색갑옷은 레어 등급의 재료인 흑요석으로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한눈에 봐도 유저가 장비한 아이템들은 최소 레어 등급 이상.
더군다나 묵색 빛을 뿜어대는 대검은 유니크 등급 이상의 무기로 보였다.
한정우가 침을 꿀꺽 삼켰다.
“랭킹 1위의 직업 미공개 유저, 유하린.”
그녀야말로 5억 명이 넘어가는 플레이어들의 정점.
수많은 랭커들 사이에서도 오직 한 명에게만 허락된 일인자의 자리에 올라선 랭커였다.
스르르릉.
유하린이 등 뒤의 대검을 뽑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한정우는 얼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자, 잠깐만. 지금 저거…… 설마 베이거스랑 1대 1을 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한 이유는, 천화 길드원들이 유하린과 베이거스를 둘러싸며 장소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이 마치 원형 결투장을 연상케 했다.
[하, 가소롭군.]
주변을 둘러본 베이거스도 그것이 웃겼는지, 코웃음을 한 번 치더니 정색했다.
[건방진 녀석들, 목숨으로 그 죗값을 대신해라.]
그는 순식간에 하린에게 달려들었다.
한정우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미, 미친. 말도 안 되는 속도잖아!”
베이거스는 말 그대로 차원이 다른 속도를 선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한정우가 비명을 터뜨린 것은 그의 움직임 때문이 아니었다.
차아앙!
베이거스의 장도 한 자루를 그대로 쳐낸 뒤, 도리어 그의 품으로 파고드는 유하린!
현재의 한정우는 모방을 할 수도, 아니. 모방은커녕 눈앞에 있다면 인식조차 할 수 없는 아득한 빠르기를 보고 소리친 것이었다.
‘신성 폭발을 사용한다고 해도…… 절대 무리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릴 정도의 압도적인 실력!
붉은 주먹 길드원들 여섯을 홀로 처치하면서 상승했던 자신감이 순식간에 땅에 떨어졌다.
쿠구궁.
아쉽게도 영상은 거기서 끝이 났다.
천화 길드의 마크가 떠올랐고, 영상을 끝까지 보고 싶으면 결제를 하라는 창이 떠올랐다.
“…….”
부들부들!
한정우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레이드 영상의 가격은 무려 12,000원!
어지간한 블록버스터 영화의 블루레이 DVD와 비슷한 가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회 수는 70만 뷰를 가볍게 넘은 상태였다.
‘까드득! 천화 길드 녀석들, 아주 돈을 갈퀴로 쓸어담는구나!’
피눈물을 흘린 한정우가 결국 결제 버튼을 클릭했다.
그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영상을 철저히 분석하기 시작했다.
‘과연 국내 최고의 길드 중 하나.’
확실히 사냥터를 통제하는 행동들은 눈살을 찌푸리게 할지 몰라도, 실력만큼은 세계급이다.
바로 최소 150레벨 이상으로만 구성된 천화 길드의 제1 공격대 때문이었다.
‘칠 때 치고, 빠질 때 빠진다.’
기본적인 전술인 히트 앤 런(Hit and Run).
하지만 그것을 천화 길드처럼 깔끔하게 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그들은 마치 한 몸이라도 된 것처럼 예술적으로 움직이고, 빠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카이가 한 여인을 눈에 담았다.
“마법병단. 4초 뒤 아이스 월로 적들의 왼쪽 별동대의 발을 묶는다. 딜러들은 정확히 5초 뒤 모든 공격을 왼쪽으로 집중시켜.”
전장이 훤히 보이는 초원의 언덕에 서서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여인!
그녀는 천화 길드의 마스터임과 동시에 기사 클래스의 최상위 랭커 중 하나인 설은영이었다.
‘성격은 차갑다고 소문났던데, 얼굴은 예쁘네.’
평소 그녀에게 관심이 없던 한정우조차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드는 외모!
허리까지 늘어뜨린 탐스러운 흑색 생머리는 연신 찰랑거리며 태양빛을 반사시켰다.
커다랗지만 날카로운 눈매로 인해 전체적인 인상 자체가 차갑고 시크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속아 방심한 적의 목을 단번에 날릴 수 있는 실력자였다.
“…….”
전장을 내려다보던 설은영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딜러들 공격 적중률이 아주 형편없어. 그 수준으로 월급 받아가는 게 미안하지도 않아?”
“…….”
전투의 함성을 내뱉던 길드원들이 꿀이라도 먹은 듯 순식간에 합죽이가 되었다.
그들은 눈앞의 적들보다는, 등 뒤의 설은영을 더욱 두려워했다.
적들은 자신을 길드에서 추방시킬 수 있는 마스터가 아니었으니까!
“레이드 끝나면 딜러들은 데미지 표 제출해.”
딜러들은 울상을 지었고, 반대로 힐러와 기타 지원형 유저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정우는 영상을 보면서 채팅들도 쭈욱 훑어봤다.
-하악, 하악. 오늘도 우리 여왕님 카리스마 멋있으시다.
-저 차가운 눈빛! 오싹오싹하다! 절 가져요!
-여기 채팅방 좀 이상한 것 같은데;;
ㄴ원래 설빠 중에서 변태들이 좀 많음.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여왕이 지휘 하나는 잘하네.
ㄴ괜히 전장의 지휘자라고 불리겠음?
-다른 길드 마스터들은 저걸 보고 배울 필요가 있음.
-근데 베이거스 패턴은 전부 다른 길드에서 알아낸 거잖아. 선발대 길드들 배 좀 아프겠네
-난 다른 건 몰라도 길드 단위의 레이드는 천화가 한국 최고라고 생각함.
ㄴ지휘관 능력 좋고, 길드원 수준도 한국 최고니까 당연한 거지.
“흐음…….”
확실히 한정우가 보기에도 그녀의 지휘는 대단했다.
‘음성을 들어보면…… 거의 초 단위로 전술을 지휘하잖아?’
다른 길드들을 애먹인 베이거스조차, 그녀가 지휘대를 잡은 천화 길드를 흔들 수는 없었다.
그녀는 베이거스가 내미는 전략들을 정면에서 하나씩, 하나씩 꺾어나갔다.
도망 따위는 모르는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지휘를 통해 그녀의 성격이 보이는 듯했다.
‘확실히 뛰어나.’
저것이 최고 수준 길드의 마스터.
게다가 그녀 스스로도 세계적인 랭커 중 하나였다.
그야말로 전장의 여왕, 병사들을 연주하는 지휘자!
“…….”
영상은 계속 흘러갔다.
천화 길드는 결국 베이거스의 모든 수단을 정면에서 격파했고, 뒤이어 나온 베이거스는 유하린과의 승부에서 패배했다.
그야말로 별들의 전쟁이라는 말이 걸맞을 정도로 압도적인 힘의 격차!
영상을 모두 시청한 한정우는 컴퓨터를 끄고 침대에 누웠다.
천화 길드원들의 실력도 대단했고, 설은영의 지휘도 대단했다.
하지만 영상을 모두 본 순간, 그의 머리에 남은 것은 유하린의 움직임뿐이었다.
“대체 뭐하는 여자지?”
설은영이 뛰어난 지휘로 한정우의 마음을 흔들었다면, 유하린은 압도적인 피지컬과 전투 센스로 한정우의 혼을 쏙 빼놓았다.
‘게다가 유하린은 이제 게임을 시작한 지 3개월이야.’
무려 자신보다 1달이나 늦게 게임을 시작한 유하린!
하지만 그녀는 모든 랭커들을 여유롭게 따돌리고 랭킹 1위를 차지했다.
그녀의 압도적인 실력과 사냥 속도, 퀘스트 진행률은 최상위권 랭커조차 한 수 접어줄 정도라고 한다.
‘소문으로는 한국 사람이라던데, 진짜일까?’
아무래도 닉네임이 한국 사람의 이름 같았기에, 한국의 유저라는 추측이 난무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해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국적, 생김새, 나이, 신장 등등…….
단순히 솔로 플레이를 지향하는 유저라는 사실만이 돌아다닐 뿐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하지.‘
그것은 마치 새하얀 눈밭에 누구보다 먼저 발자취를 남기고 싶은 순수한 욕망과 닮아 있었다.
멍한 표정으로 천장을 응시하던 한정우가 눈을 감았다.
“……세상은 정말 넓구나.”
사실 영상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한정우는 크게 고양된 상태였다.
직업도 좋고, 최근의 성장세는 그가 생각해도 대단했으니까.
‘하지만 저들과 비교하자면…… 말도 안 되게 약하구나.’
유하린, 설은영 같은 괴물들은 배제하고서라도, 천화 길드의 일개 길드원이 보여주던 움직임조차 한정우에게는 벅찼다. 문득 누나의 질문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래서 너 재능 있어?’
“…….”
재능이라.
한정우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솔직히 말해서 조금 무서워.’
만약 자신에게 재능이 없다면?
태양의 사제라는 직업을 가지고도 랭커조차 되지 못한다면?
그 두려움이 때때로 그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재능을 의심하는 것 이상으로, 자신을 믿었다.
그 모순된 감정이 공존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자신이 걸어온 길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노력은 언제, 어떤 식으로든 보상을 받더라고.’
물론 현실에서는 조금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게임에서는 그것이 절대적인 법칙이었다.
자신이 노력한 만큼 경험치가 오르고, 그 경험치가 쌓이면 레벨이 오른다.
스탯을 올리면 캐릭터가 성장한다.
사냥을 할수록 돈이 모이고, 더 좋은 장비가 갖춰진다.
“안 되면 두 배 더 열심히, 그게 안 되면 네 배 더 열심히…… 될 때까지 하면 돼.”
노력하는 것.
아직 자신의 재능을 깨닫지 못한 한정우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분야였다.
***
두 명의 남녀가 고급스러운 장식품이 비치된 복도를 걷고 있었다.
물론 귀족의 저택이나 왕궁의 복도에 비하면 손색이 많았지만, 이 건물이 플레이어의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들이 게임에서 얼마나 대단한 세력을 일궜는지를 유추할 수 있었다.
“마스터는 안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흑색의 갑옷을 입고 있는 기사를 안내한 마법사 차림의 남자가 고개를 짧게 숙이며 말했다.
그러자 기사는 아무런 말 없이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들어와요.”
끼익.
방의 내부는 마치 대기업의 사무실처럼 세련되고 깔끔했다.
흑기사는 내부를 가볍게 둘러보다가,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명패를 쳐다봤다.
[천화 길드마스터, 설은영.]
“찾아오느라 고생했어요.”
천화그룹의 길드마스터는 방에 들어선 기사를 보며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라면 모두 혹할 정도의 얼굴을 앞에 둔 흑기사는 덤덤하게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베이거스를 사냥하고 나온 전리품은 모두 상자에 넣어놨으니 확인해봐요.”
설은영이 탁자 위에 놓인 상자를 가리키자, 흑기사는 그것을 확인하며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골드는 필요 없어요? 저희 길드에 판매하면 좋은 가격에 구매해드릴 수 있는데.”
도리도리.
제법 솔깃한 제안이었지만, 흑기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설은영이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드린 제안, 생각해 보셨나요? 슬슬 답변을 듣고 싶은데.”
“…….”
방을 들어온 이후로 처음. 흑기사가 설은영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영입 제안 말하는 거예요. 천화 길드의 공격대장 자리를 약속드리죠.”
천화 길드의 공격대장!
한국의 재벌가인 천화그룹에서 작정을 하고 만든 기업형 길드가 바로 천화 길드였다.
길드원 개개인이 모두 그룹의 사원들과 비슷한 연봉을 받고, 간부들은 상상도 못 할 거금을 연봉으로 받게 된다.
그런 곳의 돌격대장이라면 길드에서도 최고의 요직.
못해도 연봉이 10억은 가볍게 넘는다.
“혹시나 싶어서 말하지만, 천화에서는 당신이 원하는 모든 조건을 수용할 의사가 있어요. 최고급 차와 펜트하우스, 아니면 건물이나 땅, 돈까지. 말만 해요.”
마치 돈이면 모든 것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 당당한 말투!
하지만 베이거스를 혼자서 잡아버린 괴물 플레이어, 유하린은 고개를 다시 한번 흔들었다.
“후우…… 좋아요. 하지만 공격대장의 자리는 언제든 내드릴 수 있으니, 다음번엔 긍정적인 대답을 듣고 싶네요.”
끄덕.
“그럼 앞으로도 지금처럼 좋은 관계를 유지해 나가죠.”
하린은 설은영의 도도한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방을 나섰다.
잠시 후 하린을 안내한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오며 물었다.
“협상은요?”
“…….”
설은영은 대꾸조차 하지 않고 남자를 스윽 흘겼다.
그 표정에서 답을 읽어낸 남자 마법사, 보이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애초에 기대도 별로 안 했잖습니까. 무려 유하린인데.”
“아쉬워. 그녀의 영입에 성공했다면 천화 길드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길드가 될 수 있을 텐데.”
물론 하린의 실력도 뛰어났지만, 설은영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랭킹 1위의 상징성.
게다가 그녀를 따르는 수많은 추종자들의 지지를 손에 넣지 못한 것이 무척이나 아쉬웠다.
“어휴, 아가씨. 회장님께서 항상 말씀했잖아요? 모든 일은 천천히 보라고. 나무보다는 숲을, 숲보다는 세상을 보라고.”
“아가씨?”
설은영이 찌릿한 눈빛으로 보이드를 쳐다보자, 그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이크, 죄송…….”
“꺼져.”
설은영은 서둘러 방을 나서는 보이드를 노려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여겼고, 그 생각은 살면서 단 한 번도 깨진 적이 없었다.
‘유하린. 당신도 언젠가 내 밑으로 들어오게 될 거야.’
설은영은 그렇게 단정 지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원했던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