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47화 (47/441)

# 47

힐통령 047화

23장. 데바의 오래된 동화책

“비록 나는 검에 크게 소질이 없지만, 우리 가문은 한때 훌륭한 기사들을 배출해낸 가문일세. 가주의 권한으로 자네에게 검법의 일부를 전수하고 싶네. 꼭 받아주게나.”

“그, 그런…….”

자리에서 일어난 카이는 두 손을 공손하게 내밀어 책을 받아들었다.

책에서는 푸른색 빛이 은은하게 뿜어져 나왔다.

‘스킬 북!’

하녹스의 시련에서 허탕을 친 뒤, 조금은 가라앉아 있던 기분이 순식간에 부상했다.

카이는 침을 꿀꺽 삼킨 뒤 스킬 북의 정보를 확인했다.

[스킬 북 - 칼날 쇄도]

등급 : 레어

회전력을 담은 검을 고속으로 휘둘러 상대방의 급소를 공격합니다.

사용 제한 : 검술 스킬을 보유한 자, 스킬 북을 글렌데일 가(家)의 가주에게 받은 자.

‘그것도 레어 등급이다.’

경매장에서 고가로 거래되는 레어 등급 스킬 북!

물론 지금 카이가 가진 돈이면 레어 등급의 스킬 북 한두 개 정도는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이건 글렌데일 가문만이 지닌 고유 스킬 북이야.’

그 말은 다른 곳에서 돈 주고도 못 구한다는 뜻!

게다가 공짜라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역시 선행이 최고야!’

함박웃음을 짓던 카이는 스킬 북을 껴안은 채 넙죽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껄껄. 나야말로 늦었지만 인사를 하지. 내 영지민들을 구해줘서 정말 고맙네.”

아르센 남작의 두껍지만 따뜻한 손이 카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 용무는 여기까지일세. 아! 혹시 지금 시간이 괜찮다면, 자네가 구해줬던 영지민들을 찾아가 보지 않겠나? 자네를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려올 정도야.”

“그런가요? 그럼 지금 바로 찾아가 보겠습니다.”

데바에게 받아야 할 보상도 보상이지만, 그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가 크게 궁금했다.

“토벌대는 앞으로 사흘 후 광장에서 집결하여 출발할 예정이네.”

“늦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

저택을 빠져나온 카이는 아르센 남작에게 받은 주소지를 바탕으로 데바의 집을 찾아갔다.

옆집과 비교해서 특출나게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담한 가정집.

저녁 시간이라 그런지, 로디 가족의 정겨운 목소리가 집 밖까지 흘러나왔다.

‘엄마! 오늘 저녁은 뭐예요?’

‘오늘은 고기감자 수프란다. 로디가 좋아하는 거지?’

‘응! 난 엄마가 만들어준 음식이 제일 좋아!’

‘나도 네 엄마 요리 솜씨 하나만 보고 결혼한 거다.’

‘뭐라고욧!?’

대화를 듣고 있던 카이가 잔잔한 미소를 띄웠다.

듣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가족애가 대화에서 느껴졌기 때문이다.

카이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엄마! 누가 문 두드려요.’

‘이 시간에 누굴까요?’

‘있어 봐. 내가 나가볼 테니까.’

끼이익.

나무로 만들어진 문이 열리고, 로디의 부친인 레디가 고개를 쓱 내밀었다.

“누구…… 엇!”

웃는 낯의 카이를 목격하고는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진 레디.

그는 곧장 문을 왈칵 열더니 카이를 자신의 넓은 가슴에 끌어안았다.

“은인께서 오셨군요!”

“네, 네…… 저기 그런데 포옹은 좀…….”

카이는 수컷 냄새가 물씬 풍기는 레디의 가슴에서 빠져나오고자 몸을 비틀었지만, 레디의 힘이 워낙 좋은지라 빠져나올 수 없었다.

결국 레디는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카이를 실컷 이용(?)하더니, 그를 품에서 떼어냈다.

“여보! 누구예요?”

“아, 이럴 게 아니군요. 우선 안쪽으로 들어오시지요.”

“저녁 시간이라서 바쁘실 것 같은데, 제가 방해한 건 아닌지…….”

“어이구! 그런 말씀 하지 말아주십시오. 아직 식사 전이라면 저희가 대접하겠습니다.”

결국 등을 떠밀려 집으로 들어온 카이는, 머쓱한 표정으로 그의 가족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들 건강은 괜찮으신가요?”

“어머, 성자님!”

“아저씨…… 아니, 사제님!”

로디가 도도도 달려와 카이의 허벅지에 찰싹 달라붙었다.

녀석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준 그는 가족들에게 성대한 환영을 받으며 테이블에 착석했다.

“어서 드셔보십시오. 제 아내가 음식 솜씨가 정말 좋거든요.”

“제 친구들도 전부 우리 엄마 음식이 최고라고 그랬어요!”

“호호, 성자님 앞에서 부끄럽게…….”

“그럼 잘 먹겠습니다.”

카이의 그릇에는 고기와 감자가 다른 이들보다 훨씬 많이 들어 있었다.

그릇만 쳐다봐도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훤히 보일 정도.

스프를 먹기도 전에 가슴이 따뜻해짐을 느낀 카이가 숟가락을 움직였다.

먹음직스럽게 생긴 고기와 감자가 둥둥 떠 있는 스프가 곧장 입안으로 들어갔다.

“……음!”

카이의 눈이 번쩍 뜨였다.

확실히 그들의 칭찬은 빈말이 아니었다.

‘맛있다!’

숟가락을 움직이는 시간이 점점 빨라졌다.

카이가 스프를 맛있게 먹기 시작하자, 그를 쳐다보는 가족들의 눈에 뿌듯함이 깃들었다.

“자, 잘 먹었습니다.”

순식간에 그릇을 비운 카이가 머쓱한 표정으로 입을 열자, 타냐가 그릇을 가져가며 물었다.

“한 그릇 더 드릴까요? 스프는 많답니다.”

“그럼…… 한 그릇만 더 부탁드립니다.”

마약 김밥, 마약 떡볶이와는 비교도 안 되는 마약 스프!

결국 카이는 스프를 세 그릇이나 비우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겠는감.”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데바의 말에, 카이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물론이죠. 무슨 일이십니까?”

“그야 물론 약속한 보상 때문이네.”

데바는 카이의 손아귀에 23실버를 꼬옥 쥐여준 뒤, 그의 손을 몇 번이고 흔들었다.

“정말 고마우이. 정말…… 정말 고마우이.”

고개를 숙인 채 두 눈 가득 고인 눈물을 줄줄 흘려내는 데바.

카이는 아무 말도 못 하고 한쪽 무릎을 낮춘 뒤 손수건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줬다.

“할머님, 울지 마세요. 앞으로 행복하게 사실 일만 남았잖아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데바를 달래는 모습은 그야말로 성자의 귀감과도 같았다.

“아아아, 역시 성자님.”

“크흑. 로디야. 너도 크면 꼭 저분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네, 아빠.”

그 훈훈한 모습을 쳐다보던 로디의 가족들은 촉촉하게 젖은 눈가를 비벼댔다.

잠시 후 마음을 추스린 데바가 로디에게 손짓했다.

“로디야, 할미가 가장 아끼는 책을 가져오련?”

“어? 그 책은 평소에 만지지도 못하게 하셨잖아요?”

귀여운 손자의 물음에 데바가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그 책을 선물해 줄 만한 사람을 찾은 것 같구나.”

‘책? 아, 그러고 보니…….’

그들의 대화를 듣던 카이가 한 가지 기억을 떠올렸다.

분명 데바의 퀘스트는 23실버와 더불어, 데바의 오래된 동화책 한 권이 보상이었다.

“여기 있어요!”

로디가 가져온 책을 받아든 데바는, 그 책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카이에게 내밀었다.

“자네라면 이 책을 받기에 충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네.”

“아, 예. 감사히 받겠습니다.”

먼지가 덮이고, 낡은 동화책 한 권.

비록 스킬 북은 아니었지만, 분명 데바가 아끼고 아끼던 책이었을 터.

그렇다면 주는 것을 거절하는 것 또한 예의가 아니었다.

카이는 크게 기쁜 표정을 지으며 동화책을 갈무리했다.

“안 그래도 심심할 때 읽을 책 한 권을 사려고 했는데, 덕분에 돈이 굳었네요. 하하.”

“꼭 한 번 읽어보게나. 꼭일세.”

“예, 꼭 읽어보겠습니다.”

용무를 모두 마친 카이는 집을 나섰다.

로디의 가족은 문밖까지 나와 카이를 배웅했다.

“바람이 찹니다. 어서 들어가세요.”

“성자님께서 떠나는 모습만 보고 들어가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커서 꼭 사제님처럼 훌륭한 사람이 될게요!”

가슴 한편이 따뜻해지는 로디네의 인사.

카이는 자신이 빨리 떠나야 그들이 집에 들어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 진짜 가보겠습니다.”

카이가 길모퉁이를 돌아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로디네 가족은 손을 흔들었다.

“……선행이라.”

어느새 별이 반짝이는 맑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카이가 중얼거렸다.

‘그렇지, 이게 선행이지.’

단순히 선행 스탯을 올리기 위해 누군가를 도와주는 게 아닌, 진심으로 누군가를 걱정하고,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 하나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선행이었다.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도와주는 것.’

이성보다 감성이 먼저 선택하는 것.

선행이란 그런 것이었다.

“공기 한 번 시원하다.”

자신의 선행이 지켜낸 한 가정의 평화.

그 결과를 지켜본 카이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밤거리를 걸었다.

***

“이 정도면 되겠지?”

전신거울을 소환해낸 카이는 자신의 외견을 여러 각도에서 살펴봤다.

그는 새롭게 구매한 노말 등급의 방어구를 장비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간단했다.

“거, 인기인이란 것도 힘들구만.”

바로 참교육 동영상이 제법 유명해진 뒤,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겨났기 때문!

카이가 지독한 연예인 병에 걸려서 착각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칠흑의 원한 세트를 입고 도시를 걸어 다니면 날파리들이 꼬였다.

“으으. 귀찮지만 당분간 이렇게 다녀야지, 뭐.”

현재 카이는 누가 보더라도 전사처럼 보였다.

게다가 노말 등급의 장비인지라 겉보기에는 정말 볼품이 없었다.

강렬한 포스를 뿜어내는 칠흑의 놀 세트와는 1억 광년 정도 떨어진 모습.

다행히 카이는 지금의 모습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이 모습을 보고 내가 그 영상 속 주인공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겠지.’

커뮤니티에서는 아직도 많은 사람이 영상 주인의 정체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카이는 자신의 정체를 공개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오히려 지금이 딱 좋아. 언노운(Unknown)으로 활동하는 게 편해.’

언노운(Unknown).

아무런 정보도 공개되지 않은 영상의 주인, 카이에게 붙은 별명이었다.

직업은 물론이고 성별이나 나이, 레벨 등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존재!

“만약 그 영상 주인이 다른 사람이었다면, 지금쯤 엑스레이 사진까지 찍어서 인증했겠지.”

돈과 명예, 그리고 인기까지 얻을 수 있는데 그걸 거절할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물론 태양의 사제인 카이는 돈 몇 푼 보다 자신의 정보가 훨씬 더 소중했다.

당연히 모든 정보는 비공개!

그 때문에 오히려 신비주의 마케팅이라는 평가를 듣고 있었다.

“신비주의는 개뿔이 신비주의야.”

덕분에 살 필요도 없던 방어구를 사게 된 카이는 고개를 흔들며 인상을 찌푸렸다.

‘뭐, 지금은 이런 생각할 때가 아닌가.’

카이는 고개를 돌려 줄을 맞춰 서 있는 수많은 사람을 한눈에 담았다.

‘글렌데일 토벌대.’

오크 주술사를 말살하기 위해 결성된 토벌대의 구성원은 열 명의 기사와 200명의 영지병, 그리고 300명의 플레이어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 토벌대는 처음인데. 좀 긴장된다.”

“어차피 오크 잡으러 간다던데 긴장은 무슨?”

“확실히 요즘 오크 놈들 수가 많아지긴 했지. 그래서 글렌데일 사냥터가 인기 많아졌잖아.”

“토벌대 공헌 포인트로 유니크 템 살 수 있을까?”

한 식구라는 소속감으로 묶여있는 기사와 영지병들과는 다르게, 플레이어들은 저마다의 이득을 위해 움직인다.

그리고 카이는 그 두 세력 사이에서 토벌대가 붕괴되지 않도록 조율을 해야 할 임무까지 지니고 있었다.

“별일 없었으면 좋겠는데.”

왠지 모르게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느낌.

카이는 먹구름이 잔뜩 껴있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러기를 잠시, 토벌대는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며 글렌데일의 성문을 나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