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힐통령 052화
25장. 죽음의 술래잡기(3)
분명 공격을 한 것은 카이였지만, 검은 벌 길드는 이미 파이어 월을 통해 오크 주술사의 어그로를 한껏 올려놓은 상태였다.
그것을 정확하게 계산한 카이는 파이어월을 흩어버림과 동시에 오크 주술사를 공격했고, 그 결과 검은 벌 길드와 오크 주술사의 싸움이 성립되었다.
”자, 그럼 너희는 열심히 싸우고…….“
카이의 시선이 전장을 크게 훑었다.
‘상황이 많이 안 좋아.’
이미 토벌대의 인원은 NPC와 유저 모두를 합쳐도 100명 미만!
대패도 이런 대패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을 꼽으라고 하면, 오크 로드의 피가 15%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크 주술사의 체력은 아직도 많아.’
오크 주술사의 체력은 75% 정도.
그랬기에 카이는 주먹을 불끈 쥐며 검은 벌 길드를 응원했다.
“화이팅, 힘 좀 내봐! 세계 10대 길드의 저력, 뭐 그런 거 하나씩 있지 않나?”
“이 새끼가 뚫린 입이라고!”
“크아아악! 진짜 죽여버린다!”
머리끝까지 화가 차올라 얼굴이 붉어진 검은 벌 길드!
하지만 오크 주술사를 상대하고 있었기에, 카이에게는 욕설만 내뱉을 뿐 이렇다 할 행동을 취하지는 못했다.
‘아무튼 당분간 오크 주술사는 이 녀석들이 상대해 줄 거고…….’
카이의 시야로 오크 로드의 단단해 보이는 등이 들어왔다.
‘그사이에 난 저 녀석부터 마무리해야겠네.’
하지만 놈을 사냥하기 전에 확실하게 해놓아야 할 것이 있었다.
“응? 언노운이 이쪽으로 다가오는데?”
“뭐, 뭐야. 설마 검은 벌 길드에 이어서 우리까지?”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아군인지 적군인지 구분이 안 가는군. 끄응.”
가까스로 살아남은 유저들은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언노운을 경계하며 침을 삼켰다.
그들의 스테미너와 마나는 이미 바닥으로 떨어진 지 오래.
만약 그가 악독한 마음을 먹는다면,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언노운은 자신들을 한 차례 훑어보더니 짤막하게 말했다.
“목숨, 살려드리겠습니다.”
“……이건 또 예상치 못한 신선한 대사인데.”
“목숨을 살려주는 게 공짜일 리는 없을 테고…… 대가는?”
“미리 말해두지만 나 거지라고.”
토벌대에 참가한 유저들이니만큼, 대가 없는 보상은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오히려 이해력이 빨라서 좋네.’
그 태도가 마음에 든 카이는 기사 NPC들을 사이에서 난동을 부리는 오크 로드를 가리켰다.
“저 녀석, 저한테 넘기세요.”
“……뭐?”
“잠깐만. 지금 우리가 뭐 빠지게 때려놓은 녀석을 그냥 넘기라는 거야?”
“그것도 아무 보상도 없이?”
”그렇게 안 봤는데, 욕심이 너무 과하군.“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는 유저들!
하지만 아쉬울 게 없는 카이는 오히려 어깨를 쫙 펴면서 당당하게 요구했다.
“보상이 왜 없습니까. 사흘 동안 접속 불가, 경험치 하락, 운 나쁘면 장비 드랍. 그 모든 페널티가 사라지는 건데.”
“……오크 로드를 죽여도, 오크 주술사를 해치우지 못하면 이곳을 빠져나가긴 힘들어.”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뭘 믿고 네게 오크 로드를 넘기지?”
“믿음? 다들 뭔가 크게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카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쉬운 건 제가 아닙니다. 저야 언제든지 몸을 뺄 수 있거든요.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여러분들이 오크 로드를 잡아도 어차피 죽으면 본말전도 아닙니까?”
“…….”
“아무튼 이게 제 마지막 제안입니다. 결정할 시간은…… 60초 드리죠.”
말을 마친 카이는 용무가 끝났다는 듯 팔짱을 꼈다.
그러자 유저들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 위로 떠오른 감정은 갈등.
카이는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넘어왔네.’
토벌대의 특성상 마을 귀환 주문서나 로그아웃을 사용할 수 없다.
한 마디로 지금 저들은 죽음을 기다리는 시한부 환자와 똑같은 위치!
당연한 말이지만 죽는 것을 즐기는 유저는 없다.
‘이 사람들은 모두 턱 끝까지 바짝 추격한 죽음을 이미 각오했어.’
사람은 희망이 없을 때 모든 것을 내려놓는 법이다.
그 시점에서 카이는 그들의 눈앞에 살 수 있다는 당근을 내밀면서 흔들었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은 어떤 결정을 내릴까?
‘눈앞의 당근을 먹겠지. 그것도 아주 맛있게. 냠냠.’
어차피 저들이 크게 손해 볼 것은 없다.
오크 로드를 카이에게 넘긴다고 해도, 본인들의 포인트가 마이너스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
비록 여태까지 한 고생이 아깝기야 하지만, 죽는 것보다는 백배 천배 낫지 않은가?
결정적으로, 저들의 표정에는 한 가닥의 호기심이 떠올라있었다.
‘그야 궁금해서 미칠 지경일걸?’
스테미너가 바닥까지 떨어졌다고는 하나, 남아 있는 수십 명의 유저가 작심하고 덤벼들면 오크 로드를 마무리할 순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뒤집어서 말하면, 그건 수십 명이기에 가능한 이야기.
그런데 한 명뿐인 카이는 체력이 고작 15%밖에 안 남았다지만, 오크 로드를 혼자 잡겠다고 선언했다.
‘대체 뭘 믿고?’
‘참교육 영상을 보면 실력이 그리 뛰어나 보이지는 않았는데…….’
‘혹시 그때 모든 패를 깠던 건 아니었나?’
그들에게 깃든 것은 아주 사소한 호기심이었다.
그리고 호기심이란 녀석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제 몸을 불리는 지독한 녀석!
결국 저울질을 끝낸 유저들은 하나둘씩 고개를 끄덕였다.
“난 오크 로드를 포기하지.”
“나도. 경험치도 경험치지만, 얼마 전에 레어 아이템을 구매했거든. 죽을 순 없어.”
“젠장, 포인트가 아깝긴 하지만…… 대체 뭔 짓을 하려는지 궁금해서 미치겠으니 넘긴다!”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유저에게 허락을 받은 카이는 마지막 유저를 바라봤다.
“저, 저기…….”
여성 유저인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소신 있게 발언했다.
“오크 로드를 넘길 테니, 토벌대가 끝나면 혹시 인터뷰해 주실 수 있나요?”
“……인터뷰요?”
“헤헤.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이런 기회를 놓치긴 아까워서요.”
‘아, 그러고 보니 이 사람…….’
그녀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던 카이가 입을 벌렸다.
‘그래, 이름은 가물가물하지만…… 분명히 게임 BJ였지?’
아리스인지, 아리사인지 뭔지 하는 여자였다.
가끔씩 커뮤니티에도 동영상이 올라오기에 카이의 기억에도 남아 있었다.
‘인터뷰라…….’
카이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지금은 자신의 정보를 뿌리기보다는 실력을 키우며 몸값을 불릴 시간이었다.
당연히 현재 시점에서 인터뷰를 하는 것은 득보다 실이 더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달라질 수도 있지.’
결국 카이는 선택지를 열어두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좋습니다. 하지만 날짜와 시간은 제가 정하죠.”
“저, 정말인가요!”
단번에 표정이 화악 밝아진 아리스가 고개를 끄덕끄덕 흔들었다.
“그럼 저도 오크 로드를 포기할게요, 감사합니다!”
‘감사는 내가 해야 하는 거고.’
유저들의 허락은 받았다.
그들이 뒤통수를 치지 않는 한, 이제 오크 로드의 소유권은 온전히 자신에게 들어온 것이다.
카이는 검집 안에서 고이 잠들어 있는 검의 손잡이를 어루만졌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 엄마가 가르쳐주셨지.’
맛있는 걸 먹기 전에는, 요리사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항상 말을 하라고.
“맛있게 잘 먹겠습니다.”
***
“크하아아! 인간들이란 고작 이 정도냐!”
2미터 크기의 몸뚱어리에 단단한 근육을 갑옷처럼 때려 박은 오크 로드 우르간이 포효했다.
그의 코에서 씩씩거리며 뿜어져 나오는 콧바람은 마치 증기 기관차를 연상시켰다.
비록 오크였지만, 그 엄청난 존재감 때문에 이 자리의 누구도 우르간을 무시하지 못했다.
‘너무 강하다……!’
‘이것이 정녕 일개 오크가 지닌 힘이란 말인가!’
글렌데일의 기사 NPC들.
그들은 대부분 레벨 120이 넘는 실력자들이었지만 상황이 너무 안 좋았다.
오크 부락의 밖에서만 전투를 네 번이나 치렀고, 안쪽에서는 쉬지도 못하고 계속 싸웠다.
한 마디로 그들의 체력도 모두 방전이 되었다는 소리!
‘모두 내 실책이다……!’
토벌대의 대장을 맡고 있는 아도르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반파된 투구 밑으로 드러난 얼굴은 앳돼 보였다.
나이가 많아 봐야 열일곱 정도로 보이는 소년의 얼굴.
그런 그의 주변으로 기사들이 모여들었다.
“도련님, 여기는 저희에게 맡기시고 먼저 탈출하십시오.”
“여기서 만에 하나 도련님이 잘못되시면…… 남작님을 뵐 낯이 사라집니다.”
“……지금 경들은 나에게 도망을 치라는 것이요!”
아도르가 분하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열일곱의 나이로 기사직을 획득한 그는 나이에 비해 능력치 출중하다는 평가를 들었다.
아도르는 그것이 싫었다.
‘내가 노력하여 손에 넣은 실력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사람들은 아도르가 남작의 아들이라는 점과, 어린 나이를 언급하며 그를 칭찬했다.
그랬기에 그는 한 사람의 기사로서 떳떳하게 인정을 받고 싶었다.
그 누구보다 인정을 받고 싶었던 대상은,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인 아버지였다.
‘하지만 욕심에 눈이 멀어 제 사람들도 챙기지 못하다니…… 대장 실격이다.’
아도르의 얼굴 위로 짙은 후회와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지.’
다른 곳에서라면 후회를 바로 잡을 길이 있다.
하지만 아주 조그마한 요인이 승패를 정하는 전장에서는, 이 정도의 실수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다.
아도르는 자신을 보좌해 준 이들을 쭈욱 둘러봤다.
‘나 같은 철부지를 믿고 따라와 준 이들이다. 절대 버리고 갈 수는 없어.’
눈을 꼭 감은 그는 자신의 고향이자 집인 글렌데일을 떠올렸다.
‘불효자는 이 전장에서 뼈를 묻겠습니다. 부디 건강하시길.’
그의 눈이 다시 뜨여졌을 땐, 전에 없던 필사의 각오가 새겨져 있었다.
“전군!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 사악한 오크…….”
“좀 나와주시죠.”
“……?”
툭툭.
아도르는 어느새 다가와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는 모험가를 쳐다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새……? 아니, 그것보다. 아직 멀쩡한 모험가가 있었나?’
이미 모험가들 대부분은 체력과 스테미너가 바닥까지 떨어져서 후방으로 빼놓은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처음 보는 모험가가 등장하니 당황할 수밖에.
아도르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들을 죽음의 구덩이로 끌고 들어와서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모험가들은 신의 축복을 받아 죽어도 죽지 않는 존재라고 들었네. 부디 나를 용서하고, 다음번에는 꼭 이 사악한 오크 무리들을 벌하여 주게.”
“…….”
모험가는 아도르를 빤히 쳐다보더니, 그의 한쪽 볼을 잡아당겼다.
“이, 이게 뭐하는 짓인가흐아!”
“얼굴은 앳돼 보이는데, 말투가 대체 왜 그럽니까. 무슨 리어 왕 읽는 줄?”
“그게 무슨……”
아도르가 거칠게 카이의 팔을 쳐내자, 카이는 욱신거리는 팔을 주무르며 말했다.
“남작님이 제게 몰래 부탁하더군요. 아들 좀 잘 부탁한다고.”
“……?”
“그러니까, 나 혼자 살아가면 고개를 들고 남작님을 못 본단 말이에요.”
옅은 한숨을 내쉰 카이는 아도르와 기사들을 쳐다보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알았으면 좀 나와주시죠.”
“지금…… 자네 혼자서 오크 로드를 잡겠다는 건가?”
“예.”
오크 로드를 슬쩍 바라본 카이는, 저 멀리 있는 오크 주술사 또한 눈에 담았다.
“그리고 저놈까지 제가 찜해뒀습니다.”
“…….”
카이의 욕심과 오만이 그득한 발언에 아도르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