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
힐통령 066화
30장. 기사를 사랑한 인어(1)
“와……!”
그림에는 업계 최고의 일러스트레이터가 한땀 한땀 그린 것처럼 생동감이 넘치는 바다와 그곳을 즐겁게 헤엄치는 인어들이 그려져 있었다.
‘삽화 한 장만으로도 책을 펼친 가치는 충분하네.’
카이는 순식간에 독서에 빠져들었다.
[……인어들은 보름달이 가장 높게 뜨는 시간에 뭍으로 나와 노래 부르기를 즐겨한다. 그들은 아무리 거리가 떨어져 있어도 동료의 감정을 파악할 수 있으며, 엘프나 드워프와는 다르게 기본적으로 성격이 순하고 장난기가 많은 종족이다.]
한참이나 책을 읽던 카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읽다 보니 동화책이 아니잖아?’
사실 동화책보다는 설정집에 가까운 책이었다.
저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설정이 정말 탄탄하게 잡혀 있었다.
‘인어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또 무엇을 무서워하는지. 정말 세세하게 적혀 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왕국인 아쿠아베라는 물론이고, 천적인 나가들의 특징까지 아주 빠삭하게 알고 있는 이가 적은 듯했다.
동시에 카이의 눈이 반짝였다.
‘이 책의 저자는 혹시 아쿠아베라에 가본 적이 있던 것이 아닐까?’
책의 내용은 도저히 한 사람이 상상했다고 믿을 수 없으리만큼 방대하고, 또 자세했다.
카이는 곧장 책을 뒤져 저자를 살펴봤다.
“크라포드 윈더필드.”
저자의 이름을 확인한 카이는 즉시 고민에 빠졌다.
‘만약 이 사람이 아직까지 살아 있고, 내가 만날 수 있는 인물이라면…….’
카이의 시선이 미동조차 하지 않는 낚싯대를 향했다.
정말로 크라포드를 만날 수만 있다면, 강철 거북이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비늘을 얻을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아쿠아베라에는 지상에서 볼 수 없는 몬스터들도 많겠지.’
그들의 비늘이야말로 자신이 가져올 수 있는 비늘 중 최고라 말할 수 있을 터!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태양의 사제가 지닌 진정한 힘을 개방해 줄 삼신기 중 하나가 잠들어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카이는 즉시 낚싯대를 거두었다.
“역시 이런 데서 얌전히 기다리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야.”
카이는 두 발로 열심히 뛰어다니며 고생하는 현장직 타입!
정보 길드로 돌아가자, 아까 정보를 건네준 사내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우리도 먹고살아야지. 환불은 못 해줘요.”
“그런 거 아닙니다. 아까 추가 정보 물으면 싸게 해주신다고 했죠?”
“그건 아까였지만…… 금방 왔으니 해드리죠, 뭐. 이번엔 뭡니까?”
“사람 하나를 찾고 싶습니다.”
“아하, 모험가요?”
“아닙니다.”
카이의 대꾸에 사내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모험가가 이 세계의 주민을 찾는다라…… 흔한 경우는 아니네요. 그래서 찾으시는 분 성함이?”
“크라포드 윈더필드.”
우뚝.
올라가 있던 사내의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왔다.
“찾으시는 분 성함이 크라포드 윈더필드라고요?”
“예.”
“쓰읍…….”
골치 아프다는 듯 제 앞머리를 쓸어넘긴 정보 길드의 도적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며 물었다.
“대체 그 양반은 어떻게 알게 된 거요? 외지인이 쉽게 알 수 있는 이름이 아닐 텐데…….”
“외지인? 그 말은…….”
도적의 말실수에서 힌트를 찾은 카이가 되물었다.
“크라포드가 아쿠에리아와 연관된 사람인가 보죠?”
“아, 눈치 한번 더럽게 빠르시네.”
실수했다는 표정으로 혀를 찬 도적이 손을 내밀었다.
“노코멘트하겠습니다. 저희 거래 방식은 아시죠? 선불인 거.”
“얼마입니까?”
“50골드.”
“…….”
인벤토리를 뒤적거리던 카이가 사내를 노려봤다.
“아아, 그렇게 노려보지 말라고요. 내가 뭐 손님 등 처먹는 사람도 아니고.”
“등 처먹는 것도 아닌데 그 가격이 말이 됩니까?”
“쩝…… 이 손님아. 솔직히 말해서 우리도 그 정보는 다루고 싶지 않다고요.”
“그게 무슨 소리죠?”
콕콕.
사내가 검지로 천장을 가리켰다.
“높은 분들이 엮여 있거든요. 그것도…….”
콕콕.
사내가 이번에는 엄지로 뒤쪽을 가리켰다.
“바로 이곳. 아쿠에리아의 영주분이랑.”
“…….”
“알잖아요? 똥개도 제 앞마당에선 한 수 먹고 들어가는데…… 아무리 정보 길드라도 좀 껄끄럽다 이 말…….”
짤그랑.
테이블 위로 금화 50개가 쏟아졌다.
주저 없이 돈을 지불한 카이는 ‘어쩌라고’라는 표정을 지으며 턱을 까딱였다.
설명이나 하라는 뜻이었다.
“하…….”
그 모습에 한숨을 내쉰 도적은 골드를 모두 챙기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려보세요. 서류 들고 올 테니까.”
10여 분이 흐르자 그는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양의 서류 더미를 들고 나타났다.
쿠웅!
종이뭉치가 내는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둔탁한 소리와 함께, 설명이 시작됐다.
“크라포드 윈더필드. 본래는 여기 아쿠에리아에서 기사인 양반이었지. 실력도 좋고, 인덕도 좋고, 잘생기고 나이도 어렸죠. 한마디로 앞날이 창창한 인재였다, 이 말이지.”
사라락, 사라락.
사내는 서류 뭉치를 빠르게 넘기며 사진을 통해 이해를 도왔다.
‘확실히 잘생겼네.’
서양의 배우를 연상케하는 날카로운 턱선과 깊은 눈두덩이, 오똑한 코까지!
그의 말대로 앞날이 창창한 인재처럼 보였다.
“하지만 인재였다는 말은 과거형이니…… 지금은 아니라는 말이네요.”
“캬, 역시 우리 고객님! 눈치 하나는 더럽게 빨라!”
감탄을 터뜨린 사내가 가장 두꺼운 서류 더미 하나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이야기가 제법 길어질 거요.”
“시간 많습니다.”
“그럼 사양 않고…….”
사내가 서류를 펼치자, 카이의 눈앞으로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크라포드의 스토리를 보시겠습니까? 수락하시면 관련 퀘스트를 받을 수 있습니다.]
‘본다.’
수락과 동시에, 마치 영화라도 보는 것처럼 카이의 시야가 뒤바뀌었다.
***
크라포드 윈더필드.
아쿠에리아에서 가장 장래가 유망한 기사였다.
젊고, 실력도 뛰어나며, 인덕도 높았다.
당연히 그를 사모하는 여성들도 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에게는 이미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다.
그것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연인이었다.
찰박.
“오셨어요?”
아쿠에리아에서 멀리 떨어진 해안가의 동굴.
그곳에 도착한 크라포드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여인에게 사랑스럽다는 미소를 지었다.
“늦어서 미안. 많이 기다렸지?”
“아니에요. 저도 방금 왔는데요, 뭘.”
찰박, 찰박.
가녀린 두 다리로 동굴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를 차고 있던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메랄드빛을 하고 있는 아름다운 두 눈동자는, 그녀가 일반적인 사람이 아님을 증명했다.
크라포드의 넓은 가슴에 그대로 안긴 여인은 10분이 지나서야 그의 품에서 떨어졌다.
그녀가 떨어지자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은 크라포드가 입을 열었다.
“역시 당신에게서는 좋은 냄새가 나.”
“킁킁, 혹시 저한테서 비린내 난다고 구박하시는 거 아니죠?”
“뭐? 하하하!”
연인의 농담에 웃음을 터뜨린 크라포드가 그녀의 푸른빛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절대 아니야. 당신에게서 얼마나 좋은 냄새가 나는데.”
“바다 짠 내밖에 안 날 거 같은데…….”
“아니라니까. 인어들은 모두 당신처럼 좋은 냄새가 나나?”
“제가 좀 특별하답니다.”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은 그녀는 인어였다.
그야말로 종족을 뛰어넘은 사랑!
물에 빠진 크라포드를 연인인 엘레느가 구해주던 순간, 그들은 운명처럼 서로에게 반했다.
그들의 만남은 고작 한 달에 한 번 꼴로 이루어졌지만, 서로를 향한 사랑은 점점 깊어져 갔다.
“엘레느, 좋은 소식이 하나 있어.”
“뭔데요?”
좋은 소식이라는 말에 엘레느가 기대 어린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아무래도 조만간 기사직을 반납하고 자유의 몸이 될 거 같아.”
“네? 혹시…… 저 때문이에요?”
“아니야.”
크라포드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도저히 지금 모시는 주군에게 충성을 다 할 자신이 없어서 그래. 당신과는 상관없어.”
그의 주군인 아쿠에리아의 영주 바리탄은 기사의 명예를 우습게 알고 욕심이 많은 작자였다.
바리탄의 밑에서 기사직을 수행하던 크라포드는 회의감을 느끼고, 그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그게 왜 좋은 소식이에요?”
“기사를 그만두면 너를 매일 볼 수 있잖아.”
크라포드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곱게 휘었다.
그는 엘레느가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때가 되면 나랑 결혼해 줄래?”
“크, 크라포드…… 지금 혹시?”
“프로포즈야.”
“하지만 전 인어인데…… 괜찮을까요?”
“상관없어. 누가 뭐래도 엘레느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여인이니까.”
“크라포드…….”
눈시울을 붉히며 울먹거린 엘레느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할래요. 크라포드와 결혼할게요.”
크라포드의 프로포즈는 성공적이었고, 두 사람의 입맞춤과 함께 장면이 뒤바뀌었다.
***
“그동안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끄응…… 정말 그만둘 텐가?”
“……죄송합니다.”
갑옷을 벗고 사복을 입은 크라포드는 바리탄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모습에서 꺾을 수 없는 의지를 읽은 바리탄이 결국 혀를 찼다.
“어쩔 수 없군. 그동안 수고했네. 살펴가게.”
“부디 강녕하시길.”
자유의 몸이 되어 영주의 저택을 나선 크라포드는 새사람이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제 엘레느와 정식으로 부부의 연을 맺고, 즐겁게 살아가는 일만 남았다.’
그 사실이 미치도록 즐거워서 연신 입꼬리가 내려오질 않았다.
게다가 오늘 밤에는 항상 만나던 장소에서 그녀와 만나기로 약속도 정해둔 상태였다.
그들이 한 달에 한 번씩만 만나던 이유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안전하기 만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에는 꼭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기에 억지를 부린 감이 없잖아 있었다.
크라포드는 수중에 있는 돈을 털어 아름다운 반지를 샀다.
‘좋아해 줬으면 좋겠군.’
부푼 가슴을 안은 크라포드는 그날 밤, 그들이 항상 만나던 장소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그녀는 오지 않았다.
***
‘대체 왜…….’
일주일 만에 얼굴이 핼쑥해진 크라포드는 터덜터덜, 힘없는 걸음으로 아쿠에리아에 돌아왔다.
그녀가 약속을 해놓고 오지 않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던 크라포드는 술집으로 들어가 술을 있는 대로 들이켰다.
평소 그의 품행을 잘 알고 있던 술집 주인이 넌지시 물었다.
“뭐 슬픈 일이라도 있나 보지?”
“큭, 예…… 아무래도 저, 실연당한 것 같습니다.”
“저런! 어떤 여자가 자네 같은 사람을?”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 술집 주인은 주변의 눈치를 살피더니,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런 여자는 잊어버리게. 그리고 오늘 밤 중앙 광장에 가보게나.”
“중앙 광장은 왜요?”
“자네 몰랐나? 영주님께서 일주일 전에 잡은 인어를 오늘 광장에서 전시하시기로 공표하셨네. 그 미모가 끝내주게 아름답다고 하더군. 그녀라도 보면서 슬픈 일은 잊어버리게.”
“……인어라고요?”
번쩍!
그 단어를 듣는 순간, 그는 마나로 취기를 순식간에 날려 버렸다.
몽롱하던 정신을 날카롭게 벼린 그는 술집 주인에게 물었다.
“어디서 잡았답니까?”
“으, 응? 멀지는 않다고 들었네. 왜, 저기 서쪽으로 가면 쌍둥이 바위가 있지 않은가? 그 근처에서 잡았다고 하더군.”
크라포드의 돌변한 기세에 놀란 술집 주인이 떠듬떠듬 말을 마쳤다.
‘쌍둥이 바위…….’
크라포드의 눈이 빛났다.
항상 그녀와 만나던 동굴이 쌍둥이 바위의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나 때문에? 내가 무리하게 보자고 해서 엘레느가 잡힌 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크라포드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철그럭, 철그럭.
다시는 쓸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던 검과 방어구를 장비한 크라포드는 밤을 기다렸다.
***
마치 수영장을 연상케하는 거대하고도 투명한 어항.
그 안에 갇힌 존재는 두려운 눈으로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들을 회피했다.
엘레느.
크라포드의 연인이자 인어족인 그녀는 연신 뒤로 물러나고 싶었지만, 그조차도 쉽지 않았다.
철그렁, 철그렁.
그녀의 목을 강력하게 조이고 있는 목줄.
그것이 그녀의 움직임을 철저하게 제한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고 싶어요…… 크라포드…….’
광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에게 동물처럼 구경거리가 된 엘레느는 구슬프게 울었다.
그리고 그 순간,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듯한 고함 소리와 함께, 어항이 깨졌다.
쨍그랑!
촤아아아아악!
어항이 깨지고, 흘러나오는 물과 함께 엘레느의 신형도 함께 섞여 나왔다.
순식간에 검을 휘둘러 어항을 깨고, 그녀의 목줄을 잘라버린 크라포드가 그녀를 제 품에 안고 달렸다.
“아아, 크라포드! 크라포드!”
“조금만 기다려. 내가 널 다시 바다로 돌려보내 줄 테니까.”
시민들 수백 명이 쳐다보는 앞에서 자신의 물건을 강탈당한 바리탄 남작은 크게 분노했다.
“저 녀석은 크라포드가 아닌가! 감히 내 물건에 손을 대다니!”
이제는 자신의 기사도 아닌 녀석이 가장 아끼는 물건을 훔쳐갔다.
그 상황에서 바리탄이 내릴 만한 명령은 하나뿐이었다.
“놈을 죽여서라도 인어를 다시 빼앗아와라!”
분노에 찬 명령과 함께 크라포드의 이야기는 끝이 났고, 카이의 시야가 본래대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