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67화 (67/441)

# 67

힐통령 067화

30장. 기사를 사랑한 인어(2)

카이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마치 짧은 단편 영화를 한 편 감상한 것처럼, 크라포드의 이야기는 머릿속을 떠다니며 짙은 여운을 남겼다.

‘그렇군. 그건 크라포드의 이야기였어.’

그는 종족을 뛰어넘은 사랑을 나누던 낭만적인 기사였다.

동시에 그것이 그가 [인어들의 고향]이라는 책을 쓸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엘레느는 무사히 바다로 돌아갔지. 크라포드가 창과 칼을 받아내면서도 그녀만은 끝까지 지켜냈거든.”

“크라포드는요?”

이야기를 하던 도적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더니, 담배곽을 열어 한 개비를 집어 들었다.

“고객님, 하나 펴도 될까?”

“예.”

칙, 치직.

마법 성냥으로 담배에 불을 붙인 도적은 매캐한 연기를 음미하더니 말을 이었다.

“크라포드도 목숨은 건졌어. 지금도 아쿠에리아의 주민으로 살아가고 있거든.”

“……정말입니까? 바리탄 남작의 성격에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정말이야. 크라포드는 현재 아쿠에리아의 서쪽 외곽 지역의 판자촌에서 물고기나 낚으면서 살고 있지.”

툭.

아예 골드 주머니를 책상 위에 올려놓은 카이가 물었다.

“얼마입니까.”

“이건 2골드만 내.”

돈을 건네받은 도적은 크라포드가 살고 있는 위치가 담긴 지도를 건네면서 설명을 이었다.

“바리탄 남작에게도 대외적인 이미지라는 게 있거든. 사실 그 인어가 크라포드의 연인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 영지민들의 동정표가 쏟아졌어.”

“그래서 살려줬다고요?”

“아니, 엄밀히 말하면 살아도 산 게 아니지만.”

치이익, 툭.

담배를 끄더니 쓰레기통으로 던진 도적이 카이를 쳐다봤다.

“그의 성정이라면 크라포드를 사고사로 위장해서 죽이고도 남아. 그럼에도 살려줬다는 건…….”

“바라는 게 있군요.”

“이야, 우리 고객님 눈치 빠르네. 혹시 여기 취직해 볼 생각 있남?”

“없습니다. 그래서 바리탄 남작이 원하는 건 인어인가요?”

“그것밖에 더 있겠어? 물론…… 그 생각을 크라포드가 모를 리 없지.”

“그런데 왜 도망칠 생각을 안 합니까?”

“도망을 치고 싶어도 못 쳐. 탈출 과정에서 공격을 받은 크라포드는 팔과 다리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거든. 게다가 주변에 기사 두 명이 항상 감시를 하고 있기도 하고.”

크라포드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자, 카이의 눈앞으로 퀘스트창이 떠올랐다.

띠링!

[크라포드를 찾아가라]

난이도 E-

아쿠에리아의 서쪽 외곽 판자촌에 살고 있는 크라포드를 찾아가서 대화를 하십시오.

퀘스트 보상 : 명성 10 상승.

‘연계 퀘스트가 있긴 있구나.’

누군가를 찾아가라는 퀘스트는 대개 연계 퀘스트로 이어진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카이가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나야말로.”

도적과 인사를 마친 카이가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하늘이 새카맣게 물든 후였다.

‘인어를 사랑한 기사라…….’

그들을 기다리는 진정한 엔딩은 과연 어떤 형태일지.

카이는 그 끝을 직접 보고 싶었다.

***

“계십니까.”

다음 날 오전이 되자 크라포드의 집으로 찾아간 카이는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안쪽에서는 경계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요.”

“지나가던 모험가입니다. 꼭 여쭤볼 게 있어서요.”

“……들어오시오.”

문을 열고 들어간 카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이 한때 미래가 촉망받던 기사가 사는 곳인가…….’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볼품없는 공간에 절로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크라포드로 추정되는 40대 중반의 남자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카이에게 다가왔다.

“모험가가 나에게 물어볼 것이 있나?”

그곳에는 크라포드의 이야기에서 보았던 젊고 잘생긴 청년이 없었다.

노숙자를 연상케하는 장발의 머리와, 덥수룩한 수염을 보고 있자니 괴리감이 느껴질 정도.

“이 책, 당신이 쓰신 것 맞습니까.”

카이가 인벤토리에서 [인어들의 고향]을 꺼내자, 크라포드의 두 눈이 크게 뜨여졌다.

“아니, 이 책은……!?”

떨리는 손을 뻗어 책을 부여잡은 크라포드는 천천히 책장을 펼쳤다.

한 페이지, 두 페이지.

느릿하게 책을 읽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이건 내가 집필하여 엘레느…… 내 연인에게 선물해 주었던 책이지.”

“전 우연한 경로로 이 책을 손에 넣었고, 당신과 엘레느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으음…….”

자신이 사랑했던 연인을 떠올린 크라포드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다 지나간, 한때의 추억일 뿐이지.”

“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십니까?”

툭, 툭.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쳐 보인 카이가 믿음직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제가 엘레느와 만날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마음은 고맙지만 무리라네. 지난 20년 동안 그녀를 보고 싶었지만 기사들의 감시 때문에 그러지 못했지. 혹여나 그녀가 다시 잡히기라도 하면…… 이번에는 구해줄 수 없으니까.”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는 크라포드는 완전한 자포자기 상태였다.

검은커녕 숟가락 하나도 겨우 드는 빈약한 양팔과 걸어 다닐 때조차 절뚝거리는 두 발!

누군가를 구해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몸뚱어리였다.

“하지만 엘레느를 알고 있는 모험가라…… 그렇다면 자네에게 부탁할 것이 있네.”

절뚝, 절뚝.

방의 구석으로 다가간 크라포드는 바닥에 쌓인 책들 사이에서 뭔가를 꺼내 카이에게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편지일세. 나는 기사들의 시선을 피해 그녀를 볼 수 없지만…… 모험가인 자네라면 가능할 것이네. 그녀에게 이 편지를 건네주게나.”

띠링!

[크라포드를 찾아가라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명성이 10 상승합니다.]

[연계 퀘스트, 크라포드의 마음 퀘스트로 이어집니다.]

[크라포드의 마음]

난이도 : D-

자신의 연인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크라포드의 마지막 소원은, 그녀가 자신을 잊은 채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엘레느를 만나 크라포드의 마음이 담긴 편지를 전해줍시다.

퀘스트 보상 : 선행 스탯 5개, 인어의 비늘.

실패 페널티 : 선행 스탯 5개 감소.

“…….”

편지지를 받아든 카이는 퀘스트 창을 앞에 놓고 고민했다.

카이로서는 위험 부담을 떠안을 여지도 없는 퀘스트였지만, 고민을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두 사람의 엔딩. 정말 내가 이대로 끝내도 괜찮은 걸까?’

엘레느와 크라포드.

두 사람에게는 그 어떠한 잘못도 없었다.

서로를 사랑한 죄밖에 없는 그들이 이 지경이 된 것은 모두 바리탄의 탐욕 때문이다.

‘만약 바리탄이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머릿속에서 저절로 그림이 그려졌다.

해변가를 뛰면서 해맑게 웃는 아이와 그 녀석을 지켜보며 손을 잡은 채 걸어가는 부부,

크라포드와 엘레느의 모습이.

하지만 현실은 참혹했다.

‘두 사람은 20년이 넘게 서로의 얼굴조차 볼 수 없었고…… 크라포드는 다 찌그러져 가는 이 집에서 겨우 숨만 붙이면서 살고 있지.’

이 상황에서 편지를 전해주는 것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마음을 굳힌 카이는 편지지를 다시 내밀며 고개를 흔들었다.

“거절하겠습니다.”

동시에 떠오르는 알림음!

쿠구궁.

[크라포드의 마음 퀘스트에 실패하셨습니다.]

[선행 스탯이 5개 감소합니다.]

충격적인 메시지가 떠올랐음에도 불과하고 카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그대로 밀고 나가는 고집불통!

그러한 행동은 크라포드조차 당황하게 만들었다.

“아, 아니, 대체 왜……? 날 도와준다고 하지 않았나?”

“엘레느와 만나는 걸 도와드린다고 했지, 이런 편지 쪼가리를 전해준다고는 말 안 했습니다.”

“하지만 난 더 이상 그녀와 만날 수 없네.”

“제가 도와드린다고 했잖습니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란 말일세!”

주먹으로 제 가슴을 쿵쿵 때린 크라포드는 분노와 억울함이 한데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나라고 그녀를 만나고 싶지 않겠나? 전혀!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그녀를 보고 싶은 건 나일 걸세!”

“그런데 어째서…….”

“이미 한 번 실패해 봤으니까!”

버럭 소리를 친 크라포드는 입술을 꾹 다물더니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어진 음성은 방금 전과는 달리 착 가라앉아 있었다.

크라포드는 자책을 하는 것처럼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 욕심으로 인해 그녀가 눈물을 흘리는 걸 봐버렸단 말일세. 만약 내 욕심으로 인해 그녀가 다시 한번 잘못된다면…… 난…… 도저히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단 말이네.”

‘그런가.’

죄책감.

크라포드는 엘레느가 인간에게 잡힌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는 죄책감에 짓눌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왜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자가 후회하며 과거에 갇힌 채 살아가야 하는가.

목에서 태양교의 펜던트를 꺼낸 카이는 두 손으로 그것을 잡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크라포드 님. 그것은 절대 당신의 욕심이 만들어낸 일이 아닙니다. 욕심에 사로잡혀 두 사람의 아름다운 사랑을 철저히 짓밟은 자들만이 죄를 지니고 있지요.”

“……그 펜던트를 보니 태양교의 사제였군. 하지만 이미 늦었네. 난 이미 그녀에게 상처를 입혔어. 아마 날 많이 원망하고 있겠지.”

두 손으로 제 얼굴을 덮으며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크라포드.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카이가 질문을 던졌다.

“크라포드 님은 엘레느 님을 원망하십니까? 왜 인간에게 잡혀서 이런 상황을 만들어냈냐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어찌 그런 생각을…….”

“마찬가지입니다.”

고개를 들어 올린 크라포드가 마주한 건 자애로운 카이의 미소였다.

카이는 햇살의 따스함이 번진 손을 크라포드의 정수리 위에 가볍게 얹었다.

그의 머리를 채우던 부정적인 생각이 천천히 씻겨나가고, 상처 입은 마음이 치유되었다.

카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크라포드 님은 어째서 엘레느 님을 원망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야…… 그야 내가 아직도……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네.”

그녀가 지나간 한때의 추억이라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

자신을 잊은 채 살아가면 좋겠다는 내용이 담긴 편지도, 새빨간 거짓말.

거짓으로 무장을 한 채, 자신마저 속이던 크라포드는 가슴 한편에서 북받쳐 올라오는 서러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사랑하는 이를 20년 동안 볼 수 없었던, 그 누구보다 뜨거운 가슴을 지닌 사내의 눈물이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엘레느 님은 어떨 것 같습니까?”

“그녀라면…….”

“당신이 알고 있는 엘레느 님이라면, 정말로 사랑이 식은 채 당신을 원망할 것 같습니까?”

“……그녀라면, 그녀가 그럴 일은…… 없을 걸세.”

주르륵.

누구보다 엘레느를 잘 알고 있기에, 절대 그럴 일 없다는 걸 알고 있는 크라포드가 눈을 감았다.

사실 그녀가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그녀를 만나지 못하는 것이 서럽고 두려웠기에 그런 식으로 자기합리화를 했을 뿐!

“사람은 신이 아닙니다. 서로의 생각을 모르고, 감정을 모른 채 살아가지요.”

카이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황금빛은 순식간에 방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사랑, 그 위대한 감정은 그 말도 안 되는 걸 가능토록 해줍니다.”

카이의 따스한 위로 한 마디에 크라포드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물었다.

“내가 진정…… 진정 욕심을 부려도 되겠는가……?”

“그걸 욕심이라 부르지 마십시오. 그건 당신의 진심일 뿐입니다.”

거듭된 설득에 결국 크라포드는 자신의 마음을 깨닫고, 인정했다.

“크으윽… 보고 싶네…… 엘레느…… 나의 사랑스러운 연인이 미치도록 보고 싶다네…….”

지난 20년 동안, 그녀가 자신의 삶에서 자리를 비웠던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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