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힐통령 068화
30장. 기사를 사랑한 인어(3)
카이는 다 큰 어른이 펑펑 우는 것을 지켜보며 손수건을 건넸다.
한참이나 눈물을 흘리던 크라우드는 진정이 되자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고맙네. 제법 부끄럽군.”
“이제 와서요?”
카이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마주한 크라포드는 머리를 긁적이며 되물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말했다시피 내 주변에는 두 명의 기사가 항상 날 감시하고 있네.”
“그들은 제가 맡을 테니 염려 놓으시고…… 엘레느 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있으십니까?”
“……방법은 있네.”
크라포드는 자신의 베개에서 조그마한 피리 하나를 꺼내 들었다.
“조개껍데기로 만든 피리일세. 이 피리를 건네주던 엘레느가 이런 말을 했네. 이 피리를 부르면 어디가 되었든, 언제가 되었든, 자신이 찾아가겠다고.”
“낭만적이군요.”
“……그래, 그녀는 끝내주게 멋진 여성일세. 나와는 다르게 말이지.”
“크라포드 님도 수염 깎고, 머리 손질하면 아직까지 현역일 거 같은데요?”
카이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지금에야 노숙자처럼 보인다지만, 카이는 크라포드의 잘나가던 기사 시절을 본 적이 있다.
‘부러울 정도로 잘생겼었지!’
지금도 수염과 긴 장발에 가려져 있을 뿐, 본판이 어디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 일단 나가죠.”
“……어디를 말인가?”
“설마 지금 그 꼴로 엘레느 님을 보시겠다는 건 아니죠?”
카이의 황당한 목소리에 제 몸을 내려다보던 크라포드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부끄럽지만 내 수중엔 돈이…….”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카이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제가 오늘 크라포드 님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 다 고쳐드릴 테니까.”
***
서걱, 서걱.
“어머……!”
“어쩜……!”
아쿠에리아의 미용실에서 손님들의 머리를 손질하던 직원들이 동시에 감탄사를 터뜨렸다.
스윽.
감겨있던 눈을 뜬 크라포드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쳐다봤다.
“아아…….”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고, 주름이 조금 지기는 했지만, 엘레느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던 그 시절의 그 얼굴이다.
자신조차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으니,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말할 것도 없었다.
머리와 수염 손질이 끝나자 카이는 그를 데리고 가게를 나왔다.
‘진짜 잘생겼다.’
그야말로 미중년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크라포드!
젊었을 때는 단순히 잘생긴 미청년이었지만, 슬픈 나날을 보내온 그는 우수에 찬 눈빛으로 인해 한층 더 성숙하고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제 옷을 사러 가죠.”
“아니, 그렇게까지 폐를 끼칠 수는…….”
“말했잖습니까. 오늘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해드린다고.”
크라포드의 등을 떠민 카이는 이후로 양복점과 구두 집 등을 들러 크라포드를 완벽한 신사로 만들었다.
“흠, 좋군요.”
크라포드의 비포&애프터를 사진으로 찍어서 광고를 하면, 떼돈을 벌 수 있을 정도!
‘사람이 이렇게나 바뀔 수 있다니. 역시 사람은 평소에 관리를 잘해 줘야 돼.’
불과 며칠 전, 어머니의 생신 때 겨우 거지꼴을 탈출한 건 까맣게 잊어버린 카이였다.
본래 개구리는 올챙이 적을 생각하지 않는 법!
크라포드를 이끈 카이는 마지막 목적지로 다가갔다.
멈칫.
“잠시 기다리게. 이곳은…….”
카이의 어깨를 붙든 크라포드는 아련한 눈빛으로 가게의 간판을 올려다봤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아니, 아닐세.”
크라포드는 얌전히 카이의 뒤를 따라 가게로 들어갔다.
“마음에 드는 것 고르세요.”
“내가 말인가?”
“그럼 제가 고를까요?”
“……아닐세. 내가 고르지.”
크라포드는 장신구 상점의 반지 진열대를 한참이나 구경하더니, 카이에게 돌아왔다.
“정하셨어요?”
“정하지 못했네.”
“그럼 제가 정해드릴까요?”
“아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크라포드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에게는 미안하지만, 반지 정도는 내가 알아서 하면 안 되겠나?”
“예? 하지만 크라포드 님은 분명 돈이 없으시다고…….”
“그녀에게 꼭 전해주고 싶었던 반지가 있네.”
“…….”
20년 전 차마 그녀에게 전해주지 못했던, 프로포즈 반지!
그것을 떠올린 카이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죠.”
“고맙네.”
“뭘요. 저도 돈 굳어서 좋죠.”
크라포드는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는 카이를 이끌고 어딘가로 향했다.
그가 앞장을 서서 도착한 곳은, 저 멀리의 바다 위로 쌍둥이 바위가 보이는 해변가였다.
“이곳이면 될까요?”
“아아, 항상 만나던 곳이 이 근처였네.”
“그럼 피리를 불어서 엘레느 님을 부르세요.”
“자네는 정말 괜찮겠나?”
“안 괜찮아도, 괜찮도록 만들어야죠. 준비도 좀 해야 되고요.”
순식간에 장비를 칠흑의 원한 세트로 변경한 카이가 등을 돌렸다.
그의 시야로 저 멀리서 다가오는 두 명의 기사가 보였다.
***
철그럭, 철그럭.
전신을 보호하는 풀 플레이트 메일을 장비한 두 명의 기사가 해안가로 들어섰다.
그들은 해변의 끝에서 피리를 불고 있는 크라포드를 응시하더니 그에게 다가갔다.
척.
하지만 그들의 앞길을 막아서는 이가 있었다.
전신을 새카만 경갑으로 감싼 모험가, 카이였다.
“저쪽은 지금부터 바쁠 예정이니, 저희는 저희끼리 따로 대화합시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지?”
“우리는 아쿠에리아의 영주이신 바리탄 남작님에게 받은 임무를 수행 중이다.”
두 명의 기사는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은 카이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설마 모험가 따위가 바리탄 남작님의 명령을 거스르겠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난 태양신 헬릭이 이 땅에 전파하신 말씀을 따르는 중인데, 감히 남작 따위가 신을 거스르겠다는 소리는 아니겠죠? 신성 모독으로 확 교단에 신고해 버릴까요.”
“감히 뚫린 입이라고!”
말이 안 통한다는 걸 깨달은 기사들이 순식간에 검을 뽑았다.
동시에 전투 태세에 돌입한 카이가 눈을 빛냈다.
‘우선 간부터 볼까.’
파앗!
모래사장을 박차고 튀어나간 카이의 검이 순식간에 회전했다.
“칼날 쇄도!”
“으음!”
기사 하나가 생각보다 빠른 카이의 공격에 신음을 흘리며 검을 휘둘렀다.
채앵!
‘반응 좋네. 공격력을 보면 대충…… 100레벨 정도인가.’
그야말로 압도적이라고 칭할만한 차이!
오크 로드를 상대할 때보다도 힘든 상대인데, 이번에는 무려 두 명이었다.
‘게다가 이 녀석들은 오크처럼 머리가 나쁘지도 않아.’
사람과 똑같이 생각을 하도록 만들어진 NPC.
그것도 설정상 수십 년이나 검을 휘둘러온 기사들이 카이의 상대였다.
“도베르! 이 녀석은 내가 맡고 있을 테니, 크라포드의 신병부터 확보해!”
“알았다!”
도베르라 불린 기사가 카이를 그대로 지나쳐갔다.
그리고 그 순간, 카이의 눈이 빛났다.
‘걸렸다.’
순식간에 몸을 돌려 도베르의 뒤로 따라붙은 카이가 소리쳤다.
“지금이다!”
파바박!
외침과 동시에 모래가 폭발하듯 허공을 비산했다.
그 사이를 뚫고 나온 것은 무려 여섯 마리의 놀 언데드들!
그들은 동시에 도베르의 왼쪽 다리에 매달렸다.
“뭐, 뭐냐 이것들은!”
당황한 도베르가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나약한 놀 언데드들은 그대로 역소환을 당했다.
하지만 카이에게는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했다.
‘칼날 쇄도!’
콰드드득!
풀 플레이트 메일은 강력한 방어력을 지닌 장비로써, 기사들이 즐겨 착용한다.
그 강력한 방어력을 배경으로 두고 휘두르는 검은 살벌할 정도!
‘하지만 여기에도 약점이 있지.’
바로 이음새.
그것이 풀 플레이트 메일의 유일한 약점이었다.
통짜 재료를 사용해 방어력을 증강한 풀 플레이트 메일을 입은 자가 원활하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이음새 부분을 느슨하게 만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보통 이음새 부분을 채우고 있는 건 가죽!
가죽을 뚫기에 충분한 카이의 검은 기사의 종아리에 위치한 이음새를 그대로 관통했다.
“크아아악!”
순식간에 한쪽 다리가 걸레가 되어버린 도베르는 비명을 터뜨리며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카이는 이미 거리를 벌려 검의 궤적에서 벗어난 상태!
‘젠장, 왼쪽 다리가…….’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도베르는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자신의 동료인 부르파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혼자서는 무리다! 지원을!”
“젠장…… 그럼 둘이서 빨리 끝내도록 하지!”
‘됐다!’
카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기사들이 크라포드에게 가는 최악의 상황은 막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놀 언데드 여섯 마리가 희생당했지만, 결과에 비하면 매우 싼 값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제대로 해보자고.’
두 명의 기사, 아니 먹잇감을 눈앞에 둔 카이의 눈이 번뜩였다.
***
선공은 도베르였다.
그는 자신의 왼쪽 다리가 그 기능을 상실했고, 기동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빠르게 인지했다.
‘그렇다면 내가 저 녀석의 발을 묶어놔야겠군.’
그 사이에 동료인 부르파가 놈의 목을 친다!
간단하지만 그만큼 효율적인 작전이었다.
쇄애애액!
수십 년간 검을 휘두른 기사의 검격이 카이를 향해 벼락처럼 떨어졌다.
카이의 수직 베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깔끔한 내려베기!
‘하지만…….’
깔끔하다는 건 군더더기가 없다는 뜻이고, 그만큼 읽기가 쉽다는 뜻이다.
즉, 반응할 수만 있다면 피하는 건 그 무엇보다 쉬운 공격이라는 것!
공격을 끝까지 주시한 카이는 왼발을 축으로 몸을 가볍게 돌리며 검을 회피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반격!
푸욱!
“크아악!”
이번에는 도베르의 왼쪽 무릎이었다.
앞과 뒤, 그야말로 너덜너덜해진 다리를 질질 끌던 토베르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 새끼가 아까부터 왼쪽 다리만!”
“상대방의 약점을 노리는 건 전투의 기본 아닌가?”
“기사의 명예도 모르는 후안무치한…….”
“사지근맥이 절단당한 남자를 미행하면서 그를 핍박하는 건 명예로운 기사가 할 짓이고?”
도베르의 개소리를 가볍게 무시한 카이는 제대로 서 있지조차 못 하는 그를 보면서 확신했다.
‘후이 관장이 그랬지. 검술에서 가장 중요한 건 뿌리라고.’
그 뿌리가 의미하는 건 바로 단단한 두 다리다.
평지에서조차 중요한 것이 두 다리거늘, 이렇게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사장에서라면?
‘아마 도베르는 이제 평소 실력의 절반조차 내지 못할 거야.’
무게 중심이 한곳으로 치우친 검만큼 피하기 쉬운 건 없으니까.
게다가 저 다리로 휘두르는 검이라고 해봤자 위력도 볼품없을 터!
그렇게 판단한 카이는 곧장 앞으로 몸을 날려 모래사장을 굴렀다.
파아악!
“쥐새끼 같은 놈!”
이 싸움은 1 대 2로 이루어진 불공평한 싸움!
카이는 도베르를 상대하면서도 등 뒤로 다가오는 부르파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애초에 불리한 싸움이니만큼, 평소 실력의 150%를 발휘해야 겨우 이길 수 있는 상황이다.
‘저들에 비해 내 레벨이 한참이나 모자라지만…… 신성 폭발을 사용하면 잠깐이나마 우세를 점할 수 있어.’
모든 스탯이 30씩 상승하는 신성 폭발은, 스페셜 칭호인 글렌데일의 성자와 놀라운 시너지를 일으켰다.
‘글렌데일의 성자는 신성력을 사용한 모든 스킬의 효과를 10%나 상승시킨다.’
한 마디로 총 150개가 상승하던 스탯이, 글렌데일의 성자로 인해 무려 165개나 상승한다는 소리!
‘그렇다면 한순간뿐이지만 녀석들에게 꿇릴 이유는 없어.’
체력도 말도 안 되게 늘어나고, 공격력과 속도, 하다못해 회피율까지 대폭 상승한다!
그 사실에 자신감을 얻은 카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모래를 털었다.
‘그럼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녀석들의 인식을 흐트려 놓는 것.’
카이는 상대방의 목을 천천히 졸라 죽이는 페르메의 독을 모두 소비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는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몸에서 털려 나가는 모래가 두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독이 없으면 만들면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