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힐통령 070화
31장. 해저왕국, 아쿠아베라
카이는 두 사람의 해후를 방해하지 않고 얌전히 기다렸다.
그들은 20년 동안 서로에게 하지 못했던 이야기,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1시간 동안 나눈 뒤에야 카이에게 다가왔다.
“기다려줘서 고맙네.”
“아닙니다, 20년 만에 만나셨는데 이 정도는 기다려드려야죠.”
“정말 고맙네, 엘레느. 이쪽은 우리가 만날 수 있도록 도와준 카이라는 모험가다.”
“어머, 그럼 저희의 은인이시네요!”
“그래. 평생을 갚아도 갚지 못할 은혜를 입었지.”
엘레느와 크라포드는 고마움이 듬뿍 담긴 눈빛으로 카이를 쳐다봤다.
순식간에 자애로운 미소를 띤 카이는 가장 모범적인 답안을 입에 담았다.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도리를 했을 뿐입니다.”
“어머, 겸손하셔라!”
“자네는 정말……!”
[엘레느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크라포드 윈더필드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무럭무럭 올라가는 호감도!
자신의 예상이 적중했다는 표정으로 메시지창을 쳐다보던 카이가 되물었다.
“그런데 이제 두 분은 어떡하실 생각입니까?”
바리탄은 자신이 크라포드에게 붙여놓은 기사들이 실종됐다는 걸 알게 되면 분노할 것이다.
당연하지만 당사자인 크라포드는 아쿠에리아는 물론 인근 영지를 돌아다니는 것도 위험할 터!
“아, 그 문제 말인데요…….”
엘레느가 수줍게 손을 들더니 크라포드를 쳐다봤다.
“크라포드, 예전에 제가 드렸던 제안 기억하시나요? 생각해 보신다고 했던.”
“물론이지. 그대가 했던 말은 단 한 문장도 잊은 적이 없어.”
“아아, 크라포드…….”
카이는 다시금 애틋해지려는 두 사람의 분위기를 사전에 차단했다.
“그래서 그 제안이란 게 어떤 건데요?”
“아, 제가 크라포드에게 같이 바닷속에서 살자고 제안을 드린 적이 있답니다.”
“바닷속이라면……?”
“저희 인어들의 고향이자, 바닷속에 위치한 유일한 왕국. 아쿠아베라랍니다.”
“하지만 인간은 물속에서 숨을 쉬지 못하잖아요?”
카이의 질문에 엘레느가 배시시 웃었다.
“설마 제가 크라포드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겠어요?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게 만들어주는 마법이 있답니다.”
“평생이요?”
“물론 제가 평생 옆에서 마법을 걸어줘야 되지만요.”
카이가 안타까운 눈빛으로 크라포드를 쳐다봤다.
“……엘레느한테 잘 보이셔야겠네요, 크라포드.”
“험험, 물론 그녀에겐 평생 잘할 것이네.”
미움을 받는 순간 그대로 익사할 수도 있는 살벌한 부부 생활!
그 사실을 인지한 크라포드는 몸을 부르르 떨며 대꾸했다.
“그럼 두 분은 언제 출발할 생각이세요?”
“저는 괜찮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크라포드는 따로 시간이 필요하세요?”
“아니, 나도 딱히 가져갈 건 없소.”
“그럼 곧장 떠나도록 해요. 인간들이 오기 전에.”
엘레느가 서둘러 떠날 채비를 하자 카이가 조심스레 질문했다.
“저기, 엘레느 님. 혹시 아쿠아베라를 방문하는 데 특정한 자격이 필요합니까?”
“인어들의 친구라면 누구나 방문할 수 있답니다.”
“그, 그럼 혹시 저도 가능할까요?”
“네? 당연히 같이 가는 게 아니셨어요? 은인에게 은혜를 갚을 기회 정도는 주셔야죠.”
“아쿠아베라에 데려가 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곳을 방문하는 건 제 오랜 꿈 중 하나였거든요.”
무려 2주 전부터 꾸기 시작한 꿈을 이루게 된 카이가 넙죽 고개를 숙였다.
“카이 님이 저희에게 해주신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럼 두 사람 잠시만 기다리세요.”
눈을 감고 무언가를 중얼거린 엘레느가 크라포드와 카이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동시에 두 사람의 머리에 비눗방울처럼 생긴 투명한 막이 씌워졌다.
“엘레느 님, 이것은?”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게 만들어주는 마법이랍니다. 지속시간은 하루밖에 안 되지만,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걸어드릴 수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렇군요.”
신기한 듯 머리에 쓰인 비눗방울을 한참이나 쳐다보던 카이는 어렸을 적 읽었던 동화책들을 떠올리며 물었다.
“그런데 아쿠아베라는 뭘 타고 가나요? 혹시 돌고래?”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따악!
엘레느가 손가락을 튕기자 그녀의 앞에 포탈이 생성되었다.
“당연히 텔레포트 마법으로 이동해야죠. 돌고래가 얼마나 느린데 그걸 타고 가죠?”
“…….”
역시 마법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종족!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인 카이는 두 사람의 권유에 따라 먼저 포탈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뒤바뀌는 풍경.
“음……!”
순식간에 납덩이라도 달린 것처럼 몸이 무거워졌다.
시험 삼아 걸음을 내딛어봤지만, 마치 수영장 바닥을 걸어다니는 것처럼 느리기 짝이 없었다.
‘이 상태로는 전투도 못 할 거야.’
하지만 개발사에서 해결책도 없이 이런 페널티를 안겨줬을 리는 없다.
느긋한 마음을 품은 카이는 여유롭게 주변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몇 미터나 되는 미역과 다양한 색상을 지닌 예쁜 산호초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것이 바닷속 풍경!’
현대의 잠수정을 통해서가 아닌, 맨몸으로 심해를 탐사한 유일한 인간이 된 카이!
줄을 맞춰 움직이는 물고기 무리와 바닥을 기어 다니는 신기한 해양 생명체들도 그의 눈길을 끌었다.
‘바다 깊숙한 곳은 막연하게 무섭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자유롭고 아늑한 풍경이다.
게다가 빛이 한 점도 없어 깜깜할 것이라고 생각했건만 밝게 빛나는 해파리들은 생각보다 많았고, 무엇보다 바닥에는 마법 가로등이 박혀있어 전혀 어둡지 않았다.
“바닷속 풍경은 마음에 드시나요?”
뒤쪽에서 들려오는 엘레느의 목소리에 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물속에서는 대화를 어떻게 해야 되지?’
카이의 고민을 알아챈 엘레느가 미소를 지으며 친절히 설명했다.
“평소에 육지에서 말씀하시던 것처럼 하시면 돼요. 마법은 편리하답니다.”
“아, 아.”
자신의 목소리가 정말 나온다는 것을 깨달은 카이가 입을 열었다.
“바닷속이 이렇게 아름다울 줄은 몰랐습니다.”
“호호,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그럼 이제 들어가실까요? 제 고향인 아쿠아베라로.”
엘레느는 한시라도 빨리 아쿠아베라를 소개시켜 주고 싶은 사람처럼 신나 보였다.
“네. 그런데…… 저게 아쿠아베라입니까?”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카이가 정면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쿠아베라의 입구는 성벽은커녕, 간단한 목책조차 없는 초라한 모습이었다.
혹시 인어들은 단체로 안전불감증에 걸린 것이 아닐까 의심이 될 지경!
“네? 안전 문제요?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엘레느는 엣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를 카랑카랑하게 울리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어차피 바닷속에는 적이라고 해봤자 나가들밖에 없고, 그들은 저희 아쿠아베라에 씌워진 마법 방벽을 뚫을 수 없답니다. 애초에 아쿠아베라를 찾기도 쉽지 않을 거예요.”
“마법 방벽이 씌워져 있다고요?”
카이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벽을 찾으며 질문했다.
“물론 인어들에게 정식으로 초대를 받은 손님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답니다. 만약 카이 님도 저에게 초대를 받지 않았다면 아쿠아베라를 눈앞에 두고도 몰라봤을 거예요. 공간인식저해 마법이 왕국 전체에 걸려 있거든요.”
“대단하네요.”
“대단하군.”
어째서 마법이 만능이라 불리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아쿠아베라의 방비 수준!
엘레느는 감탄한 카이와 크라포드를 이끌고 아쿠아베라로 들어갔다.
프리카 마을보다 치안이 나빠 보이는 허술한 도시.
그렇기 때문에 카이는 자신이 아쿠아베라 방문했다는 사실조차 긴가민가했다.
메시지가 떠오르기 전까지는.
띠링!
[스페셜 칭호, ‘아쿠아베라를 발견한 자’를 획득했습니다.]
[아쿠아베라를 발견한 자]
등급 : 스페셜
내용 : 처음으로 아쿠아베라를 발견한 자에게 주는 칭호.
효과 : 모든 스탯 +10, 수중에서의 움직임 보정 +30%.(이 효과는 칭호를 착용하지 않아도 적용됩니다.)
“오오.”
아쿠아베라 첫 발견이라는 업적을 달성하고 나서야 실감되는 해저 도시의 방문!
몸이 더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을 느낀 카이는 천천히 걸으며 주변 건축물들을 감상했다.
‘확실히 인간들의 건물들과는 많이 다르구나.’
인어들의 건물은 거대한 조개껍데기나 소라 등을 개조하여 만든 것이 대부분이었다.
물고기와 돌고래들이 건물들 사이를 제집처럼 드나들었고, 어린 인어들은 그들과 함께 놀았다.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 같은, 세속에 찌든 마음이 그대로 정화되는 듯한 풍경!
‘그리고 인어들의 종류도 하나가 아니구나.’
카이는 모든 인어가 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크나큰 착각이었다.
인어들은 모두 상반신이 사람, 하반신은 지느러미라는 것은 공통적이었지만 개개인의 종은 달라 보였다.
‘저쪽은 범고래형 인어인가? 지느러미 색깔이 그렇네. 그리고 저 사람은 갈치?’
지느러미마다 각각의 색상과 특징이 담겨 있는 인어들!
카이가 그들을 물끄러미 관찰하고 있자, 인어들이 그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아쿠아베라에 인간들이 왔어!”
“인간은 책에서만 나오던 존재 아니었어?”
“엄마! 저 사람들은 지느러미가 없어요!”
“이상해! 무서워! 그런데 궁금해!”
호기심을 품은 인어들은 순식간에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인어들이 바닷속을 까맣게 물들이며 다가오는 모습을 보던 카이는 깊은 탄식을 흘렸다.
‘이것이 인기인의 비애인가…….’
탑스타들이라면 공항에 갈 때마다 겪는 고초!
어떤 면에서는 그들보다 더욱 힘겨웠다.
그들은 전후좌우만 조심하면 되지만, 카이는 머리 위에서도 인어들이 헤엄을 치고 다녔으니까.
“인간 손님이 도시에 방문했다고?”
담백하고도 씩씩한 목소리가 카이의 귓가에 들렸다.
동시에 멸치 떼처럼 몰려 있던 인어들은 모세의 기적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옆으로 물러섰다.
그들 사이를 헤엄치며 다가온 자는 푸른색의 지느러미를 자랑하는 남자 인어였다.
‘상어……?’
그의 지느러미의 뒤쪽으로는 상어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샥스핀이 달려있었고, 다른 인어들보다 배는 커다란 상체 위로는 보기 좋은 근육이 들어서 있었다.
힘차게 물살을 가르며 다가온 그는 돌연 카이의 손을 붙잡았다.
“인어의 도시에 당도한 것을 환영합니다, 낯선 이여. 저는 백성들을 굽어살피는 자애로운 왕 카리우스의 아들, 사이러스라고 합니다.”
“저는 모험가 카이입니다.”
카이에 이어 크라포드와도 인사를 마친 사이러스는 엘레느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나저나 엘레느…… 흔한 노처녀라고 생각했는데, 남편을 두 명이나 데려오다니. 생각보다 능력이 있었구나.”
“네, 네!? 그런 거 아니에요!”
빼액 소리를 지른 엘레느가 크라포드를 꼬옥 끌어안으며 항변했다.
“제 신랑감은 이쪽! 크라포드 하나뿐이에요. 저분은 저희가 만날 수 있게 도와주신 모험가구요!”
“이런, 단순히 남편을 데려온다고 말하고 나가길래…… 내가 큰 착각을 했구나.”
머리를 긁적거린 사이러스는 사과를 건네며 카이 일행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거대한 산호초로 외부 인테리어까지 마친 사이러스의 집은 확실히 왕세자의 집이라고 칭할 만큼 멋있었다.
스스로 차가운 음료를 내온 사이러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도시에 인간들이 찾아온 건 무려 수백 년 만의 일이니, 인어들이 저리 흥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겁니다. 그들이 결례를 범했다면 부디 용서해 주시길.”
“아니요. 오히려 예쁜 인어들에게 관심받아서 좋았…… 흠흠.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습니다.”
카이가 황급히 손사래를 치자, 사이러스는 호탕하게 웃더니 말을 이었다.
“사실은 저도 개인적으로 인간에게 관심이 많…….”
우웅, 우웅.
“은 인어이기 때문에. 인간분들이 도시에 방문하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우웅, 우웅.
“두 분을 찾아온 것…….”
사이러스의 말은 중간에 계속 끊기고,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그 상황을 인지한 것은 카이뿐만이 아닌지, 네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돌아갔다.
“아니, 저건 갑자기 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러스.
하지만 연신 밝은 황금빛을 뿜어대는 물건을 확인한 카이는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