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74화 (74/441)

# 74

힐통령 074화

31장. 해저왕국, 아쿠아베라(5)

흰 수염 사범의 제안을 수락한 카이는 곧장 그를 따라 개인 수련장으로 이동했다.

‘확실히 바다는 땅값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수련장도 큼직큼직하게 짓는구나.’

인간의 기준으로 최소 300평은 되어 보일 듯한 사각형의 연무장은 바닥은 물론 벽과 천장까지 단단해 보였다.

“내부에는 특수한 마법 방벽이 둘러져 있기에 웬만한 충격으로는 절대 무너지지 않을 걸세.”

“대단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 훈련을 따라오려면 무슨 일이 있어도 강해지고 싶다는 간절한 염원이 필요해. 만약 자네가 가벼운 마음가짐을 지니고 있다면 지금 당장 포기하게. 그것이 서로의 시간을 절약하는 좋은 방법이겠지.”

“그 부분은 걱정 마십시오. 자신 있습니다.”

카이는 다시 한번 자신감에 차올랐다.

아까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나름의 근거는 있었다.

바로 여명의 검술관에서 후이 관장의 혹독한 훈련을 모두 소화했다는 것.

그것이 자신감의 발로였다.

“흐음. 그렇다면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일세.”

“물론이죠.”

“험. 그럼 혹시 본래의 직업이 뭔지 알 수 있겠나?”

직업에 대해 묻는 걸 보니 아직 사이러스 왕자가 태양의 사제에 대해선 말하지 않은 모양.

카이는 당당한 표정으로 자신의 직업을 소개했다.

“사제입니다.”

“……사제?”

“예, 사제입니다.”

“혹시 인간 중에서 다른 이들을 치유해 주는 그 사제들을 말하는 건가?”

“예, 바로 그 사제입니다.”

“허어…….”

신선한 충격에 빠진 사범의 기다란 수염이 흐느적거렸다.

“뭐, 예상 밖이기는 하지만 배우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직업 따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겠지. 내가 자네에게 가르쳐 줄 것은 단 두 가지일세.”

“경청하겠습니다.”

카이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눈빛에서는 흰 수염 사범의 가르침을 완벽하게 습득하겠다는 마음이 엿보였다.

‘가르치는 보람은 있겠군.’

옅은 미소를 지은 사범은 뒷짐을 진 채 카이의 주변을 천천히 헤엄치며 돌아다녔다.

“짐작하고는 있겠지만 바로 수중에서의 전투법과 무빙 캐스팅이 그것일세.”

“예.”

확실히 미리 예상을 하고 있던 카이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중에서의 전투법이야 육지로 나가면 사용하지 못할 테지만, 무빙 캐스팅은 달라.’

단순하고 직선적인 카이의 전투법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고쳐줄 것이다.

그야말로 혁신이라고 부를만한 전투 방법!

카이는 그 스킬만큼은 반드시 배우겠다고 의지를 활활 불태웠다.

“나는 자네의 검에 자유를 불어넣어 줄 걸세. 혹시 이 뜻을 알겠는가?”

“죄송하지만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생각해 보면 정말 간단한 뜻이라네.”

쿠르륵.

사범이 손을 뻗자 저 멀리 벽에 걸려 있던 삼지창이 순식간에 그의 손아귀로 빨려들어 갔다.

“무기에 자유를 담는다는 건, 형(形)에 구속되지 않는다는 뜻이네.”

“형식에 구속되지 않는다? 그건 지금의 저도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가 가진 유일한 검술 스킬, 여명의 검법은 딱히 정해진 검로가 없는 스킬이었다.

기껏해야 수직베기, 수평베기, 사선베기와 찌르기 정도가 전부인 하급 검술이기 때문이다.

카이의 질문에 흰 수염 사범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착각하지 말게. 형을 없애라는 건 자네처럼 아무 생각 없이 검을 휘두르라는 소리가 아니네.”

“…….”

묵직한 팩트에 얻어맞은 카이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사범이 말을 이었다.

“상식에 구애받지 않는 검. 그 무엇보다 자유로운 검을 휘두르려면 오히려 더 많이 생각을 해야 하지. 상대방이 공격을 피하게 되면 어떤 움직임을 취할지, 상대방이 만약 반격을 한다면 어떻게 피해야 할지, 피한 뒤에는 또 어떻게 공격해야 할지. 모든 경우의 수를 머릿속에서 그린 뒤에 움직여야 하네.”

“그, 그게 가능합니까?”

설명만 들어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져 오는 기분!

“물론 가능하네. 오히려 검을 잡은 이상, 자네가 언젠가는 올라서야 할 경지이기도 하지.”

“끄응…….”

카이는 여태껏 전투를 치를 때마다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과 전술로 적을 상대하던 부류였다.

그런 이에게 하루아침에 계산을 하라고 해봤자 잘 될 리가 만무하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말게. 내가 앞으로 2주 동안 자네를 전투의 달인은 무리더라도, 숙련자 정도로는 만들어 줄 테니까.”

“…….”

카이는 물속에서도 식은땀이 날 수 있다는 경이로운 사실을 느끼며 침을 꿀꺽 삼켰다.

***

“후, 하나 끝났고. 그럼 다음으로 편집해야 할 영상은…….”

미드 온라인의 영상을 전문적으로 편집해주는 마이클 레이놀드는 이메일 박스를 열었다.

모니터 위에 떠오른 것은 앞으로 몇 달 동안 처리해도 끝나지 않을 일감들.

그중에서 가장 밑에 있는 메일을 클릭한 마이클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Please fix it good……?”

그냥 잘 만들어달라는, 초등학생도 할 수 있을 만한 간단하고 조촐한 문장!

스크롤을 내려봤으나 메일에 첨부된 말은 저것이 전부였다.

‘뭐야, 요구 사항은? 뭘 어떻게 만들어 달라는 건데?’

이런 경우를 처음 맞닥뜨린 마이클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최고는 최고를 아는 법!

그렇기에 자신에게 영상을 보내는 이들 또한 미드 온라인에서는 최고의 플레이어들뿐이었다.

당연하지만 고객들은 영상을 어떤 식으로 만들지, 어느 부분에 임팩트를 줬으면 좋겠는지,

자세하다 못해 짜증 날 정도로 많은 주문 사항을 메일에 기입해 넣는다.

‘그런데 없다고? 정말로?’

혹시 장난인가 싶어 통장의 거래 내역을 확인해 봤지만, 선금은 확실하게 전달받은 상태!

“그럼 뭐야…….”

이 영상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손 볼 수 있다는 소리 아닌가?

‘그렇다고 대충…… 하는 건 프로로서 할 짓이 아니지.’

하아암.

짙은 하품을 내쉰 마이클은 아무 기대감 없이 영상을 클릭했다.

고객의 요구 사항이 없는 경우는 처음이니, 적당히 돈값만 해주면 되겠다고 생각하면서.

“……어?”

하지만 그 생각이 변하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느새 졸음을 모두 날린 마이클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영상을 분석했다.

“인트로 부분은 씬을 잘게 쪼갠 뒤 이어붙이면 더 임팩트가 있을 거야.”

“이 부분에서는 폭발 효과음을 최대로 키워주고…….”

“오크 로드와의 전투 씬에서는 템포가 느린 노래를 넣어주는 게 영상미가 살겠는데?”

고객의 요청은 영상을 잘 만들어 달라는 짤막한 글귀 한 줄뿐.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 요청이 제법 막막하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달랐다.

‘내가 넣고 싶은 효과는 모두 넣고, 내 마음대로 영상을 만들 수 있다!’

평소라면 이 정도로 불타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마이클이 확인한 영상의 내용은 끝내줬다.

‘난 게임은 직접 하지 않지만, 그래도 이 녀석들이라면 알아.’

검은 벌.

세계 10대 길드의 일좌를 맡고 있는 공룡 길드다.

그런데 영상의 주인은 그들의 뒤통수를 시원하게 까버리는 것은 물론, 레이드 보스 몬스터 두 마리를 혼자서 꿀꺽했다.

이런 영상이야말로 대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저도 모르게 흥이 오른 마이클은 잠조차 잊은 채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

2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이번에 카이가 겪은 2주의 시간은 전자였다.

‘더럽게 길었어.’

그야말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시간이었다.

후이 관장에게 검술을 배웠을 때는 최소한 두드려 맞아서 죽을 뻔하지는 않았으니까.

물론 기절을 해서 로그아웃을 한 적은 있지만…….

‘하지만 그때가 더 좋았을 줄이야.’

카이는 질린 듯한 눈빛으로 흰 수염 사범을 쳐다봤다.

그는 사람을 패는 데 있어서는 전문가였다.

이 사람이 얼마나 큰 고통을 느끼고 있는가, 더 때리면 기절을 할까?

그 모든 것을 알고서 강약을 조절하는, 그야말로 귀신같은 솜씨를 지닌 인어!

덕분에 카이는 지난 2주 동안 단 1분도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고생도 오늘로 끝.”

“물론 마지막 대련에서 통과를 해야겠지만 말이지.”

흰 수염 사범이 본인의 삼지창을 두 손으로 잡으며 중얼거렸다.

“행동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카이는 부드럽게 검을 뽑고 천천히 걸어나갔다.

지난번처럼 신성 폭발을 쓰지도, 흰 수염 사범의 뒤를 잡으려고 노력을 하지도 않았다.

“으음…….”

하지만 천천히 다가오는 카이를 마주한 흰 수염 사범은 오히려 까다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괴물 같은 인간…… 요즘 인간들은 죄다 이런가?’

그는 카이가 스펀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무언가를 가르치는 족족 그것들을 전부 흡수했으니까.

“갑니다.”

“오게.”

다음 순간 카이의 검이 봄날의 꽃처럼 유려하고 부드럽게 바닷물을 갈랐다.

만약 그 아름다움에 혹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생각을 잘못한 것이 분명했다.

카이의 검은 상대의 급소를 뚫어버릴 치명적인 가시를 품은 위험한 검이었으니까.

까앙!

삼지창을 내질러 카이의 공격을 막은 사범은 곧장 손목을 돌렸다.

우르릉.

동시에 그의 삼지창이 회전을 일으키며 강력한 찌르기를 선보였다.

‘하지만 이미 수백, 수천 번도 더 본 공격이지.’

새삼스럽지도 않은 카이는 몸의 무게 중심을 뒤로 두면서 물러나는 한편, 다리를 크게 굴렸다.

펑, 퍼펑!

바닥을 박차고, 그 후엔 물을 박차며 허공으로 솟아오른 카이!

그에게는 지느러미가 없었지만, 물을 ‘밟을’ 수 있는 강력한 두 다리가 있었다.

이것이 카이가 지난 2주간 수중 전투를 겪으며 생각해낸 방법이었다.

오직 인간인 카이만이 할 수 있는 이동방법!

‘회피 다음에는 공격. 그것도…….’

절대 피하지 못할 정도의 속도와 방향으로!

사아아아악!

순식간에 물을 밟은 카이의 몸이 90도로 꺾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휘둘러지는 검.

그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겨울의 차디찬 바람이 생각나게 만드는 살벌한 내려베기!

“음!”

사범은 짤막한 신음을 흘리며 일순 당황했지만, 그는 여전히 노련했다.

지느러미를 강하게 휘저어 뒤로 물러서는 한편, 삼지창을 회전시켜 검을 튕겨낸 것이다.

물론 카이는 기껏 잡은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잠시의 여유도 주지 않은 그는 마치 자석이라도 달린 듯 사범의 신형을 바짝 쫓아갔다.

깡, 까강, 까가가강!

두 자루의 무기가 쉴 새 없이 부딪쳤다.

누구 하나 양보할 마음이 없는, 그야말로 눈 한 번 깜빡할 때마다 오고 가는 치열한 공방!

‘그리고 지금쯤이면 그걸 쓰겠지.’

무빙 캐스팅.

인어족들이 나가족에게 대항하기 위해 만든 회심의 비기이자, 지난날 카이가 당했던 기술.

‘개중에서도 흰 수염 사범이 즐겨 쓰는 기술은 다름 아닌 익스플로젼.’

익스플로젼은 공기를 모은 뒤 터트리는 마법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카이를 향해 터져 나오기 직전!

카이의 반대쪽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스러운 방어막!”

순식간에 카이의 전방에 씌워지는 새하얀 방어막!

그 위를 바닷물을 동반한 강렬한 공기의 폭발이 덮쳤다.

쩌저저적!

성스러운 방어막은 고작 그 공격 한 번을 막고는 허무하게 깨져 버렸다.

“시도는 좋았으나, 주문의 방어력이 너무 낮구나!”

호기롭게 소리친 흰 수염 사범은 그대로 바닥을 박찼다.

그의 손끝에서 다시 한번 회전하는 삼지창!

‘아직 왼손은 거두지도 못한 상태. 이대로 돌진하면 오늘도 나의 승리. 아직 멀었구나.’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 흰 수염 사범은 다음 순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아니, 검이 왜 여기에……?’

당연히 카이의 손에 붙잡혀 있어야 할 검.

그것이 지금 맹렬한 속도로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이미 피하기에는 늦은 상황!

“크윽!”

까앙!

반사적으로 휘두른 삼지창이 겨우 검을 쳐냈다.

하지만 안도의 한숨이 입 밖으로 흘러나가기도 전, 귓가로 카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홀리 익스플로젼!”

콰르르르르르릉!

물은 물이요, 인어는 인어로다!

바닷물과 흰 수염 사범을 가리지 않고 벽으로 날려버린 강렬한 백색 광선!

그 짜릿한 손맛을 오랜만에 느낀 카이는 천천히 바닥에 내려섰다.

“……언제부터 이런 계획을?”

멍한 표정을 지은 채 자리에 주저앉아 있던 흰 수염 사범이 물었다.

“사범님이 익스플로젼을 준비할 때부터요. 제 방어막으로 익스플로젼을 못 막는 건 이미 알고 계시잖아요? 그리고 왼손으로 홀리 익스플로젼은 시전하기에는 이미 늦은 상태였죠.”

그래서 카이는 성스러운 방어막을 사용함과 동시에, 검을 있는 힘껏 던지고 오른손으로 홀리 익스플로젼을 캐스팅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야말로 허를 찌르는 자의 허를 찌르는 작전!

“……완전히 당했군.”

눈앞의 인간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흰 수염 사범은, 뭐가 그리 기쁜지 미소를 지었다.

‘나가 녀석들, 애 좀 먹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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