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75화 (75/441)

# 75

힐통령 075화

32장. 될성부른 떡잎(1)

카이는 고개를 푹 숙였다.

“지난 2주간의 가르침, 정말 감사합니다.”

“다 우리 인어들을 위한 것이지.”

“그래도 제가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고개를 들며 말하는 카이의 두 눈에는 2주 전에 없던 자신감이 깃들어 있었다.

이를 지켜본 흰 수염 사범은 제 수염을 쓸어내리며 허허 웃음을 흘렸다.

“자네를 보면서 인간이란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네. 종족 고유의 특성은 단 하나도 없지만, 다른 문화와 문명, 기술을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습득해 버린단 말이지.”

“과찬이십니다.”

쑥스러운 표정으로 볼을 긁적이던 카이에게, 흰 수염 사범이 손을 내밀었다.

“부끄럽지만 자네에게 맡기네. 인어족의 미래를.”

“믿고 맡겨주십시오.”

당당한 목소리를 내뱉은 카이는 곧장 수련관을 나서며 상황을 정리했다.

‘타르달 퀘스트는 2주 정도 남았나. 상식적으로 최소 1주일 후에는 던전에 진입해야 해.’

게다가 던전에서 1주일 동안 숨을 쉴 수 있는 방법.

그 문제도 생각을 해봐야 했다.

‘일단 사이러스에게 찾아가서 그 문제에 대한 질문을…….’

띠링!

갑자기 귓가를 울리는 알림에 카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터페이스 창에 깜빡이는 건 이메일 아이콘이었다.

미드 온라인의 계정과 연동되어 있는 주소로 메일이 왔다는 소리였다.

“이 시간에 웬 메일?”

바깥은 이미 새벽이다.

메일은커녕 스팸 문자도 오지 않을 야심한 시각!

곧장 메일함을 확인한 카이는 짤막한 탄성을 터뜨렸다.

“아!”

기다리고 기다렸던 마이클 레이놀드의 영상 편집본!

그것이 도착했다는 사실에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것이다.

‘잘 뽑혔을까? 잘 뽑혔겠지?’

무려 500만 원이나 지불하고 업계 최고의 실력자에게 맡긴 영상이다.

물론 영어 실력이 부족해서 디테일한 부분까지 요구하지는 못했지만…….

서둘러 파일을 받은 카이는 동영상을 재생했다.

“…….”

약 20분가량의 영상을 모두 시청한 카이는 쉬지 않고 다시 한번 영상을 처음부터 재생했다.

두 번째 감상은 첫 번째 감상과는 받는 느낌이 또 달랐다.

중요한 건, 그가 쉬지 않고 40분 동안 똑같은 영상을 반복해서 봤다는 것이었다.

‘한 번도 안 본 사람은 있지만,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는 영상…….’

카이가 자신의 영상을 보고 느낀 솔직한 심정이었다.

영상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고, 영화 같은 동영상!

동시에 직감에 가까운 무언가가 머리를 뒤흔들었다.

‘이건 무조건 뜬다.’

***

미라클 드림 온라인 커뮤니티(Miracle Dream Online Community).

MDOC, 엠독 등등 다양한 줄임말로 불리는 이 사이트는 게임을 플레이하지 않는 일반인들조차 명성에 끌려 한 번씩은 기웃거리는 사이트다.

전 세계의 사람들이 이용하기 때문에 24시간 내내 동시 접속자 수가 5천만 명 이하로 떨어진 적이 없을 정도이며, 사용자가 원하면 각국의 언어로 순식간에 번역까지 되는 최첨단 시스템을 갖춘 이곳은 정보의 바다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

오늘도 어김없이 싸울 놈은 싸우고, 잡담할 놈은 잡담을 하는 평화로운 커뮤니티의 채팅방.

그곳에 새로운 채팅 로그가 떠올랐다.

-야! 떴다!

└뭐, 레어 템이라도 뜸?

└히든 퀘스트라도 뜸?

└엄크라도 뜸?

└아니, 그게 아니라, 언노운 신작 떴다고! 이 머저리들아!

언노운.

그가 이 커뮤니티에서 갖고 있는 이름값은 사실 그렇게 높지만은 않았다.

물론 참교육 동영상을 통해 나름의 인기는 얻었지만, 기껏해야 호수에 던져진 조각돌 하나.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낸 조그마한 파문 정도의 크기에 불과하다.

랭커들이 매번 똑같은 패턴으로 찍어대는 영상에 질린 사람들.

그들이 언노운의 신선한 동영상에 매료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점이 그에 대한 평가를 갉아먹었다.

-뭐, 사실 언노운 같은 애들이야 일종의 밈이지. 거 왜, 옛날에 PPAP같은 것처럼 말이야.

-확실히 참교육 영상은 그럭저럭 재밌었지만…… 이번엔 글쎄?

-사실 몇 번 돌려보다가 느낀 건데, 언노운은 그리 대단한 실력을 지닌 것도 아니거든.

-만약 이전이랑 비슷한 영상을 들고온 거라면 정말 별로지.

언노운의 영상 이후로 그의 카피캣들은 수도 없이 쏟아졌다.

유행에 편승하려는 자들, 유명해지고 싶은 자들.

그들의 눈에 참교육 영상의 대박은 신세계로 향하는 통로처럼 느껴졌을 테니까.

실패한 사람은 차치하고서라도, 혼자서 길드를 박살 내는 사이다 영상만 수백 개가 올라왔다.

덕분에 갈증을 해소한 유저들은 충분히 배가 부른 상태.

포만감에 느끼는 고객을 만족시키는 건 그 어떤 일류 쉐프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뭐, 그래도 언노운이니까 한 번 볼까?

-저번에 나름 재밌었으니, 한 번 정도 더 봐주는 건 예의겠지.

-물론 저번과 똑같으면 당장 구독을 취소하겠지만 말이야.

낮은 기대치와는 반대급부로 깐깐하고 엄격한 평가 잣대.

이 열악한 상황을 뒤집고 고객들을 만족시키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이번 신작 제목 좀 특이한데?

-죽음의 술래잡기(Deathful Tag)?

-설마 몹몰이 잔뜩 해서 도망치는 식상한 내용은 아니겠지?

물론 그걸 해내는 이가 있다면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목을 받게 될 것이다.

차세대 랭커를 노리는, 그 누구보다 막강한 유망주로서.

***

“캬아, 죽이네.”

같은 시각, 천화 길드가 뮤리아 성에 임대한 최고급의 길드 하우스.

그곳 로비의 커다란 소파에 누워 있는 남성은 허공에 떠오른 영상을 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어우, 잘한다, 잘해! 검은 벌 새끼들 뒤통수를 팍! 아, 고렇취!”

길드 하우스가 제집이라도 되는 양,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는 남성.

겉보기에는 한없이 가벼워 보이지만 그 면면을 아는 자라면 절대 그를 무시하지 못했다.

천화 길드의 2인자, 여왕의 오른팔, 마법사 랭킹 7위의 플레이어.

그는 하나만 쥐고 있어도 무시 못 할 수식어들을 쭉 나열해놓은 마법사, 보이드였으니까.

“햐, 십 년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가는 기분이네.”

때문에 그가 길드 하우스 로비에서 시끄럽게 뒹굴거려도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딱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시끄러워. 빈둥거릴 시간 있으면 사냥이나 해.”

“아…… 마스터.”

머리맡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시선을 느낀 보이드가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최고의 마법사답게 이 상황에서 어떤 변명이 가장 어울릴지를 생각해낸 것은 덤!

“마스터, 큰일 났습니다.”

“말해.”

설은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되물었다.

마치 네깟 게 큰일이 있어 봐야 화장실 가는 것밖에 더 있냐는 눈빛으로.

“이 영상 보셨습니까?”

보이드는 순식간에 영상 공유를 통해 언노운의 신작을 그녀에게 보여줬다.

첫 시작부터 눈길을 끈 것은, 동영상 좀 봤다 하는 사람은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었다.

‘제작자가 마이클 레이놀드?’

천화 길드의 영상편집부에 고용하려고 제안을 해봤지만, 기업에 묶이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퇴짜를 놓았던 인물이다.

그녀의 눈빛이 살짝 차가워지는 것과 동시에 인트로가 시작되었다.

두 눈에 들어온 것은 거대한 목책.

그리고 그곳을 향해 여유롭게 걸어가는 검은색 로브를 입은 마법사들.

그들이 누군지는 가슴에 박혀 있는 엠블렘을 볼 수만 있다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검은 벌.’

압도적인 화력으로 천화 길드를 따돌리고 세계 10대 길드라는 타이틀을 손에 넣은 길드.

예전에는 물론 지금도 언젠가는 넘어야 할 경쟁자로 여기기에 항상 주시하고 있는 곳이다.

그들을 이끄는 남자가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그럼 우리도 나가지.]

구석까지 몰린 토벌대 NPC와 유저들을 쓰레기처럼 모두 버려둔 채.

자신들만 유유히 전장을 떠나려는 검은 벌 길드원들.

제삼자가 딱 보기에도 상황이 유추되며, 더럽고 치사하다는 말이 목구멍을 튀어나오기 직전.

그 단어가 목구멍 밑으로 쏙 들어갔다.

아니, 실제로 검은 벌 길드원 한 명의 목구멍을 쑤셔버린 검이 있었다.

동시에 흑백으로 전환되면서 모든 것이 멈춰버린 화면.

쿵, 쿵, 쿵.

전신의 세포를 일깨우는 듯한 강렬한 비트의 노래가 흐르기 시작하고,

목책의 불구덩이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온다.

흑과 백의 세상에서 유일하게 색(色)을 지닌 사람이.

“뭐야.”

“예?”

“뭐냐고. 얘.”

“아, 언노운이라고요. 커뮤니티 동영상 게시판의 반짝스타 같은 녀석입니다. 이번 영상으로 자리매김은 한 것 같지만요.”

그 설명을 귓등으로 흘려들은 설은영의 시선이 다시 영상으로 향했다.

영상은 언노운이 등장하는 장면을 여러 각도에서 보여줬다.

마치 영화에서 주인공이 등장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

척.

언노운이 천천히 왼손을 들어 올리고, 손가락을 튕긴다.

따악!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기도 전에 장면은 전환.

분노한 오크 주술사가 검은 벌에게 달려가고, 이를 무시한 언노운은 오크 로드에게 달려간다.

그때까지 쿵쿵. 울리던 노래가 서서히 줄어들더니 이내 사라졌다.

그리고 기사 NPC들을 모두 물린 언노운은 오크 로드 앞에 당당히 자리했다.

[…….]

그의 음성은 모두 뭉개져 있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분명 멋진 선전포고를 날렸을 것이다!

그것이 영상을 보는 이들이 떠올린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크 로드가 이런 말을 꺼내 들었으니까.

[설마 지금 거친 바위 부족의 족장인 나, 우르간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것인가? 크하아! 재미있구나!]

결투의 수락과 동시에 이어지는 격돌.

거대한 도끼와 검이 허공에서 부딪친다.

상대를 부숴 버리겠다는 의지가 서로의 무기에서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노래가 바뀌면서 영상이 조금 느리게 재생되기 시작했다.

“이 노래…….”

설은영의 무표정하던 눈매가 살짝 커졌다.

새로 시작된 노래는 에디트 피아프의 Non, Je ne regrette rien(아뇨, 전 후회하지 않아요).

흔히 영화 인셉션의 OST로 알고 있지만, 당대 프랑스 최고의 가수가 1960년에 발표한 노래다.

노래 자체가 느릿느릿한 탓에 전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노래이기도 하다.

‘왜 굳이 이런 노래를?’

마이클 레이놀드의 실력을 그 누구보다 인정하고, 그래서 한때 영입하려고 했던 설은영조차 의문을 품는 순간, 전투의 양상이 뒤바뀌었다.

콜로세움의 검투사들처럼 서로의 목숨을 노리던 치열한 싸움이 자취를 감췄다.

그곳에 잡히면 죽는 자와, 잡으면 이기는 자의 살벌한 술래잡기뿐!

그 와중에 언노운은 오크 로드와 사전에 협의해 놓은 사람처럼, 그의 모든 공격을 피해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렇구나’라며 넘어가겠지만 설은영과 보이드의 눈에는 진실이 보였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오크 로드의 움직임을 사전에 읽고…… 회피하잖아.’

‘개쩔죠?’

천하의 설은영조차 인정할 수밖에 없는 움직임!

그녀의 옆에서 영상을 구경하던 보이드는 문득 생각난 듯 말을 꺼냈다.

“그런데 언노운 이 녀석 괜찮을까요? 무려 검은 벌 길드를 건드린 거잖아요?”

“그에 대한 답은 이미 줬잖아.”

“예?”

설은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팔짱을 낀 채 턱을 까딱였다.

그들의 귓가에는 아직도 들리고 있었다.

에디트 피아프가 남긴 불후의 명곡.

Non, Je ne regrette rien(아니요, 전 후회하지 않아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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