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84화 (84/441)

# 84

힐통령 084화

37장. 블랙 리자드맨(1)

“여긴 그사이에 사람이 더 늘었네.”

사제복 차림으로 북적거리는 거리를 쳐다보던 카이는 짤막한 감상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대장간에 줄 서 있는 사람은 더 많아졌고.’

못해도 한 시간은 기다려야 할 것 같은 기다란 줄!

하지만 카이는 고민 없이 대장간의 뒤편으로 향했다.

‘다음부터는 굳이 줄을 설 필요가 없다고 했지.’

솔리드에게 특별 취급을 받는 카이였기에 뒷문으로의 출입이 허용된 것이었다.

그에게 건네받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서자 공방으로 직결되는 통로가 나타났다.

“음?”

뒷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솔리드가 몸을 돌리더니, 카이를 발견하고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게 누군가? 카이 아닌가!”

곧장 털털한 웃음을 흘린 솔리드는 망치를 내려놓으며 카이에게 다가왔다.

“생각보다 일찍 재회하게 되었군. 그동안 잘 지냈나?”

“저야 잘 지냈죠. 솔리드 님은요?”

“대장장이야 망치 휘두를 힘만 있으면 잘 지내는 거 아니겠나. 그나저나…….”

카이의 몸을 훑어본 솔리드가 작은 탄성을 터뜨렸다.

“자네는 대체 뭘 먹고 다니는 건가? 잠시 못 본 사이에 이토록 강해지다니…….”

“일이 많아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껄껄. 모험가가 입에 담을 수 있는 최고의 인사말이로군. 자, 그럼 강해진 만큼 새로운 장비가 필요해서 찾아온 거겠지?”

“예, 마침 좋은 재료도 구하게 됐거든요.”

“호오, 겸손한 자네 입에서 좋은 재료라는 말이 나오다니. 제법 기대가 되는 군 그래.”

그새 손이 근질거리는지 어서 재료를 꺼내 보라는 제스처를 취하는 솔리드.

이에 카이가 탁자 위에 하카스의 비늘을 올려놓자 솔리드가 비명을 터뜨렸다.

“오오오! 평생 보아왔던 비늘 중 단연코 최상급 품질의 비늘이로군!”

연신 비늘을 요리조리 돌려보던 솔리드는 심지어 망치를 가져와 두드려보기까지 했다.

“단단하고 마법 저항력도 높아 보여. 색깔이 너무 튀어서 조금 별로지만…… 자네는 그런 거 신경 안 쓰지?”

“예. 성능만 좋으면 외관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쯧쯧쯔…… 요즘의 젊은 모험가들이랑은 영 딴판이구만.”

솔리드는 패션 감각을 상실한 카이를 나무랐지만, 그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뭐, 그런 무덤덤하고 실용적인 면이 마음에 들지만 말이지.”

카이의 어깨를 친근하게 툭툭 두드린 솔리드가 비늘을 제 품에 한 아름 껴안고 작업대에 올리더니 물었다.

“이 정도 양이면 세트 하나를 뽑아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자네의 선택이 필요할 것 같군. 지금 자네가 입을 수 있는 수준의 장비를 만들고 성능을 조금 떨어뜨리는 것과 지금의 자네는 입을 수 없지만 재료의 성능을 온전히 뽑아내는 방법이 있지..”

“음…….”

미간을 찌푸린 카이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확실히…… 하카스의 비늘은 165레벨짜리 보스 몬스터가 뱉어낸 거였지.’

만약 솔리드가 작정하고 만들면 착용 제한 165레벨의 세트 아이템이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는 곤란해.’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당장 전력이 되어줄 수 있는 장비였으니까.

‘지금 내 레벨이 88이니까…… 100레벨 정도의 아이템이면 딱 적당할 것 같은데.’

최근에 선행 스탯도 크게 늘었기 때문에 100레벨까지는 칠흑의 원한 세트로 어찌어찌 버틸 자신이 있었다.

“지금 당장 입을 필요는 없습니다만…… 착용 제한이 너무 높아도 곤란할 것 같네요.”

“흠. 그럼 약간 더 성장했을 때 입을 수 있는 수준으로 만들면 된다는 소리로군?”

역시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솔리드!

카이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솔리드도 진한 미소로 화답했다.

“좋아. 저번처럼 최고의 걸작을 한 번 뽑아보도록 하겠네.”

“부탁드립니다. 아! 그럼 대금은 얼마나…….”

“어디 보자…….”

잠시 셈을 하던 솔리드는 이내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에이, 이번에는 그냥 무료로 해주겠네.”

“……정말이세요?”

카이가 멍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였다.

칠흑의 원한 세트를 만들 때 냈던 돈이 7골드였던 것을 생각하면, 못해도 15골드는 받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솔리드는 오히려 고맙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네 덕분에 내 경지가 올라갔지 않나. 왕실에서 내 실력을 인정하여 주는 보상이 더 좋아졌네. 그리고 찾아오는 손님들도 늘어났으니 이번에는 내 고마움의 표시라고 생각하게.”

“하지만 감사의 표시는 지난번에 전부 받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래서, 안 받을 건가?”

“아니요? 주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두 번 거절은 안 하는 카이!

망치의 뒷부분으로 제 정수리를 긁적거리던 솔리드가 말했다.

“그나저나 이번에는 제법 시간이 걸릴 것 같군. 이 주일 정도 후에 오게나.”

“딱 좋네요.”

2주.

지금의 카이가 100레벨을 찍기엔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시간이다.

“대신 다음에 올 때 좋은 술이나 한 병 가져오게!”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

콘데른 영지 근처에서 가장 유명한 사냥터는 다름 아닌 리자드맨의 늪지대다.

시종일관 끈적거리는 바닥과 더불어 전술을 이해하고 사용할 줄 아는 리자드맨들.

하나만 있어도 엿 같은 요소가 두 개나 겹친 이곳은 유저들에게 빅엿을 선사하는 사냥터로 정말 유명했다.

‘여기인가.’

늪지대의 입구에 쌓인 석탑.

타르달이 말한 접선 장소는 바로 그곳이었다.

카이가 그 옆에 서서 멀뚱멀뚱 주변을 둘러보자, 한 남자가 다가왔다.

“일찍 오셨군요. 반갑습니다.”

악수를 내미는 그의 손을 붙잡자, 머리 위로 이름이 떠올랐다.

‘네일…… NPC네.’

레벨 130의 안내인 NPC 네일.

그는 카이를 곧장 늪지대의 내부로 안내했다.

“타르달 님에게 설명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단순히 견학만 하실 겁니다.”

“……그런 말은 못 들었습니다만.”

“하하하. 타르달 님이 원체 입이 무거우시니까요. 하지만 이제 갓 입단한 신입에게 어려운 일을 맡기기도 힘드니까 우선 현장에서 선배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 감을 익힌다고 생각하시면 편할 겁니다.”

한마디로 오늘은 자신이 활약할 무대가 없다는 소리!

이에 카이는 작은 아쉬움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죠. 그럼 제가 할 일은 뭡니까?”

“태양교의 사제시라고 들었습니다. 다른 추적자들이 위험에 빠지면 적당히 서포트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러죠.”

네일은 능숙한 발놀림으로 늪지대를 척척 걸어나갔다.

잠시 후 그들이 도착한 곳은 늪지대의 중앙 부근에 위치한 자그마한 언덕.

그곳에는 일곱 명의 남녀가 옹기종기 모여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카이는 그들의 면면을 천천히 살펴보더니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유저는 없는 것 같네.’

한마디로 오늘은 NPC들과의 협동 사냥이라는 뜻!

카이가 도착한 것을 확인한 어둠 추적자들이 입을 열었다.

“삼 일 후에 올 수도 있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왔군.”

“쯧, 대의도 모르는 모험가 놈들이 어둠 추적자에 어울리기나 한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생긴 것도 영 비실비실해 보인다만.”

각자의 눈으로 카이를 품평한 그들의 시선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어쨌든 이번에는 저 애송이를 데려가라고 지침이 내려왔으니 어쩔 수 없지. 그럼 가자고.”

무리의 리더로 보이는 야만 전사는 도끼를 어깨에 걸치며 힘찬 발걸음으로 앞장섰다.

행렬의 꼬리에 따라붙은 네일은 연신 선배처럼 카이에게 이런저런 사실들을 가르쳐줬다.

“기분은 조금 나쁘시겠지만…… 카이 님께서 참으시죠.”

“왜들 저럽니까? 혹시 제가 뭐 잘못한 거라도?”

“아! 오해하시진 마십시오. 딱히 카이 님을 싫어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모험가를 좀 배척할 뿐이죠.”

카이가 고개를 돌려 네일을 빤히 쳐다봤다.

다분히 설명을 요구하는 그 눈빛에 네일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시다시피 모험가들의 성장 속도는 빠르지 않습니까. 저들도 초기에는 모험가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줬습니다. 빠른 성장을 이뤄내는 모험가들은 어둠 추적자들의 강력한 힘이 되어줄 것이라고 믿으면서요. 하지만 그들이 가르친 모험가 중 몇 명은 강해지는 순간 그들을 깔보고 무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저들은 모험가들을 미워하기 시작한 거죠.”

“흠.”

설명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카이의 뚱한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그럼 자신들을 깔본 녀석한테나 투정 부리지. 왜 나한테 이래?’

그야말로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하는 격!

당연히 화풀이의 대상이 된 카이는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그나마 안내인인 네일이 옆에서 살갑게 이런저런 설명을 해줬기에 화를 삭일 수 있었다.

“카이 님도 앞으로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게 될 테지만, 아마 당분간 단독 임무는 없을 겁니다.”

“왜죠?”

“모험가들이 단독 임무를 맡으려면 실적이 뛰어나거나 지닌 바 능력이 정말 출중해야 합니다. 그러니 카이 님은 실적이 쌓이기 전까지는 지금처럼 다른 이들을 지원하는 임무를 위주로 받게 될 겁니다.”

“흐음…….”

역시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본인의 능력을 어필하는 건 뛰어난 실적뿐!

카이는 네일을 힐긋 쳐다보며 물었다.

“그래서 오늘 잡을 녀석은 뭡니까?”

“아차, 제 정신이 이렇습니다. 아마 오늘 잡을 녀석은 블랙 리자드맨이 될 것 같습니다.”

“블랙 리자드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몬스터의 이름에 카이가 의문을 표시했다.

“아직 정식 명칭은 아니지만 곧 그렇게 명명될 녀석입니다. 혹시 어둠의 정수를 받아들인 녀석을 처치하면 어둠의 정수가 나오는 건 알고 계십니까?”

“예. 동시에 인근의 몬스터들도 다시 약해지고요.”

“맞습니다. 저희 어둠 추적자가 주로 하는 일이 그렇습니다. 어둠의 정수에 물든 몬스터들을 처치하고 일대의 몬스터들을 다시 정상으로 돌리는 것이 주된 목적이죠.”

“그럼 뮬딘 교의 뒤를 쫓는 건 누가 합니까?”

“그건 어둠 추적자 중에서도 실력이 뛰어난 이들이 단독으로 맡는 임무입니다. 저희에겐 아직 멀었죠, 하하.”

머리를 긁적이며 대꾸하는 네일을 슬쩍 쳐다본 카이는 다시 화제를 전환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블랙 리자드맨이라는 녀석이 정수를 꿀꺽한 놈인가요?”

“예. 어둠에 물들기 전에는 뭘 하는 놈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멀리서 확인한 결과 두 자루의 곡도를 들고 다니는 걸로 봐서는 리자드맨 전사였을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정지.”

야만 전사가 손을 들어 일행을 정지시켰다.

그를 따라 멈춘 카이는 전방의 바위에 앉아있는 검은색의 리자드맨을 시야에 담았다.

‘저게 블랙 리자드맨.’

듣던 대로 등 뒤에는 두 자루의 곡도를 매달고 있었으며, 도마뱀 같은 비늘 가죽이 전신을 뒤덮고 있는 녀석이었다.

“일곱 방향에서 포위한 뒤 순식간에 끝낸다.”

“빨리 끝내고 갑시다.”

“저렇게 무방비한 녀석이라니…… 뮬딘 교 녀석들도 실수를 하는군.”

블랙 리자드맨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추적자들은 한껏 여유로움을 뽐내며 곧 다가올 전투를 준비했다.

“아, 깜빡했군.”

리더인 야만전사가 카이를 돌아보더니, 검지로 땅을 가리켰다.

“우린 지금부터 놈을 사냥할 테니, 방해하지 말고 여기에서 구경이나 하면 된다. 여차하면 근처의 나무나 바위 뒤에 숨어 있어도 좋고.”

“…….”

카이가 팔짱을 낀 채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자, 야만 전사는 피식 웃으며 제 도끼를 들었다

동시에 표정이 살벌하게 바뀌는 추적자들.

성격은 어떨지 몰라도, 사냥감을 눈앞에 둔 그들의 자세만큼은 확실히 프로라 불릴 만했다.

스르르릉.

철그럭.

그들이 무기를 뽑아 드는 순간, 블랙 리자드맨의 귀가 움찔거렸다.

동시에 자리에 앉아 있던 녀석이 천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이 거리에서 소리를 들었다고?”

“지금 알아채 봤자 이미 늦었어,”

“우선 포위망부터 좁혀서 도망을 못 치게 만든다!”

순식간에 부채꼴로 퍼져 나간 일곱 명의 추적자들은 블랙 리자드맨의 전방을 포위했다.

동시에 여성 마법사가 주문을 외웠다.

“어스 월!”

쿠구구그긍!

늪지대를 뚫고 솟아난 토벽(土壁)이 녀석의 후방을 완벽하게 막아버렸다.

앞에는 일곱 명의 추적자들, 뒤로는 토벽!

빠져나갈 곳이 사라진 녀석은 살기가 담긴 샛노란 눈을 번들거렸다.

‘이건 끝났네.’

비록 자신의 마음에는 들지는 않는다지만 추적자들의 실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2초도 되지 않을 찰나의 순간에 녀석을 완벽하게 포위하는 모습은 그들이 하루 이틀 손발을 맞춘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줬으니까.

“으랴아압!”

야만 전사가 앞으로 튀어나가며 거대한 도끼를 휘둘렀다.

무기의 크기와 커다란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쾌속의 일격!

하지만 다음 순간 들린 것은, 살갗이나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아니었다.

촤아아아악!

마치 커다란 바위를 물에 떨어뜨렸을 때 날 것만 같은 소리.

동시에 자연스럽게 팔짱을 푼 카이가 인상을 찡그렸다.

‘……뭐야, 저 속도는?’

그야말로 신속(神遬)이라 불릴 만한 아득한 속도.

블랙 리자드맨은 자신의 발 아래에 깔린 채 버둥거리는 야만 전사를 내려다보며, 뱀처럼 갈라진 혀로 입술을 핥았다.

츄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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