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힐통령 086화
37장. 블랙 리자드맨(3)
당황한 블랙 리자드맨은 다시 바닥에 납작 엎드리며 카모플라쥬를 사용했다.
하지만 녀석은 자신의 피부 가죽에 묻은 얼룩덜룩한 붉은 포션까지는 지워내지 못했다.
“이제 못 써, 그건.”
짤막한 선고를 날린 카이는 신성폭발까지 사용하며 놈에게 달려들었다.
결국 카모플라쥬가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것일까.
회색 바위의 색깔로 변해있던 녀석의 피부색이 다시 검은색으로 돌아왔다.
동시에 커졌다가 작아졌다를 반복하는 녀석의 노란색 동공!
‘날 관찰하고 있다.’
관찰대상 1호가 된 카이의 오른손이 매서운 검을 뿌려냈다.
채앵!
두 자루의 곡도가 마치 이빨처럼 카이의 검을 물어뜯었다.
동시에 녀석이 양쪽 손목을 살짝 회전시켰다.
그러자 저 멀리 떨어져 있던 검날이 순식간에 다가오며 카이의 손목을 노렸다.
“이런!”
기겁한 카이는 검을 빼내며 뒤로 훌쩍 물러났다.
찌푸린 표정이 그의 난감한 기분을 대변해 줬다.
‘곡도…… 까다로운걸.’
곡도의 검날은 깨달은 자의 롱소드처럼 직선으로 뻗어 있지 않다.
중간을 기점으로 가파르게 꺾여 있는 기묘한 모양새.
멀리서 보면 검보다는 부메랑으로 보일 정도다.
그 때문인지 손목을 살짝만 돌려줘도 공격 범위가 제법 넓어졌다.
‘골치 아픈 게 두 자루나 있으니…….’
우선 한 자루를 줄여보자.
그렇게 판단한 카이의 왼손이 불시에 빛을 뿜어냈다.
“케륵!”
어스 월을 상대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느꼈지만, 이 녀석의 학습력은 굉장히 빨랐다.
카이의 왼손에서 뻗어져 나오는 홀리 익스플로젼.
그것을 한 번 얻어맞은 녀석은 필요 이상으로 왼손을 경계했고, 때문에 왼손이 빛나는 순간 몸을 숙였다.
‘하지만…….’
녀석이 똑똑하다는 건 전투를 지켜본 카이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
“훼이크다, 이 자식아!”
[체력이 회복되었습니다.]
[체력이 회복되었습니다.]
“키르윽!?”
카이의 왼손에서 빛난 것은 햇살의 따스함!
그가 진짜 공격은 검을 잡고 있는 오른손의 검지에서 뿜어져 나왔다.
콰아아아앙!
“케르아아악!”
그 와중에 몸을 비틀어 직격을 피한 무시무시한 녀석!
하지만 빙빙 돌면서 뒤쪽으로 날아가는 곡도를 쳐다본 카이가 눈을 빛냈다.
‘직격타는 못 먹였지만, 검은 한 자루 줄였다.’
이제 할 만하다.
그런 판단이 떨어지는 순간, 몸이 공기 저항을 무시하며 앞으로 튀어나갔다.
쇄애애애액!
벼락처럼 쇄도한 카이의 검이 블랙 리자드맨의 목을 향해 쏘아졌다.
부우웅!
녀석이 꼬리를 휘둘러 이를 막아내려고 했다.
자신의 비늘 가죽이 지닌 방어력을 믿은 것이었다.
하지만 녀석은 자신의 방어력은 잘 알고 있었을지 몰라도, 카이의 공격력은 잘 몰랐다.
그것이 결정적인 실수였다.
카이의 공격력은 녀석의 가죽을 찢어버리기에는 차고 넘쳤으니까.
서걱!
“케아아아아아악!”
두꺼운 꼬리가 쿵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지자 녀석은 비명을 터트리며 뒤로 물러났다.
물론 이 기세를 놓칠 생각이 없는 카이는 보폭을 빠르게 밟으며 녀석을 바짝 쫓아갔다.
“칼날 쇄도!”
치지지지징!
카이의 검에 맺힌 바람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회전하며 녀석의 곡도를 그대로 날려 버렸다.
“됐다.”
더 이상 공격할 수단을 잃어버린 블랙 리자드맨!
“그럼 잘 가라.”
마지막 일격을 꽂기 위해 카이가 다시 한번 검을 들어 올렸을 때,
무언가가 비어 있는 그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커억!”
바닥을 구르며 뒤로 나가떨어진 카이!
그는 황급히 고개를 들어 무엇이 자신을 공격했는지 확인했다.
“……아니, 저게 뭐야?”
시야에 들어온 것은 살랑살랑 흔들리는 녀석의 꼬리였다.
그것도 막 자라난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축축한 액체가 덕지덕지 묻어있는 꼬리!
‘누가 도마뱀 아니랄까 봐, 꼬리가 다시 자라나는구나.’
물론 그 사실이 이 유리한 전황을 바꿀 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하지만, 카이의 머릿속으로는 한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거 혹시……?’
몸에 묻은 흙과 나뭇잎을 툭툭 털면서 일어난 카이는 바닥에 떨어진 녀석의 꼬리를 주웠다.
[블랙 리자드맨의 꼬리]
등급 : 매직
촘촘하고 단단한 비늘 가죽으로 덮여있는 꼬리이다. 가죽을 벗겨내 장비를 제작할 수 있고, 남아 있는 꼬리는 요리 재료로는 일품!
“……호오?”
이후, 블랙 리자드맨을 바라보는 카이의 눈빛이 돌변했다.
***
“하나, 둘, 셋, 넷…….”
바닥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꼬리를 세던 카이의 음성은 열둘에서 끝을 맺었다.
“끝인가?”
“뀨룩…….”
시무룩한 눈빛으로 카이를 쳐다보던 블랙 리자드맨은 눈이 마주치자 곧장 눈을 내리깔았다.
불과 한 시간 전에 보여줬던 자신만만한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초라한 모습!
하지만 녀석의 입장이 돼서 생각해 보면 누군들 같은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덤비는 족족 꼬리를 잘라내고는 꼬리가 다시 자라날 때까지 기다리는 무서운 존재!
그렇다고 오기로 꼬리를 재생하지 않으면?
그때는 실망한 표정으로 목을 베려고 한다!
결국 블랙 리자드맨은 죽기 살기로 끙끙대며 꼬리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다.
“더 안 나와? 아랫배에 힘 좀 줘 봐.”
“끄융…….”
녀석이 안간힘을 쓰는 듯 인상을 찌푸렸지만, 더 이상 새로운 꼬리는 돋아나지 않았다.
“진짜 끝인가 보네. 그럼 이제 죽…… 음?”
검을 뽑으려던 카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이 녀석, 피부색이 원래 이랬나?’
블랙 리자드맨은 원래 피부색이 검은색이었다.
그랬으니 블랙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이고.
하지만 지금 녀석의 피부색은 검은색보다는 회색에 가까운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 꼬리를 자르는 순간 피부색이 약간 바뀐 것 같기도…….’
고개를 갸웃거린 카이가 녀석을 죽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하던 찰나.
바닥에 놓여있던 꼬리를 살펴보던 네일이 소리쳤다.
“카, 카이 님! 잠시 이쪽으로!”
“……뭡니까?”
네일에게 다가가자 그는 꼬리에서 꺼낸 무언가를 흔들어 보였다.
“이것 보십시오! 어둠의 정수입니다!”
“그게 왜 거기 있죠?”
“마지막 꼬리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아마 꼬리가 생성되는 과정에서 어둠의 정수가 우연히 흘러 들어간 모양입니다.”
“……그럴 리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카이가 블랙 리자드맨을 쳐다봤다.
“너, 일부러 그랬지?”
“키르륵?”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라는 순진무구한 눈동자를 내세우며 고개를 붕붕 젓는 녀석!
그 모습을 쳐다본 카이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 진짜 보통 똑똑한 게 아니네.’
어둠 추적자들이 자신을 사냥하러 온 이유가 어둠의 정수에 있다고 파악하고, 어둠의 정수를 꼬리를 통해 배출해내다니!
비록 어둠의 정수를 먹고 성격이 흉폭해졌다지만, 본래 똑똑한 녀석이었기에 자신이 살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낸 것이리라.
“음…… 그럼 이 녀석은 어떻게 하지?”
더 이상 어둠의 정수에 물들어 있지 않은 녀석은 이름만 블랙 리자드맨인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카이가 죽일지 말지를 고민하며 검 손잡이를 잡았다가 놓기를 반복하자, 녀석의 표정이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한참을 고민한 카이가 결론을 내리고 손을 저으며 말했다.
“으음…… 잘 가라.”
“크르륵!”
블랙 리자드맨이 울음을 터뜨렸다.
잘 가라는 말을 지옥으로 꺼지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모양!
이에 카이는 재차 훠이훠이 손을 휘저었다.
“안 죽일 테니까 가라고.”
본래의 목적이었던 어둠의 정수도 손에 넣었고, 블랙 리자드맨의 꼬리도 12개나 얻었기 때문에 내릴 수 있는 자비로운 결정이었다.
‘후우, 내가 이래서 잘생긴 호구 천사라고 욕을 먹는 건데…….’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자아성찰까지!
“……끼룩?”
뒤통수라도 맞을까 두려워 의심 섞인 눈빛을 드러내는 녀석.
이에 카이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경고했다.
“지금 안 가면 그냥 잡아버린다.”
그 말을 들은 리자드맨이 눈을 크게 떴다.
조금 전까지 적이었던 상대가 자신을 그냥 보내준다는 걸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
“안 가?”
“끼룩.”
손을 내밀어 잠시 기다리라는 제스처를 취한 녀석은, 무언가를 골똘히 고민했다.
그러기를 잠시, 갑자기 바닥에 넙죽 엎드리면서 고개를 푹 숙이는 녀석!
“갑자기 뭐 하는…….”
의문을 표시하는 카이의 눈앞으로 메시지창들이 주르륵 떠올랐다.
[블랙 리자드맨이 당신의 자비에 감복하여 복종의 절을 올렸습니다.]
[리자드맨은 강자를 숭상하는 일족. 블랙 리자드맨은 강하면서 자비롭기까지 한 당신을 따르고자 마음 먹었습니다.]
[블랙 리자드맨을 길들이실 수 있습니다.]
[길들인 몬스터에겐 장비를 입혀줄 수 있으며, 추후 스킬 북을 통해 소환과 역소환을 할 수 있습니다.]
[선행이란 종족이나 적아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태양신 헬릭은 일개 몬스터에게도 선행을 베푼 당신의 자비로움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선행 스탯이 +3만큼 증가합니다.]
“……응?”
깜짝 놀란 카이가 메시지를 한 번 읽더니, 다시 한번 더 읽었다.
‘이게 뭐야? 몬스터 테이밍이잖아?’
몬스터 테이밍.
말 그대로 몬스터를 길들여서 자신의 소환수처럼 사용하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카이는 테이머 클래스도 아닌 자신이 몬스터를 길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물론…… 테이머 클래스가 아닌 1레벨 유저들이 토끼나 다람쥐 따위를 테이밍하는 건 몇 번 본 적이 있지만.’
본 적은 있다.
하지만 같은 몬스터로 분류된다고는 해도, 토끼랑 리자드맨 전사는 그 격 자체가 다르다.
타고난 지성과 무력, 그리고 레벨까지!
‘얼떨떨하네.’
카이는 정말 얼떨떨한 표정으로 부복한 블랙 리자드맨의 뒤통수를 내려다봤다.
사실 이 상황은 정말 불가능에 가까운 확률을 뚫고 실현된 기적 같은 일이었다.
블랙 리자드맨은 어둠의 정수에 물들어 성정이 흉폭해져 있는 탓이었고, 그 와중에 카이에게 열두 번을 덤벼 열두 번을 패배했다.
그 과정에서 조금씩 깎여져 나간 자존감과 반비례적으로 커져 나가는 삶에 대한 집착!
그런데 카이가 자비를 베풀어 목숨을 살려주자, 어둠의 정수를 배출해내고 평소의 성격대로 돌아온 녀석은 말 그대로 쓰나미 같은 감동을 느끼게 된 것이다.
사실 때린 놈이 용서를 해준 것이니 감동을 느낄 구석은 어디에도 없지만!
‘……흔들다리 효과야, 뭐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눈앞의 메시지창을 쳐다봤다.
[블랙 리자드맨을 길들이시겠습니까?]
[예/아니오]
‘받아들여서 나쁠 건…….’
없다.
오히려 조금 전까지 싸워봤던 상대이기에 마음은 한쪽으로 기울었다.
이 녀석을 받아들이는 순간, 즉각 전력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섰으니까.
결국 카이는 긍정의 의사를 입에 담았다.
“……예.”
[블랙 리자드맨을 길들이셨습니다.]
[펫 상태창 카테고리가 새롭게 추가되었습니다.]
[펫 상태창에서 블랙 리자드맨의 상태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펫 상태창.”
새롭게 떠오른 인터페이스에는 블랙 리자드맨이 귀여운 SD캐릭터로 생성되어 있었다.
[블랙 리자드맨]
등급 : 필드보스
리자드맨 전사 중 최고의 기재라 불리던 천재 검사. 리자드맨 일족의 전설적인 영웅 중 하나인 아타카의 재림이라고까지 불리던 존재이다. 두 자루의 곡도를 귀신처럼 사용하고 주변 사물에 본인을 동기화하는 것이 특징. 그 뛰어난 실력과 두뇌 때문에 뮬딘 교에 사로잡혀 어둠의 정수를 주입받게 되었다.
포만감 : 41/100
충성도 : 35/100
“오, 이렇게 자세하게 나오는 건가.”
그 아래로는 블랙 리자드맨이 장비한 아이템이나 보유한 스킬들에 대한 설명도 있었다.
‘보유한 장비는 곡도 두 자루가 전부고. 스킬은…….’
[초급 리자드맨 검술 LV.1]
등급 : 노말
[카모플라쥬 LV.1]
등급 : 레어
[치유재생. Passive]
등급 : 노말
[동물적인 몸놀림. Passive]
등급 : 노말
[명석한 두뇌, Passive]
등급 : 레어
“윽…….”
일개 몬스터가 지니고 있는 것 치고는 호화로운 스킬들!
하지만 못해도 중급이었을 스킬들의 등급은 모두 초급 1레벨로 너프된 상태였다.
‘……하긴, 테이밍은 역시 키워가는 맛이니까.’
빠르게 상황을 납득한 카이는 블랙 리자드맨에게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꾸르릉!”
감격한 표정으로 손을 덥석 붙잡는 녀석!
[블랙 리자드맨에게 이름을 지어주실 수 있습니다.]
[이름을 지어줄 시 충성도가 5 상승합니다.]
“음, 이름이라…….”
카이는 턱을 문지르며 고민했다.
‘종족 이름이 블랙 리자드맨이니까…… 블랙은 너무 유치하고. 검둥이? 이건 인종차별주의자 같잖아. 그렇다면…….’
마치 게임 캐릭터 닉네임을 지을 때처럼 선택 장애가 온 카이!
결국 5분 동안 끙끙거리던 그가 갑자기 손뼉을 쳤다.
“좋아! 블리자드로 하자!”
블랙 리자드맨의 줄임말!
게다가 이름만 들으면 어디 200레벨이 넘는 마법사가 쓸 법한 주문처럼 강력한 포스마저 느껴진다.
네일은 카이의 애매한 센스에 미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당사자인 블랙 리자드맨은 이름이 마음에 드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녀석은 블리자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