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힐통령 087화
38장. 도박은 ○○○○의 지름길
카이는 리자드맨의 숲 입구에서 네일에게 작별을 고했다.
“여기서부터는 따로 가신다고요?”
“예. 곧장 가볼 데가 있어서요.”
“그렇군요.”
진한 아쉬움을 드러내는 네일.
그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번이 첫 번째 임무라고 하셔서 많은 걸 가르쳐드리려고 했는데…… 오히려 잔뜩 배우기만 했네요.”
“과찬입니다.”
“으흐흠.”
네일과 인사를 하는 도중, 야만전사가 헛기침을 내뱉으며 슬며시 앞으로 걸어 나왔다.
‘뭐야?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카이가 불만 깊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자, 그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제 콧잔등만 긁었다.
잠시 달싹이던 그의 입술은 머지않아 열렸다.
“그…… 모험가라고 무시해서 미안했다. 그리고…… 나와 동료들의 목숨을 살려줘서 고맙다.”
“……이제라도 알았다면 다행이고. 모험가라고 다 똑같은 이들은 아니니까, 앞으로도 일반화는 안 했으면 좋겠네.”
“충고 고맙다. 가슴에 새기도록 하지.”
야만전사가 먼저 사과를 건네자, 다른 추적자들도 머쓱한 표정으로 한마디씩 사과를 입에 담기 시작했다.
“비실비실해 보인다고 놀려서 미안하다.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는 건데.”
“아까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무시해서 죄송해요.”
“감사의 인사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카이 씨의 활약을 최대한 자세하게 기록하여 타르달 님께 보고서를 올리겠습니다.”
“음. 자네 같은 모험가야말로 뮬딘 교의 추적에 걸맞은 인물이겠지. 앞으로도 건승을 기원하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맙다.”
모험가들을 배척한다고 해도, 마음씨가 나쁜 이들은 아니었다.
‘하긴, 이들은 어둠 추적자. 무엇이 되었든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뮬딘 교를 대적하고자 마음먹은 이들이니까.’
흔쾌히 그들의 사과를 받아들인 카이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몸을 돌렸다.
그의 몸이 점처럼 작아지며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추적자들은 손을 흔들었다.
***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츄릅.”
사제복을 뒤집어쓴 블리자드가 혀를 날름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잘 들어서 기특한 녀석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준 카이는 곧장 아쿠에리아의 여관방을 나섰다.
‘소환/역소환 스킬 북부터 구해야겠어.’
스킬 북은 보통 마탑에서 판매한다.
하지만 가격이 비싸다는 것이 유일한 흠!
물론 카이처럼 돈 걱정이 없는 플레이어에게 마탑처럼 편리한 곳은 따로 없다.
“어서 오십시오. 어떤 용무로 방문하셨습니까?”
“스킬 북을 구매하고 싶은데요.”
“원하시는 스킬의 종류를 말씀해주십시오.”
“펫을 소환/역소환 할 수 있는 스킬요.”
“아! 사역마 호출 관련 스킬 북을 원하시는군요.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웃는 낯으로 쾌활하게 말을 끝맺은 카운터 직원은 곧장 마법 수정구를 조작하더니, 이내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저…… 손님. 죄송하지만 현재 마탑에서 사역마 호출 관련 스킬 북이 모두 판매가 된 상태입니다만…….”
“예? 마탑에서 스킬 북이 다 팔리는 일도 있습니까?”
“으음…… 아무래도 모험가분들이 즐겨 찾으시는 스킬 북들을 위주로 생산하다 보니 비주류 스킬 북의 재고가 좋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주문하신다면 일주일 내로 완성될 겁니다.”
일주일.
그리 긴 시간은 아니지만, 매번 이렇게 블리자드를 숨기는 귀찮음을 감수하기엔 제법 길다.
결국 카이의 고개는 좌우로 흔들렸다.
“그럼 다른 방법을 알아보겠습니다.”
“이용에 불편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마탑을 나온 카이가 향한 곳은 경매장이었다.
하지만 소환 관련 스킬 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나가의 삼지창을 비롯해 판매할 물건만을 등록한 카이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광장으로 나왔다.
‘뭔가 방법이 없나?’
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킬 북을 구하지 못하다니!
머리를 벅벅 긁으며 짜증을 표출해낸 카이는 곧장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후원금은 여전히 잘 쌓이고 있지만…… 후우, 그럼 뭐해. 스킬 북을 살 수도 없는데.’
하지만 일말의 희망을 품은 카이는 커뮤니티를 뒤져보기 시작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키워드는 스킬 북!
“어?”
그때 한 달 전 즈음에 작성된 게시글이 카이의 눈에 띄었다.
제목 : 고급 스킬 북 얻는 꿀팁 공개
작성자 : 맥헨로
내용 : 스킬 북을 얻고 싶다고? 그렇다면 넌 고(古) 서점이야! 거기서 수수께끼 스킬 북이라는 걸 판매하는데, 이게 다른 게임의 랜덤 박스 같은 거야. 무작위로 스킬이 나오는데, 효과나 등급, 착용 제한이 진짜 전부 랜덤임. 난 여기서 레어 등급 직업 스킬 뽑았다.
-네, 다음 뒷북.
-작성자 네 운이 좋은 거야, 멍청아.
-수수께끼 스킬 북 세, 네 개 살 돈이면 멀쩡한 스킬 북 하나를 사는데 그걸 누가 사냐?
└모르지. 돈이 썩어 넘치고 운빨에 자신 있는 놈이라면 살 수도.
-난 이거 일곱 개 샀다가 망한 이후로 쳐다도 안 봄.
-왜 이딴 게 팁과 정보 게시판에 있냐? 득템 게시판으로 꺼져.
-어라? 이거 옛날에 엄청 유행한 적 있지 않았나?
└있었음.
‘아! 고(古)서점이 있었지!’
게시글을 보는 순간, 카이가 잊어버렸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예전에 잠깐이지만 열풍을 일으켰던 수수께끼 스킬 북!
‘누구였더라? 분명 랭커 중 한 명이 여기서 유니크 등급 스킬 북을 뽑으면서 사람들이 너도나도 고서점으로 달려갔었지. 기억이 나.’
물론 그 이후에 벌어진 일도 기억이 난다.
수수께끼 스킬 북 열풍이 불었던 건 그리 길지 않았으니까.
광란의 10일이라 불리던 열흘.
그 기간 동안 커뮤니티의 모든 게시판에는 수수께끼 스킬 북의 결과가 하루에도 수천 개씩 올라왔다.
하지만 형편없는 드랍률과 쓰레기 스킬 북을 획득한 대다수의 유저들은 커뮤니티에 생전 처음 보는 욕들을 방출했고, 결국 유니크 등급 스킬 북을 뽑은 랭커가 평생 쓸 운을 다 썼다는 결론이 지어진 채 사건은 끝을 맺었다.
‘사실 나도 그때 하나쯤은 사보고 싶었는데…….’
카이의 입가로 쓴웃음이 찾아들었다.
그때는 수중에 돈이 없어서 사고 싶어도 살 수가 없었다.
용돈마저 끊긴 20레벨 사제의 지갑에 여유 따위는 없었으니까.
잠시 예전의 빈곤함을 떠올리던 카이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전에 풀지 못한 소원. 오늘 한 번 제대로 풀어보지 뭐.”
***
퀴퀴한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고서점에 들어온 카이는 코를 몇 번 씰룩거리면서 안쪽으로 들어갔다.
“음?”
깐깐하게 생긴 노인이 콧잔등에 걸친 돋보기안경을 올리며 카이를 쳐다봤다.
“오랜만에 찾아온 모험가로군. 용건은?”
“여기서 수수께끼의 스킬 북을 판매한다는 소리를 들었는데요.”
“허, 그걸 찾는 녀석 또한 간만이야. 저쪽에 있으니 알아서 골라라.”
서점 주인이 가리킨 곳은 먼지로 뒤덮인 구석 선반이었다.
‘사람들이 어지간히 안 왔나 보네.’
카이는 먼지가 수북히 덮여있는 수수께끼의 스킬 북 하나를 집어 들었다.
[수수께끼의 스킬 북]
등급 : 노말
사용 시 등급, 효과, 착용 제한이 모두 랜덤인 스킬 북 하나가 생성됩니다.
“흠.”
카이는 스킬 북을 흔들면서 물었다.
“한 권에 얼마죠?”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한 권에 10골드 정도.
‘그래서 이거 세 권 살 바에는 30골드로 마탑에서 노말 스킬 북 하나 사는 게 낫다는 소리가 있었지.’
하지만 주인장의 입에서는 의외의 답변이 흘러나왔다.
“몇 달 동안 팔리지 않는 물건이다. 어차피 조만간 재고 처리를 하려고 했으니까…… 권당 6골드 쳐주지.”
“……!”
권당 60만 원!
카이는 생각보다 저렴한 가격에 눈을 크게 떴다.
‘이 정도면…… 생각보다 손해가 막심하진 않겠는데?’
수수께끼의 스킬 북이 토해내는 것 중에는 정말 별의별 쓰레기 스킬 북이 많았다.
막힌 코 뚫기, 드랍률 0.3% 증가, 심지어는 공격 시 1% 확률로 팡파르가 터지며 유저를 응원해 주는 이해 불능의 스킬마저 있었다.
‘그것들은 경매장에 올려도 팔리지 않는 스킬들이지.’
하지만 제대로 된 노말 스킬 북만 뽑을 수 있다면, 권당 200~300만 원에 파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게다가 이 기회에 나도 쓸만한 스킬들을 얻으면 바로 배울 수 있고.’
잠시 고민을 하던 카이는 남아 있는 수수께끼의 스킬 북 개수를 세어보더니 카운터로 향했다.
“음? 안 사나?”
카이의 비어 있는 손을 바라본 서점 주인이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카이는 싱긋 웃으며 수수께끼의 스킬 북 선반을 가리켰다.
“할아버님. 제가 저기 있는 스킬 북 전부 다 살 테니 가격 좀 깎아주시면 안 되나요?”
“……저걸 다?”
최소 50권 정도는 되어 보이는 수수께끼의 스킬 북들!
잠시 머릿속으로 셈을 하던 영감은 우선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원래 10골드씩 받고 팔던 것들이야. 이미 4골드나 깎아줬는데 무얼 더 후려쳐?”
“하지만 안 팔리잖아요? 그것도 거의 1년 동안이나요.”
미드 온라인은 현실 시간의 세 배!
현실에서 석 달 전에 수수께끼 스킬 북 대란이 일어났으니, 게임 속에서는 무려 9개월이란 시간이 흐른 것이다.
“끄응…… 제법 아픈 곳을 찌르는군.”
서점 주인이 안경을 다시 한번 고쳐 쓰며 고민했다.
확실히 카이가 50권을 한 번에 사 간다고 하면, 그에게도 나쁜 소리는 아니었다.
어차피 이제는 팔리지도 않는 물건을 재고 정리한다고 생각하면 되니까.
잠시 후, 서점 주인은 약간 풀어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대체 얼마를 주겠다는 건가?”
“50권에 275골드 드리겠습니다.”
“권당 50실버나 깎겠다고?”
“무려 50권이나 사는데 이 정도는 해주셔야죠. 그리고 솔직히 제가 아니라 다른 모험가가 왔어도 권당 6골드에 주실 생각이셨잖아요?”
“끄응…….”
서점 주인은 침음성만 흘릴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몇 달 동안 팔리지 않아 먼지만 쌓이는 수수께끼의 스킬 북을 권당 3골드에 판매하려고 생각했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후우. 가져가라.”
결국 서점 주인이 백기를 올렸고, 진한 미소를 지은 카이는 카운터 위에 280골드를 올려놨다.
“……5골드가 더 얹어져 있는데?”
“생각해 보니 너무 많이 깎은 것 같아 죄송하네요. 제 사죄비라고 생각해주십시오.”
“허, 참. 웃긴 녀석이군.”
살짝 기분이 나빠 보이던 서점 주인은 카이의 애교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약간 손해를 본 기분이었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5골드를 건네받자 기분이 풀어진 것!
[고서점 주인 부크몬의 호감도가 약간 상승했습니다.]
[협상에 성공하여 20골드를 절약하셨습니다.]
[협상 스킬이 초급 3레벨이 되었습니다.]
[이제 협상을 시도할 때 상대방의 기분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좋네.’
성공적인 거래를 마친 카이가 미소를 머금었다.
그가 원한 것은 가격을 깎되, 상대방의 기분을 크게 상하지 않게 하는 것!
그 때문에 마지막에 약간의 손해를 보면서까지 5골드를 챙겨준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윈윈이야.’
카이는 서로 웃는 얼굴로 거래를 끝마치는 것이 가장 좋은 형태라고 생각했으니까.
‘아, 물론 10대 길드 녀석들은 제외.’
똥 씹은 표정으로 입금을 하던 블랙마켓의 산드로가 떠오른 카이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삼켰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충고나 하나 하지. 연금술 길드에서 파는 행운의 물약을 복용하고 사용하면 더 좋은 책들이 나온다고 들었다.”
“좋은 충고 감사합니다. 새겨듣겠습니다.”
빙긋 웃으며 서점을 나온 카이는 연금술 길드로 향하지 않았다.
‘아직 남아 있거든.’
지난번 마법의 소라고둥에서 최고의 결과를 뽑기 위해 구매해 놨던 행운 관련 장비들과 행운의 포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