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89화 (89/441)

# 89

힐통령 089화

39장. 동창회(1)

광장을 벗어난 카이가 향한 곳은 타르달의 저택이었다.

“왔군.”

“예.”

타르달.

그가 내린 첫 번째 지령을 멋들어지게 완료한 카이는 당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보면 오만해 보이기도 했지만, 타르달은 이를 질책하지 않았다.

실제로 카이가 이번에 선보인 결과는 대단했으니까.

“올라온 보고서는 읽어봤다. 제법 인상적인 활약을 했더군.”

“감사합니다.”

“사람이 이렇게 번번이 놀라움을 안겨주기도 쉽지 않은데 말이지.”

“말씀드렸잖습니까.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다고.”

“……그렇군.”

아르센 남작과 대화를 하던 때처럼, 겸양을 떨고, 서로의 얼굴에 금칠을 해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타르달과 카이는 서로를 인정했고, 그랬기에 담담한 대화를 이어갔다.

“두 번째 지령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아무래도…… 자네를 다른 이들과 같이 대우해서는 안 될 것 같으니까.”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카이는 태연함을 가장했지만, 이미 가슴은 요동치는 중이었다.

‘됐다. 타르달의 인정을 받았어!’

그는 자신이 아는 선에서 가장 깐깐한 NPC.

하지만 동시에 공정함이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랬기에 그는 이번에 카이를 제대로 인정하고,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겠다고 말한 것이다.

‘어쩌면 다음 지령부터 뮬딘 교의 뒤를 쫓는 것일 수도 있겠어.’

그러자면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뮬딘 교를 쫓는 건 리자드맨과 사투를 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치열하고, 어려울 테니까.

카이의 눈빛을 읽은 타르달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얼굴을 보니 딱히 충고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최대한 강해지겠습니다.”

“기대하지.”

“언제나 그랬지만…….”

“실망시키지 않겠다인가.”

낮은 웃음을 흘린 타르달은 서랍에서 보석함 하나를 꺼냈다.

“지난번에 말해준 적이 있을 것일세. 왜 어둠 추적자의 입단 시험에 비늘을 구해와야 하는 것인지.”

“아…….”

분명히 그런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었다.

카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타르달이 말을 이었다.

“자신이 구할 수 있는 비늘 중 최고의 비늘을 구해오라. 그것이 나의 요구였네.”

“그랬었죠.”

“난 그것만큼 공정한 시험이 없다고 생각하네. 그것 아는가? 그 시험이 상대적인 평가였다는 것을.”

“……그게 상대 평가였다고요?”

들은 적 없던 사실에 카이가 떨떠름한 의문을 내뱉었다.

“한 번 생각해 보게. 두 모험가가 리자드맨의 비늘을 구해왔다네. 그런데 한 모험가의 실력이 다른 모험가보다 압도적으로 낮다면, 자네는 누구를 뽑겠는가?”

“그야 당연히 더 강한 쪽을 뽑겠…….”

말을 이어가던 카이가 말끝을 흐렸다.

‘잠깐, 하지만 타르달은 분명히 상대 평가라고 했지?’

그렇다면 더 낮은 실력으로 더 높은 보상을 획득한 이를 뽑을 터!

“실력이 더 낮은 쪽을 뽑으시겠군요.”

“눈치챘군. 맞네. 모험가의 용기, 도전 정신, 그리고 잠재력. 우리는 그런 것들을 본다네. 어둠 추적자의 길을 걸어가는 건 힘들 거야. 뮬딘 교는 그만큼 강하고, 악랄하기 때문이지.”

“그것에 맞설 수 있는 강인한 모험가를 뽑기 위함입니까?”

“맞네.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자신의 100%를 끌어내지 못하는 모험가는, 어둠 추적자와 어울리지 않네. 그런 의미에서 항상 제 실력의 150%, 200%를 끌어내는 자네는…… 제법 기대하고 있네.”

“감사합니다.”

똑.

타르달이 보석함을 열자 조그마한 원형 패가 모습을 드러냈다.

초록색으로 이루어진 패에는 수십여 개의 별이 각인되어 있었다.

“타르달 님. 그건……?”

“모험가가 구해오는 비늘로 만들어주는 패일세. 일종의 신분패라고 할 수 있지. 받게.”

[어둠 추적자 단원 증명패를 획득하셨습니다.]

그가 건네는 패를 받아든 카이는 적당히 무겁고 차가운 감촉을 느끼며 되물었다.

“이 패로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수사 협조, 지원 요청, 신분 증명. 할 수 있는 건 많다네.”

“……제 생각이 맞다면 라시온 왕국에서만 그런 게 아닌 것 같은데요?”

“당연한 소리를.”

타르달은 무슨 말을 하느냐는 표정으로 카이를 흘겼다.

“어둠 추적자는 과거 존재했던 세계 연합군의 정신적 계승자일세. 다시 한번 대륙을 뒤덮을 어둠에 맞서고자 왕국과 제국, 수많은 상단과 교단들이 모인 세력이지. 실제로 패에 각인된 별은 과거 세계 연합군이 이루어질 때 뭉쳤던 세력들의 숫자를 의미하네. 그들의 정신과 업적을 계승한다는 뜻이지.”

“그렇군요. 그럼 이 패를 다른 왕국과 제국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는 건가요?”

“물론일세.”

“오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돈 주고도 못 구하는 아이템을 얻은 카이가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 패를 안 좋은 방향으로 남용하고 다니면 어둠 추적자들이 자네의 뒤를 쫓을 테니 조심하게.”

“다, 당연히 그런 일은 하지 말아야죠.”

“농담일세.”

살벌한 농담을 끝낸 타르달이 카이를 쳐다봤다.

“그러니 이제 보상을 줄 차례로군.”

“……보상이요?”

“왜 그런 표정을 짓는가. 설마 어둠 추적자가 대의만을 따르며 아무 보상 없이 움직이는 단체라고 생각했나?”

“그, 그야…….”

“어둠 추적자의 배후가 대륙 그 자체라는 것을 명심하게. 돈이라면 그 어떤 단체보다 많아.”

‘……생각해 보니 그렇네?’

그렇다면 주는 보상을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카이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주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자네가 이번에 어둠의 정수를 삼켰던 블랙 리자드맨을 길들였다고 들었네.”

“……그렇습니다만.”

혹시 블리자드를 데려가려는 것일까?

카이가 바짝 얼어 있자, 타르달이 테이블 위의 종을 흔들었다.

그러자 밖에서 시종들이 나무로 만들어진 사각형의 상자를 들고 나타났다.

“그 녀석이 곡도 두 자루를 귀신같이 다룬다고 들어서 준비해 봤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

“지금 열어봐도 될까요?”

“뜻대로 하게.”

검집을 열자 다소곳하게 교차되어 놓여진 두 자루의 곡도가 그 단아한 자태를 드러냈다.

블리자드가 원래 쓰던 것처럼 도신이 직각으로 휘어지지는 않았고, 마치 초승달처럼 부드럽게 휘어진 형태의 곡도였다.

‘블리자드 녀석, 계 탔네.’

순간적으로 자신이 쓸까 고민이 들었을 정도로 멋있는 도!

카이는 곧장 아이템을 감정했다.

[흑랑(黑狼)]

등급 : 레어

공격력 242~278

힘 +20

체력 +10

백호(白狐)와 함께 착용 시 공격력 30% 증가.

명장 중 하나였던 시르만이 두 자루의 곡도를 사용하는 자신의 아들을 위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한 쌍의 도.

착용 제한 : 레벨 130, 힘 360, 체력 150 이상.

내구력 100/100

[백호(白狐)]

등급 : 레어

공격력 257~269

민첩 +20

체력 +10

흑랑(黑狼)과 함께 착용 시 공격 속도 10% 증가.

명장 중 하나였던 시르만이 두 자루의 곡도를 사용하는 자신의 아들을 위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한 쌍의 도.

착용 제한 : 레벨 130, 민첩 130, 체력 150 이상.

내구력 100/100

“오오…….”

검은 늑대와 하얀 여우라!

확실히 검은색 도는 거친 느낌이 나는 반면, 하얀색 도는 마치 여성처럼 가녀린 느낌이다.

카이는 두 자루의 곡도를 잘 챙기며 고개를 숙였다.

“블리자드 녀석이 좋아하겠네요. 감사합니다.”

“이름을 정말 특이하게 지었군.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해주게.”

“저…… 그럼 다음엔 언제 찾아와야 할까요?”

“자네가 그 패를 지니고만 있으면, 우리 쪽에서 사람이 찾아갈 걸세.”

“위, 위치 추적 기능까지 있군요.”

“함부로 남용하고 다니면 안 되니까 말이지.”

“조심하겠습니다.”

두둑한 보상을 챙긴 카이가 그의 방을 나섰다.

***

“후우…….”

땀에 젖은 머리.

그리고 그 머리를 짓누르는 헤드기어를 벗은 한정우가 푹푹 찌는 늦더위에 웃옷을 벗었다.

“미치겠네. 집은 또 왜 이렇게 더워?”

토요일 오후.

거실로 나가자 누나인 한지혜가 거실 소파에 누워서 TV를 보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내 동생은 몸도 안 좋으면서 왜 옷을 벗고 다닐까? 테러가 목적이라면 성공이야.”

“내 방 더워. 이렇게 더운데 에어컨을 왜 안 틀어?”

“무슨 소리야. 추워서 가디건 걸친 거 안 보이니?”

“어…… 그러고 보니.”

방을 나오자 거짓말처럼 시원해진 집!

‘아니, 오히려 추운데……?’

으슬으슬한 몸을 부둥켜안고 있자, 안방에서 어머니가 나오며 말했다.

“네 방 에어컨 고장 났다.”

“……그럼 수리 기사 부르면 되잖아요?”

“어차피 너 곧 방 구해서 나간다고 했으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

충격, 그리고 그 위를 덮치는 더 큰 충격!

이것이 진정 친아들을 대하는 어머니의 태도인가!

“저 아직 방도 못 구했는데…….”

“오늘 구하면 되겠네. 아니면 엄마가 적당한 곳 알아봐 줘?”

“그냥 제가 구할게요.”

그래도 자신이 살아갈 공간인데, 자신이 직접 고르고 싶었다.

샤워를 마친 한정우는 옷을 입으면서 하루 계획을 세웠다.

“우선 부동산 가는 김에 은행에 들려서 현금도 좀 찾고…… 아, 이삿짐센터도 하나 알아보고 와야겠네.”

원래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안 나가는 사람이 한 번 외출하면 평소 해야 했던 일을 몰아서 하는 법! 그렇게 여러 개의 볼 일을 한꺼번에 처리할 계획을 세운 한정우는 집을 나섰다.

***

“서울 방값 비싸네.”

다행히 이삿짐센터는 부동산 쪽에서 잘 아는 곳이 있다며 알아봐 주기로 했다.

다만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는 어머니의 말에, 여의도에서 30~40분가량 떨어진 청담동에 원룸을 구해야 했다.

‘무슨 방 하나에 보증금 3천에 월 170이나 하냐.’

물론 직접 가본 결과 방 자체는 좋았다.

건물도 신축이라서 깨끗했고 방도 넓으면서 부엌과 화장실도 좋았으니까.

무엇보다 에어컨이 기본 설비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사 날짜는 벌써 2주 후인가.’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독립이 뜬금없이 다가오자, 한정우는 참담한 심정을 느꼈다.

버스를 탄 채 우수에 찬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볼 때, 누군가의 핸드폰이 울렸다.

[너 뭔데 자꾸 생각나. 자존심 상해 애가 타.]

‘누구지? 시끄러운데 전화 좀 받지.’

전화의 주인이 한참이나 전화를 받지 않자, 한정우가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그 순간, 눈을 마주친 아주머니 한 분이 이때다 싶었는지 입을 열었다.

“학생, 전화 안 받아? 시끄러워 죽겠어!”

“어……? 죄, 죄송합니다.”

설마 자신의 전화였을 줄이야!

지난 1년 동안 울린 적이 몇 번 없어서 고장 난 줄 알았는데, 다행히 그건 아닌 모양!

액정 위로 떠오른 이름을 쳐다본 한정우의 눈이 커졌다.

‘민수?’

고교 동창이었던 친구 중 하나.

몇 명 패거리가 그를 호구 취급할 때도, 민수는 끝까지 그의 편을 들어줬다.

‘간만이네. 그런데 갑자기 왜 전화를?’

그건 물어보면 될 터.

전화를 받자 낯익은 민수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야! 너 살아 있냐?

“왜, 죽었으니 소리샘으로 연결해 줄까?”

-농담하는 거 보니 살아있나 보네. 카톡은 계속 씹더니.

“아, 카톡은 지웠어.”

어차피 아무에게도 오지 않으니까!

한정우는 울적한 기분으로 퉁명스레 물었다.

“그런데 웬일이냐.”

-내가 너한테 전화하는 건 일 년에 딱 두 번 정도잖냐.

“생일은 아직 멀었는데?”

-그럼 다른 한쪽이 내 용무겠지?

“그렇다면…….”

한정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또 동창회 얘기냐?”

-그래. 석우 패거리는 안 불렀으니까 걱정하지 마. 다른 애들은 다 네 얼굴 보고 싶어 한다니까? 한 번쯤 와라.

“됐어. 얼굴 안 본 지도 오래돼서 서먹한데 뭘.”

-그러니까 얼굴 까먹기 전에 한 번 나오라는 거지. 너 보고 싶어 하는 여자애들도 많아. 너 인기 많았잖아?

“흐음…….”

동창회라.

대학을 휴학한 후로는 집 밖 외출 자체를 하지 않았던 한정우다.

당연히 동창회에 나가본 건 한 번도 없었다.

‘고등학교 친구들…….’

자신의 선행을 비웃으면서 이용해 먹던 석우 패거리만 빼면 다들 평범하고 착한 녀석들이다.

한 번쯤 얼굴을 보고 서로 잘 지내는지 물어보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아니지, 난 잘못 한 게 없잖아. 잘못은 그 녀석들이 한 거야. 내가 왜 피해야 하지?’

학창 시절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나 자신감이 부족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무언가를 결심한 한정우가 입을 열었다.

“민수야, 너 혹시 이번 동창회에 석우 녀석 부를 수 있냐.”

-뭐? 너…… 걔 엄청 싫어하잖아?

“우리도 다 컸는데 뭘.”

그래. 이제는 서로 다 컸으니까.

사회에 나온 청소년들은 어느새 어른이 되었으니까.

‘이번 기회에 가르쳐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더 이상 주먹은 사용할 수 없는, 어른들의 싸움이 무엇인지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