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힐통령 090화
39장. 동창회(2)
다음 날 저녁, 한정우는 차분한 표정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 녀석, 동창회 일정을 하루 전에 알려주다니.’
물론 민수는 이에 대해 열정적으로 반박했다.
‘지금 나랑 장난해? 내가 몇 번이고 말해주려고 했는데 네가 카톡도, 페이스북 메시지도 다 씹었잖아?’
심지어 전화를 해도 하루 종일 게임을 한다고 받지 않는 한정우였기에, 이에 관해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당연히 캡슐과 스마트폰을 연동하면 게임을 하면서도 메시지나 전화 통화가 오는 것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한정우는 그 기능을 활성화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게임을 하는 데 방해가 되니까. 랭커들도 이 기능은 비활성화해 놓는다고 들었어.’
물론 한정우의 경우에는 단순히 연락할 친구가 없었기 때문이지만!
“지난번에 사놓길 잘했다니까.”
한정우는 어머니의 생신 때 입었던 멋진 정장을 쫙 빼입고 신발을 신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본 어머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차려입고 어디 가니?”
“고등학교 동창회 가요.”
“……동창회?”
눈빛이 돌변하는 어머니!
그녀는 마치 제 새끼를 보호하는 암사자처럼 한정우에게 다가가 그를 추궁했다.
“혹시 그 녀석들이 그러디? 너보고 나오라고?”
“그런 거 아니에요. 왠지 지금은 그 녀석들을 만나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
한때는 미칠 듯이 괴로웠다.
특히 자신은 친구라도 믿었던 녀석들이 그를 이용하고, 친구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큰 상처까지 받았다.
그리고 그것이 그를 사회에서 동떨어지게 만들었다.
일종의 인간 불신.
어쩌면 그가 솔플을 하는 이유도 보상을 독차지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닐지 모른다.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인간 불신이 도사리고 있었으니까.
“……정말 괜찮겠니?”
“제가 누구 자식입니까?”
“나랑 내 남편 자식이지.”
“저희 부모님께서는 항상 이렇게 가르쳤거든요. 이기지 않는 싸움은 시작도 하지 말라고. 하지만 만약 싸움을 시작했다면, 무조건 이기라고.”
“……그랬지.”
그것을 끝으로 김현정은 더 이상 이에 관련된 질문은 던지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지갑을 열고 카드를 꺼내 흔들었다.
“혹시 엄마 카드 필요하니?”
“아니요. 굳이?”
부모님의 힘을 빌려서 녀석들을 벌 줄 생각이었다면, 이미 몇 년 전에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한정우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때는 부모님 손을 빌리는 게 창피해서 그런 거지만…….’
지금은 그 이유가 사뭇 달랐다.
‘내 힘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자신감.
누군가의 손을 빌리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도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
젊은 남녀란 남녀들은 모두 모인 일요일 저녁의 홍대.
거리를 물들인 강렬한 비트의 힙합 음악과는 반대로, 감미로운 바이올린 연주가 이루어지는 고급스러운 레스토랑.
그곳의 단체석에 앉은 민수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연신 끙끙거렸다.
“야, 정말 괜찮은 거냐?”
“뭐가.”
민수는 한정우에게 몸을 바짝 기대며 속삭였다.
“너 혹시 여기 메뉴판 안 봤냐?”
“지금 보고 있잖아.”
“가격 안 보여? 여기 비싸잖아!”
“내가 낸다니까.”
“그래서 더 걱정이라고. 너 오늘 몇 명 나오는지 알고 이러는 거야?”
“23명이라며.”
“야! 네가 석우 패거리 부르라며! 이제 27명이거든?”
“그거나 그거나.”
심드렁한 표정으로 시종일관 메뉴판만 읽는 한정우.
그런 그를 쳐다보던 민수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로또 당첨이라도 된 거냐…… 아니면 부모님한테 카드라도 빌렸어?”
“내가 달란다고 주실 부모님이냐. 아, 물론 이번에는 어머니가 빌려주신다고 하셨지만.”
“설마 안 받았어?”
“어. 그냥 내 돈에서 내려고.”
“대체 뭐지 이 생물은? 정녕 내가 알던 한정우가 맞는 것인가?”
민수는 신기한 눈빛으로 한정우의 몸을 천천히 훑었다.
“눈 치워라. 닭살 돋으니까.”
“아니 신기해서 그러지. 솔직히 너희 집 놀러 자주 가봐서 잘사는 건 아는데, 넌 그 누구보다 서민에 가까운 녀석이었잖아?”
“그랬지.”
어머니와 아버지는 모두 중소기업을 하나씩 이끌고 계시지만, 한정우가 받는 용돈은 크지 않았다.
중학교 때는 한 달에 3만 원.
고등학교 때는 한 달에 5만 원!
그것은 자수성가로 본인들의 사업을 성공시킨 부모님들의 교육 방침이었다.
-쉽게 얻은 돈은 쉽게 쓰는 법. 고기를 낚는 법을 묻는다면 가르쳐주겠지만, 고기를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 누구보다 깐깐한 부모님!
하지만 한정우는 그에 대해 큰 불만을 품지는 않았다.
누나인 한지혜조차 부모님의 회사가 아닌, 다른 회사에서 말단으로 일하는 중이었으니까.
가만히 메뉴판을 읽던 한정우가 지나가듯 물었다.
“너 미드 온라인 하냐.”
“요즘 그거 안 하는 사람도 있냐? 당연히 하지! 게다가…… 후후, 듣고 놀라지 마라? 나 이번에 휘몰이 길드에 들어갔다!”
“휘몰이 길드……?”
“너 설마 모르냐?”
민수는 얼음물에 들어있던 얼음을 이빨로 깨 먹으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뭐, 모를 수도 있지. 무려 대한민국 랭킹 4위 길드다. 내가 게임에 제법 재능이 있다나?”
“너 옛날에 나랑 게임 하면 다 졌잖아.”
“야! 미드 온라인은 스타랑 롤 같은 게임이랑 전혀 다르거든?”
열변을 토해낸 민수는 무언가가 생각난 듯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너 휴학하고 2년 동안 쉬는 중이잖아. 혹시 미드 온라인 안 하냐?”
“하지. 심지어 오픈베타 첫날부터 했다.”
“오, 그럼 레벨 높겠는데? 얼마냐?”
“88레벨이던가.”
“윽…….”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는 민수.
“좀 심각한데? 대체 뭔 짓 하고 다니면…… 잠깐만, 네 성격이면 설마?”
“뭐, 여기저기 도와주고 다녔지.”
“하긴, 너다워서 좋네. 혹시 괴롭히는 놈들 있으면 나한테 말해. 이 형이 웬만한 녀석들은 다 커버쳐 줄 수 있으니까.”
“세계 10대 길드도 가능해?”
“농담은.”
“아니면 말고.”
정우의 말을 농담으로 치부한 민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야! 이쪽!”
우글우글 들어온 남녀들은 확실히 정우의 기억에도 남는 이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와 학창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들이었으니까.
“야, 원래 약속 장소 여기 아니었잖아?”
“좀 비싸 보이는데…….”
“그건 걱정하지 마. 이 녀석이 저번에 못 나왔다고 이번에 쏜다니까.”
“……여기를?”
새삼스러운 눈빛을 지은 그들은 그제야 한정우를 발견하고 아는 체를 했다.
“여, 정우 오랜만이다?”
“얘 내 카톡이랑 페메 다 씹었어.”
“어? 네 것도? 내 것도 그러던데!”
“야야, 오해하지 마라. 다 지워서 그런 거라니까. 참고로 나도 다 씹힘.”
민수가 투정부리는 친구들을 진정시키며 자리에 앉혔다.
그 와중에 어느새 젖살이 빠져 예뻐진 여자아이들은 고개를 맞대고 수군거렸다.
“그런데 정우 뭔가 분위기 바뀐 것 같지 않아?”
“응. 뭔가 옛날엔 그냥 착한 애라는 이미지였는데…….”
“지금도 착해 보이긴 해. 하지만 뭐랄까, 훨씬 차분해 보인다고 할까?”
“어른스러워 보여!”
“그리고 잘생겨진 듯.”
“비싼 곳에서 밥 사주니까 그래 보이는 건 아니고?”
“아, 아니거든?”
물론 남자애들의 평가는 여자애들보다는 덜 호들갑스러웠다.
“정우 어디 취직했나?”
“아닐걸? 휴학했다고 들었는데…….”
“게다가 이게 어디 취직한다고 혼자 낼 수 있는 금액이냐.”
“아! 학교 다닐 때 정우 금수저라는 소문이 있었는데, 그럼 그게 사실인 건가?”
“정우가? 에이. 그런 티 한 번도 안 냈잖아. 아닐걸?”
그것이 평범한 아이들의 반응이었고,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난 이들이 보여주는 모습이다.
하지만 어디나 그렇듯, 분위기를 흐리는 놈들은 있다.
“이야, 한정우. 진짜 오랜만이다?”
입가로 비릿한 미소를 띠며 건들건들 인사를 건네는 남자.
바로 고등학교에서 한정우에게 큰 상처를 남긴 장본인인 최석우였다.
게다가 그의 뒤로는 아직도 몰려다니는지, 세 명의 남자가 병풍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휘익, 낮은 휘파람을 부른 최석우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우리 정우, 어디서 돈 많이 벌었나 봐? 이런 데서 돈 지랄도 할 줄 알고.”
“야, 분위기 흐리지 말고 자리에나 앉아라.”
정우를 대신하여 인상을 찌푸린 민수가 살짝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네네, 어련하시겠습니까. 휘몰이 길드 들어가신 초엘리트 님이신데.”
무서워 죽겠다는 시늉을 과장되게 취하며 서로 낄낄 웃는 석우 패거리들.
다른 아이들이 살짝 불쾌한 표정을 지었지만, 당사자인 최석우는 별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자, 어디 그럼 우리 정우가 사주는 음식 좀 먹어볼까? 이 가게에서 제일 비싼 게 뭐려나…….”
잠시 후 정말로 제일 비싼 음식들을 마구 시키는 석우 패거리!
다른 아이들이 당황한 얼굴로 그를 만류했다.
“야, 그건 좀 심하잖아.”
“그거 다 시키면 너희 네 명이서만 53만 원이야.”
그들의 제지에 최석우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사준다고 부를 땐 언제고, 마음대로 시키지도 못하게 해? 그게 말이야 방구야?”
“그렇네.”
한참 동안 침묵을 고수하던 한정우가 입을 열었다.
그리 큰 목소리도 아니었건만,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에게 집중됐다.
“석우 말이 맞아. 먹고 싶으면 시켜야지. 너희들도 사양 말고 먹고 싶은 거 시켜.”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을 마친 한정우는 물을 부드럽게 한 모금 넘겼다.
분위기가 험악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한정우의 한마디에 무거운 공기는 해소되었다.
“그, 그럴까? 정우가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정우야, 정말 괜찮아?”
“괜찮다니까. 먹고 싶은 거 시켜. 음료도.”
한정우가 자연스럽게 동창회를 주도해나가기 시작하자, 최석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고등학교 다닐 땐 내 한마디면 깜빡 죽던 새끼였는데…….’
자신을 절친으로 여기던 바보 같은 녀석을 이용해 먹는 건 최고로 재미있는 장난이었다.
물론 그것이 들켜서 녀석과 사이가 멀어졌을 때는 아쉽긴 했지만, 그건 친구로서 아쉬운 게 아니었다.
‘저 녀석, 조금 아픈 척하면서 빵 사오라고 시키면 걱정하면서 매번 셔틀 짓 잘 해줬는데 말이야.’
더 이상 그를 이용할 수 없다는 아쉬움.
그것이 가장 컸다.
‘뭐, 하지만 그것도 다 지나간 추억이지.’
최석우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별로 친하지 않은 민수가 자신의 무리를 동창회에 초대했을 때, 그 이유를 물어봤다.
‘몰라. 정우가 너희 한 번 보고 싶어 하더라.’
그 답변을 들었을 때의 기분은 정말 재밌고, 놀라웠다.
물론 그가 왜 자신들을 불렀는지도 충분히 예상이 갔다.
‘뭐, 확실히 오늘 돈 쓰는 걸 보니 어떤 식으로든 돈 좀 벌었나 보네.’
그래서 학창 시절 때 그를 괴롭힌 자신들을 불러 창피를 주려는 것일 터.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미 사전에 입을 맞춘 상태였다.
그가 어떤 시비를 걸거나 모욕을 해도 반응하지 말라고.
‘우리가 원하는 반응을 보여주지 않으면 아마 열 받아서 미칠 거다.’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한정우가 시비를 걸 때만을 기다리는 최석우.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의 표정은 굳어져만 갔다.
‘이 새끼…… 왜 불러놓고 시비를 안 걸어?’
돈 자랑을 하거나, 비싼 밥을 사준 고교 동창들을 내세워 자신들을 압박할 줄 알았다.
하지만 한정우가 그에게 보여주는 건 무시뿐.
마치 너라는 사람은 내 인생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했다는 걸 보여주는 듯한, 철저한 무시였다.
이에 당황한 건 최석우를 비롯한 그의 패거리였다.
‘이렇게 무시할 거면 대체 우릴 왜 부른 거야?’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비싸고 맛있는 음식들의 맛이 점점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였다.
“석우야.”
“왜?”
‘왔구나!’
최석우가 반색하며 말했다.
지금에야말로 한정우가 자신에게 창피를 줄 것이라 생각하며.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건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부족한 건 없냐. 많이 먹어라.”
“뭐, 뭐라고?”
대번에 멍청한 표정을 짓는 최석우와 그의 패거리.
하지만 다른 아이들은 그런 한정우의 모습을 보고 숙덕거리기 시작했다.
“와, 정우는 어른 다 됐네.”
“그러게. 저 녀석들 학교 다닐 때 정우 엄청 괴롭혔잖아.”
“근데 정우는 이미 다 용서한 듯한데?”
“배포부터가 달라. 뭐랄까, 있는 자의 여유라고나 할까?”
“에휴, 그런데 석우 녀석들은 뭐냐. 양심도 없이 정우가 사주는 밥이나 처먹고 있고.”
“옛날 일 사과는 했으려나 몰라?”
“애초에 양심이 있으면 여기 나오지도 않았겠지.”
‘뭐, 뭐야.’
최석우는 점점 급변하는 공기에 인상을 찡그렸다.
학창 시절 때의 그는 학교를 군림하는 포식자였다.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겨서 인기도 많았고, 힘도 셌으니까.
그런데 이 엿 같은 분위기는 뭐란 말인가?
참다못한 석우의 친구들이 다른 아이들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쫑알쫑알 뒤에서 입 털지 말고 닥쳐라.”
“학창 시절 때는 눈도 못 마주치던 새끼들이 어디서…….”
그들의 입에서 폭언이 흘러나왔지만, 그들은 이제 고등학생이 아니다.
22살의 대학생들.
개중에는 일찍 군대를 다녀온 친구들도 있었다.
석우네의 난폭한 언사에 겁을 먹기는커녕,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입을 털어? 닥치라고?”
“니들이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애초에 너네 환영하는 사람 아무도 없는데 동창회는 왜 나온 거야?”
“학교 다닐 때도 똥을 더러워서 피한 거지, 무서워서 피한 줄 아나.”
“뭐, 뭐?”
당장에라도 주먹을 휘두를 것처럼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는 석우 패거리들.
가만히 그들과 다른 아이들의 말다툼을 지켜보던 한정우는 몰래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내저으면서 자책하는 표정을 지었다.
“후우, 애들아 미안하다. 내가 석우를 괜히 초대한 것 같네.”
“그게 왜 네 잘못이야?”
“맞아. 분위기 흐리는 저 새끼들 잘못이지. 그나저나 정우 네가 저놈들을 불렀다고?”
“어. 학창 시절 때야 어리니까, 누구나 실수를 하니까. 지금이라면 반성하고 달라졌을 줄 알았지. 그런데…….”
마치 모기, 혹은 파리 떼라도 본 것처럼 한심한 눈빛으로 최석우를 쳐다보는 한정우.
“너희들은 변한 게 없구나.”
“뭐? 이 새끼가!”
“이제는.”
턱.
석우의 어깨 위에 손을 얹은 한정우의 눈이 강렬하게 빛났다.
이를 마주한 최석우는 잠시지만 등골을 타고 내려가는 오한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뭐, 뭐야. 내가 쫄았다고? 고작 눈만 마주쳤는데?’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는 모른다.
그가 보여준 재력 때문인지, 아니면 철저히 배척받는 이 장소 때문인지 확실치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자신이 한순간 그에게 겁먹었다는 것.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고, 인정하기도 싫은 최석우에게, 한정우가 말했다.
“이제는 우리도 어른이지? 그럼 상대방의 기분이란 걸 파악할 줄 알아야지. 애도 아니니까. 안 그래?”
“건방진 새끼가 지금 감히 누구한테 그딴 충고를…….”
발끈한 최석우가 반론하려고 했지만, 이미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는 중이었다.
“정우는 저 상황에서도 화를 안 내내.”
“혹시 정우 군대 갔다 왔나? 왜 저렇게 의젓하지.”
“야, 정우는 원래 의젓했어.”
“석우 저 새끼는 군대 가서 철 좀 들었으면.”
“다음부터 동창회는 물 흐리는 녀석들 빼고 하자고. 좋은 날에 분위기 망칠 일 있어?”
집단으로부터의 철저한 소외.
물리적인 폭력은 없었지만, 그들은 생전 처음 맛보는 상황에 정신을 차리질 못했다.
‘어, 어쩌다가 우리가 이런 신세가?’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이런 판을 키워온 한정우는 미소를 지었다.
툭, 툭.
그는 최석우의 어깨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면서 말했다.
“석우야, 밥 많이 먹고 가라. 계산은 해놓을 테니.”
“이이…….”
최석우가 시뻘게진 얼굴을 부들부들 떨었다.
뭐라고 시원하게 소리를 치고 싶기도 하고, 폭력을 휘두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도 뇌가 있으니 생각이라는 걸 할 수가 있다.
그는 더 이상 청소년도 아니고, 자신보다 밑이라고 생각하던 녀석보다 잘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애초에 이곳에 오는 것이 아니었어.’
이곳은 자신들을 잡아먹기 위한 한정우의 덫.
한 번 작동한 덫은 자신들의 발목을 끈질기게 물어뜯으며 절대 놔주지를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꾹 쥐어진 채 부들부들 떨리던 최석우의 주먹은 그 힘을 풀었다.
‘내가 뭘 해도, 이 녀석한테는…….’
이길 수 없다.
패배감에 사로잡힌 최석우의 모습을 확인한 한정우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격려했다.
“고생해. 그럼 난 이만.”
고생하라는 말이 왜 앞으로 남은 인생 동안 고생하라는 것처럼 들리는 걸까.
생전 처음 무력함이라는 감정을 느껴본 최석우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야, 같이 가!”
“2차 갈까?”
“우리도 대충 식사는 다 끝났으니까…… 같이 나가자고.”
친구들과 화기애애하게 인사를 하며 나가는 한정우의 뒤를 쳐다보는 최석우의 눈빛은, 처음 이곳에 들어올 때와는 달리 죽어있었다.
동시에 한정우의 가슴 한편에 올려져 있던 묵직한 돌이 치워지는 순간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