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힐통령 091화
39장. 거래(1)
2차로는 술집, 3차로 노래방까지 달린 한정우는 아침까지 달리자는 정신 나간 녀석들을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조금 어지럽지만, 플레이에 지장은 없겠다.’
적당히 기분만 좋을 정도로 취한 상태.
술에 취해 멀쩡한 아이템들을 분해하는 짓거리를 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랬기에 한정우는 곧장 게임에 접속하여, 블리자드를 이끌고 주변의 사냥터로 나섰다.
“어때?”
흑랑과 백호를 선물해주자 강아지처럼 꼬리를 좌우로 흔들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녀석.
잘 먹이고 푹 쉬었더니 어느새 두툼한 꼬리는 다시 돋아난 상태였다.
‘저것도 나중에 한 번…….’
먹이를 바라보는 듯한 카이의 반짝이는 눈빛을 알아채지 못한 블리자드는 이미 저 멀리 뛰어가서 두 자루의 곡도를 붕붕 휘둘렀다.
“역시 새로운 무기를 받을 때가 제일 신나지.”
자신이 솔리드에게 검을 받았을 때를 떠올린 카이는 흐뭇한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봤다.
10분 정도 마음껏 검을 휘두른 녀석은 강렬한 눈빛을 내세우며 카이에게 다가왔다.
‘사냥을 해보고 싶어 하는구나.’
허공을 가르는 연습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은 걸까.
블리자드는 실전을 원하고 있었다.
‘그럼 내가 적당히 상대를 해줄…… 아니, 아니지.’
카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어차피 녀석과 한 번쯤은 손발을 맞춰봐야 할 필요성을 느끼던 참이었으니까.
‘겸사겸사 새롭게 얻은 스킬들도 실험해 봐야 하고.’
그렇다면 이에 어울리는 무대는 과연 어디일까.
지도를 펼쳐 주변 지역을 살펴보던 카이가 냉큼 한 곳을 찍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이동하면 자이언트 베어가 출몰하는 숲이 나와. 거기로 가자고.”
자이언트 베어.
3미터 크기의 위압적인 덩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힘!
많은 유저가 녀석의 앞발 스매쉬에 얻어맞고 정신이 가출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뀨르륵.”
고개를 끄덕이며 카이의 제안에 동의한 블리자드는 그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자, 여기서 정지.”
숲의 초입에 도착한 카이가 손을 들며 블리자드를 멈춰 세웠다.
그의 시야로 들어온 것은 나무에 큼지막하게 새겨진 거친 발톱 자국.
“여기부터는 자이언트 베어의 영역이야. 조심하자고.”
“크륵.”
고작 한 걸음을 내디뎠을 뿐인데 주변이 어두워졌다.
울창한 나무와 나뭇잎들은 햇빛이 자신을 통과하는 것을 허락지 않았으니까.
‘분위기 좋고.’
만약 혼자였다면 살짝 겁을 먹었겠지만, 지금은 블리자드가 함께하고 있다!
그 사실에 용기를 얻은 카이가 성큼성큼 길을 걸어나갔다.
‘새롭게 배운 스킬은 영체화와 신성 사슬, 그리고 강화 소환.’
카이가 오늘 포커스를 맞춘 스킬은 다름 아닌 신성 사슬이었다.
‘다른 것들이야 대충 예상은 가지만…… 이건 하나도 모르겠어. 궁금해 미치겠다.’
신성 사슬은 NPC 중에서도 고위 성기사, 이단심판관들이나 사용하는 레어 스킬.
실제로 플레이어 중에서 이 스킬을 배운 이들은 카이가 알기로 세 손가락을 넘지 않았다.
‘물론 스킬을 배웠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는 녀석들이 있겠지. 나처럼 말이야.’
그런 부분을 감안해도 결코 흔한 스킬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메리트와 동시에, 약간의 고민도 함께 선물했다.
‘어디서 뭘 보고 배울 수가 없네.’
신성 사슬의 운용법.
카이는 그것을 하나부터 열, 걸음마부터 뜀박질까지 모든 걸 스스로 깨우쳐야 한다.
중요한 스킬인 만큼 가르쳐줄 사람도, 보고 배울 사람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다음이 블리자드의 현재 실력인데…….’
솔직히 자신과 싸울 때의 블리자드라면 이런 걱정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녀석의 모든 스킬 레벨은 초급 1레벨로 떨어진 상태.
지금의 녀석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를 확실하게 넘겨짚고 가야 했다.
그래야 향후 그 정보를 바탕으로 작전을 짤 수 있을 테니까.
“킁킁, 크르륵.”
길을 잘 가던 도중 블리자드가 코를 킁킁거리더니 카이의 소매를 붙잡았다.
“왜?”
“쿠와앙.”
손으로 앞쪽을 가리키더니, 두 팔을 넓게 벌리며 뭔가를 흉내 내는 녀석.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카이가 손뼉을 쳤다.
“아! 설마 저 앞에 자이언트 베어가 있나?”
끄덕끄덕!
‘이 녀석, 생각보다 후각이 예민한데?’
야생에서 살아왔기에 가능한, 실로 사냥꾼다운 재주!
스으윽.
앞쪽의 풀숲을 슬쩍 걷어내자, 확실히 땅을 벅벅 긁으며 놀고 있는 자이언트 베어가 보였다.
“블리자드.”
“크르륵.”
“가서 싸워도 좋아.”
“츄릅.”
“아, 먹지는 말고. 저거 지지야.”
“끄릉.”
카이의 허락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블리자드가 바닥을 박차고 날아갔다.
녀석의 양손에 들려 있는 흑백의 곡도가 어둠 속에서 빛나며 자이언트 베어의 목을 내리쳤다.
‘호오. 장비를 바꿔서인가? 확실히 검술은 이전보다 투박해지고 느려졌지만…… 데미지는 더 늘어난 것 같은데?’
카이는 전투에 끼어들지 않고 한 발자국 물러선 채 블리자드의 능력을 분석했다.
‘초급 검술 1레벨에 이 정도 실력이면…… 당분간 내가 데리고 다니면서 검술 레벨만 조금 높여줘도 쓸 만하겠어.’
현재 블리자드는 90레벨의 검사와 맞붙여놔도 쉽게 밀리지 않을 정도였다.
만약 중급 1레벨의 검술만 만들어놔도 140레벨의 유저를 상대로도 충분히 활약할 수 있을 것이다.
쿠웅!
전투 이후 5분이 지나기 전, 자이언트 베어가 눈을 까뒤집으며 뒤로 넘어갔다.
녀석의 목과 가슴에는 각각 흑백의 곡도가 손잡이까지 깊게 박혀 있는 상태였다.
“잘했어.”
블리자드를 가볍게 칭찬한 카이는 슬쩍 시스템 로그를 읽어내렸다.
‘이 녀석이 사냥할 동안 뒤에서 응원만 하고 있었는데 경험치가 들어온다.’
비율은 녀석이 80% 자신이 20% 정도다.
그렇다면 그 반대의 경우에는 어떨까?
카이는 블리자드를 쳐다봤다.
“이제 내 차례니까 가만히 있어.”
때마침 한 마리의 자이언트 베어가 어슬렁거리며 숲길을 지나갔다.
“신성 사슬.”
촤라라라락.
스킬 시전과 동시에 손바닥 위에 소환된 짤막한 빛의 사슬.
카이는 우선 사슬을 굳게 쥐고 그 감촉을 느꼈다.
‘차가워. 마치 겨울날 운동장의 철봉을 잡은 것처럼.’
비록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사슬이라고는 하지만, 쇳덩이처럼 무게가 느껴졌고 표면은 차가웠다.
‘보아하니 신성력 소모는 길이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은데.’
현재 카이가 소환한 신성 사슬은 고작 30㎝ 정도.
소모한 신성력은 300이었다.
‘그럼 대략 1㎝당 10 정도의 신성력을 소모하는 건가?’
그렇다면 1m에 신성력을 1,000 정도 소모한다는 뜻!
한 마디로 카이의 신성력을 모두 사용하면 신성 사슬을 최대 39m까지 뽑아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크허허허헝!”
그 와중에 카이를 발견하고 달려드는 녀석!
카이는 곧장 사슬을 더 뽑아낸 후 녀석을 향해 던졌다.
촤르르륵!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녀석에게 뻗어 나가는 신성 사슬!
동시에 카이의 입에서 바람이라도 빠지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당연한 것처럼 자이언트 베어의 목을 칭칭 휘감는 신성 사슬!
카이는 뭐에 홀린 듯 사슬을 쥔 손을 당겼다.
일련의 행동은 군더더기 없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쿠웅!
꼴사납게 넘어지며 머리를 땅에 쳐박는 자이언트 베어.
하지만 카이는 눈만 깜빡이며 사슬을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뭐지? 이 느낌은.’
미드 온라인의 스킬에는 어느 정도의 시스템적 보정은 가미되어있다.
그건 스킬 적중률이 형편없기로 소문난 마법사나 궁수도 마찬가지.
하지만 그 보정은 플레이어의 실력이 뒷받침되었을 때야 빛을 발할 정도로 약소하다.
한마디로 스킬을 사용하는 요령을 알고 있는 플레이어가 꾸준히 연습했을 때.
그때가 돼서야 도움이 될 정도의 아주 미약한 보정이다.
‘당연히 신성 사슬에도 어느 정도 보정은 있을 거야.’
하지만 처음 사용한 스킬을 이렇게 자유자재로 컨트롤할 정도의 보정은 절대로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바로 플레이어가 해당 무기나 스킬에 타고난 재능을 지니고 있을 경우다.
그밖에 별다른 이유는 없다.
‘그러고 보니 이런 종류의 스킬은 사용해본 적이 없지.’
당장 카이가 사용하던 주문 중에서, 그나마 마법 같은 스킬이라고 해봐야 빛의 광선과 홀리 익스플로젼 뿐이다.
모두가 직선으로 뻗어 나가는, 재능 따위가 개입할 여지 없는 심심한 스킬들이다.
‘뭐, 좋아. 그럼 내가 신성 사슬처럼 컨트롤을 요구하는 스킬에 재능이 있다고 쳐.’
그렇다면 그 재능을 어떤 식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
어느새 고개를 들어 올린 카이의 눈빛은 자이언트 베어에게 꽂혔다.
마치 그에 대한 해답을 녀석이 알고 있는 것처럼.
“크와와왕!”
목에 감긴 사슬을 쥐어뜯으며 울부짖는 자이언트 베어!
하지만 사슬을 결코 잘려나가지 않았다.
‘자이언트 베어의 완력으로 끊어질 정도였다면, 레어 등급 스킬이라는 타이틀은 반납해야지.’
카이가 사슬을 가볍게 흔들자 절대 풀리지 않을 것 같던 사슬이 풀리며 그에게 돌아왔다.
동시에 쿵쿵, 분노에 휩싸인 걸음으로 대지를 진동시키며 달려오는 녀석.
‘신성 사슬은 일종의 채찍으로 봐야 옳겠지.’
그렇다면 신성 사슬 스킬에 대한 공부는 할 수 없겠지만, 채찍류 무기를 사용하는 랭커들의 영상을 보면 어느 정도 공부를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 전에 우선…….’
촤르르륵!
카이의 사슬이 다시 한번 춤췄다.
이번에는 녀석을 묶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신성 사슬 자체의 공격력을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철그렁!
신성 사슬에 코를 얻어맞은 자이언트 베어의 인상을 찌푸려졌다.
마치 아이가 날린 종이비행기에 얻어맞은 듯한 표정.
“공격력은 별로네. 이거 세 번 휘두를 바에야 검 한 번 휘두르는 게 낫겠어.”
가볍게 한숨을 내쉰 카이는 다음 순간 바닥을 내달렸다.
근접전에서도 신성 사슬을 사용을 할 수 있는가, 없는가.
그것을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크허허허헝!”
후우우우웅!
자이언트 베어의 오른쪽 앞발이 공기를 밀쳐내며 카이에게 날아들었다.
수많은 유저의 정신과 체력을 가출시킨 앞발 스매쉬!
하지만 카이는 자신의 코앞까지 당도한 녀석의 손을 보더니,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영체화.”
화아아아악!
카이의 몸이 순식간에 푸른색 입자처럼 바뀌며 귀신같은 형상을 취했다.
동시에 앞발 스매쉬는 카이의 몸을 흩어놓으며 그대로 지나갔다.
당연한 말이지만 카이가 입은 피해는 0!
“크허엉!?”
당황을 금치 못하는 자이언트 베어.
평소라면 뒤로 물러나 상황을 지켜볼 정도로 똑똑한 녀석이지만, 말 그대로 녀석은 지금 당황했다.
그래서 녀석은 저도 모르게 왼손으로 다시 한번 앞발 스매쉬를 감행했다.
“신성 사슬.”
촤르르륵!
영체화 상태라고는 하지만 공격력이 50% 감소할 뿐, 스킬 사용에 지장은 없었다.
순식간에 튀어나온 사슬이 자이언트 베어의 왼손을 묶었고,
카이는 사슬을 쭈욱 당겼다.
‘신성 사슬은 타격기로써는 쓸모가 없어.’
그것은 아까 녀석의 콧잔등을 때려봤을 때 이미 파악했다.
그때 사슬은 터무니없이 약한 공격력을 보여줬으니까.
그래서 카이는 발상을 전환했다.
‘그렇다면 관절기로는 어떨까?’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관절기 무술은 유도나 주짓수 정도다.
마찬가지로 무술에 관해서는 문외한인 카이가 알고 있는 것도 딱 그 두 개 정도.
‘그리고 유도라면 초등학교 때 배워본 적이 있어.’
물론 석 달 배우고 때려치웠지만, 당시에 사범님이 해주신 말은 아직도 기억에 남았다.
‘유도란 곧 유능제강(柔能制剛)임을 잊지 말거라. 부드러움은 강함을 이기는 법이다.’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것이 유도의 특징.
물론 카이는 유도 기술은 하나도 모른다.
하지만 압도적인 신체 능력을 지니고 있고, 무엇보다 특출난 눈을 통해 볼 수 있다.
‘저 녀석의 공격 궤적을 말이지.’
그리고 그것을 읽을 수만 있다면,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는 법이다.
바로 지금처럼.
“크륵……!?”
강렬한 힘이 실린 앞발 스매쉬는 신성 사슬로 인해 궤적이 변경되었다.
당연히 예상치 못한 움직임이었고, 그것은 녀석의 몸에 무리를 줬다.
우드드드득!
운동선수들조차 자신의 몸을 완벽하게 컨트롤하지 못하면 부상을 입는다.
하물며 자이언트 베어처럼 압도적인 힘을 지닌 몬스터라면?
쿠우웅!
‘관절기로는 유용하구나.’
신성 사슬로 녀석의 힘을 이용하여 공격의 궤적을 살짝만 비틀었을 뿐이건만,
그것만으로도 레벨 95의 몬스터는 허리가 박살이 난 채 바닥에 쓰러져 끙끙 신음만 내뱉었다.
“오케이.”
새로운 스킬들은 확실히 돈값은 함.
카이가 짤막한 평가를 내렸다.